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인 섹스 - 일하는 뇌와 사랑하는 뇌의 남녀 차이
앤 무어.데이비드 제슬 지음, 곽윤정 옮김 / 북스넛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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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의 머리속을 이해하기 어렵던 차에 과학으로 남녀의 생각 차이를 말하는 책이라니 무척 반가웠다. 막상 집어들고는 과연 기대에 부응할 것인지. 혼란을 부추길 것인지. 살짝 걱정도 됐다.

<브레인 섹스>. 유전학 박사인 앤 무어와 생물학을 전공한 데이비드 제슬이 같이 글을 썼다. 둘은 모두 BBC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PD이며, 뇌 관련 다큐멘터리 제작과 강연을 주로 한다. 앤 무어는 남녀의 유전학적 뇌 차이를 다룬 다큐멘터리 제작의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왕립학회가 주는 BAFTA 상을 받았고, 남녀 뇌에 관한 독보적인 연구로 세계 뇌과학계에서 주목을 받는 학자라고 한다.

책을 읽는 동안 이들의 주장에 상당히 많이 고개를 끄덕였다. 책은 전문적인 연구 논문과 임상의 결과를 많이 인용한다.  사례들도 무척 다양하다. 전체적으로 37개의 문헌을 참고했다고 밝히고 있으며, 각 장 별로 다룬 예들은 어느 문헌의 어느 쪽을 참고했는지도 밝힌다. 과학을 이야기하지만 딱딱하거나 어렵게 쓴 책은 전혀 아니다.
불평등한 성차별이 엄존하는 사회에서 남과 여, 그리고 그 외의 성이 갖는 생물학적, 유전적 차이를 강조하는 이 책을 내는 데 저자들은 상당한 부담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생물학적 차이에 눈을 감고 사회 정치적인 해결점을 평등만을 강조하는 것은 어느 쪽에도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책을 써나갔다고 한다.

<브레인 섹스>는 말 그대로 뇌로 보는 ’성성姓性’에 관한 이야기이다. 요컨데, 남녀의 뇌는 차이가 있으며, 뇌의 차이가 남과 여의 행동과 태도를 결정한다. 남과 여의 뇌 차이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며, 사회적인 교육과 훈련 등의 영향은 생물학적 영향에 비해서 작은 영향을 미친다. 남녀 뇌의 결정적 차이는 다양한 능력과 업무 수행에서 두드러진 차이로 나타난다. 많은 사람이 인정하기 싫어해도, 남녀 뇌의 차이는 평균적으로 남자들이 큰 키를 가진 것과 제일 키가 큰 사람 역시 남자인 것처럼 객관적이며 선명한 사실이라고 말한다. 다만, 사람의 뇌도 근육과 같이 쓰면 쓸 수록 발달한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발달 정도와 편차 역시 결정적 차이를 능가하기 어렵다는 결론이다. 따라서 차이를 인정하고 상호보완하고 협력하는 방법을 찾을 것을 요청한다. 이제 그들이 말하는 뇌의 성별 결정 과정, 남성과 여성 뇌의 차이, 그 양상들을 들어보자.


1. 뇌의 성은 태아 시기 6주~7주 사이에 결정된다.

성이 남성과 여성으로 이분화 되지 않듯이, 뇌의 성도 여러 모습을 갖는다. 책은 뇌의 성 결정시기를 다룬 두 과학자의 주장을 인용한다.
되르너는 3단계 즉, 신체적 성별 결정기 / 성적 취향 결정기 / 성역할 결정기로 나눈다. 1단계는 남성과 여성의 전형적인 신체 특성이 만들어지는 데 영향을 미치는 호르몬이 분비되는 시기. 2단계는 여성과 남성의 시상하부가 다르게 배열되는 시기로, 서로 다른 시상하부는 어른이 되었을 때 서로 다른 성적 행동을 나타나게 한다. 3단계는 성역할을 결정하는 시기로 공격성의 수준, 사회성, 개인주의, 모험심, 소심함 등과 같은 일반적인 성격들이 형성되며, 이렇게 형성된 성격은 사춘기가 되었을 때 호르몬의 영향으로 완전하게 표출된다. 각 단계는 유전자의 결합으로  XO, XX, XXY, XY  등으로 각기 다른 성별의 태아가 안드로겐, 테스토스테론, 에스테론 등 성 호르몬의 많고 적음에 따라 뇌의 성별 특성을 갖게 되는 시기라고 설명한다.
밀턴 다이애몬드 역시 되르너와 비슷한 결론을 보이는데, 그 단계를 4단계로 나눈다. 1단계는 기본 성적 패턴의 결정 시기로, 공격성이나 수동성과 같은 패턴이 만들어지는 단계로, 2단계는 성적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단계, 3단계는 성적 대상 선택기, 4단계는 성적 능력의 조정기로 분류한다.
되르너의 경우 성별 결정기에 나타날 수 있는 호르몬 이상을 확대 해석하여 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하지만, 일반적으로 뇌가 단계별로 형성되며 성호르몬의 영향에 따라 다른 성의 뇌로 된다는 것은 인정된다. 이에 따라서 여성의 몸에 남성적인 뇌를, 남성의 몸에 여성의 뇌를 경우도 나타난다.


