마이너리티 리포트 필립 K. 딕의 SF걸작선 1
필립 K. 딕 외 지음, 이지선 옮김 / 집사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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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소위 SF 소설을 일부러 구해 읽은 것은 처음이다. 헐리우드 SF 영화 영향 때문에 생긴 SF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이야기와 필립 K 딕 소설을 읽기 권하는 최세진 씨의 책을 읽으면서 주문했다. SF는 내가 잘못 알고 있던 것처럼 물리나 자연과학에 근거한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에 근거한 SF도 있다는 것은 덤으로 알게 된 사실이다.
물론 과학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허나 세상에는 순수과학을 가장한 이데올로기 순응 과학이 많을 분이고, 그런 과학은 막무가내의 성장 이데올로기나 군사 이데올로기에 오염되기 십상이고, 인간의 삶의 질을 전반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라기 보다는 특정 자본의 이윤을 살찌우는 과학이 되곤 하는 게 범례이다 보니, 다양한 경로로 오해의 근거들을 많이 축적했을 뿐이다.

아무튼,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사회과학 SF 소설이다. 물론 미래사회를 구동시키는 과학 기술에 관한 상상과 언급도 소설의 이야기를 진전시키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주된 동인은 사회과학적 고찰과 그에 근거한 상상력이라고 볼 수 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단편소설 모음이다. 첫번째 이야기인 '스위블'은 소름이 끼쳤다. 사람들의 뇌에 잠식해서 단일한 이데올로기와 가치관, 그리고 감성을 조작해내는 유기체라니. 다 읽고 난 후에도 마치 내 주변 어딘가에 스위블이 돌아다니는 것 같은 꺼림직한 상상이 따라다녔다. 아니 실재하는 스위블의 그림자를 보았다는 게 맞겠다.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에 반하는 글을 썻다고 구속이 되는 일이나, 대통령의 심기를 거슬리는 평화적인 집회와 시위가 엄격하게 제한되는 일이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코드가 맞지 않는다고 한예종의 수업내용과 총장을 비롯한 교수진들을 압박하는 오늘은 스위블이 번성하는 시대와 닮아있다.

항상성을 유지하는 로봇 대통령이 지배하는 사회를 그린 '완벽한 대통령'은 권력을 잡는 순간 권력을 지키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인간의 탐욕을 이야기 한다. 컴퓨터 분석으로 사람들의 내일의 선택을 통제하는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나쁜 이해' 잘못 된 이해가 끌고가는 일방의 가치 독식 사회를 보는 듯 하다.  인간의 존엄을 전쟁에 빼앗긴 채 가상의 세계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는 전쟁 후 생존자(행운아)들의 이야기  '퍼키팻의 전성시대'는 마치 현실의 경쟁에서 도태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컴퓨터 속 가상의 세계에 몰입해서 살아가는 히키코모리를 연상시켰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등장하는 이야기 속 22세기는 암회색이다. 전쟁으로 인한 파괴의 먼지가 덧 쌓여있으며, 인간은 정체성 혼란으로 곤란을 느끼고, 우주로까지 확장된 사회를 통제하려는 권력은 온갖 기술과 도구와 제도의 자기증식으로 사회의 숨통을 조인다.
필립 딕이 살았던 20세기의 파시즘과 인간성을 상실한 자본주의는 그에게 22세기를 암울한 색조로 채워 그리게 했을 것이다.

그가 보내는 경고 신호를 소름 돋는 섬뜩함으로 읽으면서 사람의 존엄이 훼손되지 않는 미래를 더욱 간절하게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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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드 베이커리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16
구병모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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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완득이>에 이은’ 이란 안내를 보고 눈길이 갔다. 기대를 최대한 자제하면서 읽기 시작했다.

일단 구성이 탄탄하다. 톡톡 튀는 상상력도 좋다. 각각의 이야기들을 하나의 플롯을 잘 물고 오밀조밀 엮여있다. 마법의 세계와 우리 사는 세계를 대비시키는 것은 우리 사는 모습을 객관화 할 수 있는 좋은 장치라 생각된다. 작가의 상상력이 적중한 부분이리라.
마법도, 가족도, 그 무엇도 구원자가 되지 못하는 주인공 ’나’의 현실을 속도감 있게 풀어냈다.

