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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예술 작품들
이유리.임승수 지음 / 시대의창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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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오래전 <심장은 탄환을 동경한다>를 읽고 한 동안 가슴이 두근거렸다. <심장은 탄환을 동경한다>가 진보예술 교양도서의 20세기 버전이라면, <세상을 바꾼 예술작품들은 그 21세기 버전이다.

표지부터, 내가 좋아하는 예술가들의 모습과 작품들이 풍성한 군락을 이루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사실, 기회가 되면 나도 이런 책을 써야겠다 생각하던 차에 "늦었군" 하는 안타까움이 살짝 스치기도 했다. 그만큼 맞춤하게 반갑고 반가운 책이었다.

일단, 저자들의 면모를 보면 소위 예술계의 전문가 층이 아니다. 작가와 작품들을 안내할만한 지식은 있되, 무언가 빈틈을 노리고 해부해야 한다는 식의 사명감은 없어보인다. 마음으로 작품을 이야기 하는 이들의 시선 덕분에 책은 한결 부드럽고 친절하다. 게다가 책읽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어려운 말표현도 없다. 그저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을 듣는 것처럼, TV  속 문화산책을 보는 것처럼 편안하게 책 속 작품들로 빠져들게 하는 따뜻한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찰리 채플린의 영상들을 찾아서 보고, 밥 말리의 노래를 찾아 듣고, 핑크플로이드의 뮤직비디오를 다시 보았고, 뱅크시의 홈페이지 전시관을 둘러보았다. 쿠르베가 살던 시대를 다시 찾아 보았고,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를 찾아 들었으며, 인상 찡그리며 들었던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피에로>도 여유롭게 다시 들었다.

자신만만하고 당당하게 출산 후의 모습을 그리던 쉬잔 발라동이 씩씩한 여성주의 작가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그가 르느와르의 초상에 등장하던 직업모델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레게 머리와 마리화나가 자메이카 민족의 문화적인 의식이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됐으며, 쿠르베가 말년에 예술적인 혁명성을 잃고 풍경화를 그리며 보냈다는 것도 책을 읽으며 알게 됐다.
예술은 세상을 보는 눈과 가슴을 주는 것이라 여기는 내게, 이 책의 예술가들과 작품들은 더욱 소중하고 풍부한 모습으로 남게 될 것이다. 첫 장부터 마지막까지 정성과 수고가 그득한 책이다. 군더더기 없이 알맹이로 채우고도 체온을 잃지 않는 <세상을 바꾼 예술작품들>을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책 본문 중에서>

   
  도미에는 말했다. "만화는 단순히 웃음을 유발하는 장난질이 아니다. 오히려 행복을 추구하면서 고뇌에 허덕이는 인간의 압박된 정신에, 별안간 나타난 통풍구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 본문 35쪽 -  
   

   
 
20세기 실랄한 풍자만화가, 게오르게 그로츠  / "나에게는 이른바 위대한 미술이라고 하는 것은 무용하다. 호가스나 도미에 같은 사상적인 그림만이 나의 흥미를 끈다"고 말하며 예리한 풍자화에 대해서만 미술로서의 가치를 인정했다. 그는 자신을 진실주의자라고 불렀다.
"진실주의자는 동시대 사람들의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보게 한다. 내가 유화나 판화를 그린 것은 이의신청을 하기 위해서고 나의 작업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이 세계가 추악하고 병들었으며 거짓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 본문 33족 -
 
   


케테 콜비츠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아틀리에 예술은 실패한 예술이다. 일반 관객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반 관객을 위한 예술이 평이할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소박하고 참된 예술을 알아본다는 것이다."  
   


   
  마이크 곤살레스에 따르면 "모든 혁명은 자신의 예술가를 갖는다." 혁명은 자신의 과정을 역사로 기술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혁명의 대의에 공감한 예술가들은 혁명의 이상을 포스터와 혁명적 그래피티 등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 소개해왔다. 멕시코 혁명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멕시코 혁명은 디에고 리베라 Diego Rivera(1886~1957)를 자신의 예술가로 선택했다. -본문 117쪽-  
   


   
  멕시코 혁명이 무엇이었던가. 라틴 아메리카 출신 백인 지배자에 대항하여 인디오와 메스티소들의 권익옹호를 위해 일어난 저항의 움직임이었다. 멕시코 혁명은 인디오의 문화와 생활방식을 보존하고 부흥시켜야 한다는 인디오 전통부흥운동으로 이어졌고, 이것은 다시 전통적인 원주민문화에 기초한 새로운 민중예술을 구현해야 한다는 바람으로 나타났다. 예술도 민중의 것, 민중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뿌리를 내린 것이다. - 본문 119쪽 -  
   


   
  음악으로써 혁명을 일으킬 수는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을 깨우치고 선동하고 미래에 대해 듣게 할 수는 있다. - 밥 말리 Bob Marley -  
   


   
  최병수 작가는 그의 그림 <장산곶매>를 볼 때마다 "나는 어디에 머물러야 할까? 내가 죽을 곳은 어디일까" 가늠해 보곤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자신의 길이 어디에서 끝날지를 생각해본다고 한다. "혁명의 정상을 밟아보고 죽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중간 어디쯤 쓰러지겠지. 그렇다고 패배할 거란 생각도 하지 않았다."라며. 왜냐하면 "변혁의 과정 어디쯤에서 멈추었다고 실패한 거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는 아니 자본주의는 엄청난 물질과 문명을 축적해놓고 있지. 그것을 향해 내가 정말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아. 개인적으로 보면 미술의 역할이란 아주 미미하잖아. 나는 이 사회의 이 문명이 저질러놓은 현상을 보여주고 싶었어. 그게 내 역할이라고 생각했어. 그게 투쟁일 수도 있고 운동일 수도 있고 예술일 수도 있지만 결국은 사람들과 함께 세상을 보고 싶었던 것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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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 벌거벗은 영혼 다빈치 art 11
구로이 센지 지음, 김은주 옮김 / 다빈치 / 2003년 4월
평점 :
품절