2. 좌뇌와 우뇌가 따로 노는 남성 뇌ㅡ 서로 간섭하는 여성 뇌.

좌뇌와 우뇌가 서로 다른 영역을 통제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우뇌는 시각정보, 공간능력, 전체적 그림, 추상적 사고, 감정 반응, 모양과 패턴에 관한 것을 처리한다. 좌뇌는 보다 이성적인 뇌로, 언어 능력, 정보처리 능력, 부분적 그림, 구체적 사고, 논리 반응, 순차적 사고들을 처리 한다. 우뇌는 왼쫌 몸을, 좌뇌는 오른쪽 몸을 통제한다.
그런데, 남성과 여성은 같은 대상을 놓고도 처리하는 뇌의 위치가 다르며, 좌뇌와 우뇌가 정보를 주고 받으며 처리하는 방식도 다르다. 특히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뇌량’이라는 신경다발의 차이가 남녀의 뇌가 생각하는 방식을 달리 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친다. 남성 뇌의 뇌량은  여성 뇌에 비해 가늘고 덜 발달하여 좌뇌와 우뇌가 따로 정보를 처리한다.
예를 들면, 어떤 수학적 문제를 풀 때, 남성의 뇌의 수학문제를 풀 때는 우뇌가,  언어를 구사할 때는 좌뇌가 따로 따로 놀지만, 여자의 경우는 어떤 문제를 풀 때도 좌뇌와 우뇌를 같이 쓴다는는 얘기다.  남성의 뇌는 수학문제에 전문화된 뇌 영역만 쓰지만, 여성의 뇌는 다른쪽도 사용하여 집중성이 떨어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한편 여성은 언어 정보와 시각 정보를 남성보다 더 잘 통합하고 연결시킬 수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목소리나 몸짓, 얼굴 표정에서 드러나는 정서의 미묘한 차이를 더 잘 인식할 수 있다고 한다.
여성의 뇌는 이성적으로 분석할 때에도 감성이 개입을 하기 때문에, 개인의 문제로 받아들이거나, 감정을 섞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한편 남성은 분노나 좌절의 감정을 오래 가져 가는데  비해 여성은 분노나 좌절의 감정을 오른 뇌를 동원해 빠르게 해석해 내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뇌량의 차이가 보여주는 특성이라고 한다.


3. 성적 특성을 따라 다르게 성장하는 남녀의 뇌.

책은 키부츠의 사례를 든다. 키부츠에서는 남자 아이와 여자아이에게 같은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세탁, 요리, 바느질, 공작, 수리 등 남녀 구별 없이 다양한 일을 똑같이 하도록 교육한다. 유전 생물학적 영향을 무시한다면 키부츠에서 자란 남녀는 같은 성향을 보여야 한다. 그러나, 3대에 걸쳐 키부츠에서 생활해 온 남성과 여성을 세대별로 검토해 본 결과, 뇌의 성별에 따라 서로 다른 선호도와 집중도와 능력과 특성을 보인다는 결과를 얻었다.