헌데 뭔가 좀 냉한게 아쉽다. 책 안에서 펼쳐지는 인물들과 그들의 관계가 그렇게 만든다. 여기 등장하는 사람들, 삶에 애착이 있는 사람들이 없다. 사람들 속에 섞이길 바라는 사람들도 없다. 그저 개개인들이 자신을 중심으로 한 동심원을 그리며 산다. 그 동심원에 거슬리는 파동이 생기면 상처내고 흠집낸다. 그러면서 자신들도 상처를 받는다.
주인공 ’나’의 생모는 그 거친 세계를 사는 전형처럼 보인다.

그 때문이다. <위저드 베이커리>에 재기발랄함은 있지만, 온기가 없는 이유. 서로가 걸쳐진 세상에 딱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모습들. 그들에게는 언젠가 서로에게 들어가거나 각기 다른 파동이 어울림을 이룰 것 같은 기대가 생기지 않는다.

이를테면, <완득이>에는 똥주와 같은 인물이나, 완득이가 관계 맺는 사람들과의 관계 말이다. 파편화된 사회 속에 살지만, 서로에게 내미는 손에 온기가 있어 새로운 관계를 재구성해내는 사람냄새가 적어도 <위저드 베이커리>에서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히 세상에 팔 걷어 부치고 나서려는 적극적인 인물도 없다. 자연스레 사람들이 쳐놓은 보호막 사이로 사람들을 들여다 보게 되고, 그 만큼의 거리가 책을 읽고 난 후 ’냉’한 느낌으로 남는다. 이런 것이 쿨한 관계일까?

작가가 의도했던 것이 우리 사회 청소년들에게 놓여진 삭막한 관계와 그 속에서 자기를 지켜나가는 법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 했던 것이라면 나름 납득할 수도 있겠지만, 글쎄. 생각이 그쪽으로 기울지 않는 걸 보면 그건 또 아닌것 같기도 하고...

내가 구식인가? 배꼽 빠지게 웃거나 콧등이 시큰해지는 그런 맛을 꼭 찾으려 하니 말이다. 책을 읽을 때는 분명 폭 빠져 읽게 만드는 재미는 있었는데, 그 느낌을 정리하려니 뭔가 손 안에 남은 잔여물이 잘 안 느껴져 모호한 리뷰가 되고 말았다.


<본문 중에서>

   
  모든 사람과 사물과 사건은 이유를 갖고 거기 있는 거라고들 해.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라, 아무런 목적도 의지도 없는 채로 우연히 거기 있었던 것들이 서로를 향해 손을 뻗으면서 그때부터 이유를 만들어간다고 해. 그렇게 만들어진 이유들의 흩어짐이 대원리 또는 숙명을 이뤄. -107쪽-
 
   

   
  - 언제나 옳은 답지만 고르면서 살아온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당신은 인생에서 한 번도 잘못된 선택을 한 적이 없나요?
- 틀린 선택을 했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게 아니야. 선택의 결과는 스스로 책임지라는 뜻이지. 그 선택의 결과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너의 선택은 더욱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갈 거란 말을 하는 거야.
-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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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머의 루머의 루머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5
제이 아셰르 지음, 위문숙 옮김 / 내인생의책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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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 마음 열고 고백 한번 못 해본 곱디고운 첫사랑 해나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살했다. 그리고 사랑과 상실의 아픔이 가라앉기 전 녹음테이프 일곱개로 다시 찾아왔다. 테이프를 통해 해나는  "내 죽음의 이유가 이 테이프를 듣고 있는 너에게도 있으니까." 라고 말한다. <루머의 루머의 루머>는 이렇게 시작한다.