에곤 실레. 그의 그림을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인물의 강렬한 시선에 빠져들고 만다. 온몸이 강한 떨림에 휩싸인 듯한 몸의 선과, 강조된 손의 표정과 옷을 벗는 것으로 모자라 마치 피부를 거둬내서 내면에 꿈틀거리는 것들을 그대로 쏟아내는 듯한 몸들은 선명한 촉감을 전한다. 아름답거나 고운 것과는 거리가 먼, 거칠거칠한 수세미로 몸을 긁어대는 듯한 정체모를 불편함이 그의 그림에 눈을 잡아둔다. 왜 그는 이런 불편한 그림들을 그렸을까? 그게 궁금했다.

<에곤 실레, 벌거벗은 영혼>은 짧은 생애에 실레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 실레만이 구축할 수 있었던 예쑬세계를 꼼꼼히 짚어낸다.

두 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에곤실레에게 그림은 살기 위해 꼭 필요한 구성요소였고, 삶의 가장 중심에 있었으며, 그림이 한 복판에 깃든 자신의 삶에 대한 기록이었다. 에곤 실레를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것은 그림이었고, 에곤 실레가 가장 첨예하게 부딪혔던 삶의 현장도 그림에 있었다. 


1. ' 새로운 예술가'

히틀러가 그렇게도 들어가고 싶어했던 독일 최고의 미술 교육기관, 미술아카데미. 17살의 어린 나이에 추천을 받아 입학한 에곤 실레에게 미술 아카데미는 오로지 그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 반가운 곳이었다. 그림 외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틀진 규율에 적응하지 못했던 실레가 뛰쳐나올 수밖에 없던 학교와 달리 미술아카데미는 그림으로 말하는 자신을 알아주는 소중한 곳이었다.
그러나 기대를 품고 들어간 아카데미는 실레의 바램과 달랐다. 그리스 조각의 아름다움을 자연의 아름다움보다 가치 있게 여기고 지나치게 보수적이며 시대의 현실에 등을 돌린 미술 아카데미와 실레는 화합할 수 없었다. 아카데미는 시대의 현실에 등을 돌렸고, 시대의 현실을 세밀하게 보려한 에곤실레는 아카데미에 늘 엇서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교수로부터 "자네는 악마가 내 교실로 보낸 학생이다"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자기 삶의 방식을 스스로 선택하듯, 실레는 그림은 누구의 방식도 아닌 자신만의 방식을 따랐던 것이다. 

열아홉살이 되던 해 실레는 그리펜케를 교수의 학생들과 13항목의 아카데미 개혁요구안을 학교측에 제시한다. 허나 요구안은 거절당하고 그만두지 않으면 퇴학당할 처지가 된다. 결국 그들은 '새로운 예술가 그룹'을 결성한다. 열아홉 살의 나이에 미술 학도의 신분을 버리고 시대의 한가운데로 나가 한 사람의 화가로 우뚝선다.
아카데미에 내민 13조항 가운데 '예술 작품의 질은 꼭 미술 아카데미에 의해서만 판정되는 것인가?', '청년들이 사랑하는 조국 오스트리아를 위해 전 유럽의 예술 활동을 선도하는 위치에 서고자 하는 시도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는가'와 같은 요구는 실레 스스로 자신의 미술에 얼마나 많은 자부심을 품고 있는지를 읽을 수 있다.

"혜안을 가진 열 명을 포함한 천 명의 학자가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한 명의 천재, 한 명의 발명자, 한 명의 창조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식을 가진 사람은 몇천 명이나 됩니다. 이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훌륭한 사람과 앞으로 훌륭하게 될 사람들이 있겠지요. 그렇지만 나는 나의 훌륭함이 마음에 듭니다."라 말할 수 있는 그의 당당함이 자신만의 미술에 대한 당당함으로 발현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래는 '새로운 예술가'란 제목으로 실레가 쓴 글의 일부이다.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이 시대를 향해 나아갈 운명에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들 모두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시대의 자식들이다. 적어도 현대로 나아가는 길을 찾아낸 자들이기에.
우리들 대부분은 예술가다. 예술가라는 표현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칭호나 특성을 지닌 인간에 대해서가 아니라 운명적으로 사명을 짊어진 인간에 대해서다.
예술은 항상 동일한 한 가지로서, 즉 예술로서 존재한다. 그런 까닭에 그 어떠한 '새로운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새로운 예술가'는 존재한다. 새로운 예술가의 습작은 언제나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습작은 살아 있는 그 자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들 중에는 개성이 결여된 사람도 있고, 개성이 풍부한 사람도 있다. 운명적으로 사명을 짊어진 자들이란 바로 후자를 가리킨다. 그러나 새로운 예술가는 많지 않다. 지극히 소수다. 새로운 예술가는 무조건 그 자신이어야 한다. 그는 창조자가 아니면 안 된다. 그는 매개되는 것 없이, 즉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을 이용하지 않고 전적으로 혼자서 자신의 내부에 자기가 발판으로 하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그는 새로운 예술가인 것이다. 

우리들 각자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이름은 '새로운 예술가 그룹'이 될 수 있다. 그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자는 오로지 혼자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완전한 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는 적어도 자신의 미래를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에 의해 독자적인 창조를 이뤄낼 수 있는 새로운 예술가가 몇 명쯤은 존재한다. 정해진 처방전은 그들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다. 모든 새로운 예술가는 본래 자기 혼자서, 자신을 위해서만 창조하며, 자신이 바라보는 모든 것을 창조한다. 그들은 모든 형태를 창조해 내고, 모든 형태를 그려낸다. 예술가는 한 시대를, 그 삶의 일부를 나타낸다. 언제나 존재 속에서의 위대한 한 가지 체험에 의해.