태아 시기 염색체의 차이가 호르몬에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고, 뇌의 형성을 다르게 만든다면, 출생 후의 뇌는 뇌의 성정체성에 따라서, 환경과 대상에 달리 반응하며 특성을 드러낸다.
0세의 아이들을 보면, 여자 아기는 장난감 보다는 사람에게 많은 관심을 보이고 집중하며, 남자 아기는 사람이나 장난감이나 별 차이가 없게 반응한다. 2~4세 아이들의 경우, 남?다 더 좋아하며, 때리고 부수는 공격적인 놀이를 즐긴다. 학령기의 아이들에게서도 이런 차이는 잘 보인다. 놀이터를 가로지르며 비행기 소리를 내면서, 팔을 벌리고 뛰어 다니는 남자아이들과 그 모습을 보고 손가락질 하며 친구들과 이야기 하는 여자 아이들을 보는 것은 낯설지 않다.
사춘기에 들어서면, 성 호르몬의 분비가 급격하게 늘어나는데 남성의 경우는 여성의 경우보다 20배가 더 늘어나게 되면서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이때, 나타나는 호르몬의 큰 변화는 남성과 여성의 마음에도 현격한 차이를 일으킨다고 한다.
예를 들면, 여성의 마음은 관계를 우선하고 남성은 성취를 우선하도록 조직된다. 누드를 보거나 성적 대상을 볼 때도 여성은 애정이 있는 사람인 경우에만 성적 매력을 느끼는 데 반해 남성의 경우에는 그 차이가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남성은 구획된 뇌 때문에 성과 사랑을 구분한다는 이야기다.


4. 결혼과 사람 사귀기에 다른 모습을 보이는 남녀의 뇌

남성의 뇌는 사람과 관계를 갖기 보다는 어떤 행위를 하는데 익숙하다. 남성은 "제 말이 지루한가요?"라고 물어서 알지만, 여성은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다고 한다. 남성의 뇌는 사람을 대할 때도 사물을 다루듯 하지만, 여성은 공감하고 헤아리려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남성은 여성의 정서적 반응을 이해 못할 때가 많고 여성들이 사람들의 감정과 생각에 관심을 기울이는 지  이해하지 못한다.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남의 사생활에 왜 그리 관심이 많아?" 라고 말 할 때가 많은 경우, 여성들이 소소한 일상과 감정들을 동성들끼리 공유하는 예가 많은 것에 비해 남성들은 새로 나온 자동차에 관해 이야기 하거나, 컴퓨터, 스포츠에 대해 말할 때가 많은 것도 익숙한 경험이다.
여성은 친밀감을 드러내기 위해 상대와 더 많은 소통을 하고, 비밀을 공유하길 원하지만 남자들은 친밀감의 표시로 사랑하는 사람의 차를 닦는다고 하니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결혼생활을 유지해가는 것이 신기에 가깝다.
특히 이성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는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든 남성과 여성을 괴롭힌다. 통계에 따르면 남성은 보다 많은 여성과 관계 맺기 원하며, 여성은 그렇지 않다. 사랑과 성을 따로 생각하는 남성 뇌와 사랑하는 사람과 성적 관계를 맺으려는 여성 뇌의 차이가 그렇게 만든다고 한다. 남성이 신의의 계약을 먼저 깨는 경우가 많다. 얼핏 더 많은 권력을 가진 남성이 결혼이란 제도를 굳이 유지하려 들고, 그 제도 안에서 답답함을 자초하는 게 이해가 안 될 수 있다. 그런데, 남성은 또 결혼이라는 틀이 주는 안정감을 원한다고 한다. 실제로 이혼을 요구하는 쪽은 여성인 경우가 많으며, 남성은 이혼을 원하지 않을 때가 더 많다고 한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도 남녀의 뇌는 차이를 보인다. 여성의 뇌는 아이와 소통하려 하고, 남성의 뇌는 아이를 가르치고 훈육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은 육아일기에 ’아이가 내 손을 만지며 웃었다. 너무 사랑스러워서 꼭 안아주었다.’ 등의 얘길 쓴다면, 남성은 ’젖병을 혼자 쥐고 먹는 법을 가르쳤다. 내일은 처음부터 혼자 젖병을 쥐고 먹도록 해봐야 겠다.’  식으로 쓴다고 한다. 이 글에서 난 고개를 크게 끄덕 거리며 웃었다. 아이 아빠와 나를 보는 듯 했다. 육아일기를 꾸준히 올리는 남성 블로거의 글에는 ’미끄럼틀 올라가기’, ’세발 자전거 배우기’ 들의 과제가 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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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을 거꾸로 쏜 사자 라프카디오 생각하는 숲 4
셸 실버스타인 지음, 지혜연 옮김 / 시공주니어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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쉘 실버스타인은 그냥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는다. 뭔가 생각할 꺼리를 담아 놓는다. 아이에게 이 책을 사 주었을 때도 그런 의도를 염두에 뒀다. 대체로 먼저 읽고 나서 아이에게 준다. 사전 검열에 해당한다.  헌데 이 책은 글쓰기 선생님이 권해준 책이어서 그냥 아이에게 먼저 읽게 하곤 나중에 읽었다.

