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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하라 - 아름다운 삶, 끝나지 않은 노래
조안 하라 지음, 차미례 옮김 / 삼천리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영원히 심들지 않을 청춘의 심장, 빅토르 하라
빅토르 하라의 평전이다. 빅토르가 보낸 청춘과 열정의 시절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그의 아내 춤 예술가 조안 하라가 썼다. 조안 하라는 <빅토르 하라>로 생동하는 칠레의 혁명가수 빅토르 하라를 살려 냈다. 빅토르 하라는 비틀즈처럼 유명하지 않다. 허나 빅토르가 남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비틀즈가 남긴 것에 뒤지지 않는다. 비틀즈가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출생에 조산사 역할을 했다면, 빅토르는 소위 ‘민중가요’라 말하는 노래에 그의 심장 한 조각을 전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지구 반대편 남반구에 있어 우리와 상반된 계절을 사는 나라 칠레. 식민의 시대와 긴 독재시절을 보냈고, 긴 독재시절 만큼 긴 민주화 운동의 역사가 있고,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실종된 통한을 우리처럼 안고 사는 나라. 우리와 첫 FTA를 맺어 우리 먹거리에 영향을 주는 나라 칠레가 빅토르 하라의 조국이다. 그는 연극하는 사람으로, 연출하는 사람으로, 노래하는 사람으로 사는 동안 조국 칠레와 남미 민중을 향해 사랑을 퍼부었던 아름다운 예술가였다.
<빅토르 하라>는 빅토르의 아내 조안하라의 눈과 감성을 따라 주관적 눈으로 쓴 책이다. 영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조안 하라의 눈에 비친 칠레와 칠레 사람들은 때로는 놀랍고, 때론 아름다웠으며, 때로는 신기했을 것이다. 익숙한 공간에서 무람없이 만나던 자연이나 사람들과 달리 조안이 칠레에서 만난 그 모든 것들은 ’처음’이었고, 새로운 감흥을 부르는 것들이었을 게다. 길들지 않은 조안의 시선은 칠레 사람이라면 글에 올리지 않을 사소한 것들도 놓치지 않고 잡아채어 기록한다.
간혹 너무 세세하게 풍경이나 장면을 다뤄 조금 불편할 때도 있지만 조안 자신과 빅토르의 내밀한 감성, 섬세한 감정 변화를 읽게 돕는 점이 이 책의 큰 강점이다. 빅토르와 다른 문화에서 자란 다른 민족인 우리에게는 조안의 시선이 적절하지 싶다.
<빅토르 하라>에서는 춤의 세계도 만날 수 있다. 물론 책은 빅토르에 초점을 두었고, 조안의 춤은 빅토르의 행보에 간간히 섞이는 정도다. 허나 춤에 관한 조안의 특별한 고민과, 무대, 음악, 춤의 대중화에 쏟은 조안의 실천 경험은 또렷한 인상을 남긴다.
1. 빅토르의 노래가 잉태된 예술적 배경
빅토르는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무책임한 아버지와 부지런한 어머니 밑에서 형제들과 자란다. 민요를 빼어나게 잘 불러서 아기를 잃은 가정마다 위안과 평화의 노래를 부르러 다니던 어머니는 빅토르에게 노래의 씨앗을 남긴다. 가톨릭 교회는 빅토르에게 클래식의 화성을 가르친 교사였다. 어머니에게는 민요의 씨앗을 얻고 종교로부터는 클래식의 텃밭을 물려받은 셈이다.
누에바깐시온(새로운 노래운동)의 비올레타 빠라를 만난 것과, 그의 영향으로 남미를 두루 돌며 민요를 채보한 시간은 빅토르의 음악이 세계인의 음악이 되게 만든 결정적인 시간이었다. 오지의 시골 마을을 돌며 빅토르는 칠레와 남미 민요의 다양한 리듬과 선율 뿐 아니라, 일하는 사람들의 노동과 삶에 짙게 밴 풍요로운 정서를 길어 올렸다.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이라는 뚜렷한 정체성을 가지고 격 없이 남미 민중들과 사귀는 장면은 예술가와 대중이 어떻게 만나야 할지를 가르쳐 주었다. 대중의 정서를 자신만의 여과기에 거르지 않고 온전히 노래에 옮길 줄 아는 가수였기에 그가 남긴 노래는 아직도 만인의 가슴을 울린다.
빅토르는 연극과 연출을 십년 넘게 했다. 연극 경험은 그가 만들고 부른 노래에 극적 구성과 많은 메타포를 감게 했다. 정서적이면서 동시에 서사적이며, 하나의 이야기를 담더라도 뚜렷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빅토르가 부르는 노래의 특징이다.
또한 연극은 빅토르에게 세계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연극공연과 연극 행사로 그는 칠레 곳곳과 남미는 물론 유럽 여러 나라들을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그의 예술이 세계성을 갖게 해준 소중한 시간이었으리라.