2. 가라앉힐 것을 가라읹히지 않는 실레

실레에게 '성(姓)'은 한 없이 이끌리지만, 격없이 다가갈 수 없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해석대로 아버지의 병력이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겠다. 허나 굳이 아버지의 병력이 아니었을지라도 육체적인 성의식은 분명 무언가 불편한 요소를 안고 있다. 특히 청년기의 강렬한 욕구를 늘 안고 있으나, 이를 자연스럽게 해소할 수 없는 상황이 충돌을 일으키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실레 역시 그랬을 것이다. 다만, 다른 것은 실레는 충돌을 빚는 자아의 단면과, 충돌을 일으키게 하는 대상을 날것 그대로 그렸다는 것이다. 
수 많은 벗은 몸을 그렸으나, 아름답다거나 매혹적이다거나, 신비롭다거나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그의 그림들을 보면 실레가 느꼈을 감정을 어느정도 느낄 수 있다. 골몰해있는 듯 하나 불안해 보이기도 하며, 긴장하는 듯 하나 몰두해 있는 실레의 여러 자화상은 저자의 지적대로 어떤 '일기' 보다도 선명하게 청년의 실레를 기록한다.
많은 사람들은 가라앉히고 정화하는 것을 오히려 흔들고, 휘저어서 내면에 있는 모든 요소들을 그대로 화폭에 토해내는 실레. 만일 그 시선이 자신의 밖으로 확장될 겨를이 그에게 있었다면 20세기 초반의 격동하는 세상을 날것 그대로 담은 생생한 기록을 만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크다.


3. 실레 그 자체인 그림

"나는 다시 그림에 몰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림이 없었다면 참아내기 힘든 상황도 이젠 견딜 수가 있을 것이다. 나는 겸손한 태도로 나를 굽힌 채 이 그림도구들을 위해 걸식이라도 하듯 애원했다. 만일 다른 방법이 없다면 그들 앞에서 우는 시늉이라도 했을 것이다. 오오, 예술이여! 너를 위해서라면 이 몸이 감당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고작 3일이었다. 24일간의 구류생활 중에 3일 동안 그림을 그릴 수 없던 실레가 4일째 되던 날 그림도구를 받고 쓴 일기이다. 예술가에게 예술이 밥만큼이나 꼭 필요한 일상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허나 실레처럼 단 사흘만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라면 모든 고통을 감당하겠다고 할 예술가들이 얼마나 될까? 

그리는 것으로 자신을 탐구하고, 눈에 보이는 것들을 만나고, 세상을 만나고, 내밀한 감정까지도 새삼스레 만나가던 실레의 예술 열정을 <에곤 실레, 벌거벗은 영혼>을 통해 깊게 새긴다. 스물 일곱의 짧은 그의 삶이 너무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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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이매진 - 영화와 테크놀로지에 대한 인문학적 상상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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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비평이 아니라 새로운 담론의 놀이라고 했다. 놀이? 맞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진중권만의 놀이이다. 놀이에는 늘 규칙이 따라붙기 마련이다. 그 규칙을 이해하고 규칙을 따를 때 놀이의 주인이되어 놀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진중권의 놀이는 규칙을 모르는 사람들은 '따'를 시키는 요즘 식의 놀이로 보인다. 전통적인 놀이에 '깍두기'가 있다. 동생을 돌봐야 하는 아이들이 동생을 업고서도 놀이에 낄 수 있게 만들고, 좀 서툰 아이들이라도 같이 어울려 놀 수 있게 만드는 미덕이 담겨 있는 게 '깍두기'가 아닐까 싶다. 허나, 진중권의 놀이에는 깍두기를 위한 자리 같은 건 없다. 
낯선 용어 때문만이 아니다. 그의 어법 때문이다. 그의 눈을 따라서 질정없이 영화를 보는 시각이 옮겨다니기 때문이다. 미학에서 철학으로 윤리학에서 정치로 하나의 기표를 집어들고 그의 직관이 선택한 이론적 연산틀 안을 주르르 훑게 만든 후에 툭툭 흩뿌려 놓는 느낌이다. 그래도 책이 던져주는 몇 가지 고민을 정돈해 본다.

1. 때로는 언어가 예술을 이끌기도 한다는 점.
우리는 테크놀로지에 둘러싸여 테크놀로지가 만들어내는 문명의 재부를 누리면서 산다. 나 역시 지금 키보드를 두들겨서 책상 위에 있는 쇳덩이에게 일을 시키고 있다. 쇳덩이와 나를 연결하는 것은 인터페이스라는 통역관을 통해서다. 난, 이 쇳덩이와 주고 받을 수 있는 말이나 같이 작업할 수 있는 일들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열 두살 먹은 우리 아이는 이 쇳덩이를 늘 끼고있으려 한다. 컴퓨터로 동영상을 보면서  대화창을 띄워놓은 상태에서 닌텐도를 하기도 한다. 한꺼번에 몇 가지의 이야기를 몇 가지의 인터페이스를 동시에 사용하는 아이의 세대는 나와 무언가 다른 언어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저자의 이야기에 주목하는 이유이다.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언어를 쏟아냈고,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화법이 영화예술에 사용되고 있다. 새로운 언어와 화법으로 말하는 영화는 그에 걸맞는 미학적 준거를 가지고 바라봐야한다는 이야기다, 무조건 플롯이나 줄거리를 중심으로 주제에 접근하려는 기존의 방식을 고수하지 말자는 것이다. 아직, 정돈되지 않아 충분히 동의할 수 없는 이야기다. 
다만, 새로운 언어나 새로운 양식은 새로운 예술을 이끌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하나의 개성있는 장르로 남을지 시대를 드러내는 사조로 남을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저자의 호들갑일지 예리한 직관일지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 