실버스타인은 마치 직접 경험한 이야기를 쏟아내는 줄줄 이야기를 풀어간다. 정글 밀림 속에 살던 호기심 많은 어린 사자는 호기심이 무척 많다. 그 호기심은 아주 적극적이어서, 직접 그 궁금한 세계에 발을 딛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든다. 사자를 공격하려던 사냥꾼을 잡아먹고 얻은 총 한 자루는 사람들의 세계로 어린 사자를 이끈다. 다른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으로 사자는 사람들 세계의 일원이  되고, 또 그 호기심에 이끌려 정글에 사는 사자 동족들과 만난다.

이야기는 간단하고 단순하다. 하지만, 실버스타인 특유의 문체는 마치 맛있게 양념을 한 긴 국수가닥 같아서 그 끝에 혀를 댄 순간 입에서 놓지 못하고 끝까지 줄줄 물고 넘기게 만들며, 끝에 다다를 때까지 갖가지 양념이 주는 감칠맛을 선사한다, 그리고 책을 다 읽게 되면 그 끝에는 독자가 답해야 할 질문을 남겨둔다.

'라프카디오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아니, '어디서부터 혼란이 시작된 거지?'. '라프카디오가 현명한 어른 사자들처럼 그냥 도망쳐서 사냥꾼을 만나지 않았다면,' 뭐 이런 생각은 쓸 데 없다.
생각하다보면, 라프카디오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이라는 게 많지 않다. 사자와 사냥꾼은 서로 죽이지 않고서 자기 목숨을 구할 길이 없도록 대립되어 있다. 라프카디오는 자기를 위협하던 사냥꾼을 잡아먹었고, 총알을 구하기 위해 사냥꾼들을 수 차례 잡아먹었다. 자기 동족을 죽일 사냥꾼들과 함께 정글에 총을 들고 들어갔다.

두 세계의 상식을 바꾸든지 두 세계가 아닌 전혀 다른 제3의 세계를 찾아가지 않고서는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물론 제3의 세계가 라프카디오에게 안성맞춤일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꼬리를 물고, 여러 상황들이 겹쳐진다. 자신의 뜻과 전혀 관계없이 전쟁이 벌어진 나라에 사는 아이들을 생각해 본다. 갖가지 이유로 이주민이 되어 사는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멈추지 않는 대결과 대립 속에 사는 사회 속 사람들이 떠오른다.

아이는 책을 읽고, "나라면 말이야..." 하고 생각을 쏟아 놓았다. 나는.... 생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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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as 2015-01-29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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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예술 작품들
이유리.임승수 지음 / 시대의창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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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심장은 탄환을 동경한다>를 읽고 한 동안 가슴이 두근거렸다. <심장은 탄환을 동경한다>가 진보예술 교양도서의 20세기 버전이라면, <세상을 바꾼 예술작품들은 그 21세기 버전이다.

표지부터, 내가 좋아하는 예술가들의 모습과 작품들이 풍성한 군락을 이루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사실, 기회가 되면 나도 이런 책을 써야겠다 생각하던 차에 "늦었군" 하는 안타까움이 살짝 스치기도 했다. 그만큼 맞춤하게 반갑고 반가운 책이었다.

일단, 저자들의 면모를 보면 소위 예술계의 전문가 층이 아니다. 작가와 작품들을 안내할만한 지식은 있되, 무언가 빈틈을 노리고 해부해야 한다는 식의 사명감은 없어보인다. 마음으로 작품을 이야기 하는 이들의 시선 덕분에 책은 한결 부드럽고 친절하다. 게다가 책읽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어려운 말표현도 없다. 그저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을 듣는 것처럼, TV  속 문화산책을 보는 것처럼 편안하게 책 속 작품들로 빠져들게 하는 따뜻한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찰리 채플린의 영상들을 찾아서 보고, 밥 말리의 노래를 찾아 듣고, 핑크플로이드의 뮤직비디오를 다시 보았고, 뱅크시의 홈페이지 전시관을 둘러보았다. 쿠르베가 살던 시대를 다시 찾아 보았고,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를 찾아 들었으며, 인상 찡그리며 들었던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피에로>도 여유롭게 다시 들었다.