해나는 자살을 결심하게 만든 사람들과 사건, 그 일이 벌어진 장소를 이야기 한다. 테이프를 받아 든 클레이는 테이프 속 해나의 목소리를 따라서 잔인한 추억이 담긴 곳들을 돌며 하룻밤을 보낸다. 그리고 비로소 해나가 그토록 보여주고 싶고 들려 주고 싶어 한 해나의 진심을 마주한다. 해나는 사람들이 허위로 만들어 놓은 '루머 속의 해나'에 갇혀 지냈고, 그런 자신에게 벗어날 깊을 찾지 못했다. 해나의 주변 사람들은 해나의 진심을 알려 하지 않았고, 해나는 사람들이 루머로 만들어 놓은 자신을 깨뜨리지 못하고 굴복했다.

<루머의 루머의 루머>는 읽는 사람의 감정을 끌어 당긴다. 클레이가 해나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을 여행하는 동안, 덩달아 안타까움 속에서 가슴을 졸여야 했다. 한 사람의 자아를 부정하고, 무시하고 능멸하는 장면이 구체적으로 나열된다. 그렇지만 매 장면은 자극적이지 않다. 미국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얼마든지 있을 법한 이야기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평범한 이야기들이 오히려 우리를 소름이 돋게 한다. "아, 나도 그때 저렇게 맞장구 치지 않았던가?" 하고 생각할 만큼 과거의 어떤 경험과 비슷하게 닮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나쁜 습관보다 나쁜 말보다 더 나쁜 것은 나쁜 이해다.'라고 써 놓은 글을 봤다. '나쁜 이해'. 사람들의 '나쁜 이해'는 해나의 경우처럼 한 사람의 자의식을 파괴하기도 하며, 누군가를 파멸로 몰고 갈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새긴다. 돌아본다. '나는 누군가의 진심에 주목하며 사는가?'

   
  "해나가 아직 살아있을 때. ... 해나에게 말을 걸기가 너무 두려웠다. 선뜻 다가서려니 가슴이 떨렸다. 그런데 그녀는 죽었고, 기회는 영원히 사라졌다." - 본문 337쪽 -
 
   

아는 사람이 자살 했을 때, 무척 가슴이 아프기도 했지만 그만큼 화도 났다. 무력감 때문이었다. '난 뭐였지?', '남은 사람은 뭐야?" '난 왜 그 절망을 모르고 있었지?', '귀띔이라도 해줘야지?' 혹은 '관계라는 게 이렇게 허망한 건가? 무의미한 거야?' 같은 생각 따위가 부글부글 올라오고, 그런 만큼 미안해지고 후회가 되고, 속상해서 자신에게 퍼붓는 화풀이였다. 쓰고 아프고 아려서 가슴이 너덜너덜해지는 느낌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난 뒤에도 불쑥 가슴 한 구석에 통증을 일으키곤 한다. 클레이가 지난 시간을 떠올리게 했다.

모든 사람과 손을 잡고, 가까이서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다. 하지만, 누구든 절망에 빠진 사람은 어떤 신호를 보내온다. 그리고 그 신호는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끊기고 만다. 가슴을 열고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를 내게 재촉한다.

<루머의 루머의 루머>는 고등학생들의 세계를 다룬 소설이지만, 우리들이 살며 부딪히는 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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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어디 가?
장 루이 푸르니에 지음, 강미란 옮김 / 열림원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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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나는 속물이고 이기적이다. <아빠 어디 가?>를 읽으며, 내 아이가 장애가 아닌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아빠 어디 가?>는 소설의 방식을 따르고 있지만, 소설이 아니다. 작가가 장애를 가진 두 아이들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이며, 그 아이들을 키우며 겪은 삶의 고백이다.
장 루이 푸르니에는 <아빠 어디 가?>를 통해 장애를 가진 마튜와 토마를 웃음 섞어 말했다. 책이 아니라 장 루이 곁에서 마튜와 토마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거였다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내내 불편했을 것이다. 그가 웃을 때 따라 웃지 못하고, 차마 "당신의 아픔을 조금은 알 것 같아요." 하는 표정은 지어 보일 수 없어 난감했을 것이고, 무언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아 안절부절 하다가 그저 "힘 내세요." 하고 개미만한 소리로 이야기 했을 것이다.