2. 새로운 시각은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만드는 힘.
<미학 오딧세이> 곳곳에 나오던 에셔의 그림들을 보면, 저자가 엮어가는 담론의 놀이라는 것과 닮아있다는 생각을 한다. 포스트모던하다. '그런데, 그게 뭐야?' 하는 생각에 결국 빠지고 만다. 그리고는 이런 대답을 듣는다. ' 아름답잖아?', '참신하잖아?', '변화무쌍하잖아.', '누가 진지하고 지루한 얘기에 몰두하겠어? 요즘 세상에.'  뭔가 못마땅하지만, 별로 반박이 안 된다. (작품으로 입증하지 못하니까.)
아무튼 새로운 시각은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첫 가닥이다. 사람의 미감은 늘 새로운 것을 요구한다. 깊이 보고 세밀하게 보는 것으로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허나, 저자의 방식처럼 고개를 끊임없이 돌리거나 시공을 상상력의 날개를 타고 자유자재로 넘나들 때, 새로운 것들을 발견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시각을 끊임없이 변화시킨다면 말이다. 이건 어떤 것이  '본질'에 접근하는 최상의 방법이냐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새로운 것이 늘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새로운 시각이 늘 본질에 접근하는 방법은 아니다. 다만 그동안 보지 못했던 면모를 발견하게 해준다.
저자의 글이 불편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는 파편들의 조합을 자신의 기준으로 주런히 나열해놓고 '이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 간혹 맞을 때도 있겠지만, 맞지 않을 때도 있다. 정치를 말하든, 미학을 말하든) 
아무튼지 그는 늘 새로운 것을 끄집어내려 한다. 우회를 하는 것이든 발을 빼고 밖에서 보는 것이든, 상상력의 날개를 타고 새로운 각도로 볼 수 있는 곳으로 이동해 나선다. 그 상상력의 날개를 달고 새로운 시공으로 떠올라 새로운 각도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무척이나 소중한 행위이다.

마지막 꼭지가 '베를린 천사의 시'인 것은 재미있다. 역사 밖의 관조자로 남을 것인지 역사 안으로 뛰어들어 죽음의 강으로 빠져들 운명을 감수할 것인지 갈등하는 천사의 모습에서 시대와 미학의 경계에서 갈등하는 예술을 보는 것 같다. 시대와 미학을 모두 끌어안을 수만 있다면 무에 더 바랄 것이 있을까만, 그 경계를 오가면서 아슬아슬 걷는 것이 예술하는 사람들의 일상이 아닐까 싶다.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일상 말이다.
<진중권의 이매진>은 역시 경계에 있다. 관객도 창작자의 편도 아닌 어느 점에 부양하고 있는 느낌이다. 관조하는 것일까?  어쨌든 그가 있는 곳은 가까운 곳은 아닌가 보다.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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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소설 속 역사 여행 - 개정증보판
신병주.노대환 지음 / 돌베개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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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소설이 다리를 놓은 생생한 역사 여행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허구의 소설을 매개로 활자 속에 있던 역사가 살아있는 역사로 다가온다. 흥미진진하고 때로 놀랍고,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역사를 책 제목 그대로 여행하고 난 느낌이다. 노독이 느껴진다. 책을 읽으며, 우리의 고전문학에 전에 없던 관심과 애정을 갖게 된 것과 화석과 같은 역사 속에 살던 선조들의 삶과 고민과 문제의식들을 새롭게 알게 된 것이 큰 성과이다. 다양한 사료와 자료를 통해 소설 속 사회를 생생하게 만나게 해 준 저자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싶다. 
시대와 불화를 일으킨 옛사람들의 삶은 마음을 끈다. 봉건의 냄새가 풀풀 나는 봉건 왕조시대이니 더욱 그렇다. 시대의 단면을 보려한 작가들과 작가들에게 깊은 영감을 준 역사 속 인물들의 시선으로 고전 소설 속의 역사를 톺아본다.

* 김시습이 임종 직전에 쓴 시 <아생 (我生)>

백세 뒤 나의 무덤에 표할 적에
마땅히 꿈속에서 죽은 늙은이라 써 준다면
거의 내 마음을 안 것이라
천 년 뒤에는 나의 회포를 알아줄까

세살에 지은 시로 세종에게 상을 받을 정도로 천재 소리를 듣고 자랐으나,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를 빼앗는 것을 보고는 세상을 등지고 산 속을 떠똘았던 이. 성종이 즉위하자 유교의 도리를 따라 바른 정치가 서기를 기대했지만,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사람들을 발고한 공으로 정창손이 영의정에 오르자 정창손의 행렬을 향해 "네 놈은 그만 두거라."일갈했던 사람. 자신의 마음 속에 세운 기둥을 꺽을 수 없어 세상과 등을 지고 기괴한 사람이란 소리를 들으며 산야를 떠돌았으나 그 혹독한 외로움을 죽음 앞에서도 의연히 감당하던 그를 가슴에 담는다.


* 사헌부 금서 설공찬전

채수의 설공찬전은 실록에 6번이나 오를 정도로 조선사회를 들썩이게 한 필화사건을 일으킨 작품이다. 참수형에 처할 위기에 처했지만 중종의 사면으로 교수형만은 면했다고 한다. 당연히 설공찬전은 금서가 되었고, 지금의 국방부 금서가 사람들의 이목을 모으는 것처럼, 설공찬전은 세간의 높은 관심을 모았다. 그러면 설공찬전이 금서가 된 이유가 무엇일까? 이유는  성리학이 전국에 걸쳐 퍼져있던 시대, 불교 사상이 배척을 받던 시대에 불교의 윤회화복사상을 담았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은근히 시국을 비판한 것이라 한다. 시국을 비판하는 것은 오늘에도 이어지는 금서의 필수 덕목인가 보다.  실제로 설공찬전에는
 "비록 이승에서 임금을 하였더라도 주전충 같은 반역자는 다 지옥에 들어가 있었다"는 대목이 해석에 따라서는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즉위한 중종을 겨냥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성이라도 글에 능한 사람은 관직이 오르더라는 내용, 이승에서 충언을 했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죽은 관리가 저승에서는 귀인 대접을 받는다는 내용이 나온다. 무엇보다 염라왕을 중국의 황제보다 높은 최고의 지위로 파악한 점은 국왕 중심의 현실 정치, 나아가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비판한 것일 수도 있다. 성리학을 하늘처럼 떠받들던 시대니 정말 앗 뜨거라 할 만하다.