자신만만하고 당당하게 출산 후의 모습을 그리던 쉬잔 발라동이 씩씩한 여성주의 작가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그가 르느와르의 초상에 등장하던 직업모델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레게 머리와 마리화나가 자메이카 민족의 문화적인 의식이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됐으며, 쿠르베가 말년에 예술적인 혁명성을 잃고 풍경화를 그리며 보냈다는 것도 책을 읽으며 알게 됐다.
예술은 세상을 보는 눈과 가슴을 주는 것이라 여기는 내게, 이 책의 예술가들과 작품들은 더욱 소중하고 풍부한 모습으로 남게 될 것이다. 첫 장부터 마지막까지 정성과 수고가 그득한 책이다. 군더더기 없이 알맹이로 채우고도 체온을 잃지 않는 <세상을 바꾼 예술작품들>을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책 본문 중에서>

   
  도미에는 말했다. "만화는 단순히 웃음을 유발하는 장난질이 아니다. 오히려 행복을 추구하면서 고뇌에 허덕이는 인간의 압박된 정신에, 별안간 나타난 통풍구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 본문 35쪽 -  
   

   
 
20세기 실랄한 풍자만화가, 게오르게 그로츠  / "나에게는 이른바 위대한 미술이라고 하는 것은 무용하다. 호가스나 도미에 같은 사상적인 그림만이 나의 흥미를 끈다"고 말하며 예리한 풍자화에 대해서만 미술로서의 가치를 인정했다. 그는 자신을 진실주의자라고 불렀다.
"진실주의자는 동시대 사람들의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보게 한다. 내가 유화나 판화를 그린 것은 이의신청을 하기 위해서고 나의 작업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이 세계가 추악하고 병들었으며 거짓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 본문 33족 -
 
   


케테 콜비츠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아틀리에 예술은 실패한 예술이다. 일반 관객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반 관객을 위한 예술이 평이할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소박하고 참된 예술을 알아본다는 것이다."  
   


   
  마이크 곤살레스에 따르면 "모든 혁명은 자신의 예술가를 갖는다." 혁명은 자신의 과정을 역사로 기술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혁명의 대의에 공감한 예술가들은 혁명의 이상을 포스터와 혁명적 그래피티 등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 소개해왔다. 멕시코 혁명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멕시코 혁명은 디에고 리베라 Diego Rivera(1886~1957)를 자신의 예술가로 선택했다. -본문 117쪽-  
   


   
  멕시코 혁명이 무엇이었던가. 라틴 아메리카 출신 백인 지배자에 대항하여 인디오와 메스티소들의 권익옹호를 위해 일어난 저항의 움직임이었다. 멕시코 혁명은 인디오의 문화와 생활방식을 보존하고 부흥시켜야 한다는 인디오 전통부흥운동으로 이어졌고, 이것은 다시 전통적인 원주민문화에 기초한 새로운 민중예술을 구현해야 한다는 바람으로 나타났다. 예술도 민중의 것, 민중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뿌리를 내린 것이다. - 본문 119쪽 -  
   


   
  음악으로써 혁명을 일으킬 수는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을 깨우치고 선동하고 미래에 대해 듣게 할 수는 있다. - 밥 말리 Bob Marley -  
   


   
  최병수 작가는 그의 그림 <장산곶매>를 볼 때마다 "나는 어디에 머물러야 할까? 내가 죽을 곳은 어디일까" 가늠해 보곤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자신의 길이 어디에서 끝날지를 생각해본다고 한다. "혁명의 정상을 밟아보고 죽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중간 어디쯤 쓰러지겠지. 그렇다고 패배할 거란 생각도 하지 않았다."라며. 왜냐하면 "변혁의 과정 어디쯤에서 멈추었다고 실패한 거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는 아니 자본주의는 엄청난 물질과 문명을 축적해놓고 있지. 그것을 향해 내가 정말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아. 개인적으로 보면 미술의 역할이란 아주 미미하잖아. 나는 이 사회의 이 문명이 저질러놓은 현상을 보여주고 싶었어. 그게 내 역할이라고 생각했어. 그게 투쟁일 수도 있고 운동일 수도 있고 예술일 수도 있지만 결국은 사람들과 함께 세상을 보고 싶었던 것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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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머무는 도시 그 깊은 이야기 - 역사도시, 이희수 교수의 세계 도시 견문록
이희수 지음 / 바다출판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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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부러운 사람이다. 30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세계를 여행하다니. 그러나 드문 사람이다. 소위 문명의 중심, 세계 패권과 힘의 중심의 나라에서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주목하지 않는 세계의 창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말이다. 