   
  이제 그만 좀 구시렁거려야겠다.
장애를 가진 아이들의 얘기를 할 때면, 마치 무슨 큰 변이라도 당한 듯 사람들은 사뭇 심각한 분위기를 만들곤 하지. 그래서 난 미소를 지으며 내 아들들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 너희들은 날 많이도 웃게 만들었지. 그것이 꼭 원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너희들 덕분에 난 평범한 아이를 가진 부모들이 못누린 혜택을 받기도 했었단다. 이를테면 난 자식들의 학업 문제나 진로 걱정으로 골치가 아파본 적이 없어. 이과로 보내야 하나, 아니면 문과로 보내야 하나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을 해본 적도 없고 말이다. 너희들이 커서 어떤 일을 할까 생각하며 머리를 싸매본 적도 없단다. 엄마와 난 미리 그 답을 알고 있었거든. 우리 아들들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란 걸 이미 알았던 거야.   - 본문 p9~10 -
 
   
 
일년 반동안 사고로 중증 장애를 입은 한 언니의 활동을 보조한 적이 있다. 이십대에는 깔끔하고 총명하던 그 언니는 목발을 짚으려 해도 손이 너무 떨려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는 장애인이 됐다. 그 언니의 아버지는 동네 창피하다며 문 밖 출입을 막았다. 봄 경치를 좋아하던 언니는 꽃 피는 봄을 집 바깥에서 보고 싶었다. 부들 부들 떨리는 팔로 목발을 짚고 바깥 구경에 나서다가 계단에서 굴러 얼굴을 다치기도 하고, 앞 니를 부러뜨리기도 했다. 그렇게 다치고도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은 가라앉지 않아서 내게 나들이를 도와달라는 청을 했다. 차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운전도 할 줄 모르는 내가 한 시간 거리 공원으로 그 언니와 나들이를 가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나들이를 가서도.

아이를 낳고 2개월이 되던 때, 예방접종을 위해 병원에 갔다. 검진을 하던 의사가 아이 심장에 이상이 있는 것 같으니 큰 병원에 가 보라고 했다. 소아 심장과가 있는 대학병원에 예약을 하고 검사를 했다.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2주간. 마음이 졸아드는 듯 했다. 다행히 성장과정에 있을 수 있는 증상이고, 아무 문제 없을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가슴을 쓸었다. 그 후에도 아이가 다치거나, 귀가 잘 안 들리는 듯 하다거나, 시력이 떨어지는 걸 느낄 때마다 불안을 달래며 병원을 드나들었다. '다행히 우리 아이는 건강하다.' 는 소리를 뱉고 장루이의 글을 보며 마음이 엉겨버린다.

   
  "장애아는 하늘이 주신 선물이야."
웃으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장애아를 가진 부모가 아니다.
이런 하늘의 선물을 받으면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아이구! 이러실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 본문 p43 -
 
   
 
 <아빠 어디 가?>는 읽기에 불편한 책이었다. 책을 쓴 장 루이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투로 글을 써내렸든지 불편했다.
내게는 장애인 후배들이 있고, 장애인 형님과 언니가 있다. 장애인 자립생활센터에서 일하는 이들 모두는 건강하고 아름답다. 마음결이 너무 곱다. 그들에게서 배울 때가 많다. 그러면서도 함께 공연이나 행사를 마치고 뒤풀이를 갈 때면 그들이 쉬이 갈 수 있는 지 어떤지를 미리 생각지 못할 때가 많다.

일상을 같이 하고, 오랜 시간 같이 해야 하는 부모와, 당사자와 나와 같은 3자 사이에는 이렇게 길고도 넓은 거리가 있다. 이 거리가 문득 맞이 하는 대면의 순간 당혹에 빠지게 한다.