* 나라는 백성을 뿌리 삼아야 한다. - 전우치전
6번의 사화로 수많은 인재들이 목숨을 잃어야했던 시대를 벗어나려한 지식인들은 도가사상에 몰두했다. 정치가 바로 서지 않은 시대에 민중들은 끝을 모를 핍박과 가난과 억울함 속에 살아야 했고,  신묘한 도술로 견디기 어려운 현실을 바꿔줄 도사를 기다렸다. <전우치전>은 도가사상과 민중들의 바램이 빚어낸 이야기이다. 문학적 완결성은 홍길동전에 이르지 못하고, 홍길동전처럼 율도국이라는 대안사회를 이야기 하지 못하지만 민중들의 사랑을 흠뻑 받았다. 전우치가 황금들보를 팔아 백성들에게 곡식을 골고루 나누어 주는 장면에서
"이번 곡식을 나눔으로 혹 나를 칭송하는 듯하나 이는 마땅치 아니한지라. 대개 나라는 백성을 뿌리 삼고 부자는 빈민이 만들어 준 것이어늘... 너희들은 이 뜻을 깨달아 잠시 남에게 맡겨 놓은 것이 돌아온 줄로만 알고 남의 힘을 입은 줄은 알지 말지어다." 말한다. 백성의 처지를 이해해주는 것은 물론 백성의 의미를 이처럼 명쾌하게 밝히는 데 어떻게 <전우치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민중의 눈으로 재구성한 전쟁 - 임진록
임진록은 정치 없는 나라에서 난리를 치뤄야 했던 백성들의 마음이 빚어낸 이야기이다. 백성을 버리고 난리를 피해간 왕과 양반들. 그들을 대신해서 왜군을 막아낸 의병장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는 정부, 왜군을 물리쳐달라 청해서 들어온 명나라 군사는 민가를 습격하여 재물을 탈취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 갖은 행패를 부렸건만 왕이란 자는
"명나라 군대의 히이 아니면 왜적을 어떻게 물리쳤겠는가? 강토를 회복한 것은 모두 명나라 군대의 공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한 일이 없다. 이는 내가 사실에 근거하여 한 말이다."라 하니 전쟁이 끝났다 한들 어찌 그대로 끝난 일로 둘 수 있었을까? 임진왜란의 치욕을 민중들은 그들의 시각에서 승리하는 전쟁으로 재구성하고 싶었을 것이다. ’임진록’ 꼭지를 읽으면서 나 역시 치미는 화를 진정하기 어려웠다. 

거문고와 노래 이것은 영웅의 일이 아니고
칼춤으로 모름지기 옥장(玉帳)에서 놀 것이다
다른 날 난이 평정되어 칼을 씻고 돌아온 뒤에
강호에 낚시질하는 외에 다시 무엇을 구하리
나라를 지키려는 맑은 충절 하나로 전장에 나선 김덕령 의장의 시이다. 결국 역모로 몰려 목숨을 잃은 김덕령 의장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광주 거리에 ’충장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충장로’는 정치에 배반당한 의장의 역사와 80년의 역사가 교차되는 상징처럼 느껴져 더욱 아픈 이름으로 다가온다.

* 허균의 호민론
저자는 허균이 성리학의 철학 논쟁에 빠져 들지 않고 다양한 사상을 접한 것은 모순된 사회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학문과 사상에 동등한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학문과 사상에 대한 개방성은 당시 드러나고 있던 사회 모순을 과감하게 지적할 수 있었던 요인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책에서 소개하는 ’호민론’에 관한 부분을 그대로 옮긴다. 

 허균의 [호민론]은 그의 민중 지향 사상이 함축되어 있는 대표적인 글이다. 허균은 이 글에서 "천하에 두려워할 바는 백성뿐이다."라고 전제한 후, 백성을 호민(豪民), 원민(怨民), 항민(恒民)으로 나누었다. 항민은 ’무식하고 천하며, 자신의 권리나 이익을 주장할 의식이 없는 백성’을 말하며, 원민은 ’정치가에게 피해를 입고서도 원망만 할 뿐 스스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백성’으로 지금 개념으로는 나약한 지식인을 뜻한다. 이와 달리 호민은 ’자신이 받는 부당한 대우와 사회 모순에 과감하게 대응하는 백성’을 뜻하며 시대의 사명을 인식하고 현실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인물이다.
[호민론]의 주요 내용은 호민의 주도로 원민과 항민이 합세하여 무도한 무리들을 물리친다는 것이다. [호민론]은 ’국왕은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백성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무엇??다. 허균은 중국 진나라 때의 진승 오광의 난, 당나라 때의 황소의 난과 같이 나라가 어지러울 때 호민이 백성을 규합하여 나라사례를 통해 무엇보다 강조한 것은 호민이 나서지 않아도 되는 안정된 국가의 건설이었다

* 병자호란의 치욕 - 박씨전
김훈의 <남한산성>을  읽으면서 답답한 마음에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전쟁중에 가장 치욕을 겪은 이들은 여성이었을 것이다. 사대부가의 무기력한 남성들이 남한산성에 쫓겨들어가 40일 동안 암중모색할 때, 성밖의 백성들이 겪었을 고초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무기력한 왕과 신하들은 고통에 잠긴 백성들의 치욕을 풀어주기는 커녕, 청의 황제 앞에서 삼배구고두를 하는 창백한 왕의 모습을 보였다. 그 난리를 치루고도 앙상한 권력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아들과 정쟁을 치루던 왕을 보며 백성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박씨전을 삼배구고두의 치욕을 백성들의 마음에서 씻어내리려는 씻김굿으로 읽는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허구의 세계에서라도 이루고 그 앙갚음을 하고 말리라는 백성들의 강한 의지를 마음에 담는다.