대서양 시대를 연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 포르투칼 _ 리스본 /
슬프고도 아름다운 역사의 무대,  에스파냐 _ 그라나다 /
중세아프리카 이슬람의 자존심, 모로코_ 페스 /
클레오파트라와 피로스 등대의 도시, 이집트 _ 알렉산드리아 /
기독교를 끌어안은 최초의 이슬람 수도, 시리아 _다마스커스 /
난공불락의 암벽도시, 요르단 _ 페트라 /
셀주크 투르크의 수도, 이슬람 수피의 고향, 터키 _코냐 /
세상의 절반을 품은 도시, 이란 _이스파한  /
뜨거운 혁명의 도시, 러시아 _상트페테르부르크 /
교황 바오로 2세의 고향과 아우슈비치의 슬픈 역사, 폴란드_크라코프 /
발트 해안에 깃든 우랄문화의 숨결 애스토니아 _탈린 /
칭기즈 칸의 말발굽으로 다져진 몽골의 수도, 몽골 _울란바토르 /
티무르가 남긴 찬연한 문화유산, 우즈베키스탄 _사마르칸트 /
블랙과 이슬람이 만나는 아프리카 인도양의 진주, 탄자니아 _잔지바르 /
유카탄 반도에서 되살아난 마야 문명의 금자탑, 멕시코 _ 치첸이트사 /
신비로운 잉카 제국의 숨결, 페루 _ 쿠스코 / 

<시간이 머무는 도시>에서 담고 있는 도시들의 목록이다. 이름만 들어서는 이 나라와 도시들이 어디에 붙어있는지 가물가물했다. 지도에서 찾아 보았다. 지도를 놓고 찾는데 단박에 찾아지지 않았다.  깊은 역사를 감추고 있는 도시들이며, 지금도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과 정신을 낳은 도시들이지만 이름들을 찾아 보기 힘든 도시들도 있다.

기원전 수십 세기 전에 거대한 도시를 일구기도 하고, 현대의 천문학보다 더 정교한 발전을 15세기 이전에 이룬 나라들이 있건만, 현재 그들의 자취는 지도에 표기된 만큼이나 희미하다.
그러나, 그들이 품었던 이상 사회의 꿈과 그들이 실현하려 했던 삶의 방식은 저자의 성찰을 담아 <시간이 머무는 도시>를 통해 인상 깊게 전해진다. 역사는 현재를 힘겹게 사는 사람들이 다가서는 희망의 창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세기를 넘기며 교류하고 단절하기도 하고 확산되기도 하고 명멸한 흔적만 남기고 자취를 찾기 힘들기도 하지만, <시간이 머무는 도시>들은 현재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룰 수도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기도 한다.

<시간이 머무는 도시>는 여행지의 사진을 곁들였다. 허나 그 사진은 눈으로 보고 싶은 장면을 담기에 부족하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아쉬웠던 점이다. 책 한 권에 담아내기에 열 여섯 곳이나 되는 도시들은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고 너무도 많은 곳을 보여 주고 싶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책을 펼쳐 놓고도 상상 속 여행을 해야만 했다. 지식이 짧아 상상 속에 펼쳐지는 장면은 모자이크 같거나 앙상한 줄기를 닮아 있었다. ㅠ ㅠ

그럼에도, 책 속에서 만난 몇 몇 장면들은 아주 인상 깊게 남는다.
시리아 정교회에서 만난 하얀 히잡을 쓴 소녀의 이야기는 더욱 그렇다. 왜 이슬람 교도들의 히잡을 쓰고 있는가 묻는 저자에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서로 다른 종교를 믿지만, 우리는 똑같은 아랍 인이고 시리안 인이다. 나의 모국어는 아랍 어이고 나의 조국은 시리아다. 무슬림은 나의 형제이고 나의 이웃이다. 그래서 정숙을 상징하는 이슬람의 히잡은 나에게도 정숙의 상징이다."   
   


우리 사회 주류 기독교가 가진 배타성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위의 지도에 보는데로 오랜 세월에 거쳐 찬란한 문화를 일구었던 이들 도시들은 문명과 문명이 만나는 곳이며 나라와 나라가 만나는 곳이었으며, 대륙과 해양이 만나는 곳이었다. 서로 다른 민족과 서로 다른 문화가 어우러지면서 인류에게 의미 깊은 역사를 일구었다는 얘기다. 물론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침략과 약탈의 역사를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것은 더 나은 것으로 발전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다.