   
  토마를 바라보거나 멀리 간 마튜를 생각할 때면, 과연 아이들을 만들어낸 것이 잘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마 아이들에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아이들이 느꼈던 작은 기쁨, 스누피 인형, 따뜻한 목욕물, 고양이의 부드러운 몸짓, 햇살, 공, 마트 산책, 타인의 미소, 장난감 자동차, 감자튀김....
이 모든 것이 있어 아이들의 삶도 살아볼 만한 것이었다면.... 하고 바라본다.
- 분문 p169 -
 
   

슬픈 장면이 아니다. 익숙지 않은 장면일 뿐이다.  본문 p193

<아빠 어디 가?>는 익숙지 않은 장면 앞에 서거나 익숙지 않은 상황에 맞닥뜨릴 가능성 있는 모두가 읽어볼만 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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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에 빠진 아이 상상도서관 (다림)
조르디 시에라 이 화브라 지음, 리키 블랑코 그림, 김정하 옮김 / 다림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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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에 빠진 아이>는 어느날 갑자기 구멍에 빠진 열 두살 소년 마르크에 대한 이야기이다. 
마르크는 아빠의 집으로 가는 길에 느닷없이 구멍에 빠졌다. 걸어 오는 동안 전혀 눈에 띄지 않았지만 마치 오래 전부터 마르크를 빠뜨릴 요량이었던지 더 넓지도 좁지도 않고 꼭 마르크의 몸과 똑같은 크기의 구멍이 마르크를 잡아 당겼다.
구멍에서 헤어 나려고 발버둥을 쳐 보았지만 구멍은 마르크를 쉽사리 놓아 주지 않는다. 

마르크는 이틀 동안 구멍에 빠진 채 무력하게 팔을 괴고 있어야 했다. 낙담한 마르크를 붙들고 있는 구멍은 인적이 드문 길이었고, 인적이 드문 길에서 마르크는 아주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몇 몇의 사람들과 동물들을 만난다. 직업과 나이와 성격과 버릇과 세계관이 저마다 다른 사람들은 구멍에 빠진 마르크에게 세상의 찬바람을 여과 없이 그대로 전해준다. 마르크의 진심을 알아주는 거리의 개 ’라피도’ 말고는 모두가 날선 바람 거센 세상을 닮아서 괴팍하기 그지 없다.

구멍에 빠진 마르크와 마르크 앞에 나타나는 사람들은 나와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희망을 잃은 세대와 가치와 인정과 세계관은 망실한 채 자신의 이익과 자기 가족의 안위와 명예와 위신만을 좇아서 움직이는 주류 사회의 면모를 드러낸다. 

<구멍에 빠진 아이>는 보기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의 문제를 늘어 놓는 것이 아니라, 마르크 스스로 구멍에서 나와 발에서 뻗어나간 뿌리를 잘라내듯 당신도 어떤 선택이든 하라고 말하는 듯 하다.


뉴스는 말 되는 것보다, 말 안되는 것들을 더 많이 쏟아낸다. 말 안되는 정치와 정책들이 질주해대는 요즘 조용해 보이기만 하는 광장이 무기력해 비쳐지기도 한다. 마르크처럼 모종의 결단을 해야 할 때가 아닐까 생각했다.

"달아나지도 않을 거야. 굴복하지도 않을 거고, 입 다물고 있지 않을 거라니까. 나는 마르크야. 나에게도 나의 권리가 있어. 나는 살아 있어."


<본문 중에서>

"똑똑한 사람들은 언제나 뭔가를 궁금해하고 토론을 해. 한데 게으른 사람들은 언제나 모든 일에 대해 확신에 차 있어. ... 이 세상의 문제는 게으른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항상 확신을 갖고 있는 반면에 현명한 사람들은 의심에 차 있다는 거야"

"원래 정치인들은 두 얼굴을 갖고 있으니까. 선거에서 이겼을 때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행복한 얼굴이거나, 또 자신들이 하려고 하는 일과 그 일들이 안고 있는 자잘한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러니까 사람들이 자기가 얼마나 열심히 힘들게 사명감을 갖고 일하는지를 보여주려고 할 때 짓는 고통스러운 얼굴의 두 얼굴" 

"
아무도 구멍에 빠진 아이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아. 귀찮고 불편하거든. 텔레비전에서나 볼 수 있는 불쌍한 아이들이라고 생각하고 싶으니까.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다가 텔레비전에서 뭔가 슬픈 이야기가 나오면 채널을 돌려 버리잖아. 손가락 하나로. ...
너 같은 아이는 사람들에게 모욕이야. 모든 것이 잘 되어 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떠올리게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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