그 밖에 춘향전을 매개로 수령의 일곱가지 의무, 조선시대의 최소한의 복지제도를 살펴보고,  옹고집전이 조선의 불교 배척정책이 낳은 이야기라는 것을 새롭게 알게됐다. 배비장전에 드러나는 혹독한 신참례 관습이 조선사회 내내 문제로 지적되었다는 점도 재미있다. 장자 중심의 가족제도를 풍자한 흥부전을 보면서는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굴절된 봉건 문화를 안타깝게 새겼다.
문학예술은 시대의 단면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고전은 그저 옛 이야기로 읽었다. 고전과 시대를 종횡으로 촘촘히 엮어내어 생생한 역사여행을 하게 해 준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을 오래도록 곁에 두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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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하라 - 아름다운 삶, 끝나지 않은 노래
조안 하라 지음, 차미례 옮김 / 삼천리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영원히 심들지 않을 청춘의 심장, 빅토르 하라

 

빅토르 하라의 평전이다. 빅토르가 보낸 청춘과 열정의 시절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그의 아내 춤 예술가 조안 하라가 썼다. 조안 하라는 <빅토르 하라>로 생동하는 칠레의 혁명가수 빅토르 하라를 살려 냈다. 빅토르 하라는 비틀즈처럼 유명하지 않다. 허나 빅토르가 남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비틀즈가 남긴 것에 뒤지지 않는다. 비틀즈가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출생에 조산사 역할을 했다면, 빅토르는 소위 ‘민중가요’라 말하는 노래에 그의 심장 한 조각을 전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지구 반대편 남반구에 있어 우리와 상반된 계절을 사는 나라 칠레. 식민의 시대와 긴 독재시절을 보냈고, 긴 독재시절 만큼 긴 민주화 운동의 역사가 있고,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실종된 통한을 우리처럼 안고 사는 나라. 우리와 첫 FTA를 맺어 우리 먹거리에 영향을 주는 나라 칠레가 빅토르 하라의 조국이다. 그는 연극하는 사람으로, 연출하는 사람으로, 노래하는 사람으로 사는 동안 조국 칠레와 남미 민중을 향해 사랑을 퍼부었던 아름다운 예술가였다.  

 <빅토르 하라>는 빅토르의 아내 조안하라의 눈과 감성을 따라 주관적 눈으로 쓴 책이다. 영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조안 하라의 눈에 비친 칠레와 칠레 사람들은 때로는 놀랍고, 때론 아름다웠으며, 때로는 신기했을 것이다. 익숙한 공간에서 무람없이 만나던 자연이나 사람들과 달리 조안이 칠레에서 만난 그 모든 것들은 ’처음’이었고, 새로운 감흥을 부르는 것들이었을 게다. 길들지 않은 조안의 시선은 칠레 사람이라면 글에 올리지 않을 사소한 것들도 놓치지 않고 잡아채어 기록한다. 
간혹 너무 세세하게 풍경이나 장면을 다뤄 조금 불편할 때도 있지만 조안 자신과 빅토르의 내밀한 감성, 섬세한 감정 변화를 읽게 돕는 점이 이 책의 큰 강점이다. 빅토르와 다른 문화에서 자란 다른 민족인 우리에게는 조안의 시선이 적절하지 싶다. 

<빅토르 하라>에서는 춤의 세계도 만날 수 있다. 물론 책은 빅토르에 초점을 두었고, 조안의 춤은 빅토르의 행보에 간간히 섞이는 정도다. 허나 춤에 관한 조안의 특별한 고민과, 무대, 음악, 춤의 대중화에 쏟은 조안의 실천 경험은 또렷한 인상을 남긴다.  

1. 빅토르의 노래가 잉태된 예술적 배경

  빅토르는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무책임한 아버지와 부지런한 어머니 밑에서 형제들과 자란다. 민요를 빼어나게 잘 불러서 아기를 잃은 가정마다 위안과 평화의 노래를 부르러 다니던 어머니는 빅토르에게 노래의 씨앗을 남긴다. 가톨릭 교회는 빅토르에게 클래식의 화성을 가르친 교사였다. 어머니에게는 민요의 씨앗을 얻고 종교로부터는 클래식의 텃밭을 물려받은 셈이다. 

누에바깐시온(새로운 노래운동)의 비올레타 빠라를 만난 것과, 그의 영향으로 남미를 두루 돌며 민요를 채보한 시간은 빅토르의 음악이 세계인의 음악이 되게 만든 결정적인 시간이었다. 오지의 시골 마을을 돌며 빅토르는 칠레와 남미 민요의 다양한 리듬과 선율 뿐 아니라, 일하는 사람들의 노동과 삶에 짙게 밴 풍요로운 정서를 길어 올렸다.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이라는 뚜렷한 정체성을 가지고 격 없이 남미 민중들과 사귀는 장면은 예술가와 대중이 어떻게 만나야 할지를 가르쳐 주었다. 대중의 정서를 자신만의 여과기에 거르지 않고 온전히 노래에 옮길 줄 아는 가수였기에 그가 남긴 노래는 아직도 만인의 가슴을 울린다. 