칭기스 칸이 만들었다는 법전 <야사 Yasa>에 담긴 내용은 전 세계에 걸친 대제국을 이룰 수 있는 힘을 엿보게 한다.
   
  "어떤 민족이든 간에 학식 있고 현명한 사람을 존중하라. 모든 종교를 존중하며 어느 것에도 편중됨이 없도록 하라."  
   


다른 나라의 예술사나 전통 예술을 볼 때면 우리 나라에 새겨진 중국, 일본, 미국의 지배와 문화의 이식이 뭉개 놓은 우리 전통 문화가 떠올라 안타까울 때가 많다. 지배하고 부수고, 약탈하는 것이 아니라 열고, 포용하고 교류하는 것이었다면 하는 아쉬움 지울 수 없다. 지금은 흔적이 흐릿해진 역사 속 도시들에서도 느끼게 되는 안타까움이다. 아우슈비츠의 슬픈 역사를 담은 폴란드의 크라코프에서도 그 그림자를 보았고, 멕시코의 치첸이트사에서도 보았으며, 페루의 쿠스코에서도 보았고, 터키의 코냐에서도 탄자니아 잔지바르에서도 보았다.

허나 여전히 그 도시를 역사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 아름다운 세계들이 어우러지는 꿈을 꿔본다. 단일한 화폐나 단일한 경제시스템이나 패권을 장악할 군사력이나 세계를 석권할 독점적 기술이 지배하는 세계가 아니라 인간이 이룬 모든 것들을 존중하고 열린 눈으로 서로를 대하는 세계를 말이다.

c.f> 돋보였던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극장에 대한 인상을 하나 덧 붙인다.
   
  "네바 강에 어둠이 찾아오면 겨울 궁전은 불을 밝히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을 극장을 찾는다. 오페라나 연극은 물론 서커스를 공연하는 극장 앞에서도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이처럼 1년 내내 공연장은 자리를 잡기 어려울 만큼 관객들로 가득 찬다. 옛 소련의 화려함은 사라진 지 오래인 지금, 생활고에 시달리는 러시아 사람들에게 어쩌면 예술은 사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에게 예술은 창조의 아름다움을 뛰어넘는 삶의 호흡이다. 예술은 화려한 장식이라기보다 삶의 일부인 것이다. 그래서 서민들이 일상적으로 드나드는 러시아의 미술관과 극장, 도서관의 문턱은 어느 나라보다 낮아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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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 황금빛 유혹 다빈치 art 9
신성림 지음 / 다빈치 / 2002년 7월
평점 :
절판


배경과 인물이 오묘하게 어우러지고, 인물화를 보면 인물의 얼굴은 사실적으로 그려내건만,그림 전체는 전혀 사실적이지 않고 환상적으로 보이거나, 단일한 이미지 안에 융화시켜버리는 화가. 내가 클림트 그림에 대해 갖고 있던 인상이다.
에곤실레를 읽고 나서 클림트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에곤실레의 스승이며, 동료 화가이며, 그림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은 이가 클림트이기 때문이다. 에곤실레를 읽고 나서 곧바로 읽기 시작했지만, 에곤실레만큼 몰입되지 않았다. 그림 말고는 자신을 이야기 하지 않는 클림트의 특성이 이 책에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클림트 스스로 고백하기를

   
  내가 특별히 다른 사람의 흥미를 끌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다. 내게는 특이한 점이 아무것도 없다. 나는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그림을 그리는 화가일 뿐이다. …… 두번째로 확실한 사실은 내가 말이든 글이든 언어에는 재능이 없다는 점으로, 특히 나 자신이나 작품에 대해 뭔가 말해야 할 때 더 그렇다. 심지어 아주 간단한 편지를 써야 할 때조차 나는 공포에 질려 마치 배멀미가 난 것처럼 부들부들 떨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회화로든 글로든 내 자화상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그다지 유감스러운 일은 아니다.  
   


라고 했지만, 클림트는 유감스럽지 않을런지 몰라도, 내게는 유감스러운 일이다.
작품으로 작가를 모두 이해할 수 없는 단계에 선 내게는 더욱 그렇다.

<크림트, 황금빛 유혹>에는 클림트의 말을 인용하는 대목이나, 클림트의 일상을 이야기 하거나, 그의 인생사나 가족관계나 그의 그림에 영향을 준 시대나 환경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 오로지 그의 그림, 클림트가 그린 그림의 시대적인 나열과 그 속에서 읽게 되는 그의 화풍의 변화, 그가 자유롭게 표현하려 애쓰는 과정에서 벌어진 그림과 관련한 사건들이 전부이다.

너무도 독특하고 개성 강한 클림트의 그림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들을 듣고자 한 나의 의도는 어그러졌다. 허나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이 책을 쓴 신성림 씨가

   
  예술작품은 그 앞에 서서 끊임없이 감동하고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 좋아하는 마음이 관심을 부르고 그 관심에 이끌려 작품의 의미를 배우고 찾아가고 만들어나가는 사람들의 것이다. 예술 작품은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과 만날 때마다 새롭게 태어난다.  
   

 라고 책 말미에 쓴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다나에 _ 1907~1908>

   
  장식과 그의 적절한 사용으로 자칫 잘못하면 퇴폐적인 느낌만을 줄 장면에 성스러움이 부여된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이 세속적인 관능의 세계에 머무르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남자가 그림 속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다나에>에는 성적 도취에 온몸을 내던진 여자만 있다.  
   



클림트는 여성성에 관심을 쏟았던 화가이다. 그가 관심을 가졌던 대상은 여성이 지닌 아름다움이라고 한다. 여성인 내가 보기에도 클림트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아름답다. 그러나 결코 익숙하지 않다. 게다가 남성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해석된 여성들은 클림트의 환상 속에 깃든 여성처럼 느껴진다. 살아 있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여성이 머무른 공간과 환경과 시간을 뚝 떼어내고 일순 감각하는 어떤 상태에만 주목하는 그림들은 어떤 측면에서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_ 유디트

나는 젠틸레스키의 유디트 쪽이 훨씬 더 좋다. 아니, 클림트의 유디트를 보면 나쁜 그림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어떻게 유디트를 이렇게 그릴 수가 있는가 하는 반감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클림트의 아주 주관적인 시각으로 포착한 '클림트의 여성'일지라도 집중하고 골몰하여 작품으로 빚어내는 그의 예술가적 집요함에는 고개를 숙이게 된다. 작품의 음란성 운운하는 평단에 소송을 제기하라는 주변의 요구에 소송이 얼마나 걸리는 지를 묻고는 "그럴 시간에 그림을 그리겠다." 고 답하는 클림트, 주문 받은 초상화를 2년 넘도록 붙들고 작업하다가 주문자가 찾으러 와서 기다리는데도 미완성이라며 끝까지 붓을 놓지 않고 수정하는 클림트에게서 예술가가 가져야 할 지극한 아름다움에 대한 도전을 읽는다.

무엇보다 예술가의 자유로움을 구속하는 관례와 권위에 쉼 없이 도전을 해온 점, 뛰어난 자질을 가진 예술가를 발견하면 그의 성장과 예술적 성취를 위해 최선을 다해 지원을 했다는 점을 높이 산다. 자신의 작품을 위한 시간은 축내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명예와 관련한 일일지라도 아까와 하던 사람이, 분리파 전시회를 위해서는 포스터와 장소를 구하고 후원을 구하는  일까지 팔을 걷어부치고 나선 클림트. 진정으로 예술을 사랑한 예술가만이 지닐 수 있는 풍모가 아닐까 생각한다.

안타까운 것은 그가 머물렀던 삶이 그가 그려내고자 한 세계를 담기에는 짧았다는 것이다.
1910년대의 폭풍 속 같은 시대의 돌변을 거치면서 그의 그림 주제는 변화하고 그의 화풍도 변화했으나 그 귀결점을 세상에 남기기 전에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물론 에곤 실레보다 긴 삶을 살았고, 넉넉한 삶을 살았고, 그림에만 집중할 수 있는 조건 속에서 살았지만, 신화와 종교의 세계를 막 탈출한 인간의 심리를 담은 인물화를 넘어선 작가로 남기에 그의 삶은 짧았다. 그렇게 느껴진다.
그가 말년에 집중했던 풍경은 숨가쁘게 격정의 공간을 지나 온 클림트를 대변하는 듯 보인다. 그 들판과, 마을과 평원을 넘어서 클림트는 무엇을 담으려 했을까? 생각하면 그의 높은 예술가적 기질이 그립고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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