빅토르는 연극과 연출을 십년 넘게 했다. 연극 경험은 그가 만들고 부른 노래에 극적 구성과 많은 메타포를 감게 했다. 정서적이면서 동시에 서사적이며, 하나의 이야기를 담더라도 뚜렷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빅토르가 부르는 노래의 특징이다. 

또한 연극은 빅토르에게 세계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연극공연과 연극 행사로 그는 칠레 곳곳과 남미는 물론 유럽 여러 나라들을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그의 예술이 세계성을 갖게 해준 소중한 시간이었으리라. 

2. 빅토르 노래에 색을 입힌 요소들

당시 예술가들은 남미의 오랜 문화를 고정된 틀 안에서 바라보았지만 빅토르 하라는 남미의 민속 문화를 현재진행형의 것으로 보았다. 남미 전통 악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민요 채보과정에서 얻은 전통음악의 선율과 양식을 빌어 창작에 성공한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통속의 원리를 다시 확인 한다. 

그에 앞서 누에바 깐시온을 벌인 비올레타 빠라가 빅토르를 이끈 노래 스승이라면, 그의 노래에 역동성을 실어낸 이들은 그룹 ‘낄라빠윤’과 ‘인띠 이이마니’이다. 대학에서 자라난 낄라빠윤과 인띠 이이마니는 빅토르와 숱한 밤을 음악을 놓고 토론했다. 청춘이 지닐 수 있는 혈기 왕성함과, 대가를 바라지 않는 도전 정신을 가진 그들은 빅토르가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실험을 거쳐 얻은 음악 성과는 ‘낄라빠윤’과 ‘인띠 이이마니’에 전해졌고 더욱 넓어진 채 오늘까지 이어진다.

남미 전통 악기를 모두 동원해내어 무대 위에 올린 ‘인띠 이이마니’, 다양한 지역의 노동자와 농민들을 찾아가 무대가 거리건 현장이건 개의치 않고 공연을 펼친 ‘낄라빠윤’은 빅토르와 반주단, 때로는 합창단으로 혹은 순회 공연단이 되어 수년간을 함께 보낸다. 
한번은 빅토르와 낄라빠윤이 함께 하기로 계약한 큰 도시의 공연을 취소하고 작은 마을 축제를 택해 공연에 나선다. 그 공연을 두고 벌인 토론 장면은 지금의 우리도 종종 부딪히는 문제들과 닿아있다. 
‘이미 많은 사실을 알고 있으며, 분노를 갖고 있으며, 감동할 내용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을 만나서 이미 그들 속에 있는 것을 되새김질 하는 것 보다, 아무런 경험도 예술적 세례도 받지 않은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빅토르가 준비된 큰 무대 대신 작은 소도시를 택한 이유이다. 단 한곡의 노래도 갖은 노력을 기울여 만들되, 그 성과는 칠레의 모든 사람들의 것으로 되도록 애쓰던 빅토르의 일면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3 . 우리식의 음악감상실 혹은 소극장 _ 페냐

우리의 음악 감상실이나 살롱, 소극장 문화운동 시기가 칠레에 있었다. 비올레타 빠라의 아들 앙헬빠라가 주축이 되어 꾸린 ‘페냐’가 그것이다. ’누에바 깐시온’의 산실이었다. 누에바 깐시온에 관심을 가진 음악가들은 ‘페냐’에 모여 그들의 창작물을 나누고, 실험 음악을 발표한다. 소수 마니아 층과 지식인들이 ‘페냐’의 주된 이용 층인 것도 우리와 닮았다. ’페냐’는 칠레 곳곳에 만들어졌으며, 빅토르가 자주 들르던 국립공과대학 내 ‘페냐’가 가장 활발했다. 칠레에서 열린 작은 가요제에 입상한 ‘인티 이이마니’가 빅토르를 만나 음악적 성장을 이룬 공간이 ‘페냐’이기도 하며, 빅토르가 많은 음악가들과 교감을 나누고, 음악예술가 층을 넓혀 나간 곳 역시 ‘페냐’였다.

‘페냐’에 적극적이던 빅토르는 ‘페냐’가 부흥하자, 오히려 ‘페냐’ 안에 갇힌 음악의 한계를 예견하며 ‘페냐’의 성과를 곳곳의 현장으로 퍼 나르는 활동에 심혈을 기울인다. 이 과정 역시 우리 민중예술이 소극장에서 광장으로, 현장으로 확산되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4. 아옌데 선거운동과 거리 예술

 70년 칠레 민주화운동과 살바도르 아옌데를 지지하는 인민연합의 선거운동은 칠레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예술 양식을 모색하게 한다. 엄존하는 파시스트의 테러나 방해를 피해서 거리 곳곳에 벽화를 그리는 작업은 새로운 미술 기법을 요구했다. 마치 ‘그래피티’와 같이 형태가 강조된 굵은 선에 눈에 잘 띄는 원색의 물감으로 채색을 하여, 먼 거리에서도 볼 수 있도록 크게 그려진 벽화는 칠레 미술의 새로운 성과이기도 했다. 이는 아옌데 집권기간 예술성 높은 ’벽화’로 발전한다.

발레 역시 무용가들이 충격을 그대로 받을 수 있는 딱딱한 바닥에서도 춤의 형상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 머리를 짜냈다. 조안 하라를 비롯한 안무가들은 춤의 동선을 더욱 굵게 하고, 동작을 더욱 역동적으로 만들면서도 무용가에게는 신체적 위험이 덜한 춤동작을 개발했다. 우아한 자태를 강조해주는 타이즈와 발레복도 변화했고, 먼 거리에서 보기에 동작 선을 한층 확장된 형태로 보이게 할 의상도 개발했다.

‘인티 이이마니’나 ‘낄라 빠윤’, 그리고 이들과 함께 하는 빅토르는 광장이나 거리에서도 언제든 악기를 펼쳐 공연했다. 버스 한대에 연주자와 가수들을 싣고, 전국을 누비며 언제 어디서든 관객과 한껏 어우러진 음악 공연을 창출한 것은 이들의 활달한 활동 덕분이다. 

5. 칠레 민주정부 - 아름다운 3년

 아옌데 민주정부 수립에서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민주정부가 무너지기 전. 그 3년의 기록은 국민들이 모든 활동에 팔을 걷고 적극적으로 나설 때, 사회가 얼마나 활력 넘치는지 보여준다.

빅토르 하라는 그의 팬인 노동자의 초대로 시골 마을 달동네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민주화 혁명 전에 달동네를 찾았을 때, 가난한 노동자의 아내는 고단과 가난으로 시들어 있었고, 낯빛은 그늘지고 주름이 그득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후에 찾은 노동자의 집. 가난은 여전했지만, 수도꼭지는 고쳐졌고, 천정은 수리를 했으며, 부서진 곳은 손질이 돼 있었다. 부인의 표정은 밝고 당당했다. 가난한 삶을 한탄하는 것으로 가득했던 그의 이야기는 마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바뀌었고, 조합에 대한 이야기를 하느라 얼굴에는 밝은 빛이 서렸다. 민주정부가 집권했던 3년 동안 칠레 민중들은 국가의 주인이었다.  

6. 파시스트의 테러와 폭압이 남긴 노래

 민주화 운동에 대한 테러와 쿠데타 이후 벌어진 극심한 폭력은 칠레 곳곳에 상흔을 남겼다. 민중에게 꿈을 안겨 준 아옌데는 쿠데타군의 폭격으로 숨을 거뒀다. 칠레 민중의 가슴에 숱한 노래를 남겼던 빅토르 하라는 그가 공연해오던 체육관에서 학살당했다. 하지만 억압자의 폭력은 오히려 빅토가 노래하게 만드는 기폭제였고, 더 많은 노래를 쏟아내게 한 동력이 됐다. 쿠데타 군 대위의 총탄에 쓰러지기 직전까지 빅토르는 미완의 시를 썼다.

"프에르트몬트에 대한질문"은 오늘 용산참사를 떠올렸다. "프에르트몬트에 대한 질문"은 오지 시골마을인 ‘프에르트 몬트’ 농민들이 단지 농성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총격을 받아 수십 명이 숨진 사건을 다뤘다. ‘프에르트몬트 학살’은 1960년 후반 오지 시골마을에서 벌어진 일이고, ‘용산 참사’는 2009년 서울 한복판 노른자위 땅, 그것도 대로 옆 빌딩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만 다르다.

"69 ’어느 한 농민을 위한 기도"는 고요하게 시작되어 격정으로 치닫는다. 빅토르는 가난한 농민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불렀으나, 그 노래를 듣는 농민은 난생 처음 듣는 ’자신처럼 미천한 사람’을 위한 노래였다. 그 노래를 들은 농민, 노동자들은 노래를 통해 자신의 삶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빅토르 하라가 못 다 하고 간 그의 삶은 모두 혁명이었다. 생각해본다. 성실한 연출가요, 작곡가요, 사랑스런 남편이며, 교사였고, 다정한 아빠였던 빅토르 하라의 심장을 불태웠던 요소가 무엇일지를…. 그의 모든 삶은 사랑이었으리라. 노래에 대한 사랑, 칠레에 대한 사랑, 어머니에 대한 사랑, 동료 예술가요, 아내였고 동지였던 조안 하라에 대한 사랑, 그리고, 아이들에 대한 사랑. 

빅토르는 묻혔으나 그는 살아 있다. 그가 남긴 노래와 그의 딸 마누엘라와 아만다가 여전히 살아가는 아름다운 칠레의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지구 반대편에서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시들지 않는 청춘의 모습으로, 지지 않을 노래로 살아 있다.


<선언>

내가 노래하는 것은 목소리가 좋아서나
노래하기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내 기타도 이성도 감정도 다 있기 때문에
노래하게 되는 것이다.
내 기타는 대지의 마음과
비둘기의 날개를 가지고 있네.
기쁨과 슬픔을 다 축복하는
성수(聖水)와 같은 존재.

비올레타가 말하던 것처럼
나의 노래는 목표를 찾았네.
노동하는 기타
봄 내음이 풍기는 기타.

내 기타는 부자들을 위한 게 아니다.
절대, 그런 것은 아니다.
나의 기타는 사다리
우리가 별에 오르기 위해 만드는고동치는 노래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나의 노래는 덧없는 게 아니다.
나의 노래는 이 좁다란 나라를 위한 것
땅 속 깊이까지 이 나라를 위한 것.
만물이 여기 잠들고
모든것이 시작되는 이곳에서
그동안 용감했던 그 노래는
영원히 새롭게 태어나리라.


<어느 농민에게 바치는 기도>

일어나라.
저 산맥을 바라보라.
바람과 태양과 물의 원천을
강물 씨를 뿌리는 그대여
일어나라.
너의 두 손을 바라보라
너의 형제들에게 손을 내어 주고 함께 자라나라.
피로 뭉친 우리는 함께 나아가리니
오늘은 우리의 장래를 만들어 가는 날.

우리를 비참함 속에 가두어 두는 주인의 손에서 해방시키시고
정의와 평등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높은 산길에서 들꽃을 바람에 날리게 하듯 우리에게 불어오시며,
불처럼 내 총의 총구를 깨끗이 해 주시며,
당신이 이 땅에서 마침내 뜻을 이루시듯
우리에게 힘과 투쟁할 용기를 주소서.

일어서라.
너의 두 손을 보아라.
너의 형제들에게 손을 내어 주고 함께 자라나라.
피로 뭉친 우리는 함께 나아가리라.
지금도, 우리가 죽는 그 시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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