2. 빅토르 노래에 색을 입힌 요소들
당시 예술가들은 남미의 오랜 문화를 고정된 틀 안에서 바라보았지만 빅토르 하라는 남미의 민속 문화를 현재진행형의 것으로 보았다. 남미 전통 악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민요 채보과정에서 얻은 전통음악의 선율과 양식을 빌어 창작에 성공한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통속의 원리를 다시 확인 한다.
그에 앞서 누에바 깐시온을 벌인 비올레타 빠라가 빅토르를 이끈 노래 스승이라면, 그의 노래에 역동성을 실어낸 이들은 그룹 ‘낄라빠윤’과 ‘인띠 이이마니’이다. 대학에서 자라난 낄라빠윤과 인띠 이이마니는 빅토르와 숱한 밤을 음악을 놓고 토론했다. 청춘이 지닐 수 있는 혈기 왕성함과, 대가를 바라지 않는 도전 정신을 가진 그들은 빅토르가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실험을 거쳐 얻은 음악 성과는 ‘낄라빠윤’과 ‘인띠 이이마니’에 전해졌고 더욱 넓어진 채 오늘까지 이어진다.
남미 전통 악기를 모두 동원해내어 무대 위에 올린 ‘인띠 이이마니’, 다양한 지역의 노동자와 농민들을 찾아가 무대가 거리건 현장이건 개의치 않고 공연을 펼친 ‘낄라빠윤’은 빅토르와 반주단, 때로는 합창단으로 혹은 순회 공연단이 되어 수년간을 함께 보낸다.
한번은 빅토르와 낄라빠윤이 함께 하기로 계약한 큰 도시의 공연을 취소하고 작은 마을 축제를 택해 공연에 나선다. 그 공연을 두고 벌인 토론 장면은 지금의 우리도 종종 부딪히는 문제들과 닿아있다.
‘이미 많은 사실을 알고 있으며, 분노를 갖고 있으며, 감동할 내용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을 만나서 이미 그들 속에 있는 것을 되새김질 하는 것 보다, 아무런 경험도 예술적 세례도 받지 않은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빅토르가 준비된 큰 무대 대신 작은 소도시를 택한 이유이다. 단 한곡의 노래도 갖은 노력을 기울여 만들되, 그 성과는 칠레의 모든 사람들의 것으로 되도록 애쓰던 빅토르의 일면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3 . 우리식의 음악감상실 혹은 소극장 _ 페냐
우리의 음악 감상실이나 살롱, 소극장 문화운동 시기가 칠레에 있었다. 비올레타 빠라의 아들 앙헬빠라가 주축이 되어 꾸린 ‘페냐’가 그것이다. ’누에바 깐시온’의 산실이었다. 누에바 깐시온에 관심을 가진 음악가들은 ‘페냐’에 모여 그들의 창작물을 나누고, 실험 음악을 발표한다. 소수 마니아 층과 지식인들이 ‘페냐’의 주된 이용 층인 것도 우리와 닮았다. ’페냐’는 칠레 곳곳에 만들어졌으며, 빅토르가 자주 들르던 국립공과대학 내 ‘페냐’가 가장 활발했다. 칠레에서 열린 작은 가요제에 입상한 ‘인티 이이마니’가 빅토르를 만나 음악적 성장을 이룬 공간이 ‘페냐’이기도 하며, 빅토르가 많은 음악가들과 교감을 나누고, 음악예술가 층을 넓혀 나간 곳 역시 ‘페냐’였다.
‘페냐’에 적극적이던 빅토르는 ‘페냐’가 부흥하자, 오히려 ‘페냐’ 안에 갇힌 음악의 한계를 예견하며 ‘페냐’의 성과를 곳곳의 현장으로 퍼 나르는 활동에 심혈을 기울인다. 이 과정 역시 우리 민중예술이 소극장에서 광장으로, 현장으로 확산되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4. 아옌데 선거운동과 거리 예술
70년 칠레 민주화운동과 살바도르 아옌데를 지지하는 인민연합의 선거운동은 칠레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예술 양식을 모색하게 한다. 엄존하는 파시스트의 테러나 방해를 피해서 거리 곳곳에 벽화를 그리는 작업은 새로운 미술 기법을 요구했다. 마치 ‘그래피티’와 같이 형태가 강조된 굵은 선에 눈에 잘 띄는 원색의 물감으로 채색을 하여, 먼 거리에서도 볼 수 있도록 크게 그려진 벽화는 칠레 미술의 새로운 성과이기도 했다. 이는 아옌데 집권기간 예술성 높은 ’벽화’로 발전한다.
발레 역시 무용가들이 충격을 그대로 받을 수 있는 딱딱한 바닥에서도 춤의 형상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 머리를 짜냈다. 조안 하라를 비롯한 안무가들은 춤의 동선을 더욱 굵게 하고, 동작을 더욱 역동적으로 만들면서도 무용가에게는 신체적 위험이 덜한 춤동작을 개발했다. 우아한 자태를 강조해주는 타이즈와 발레복도 변화했고, 먼 거리에서 보기에 동작 선을 한층 확장된 형태로 보이게 할 의상도 개발했다.
‘인티 이이마니’나 ‘낄라 빠윤’, 그리고 이들과 함께 하는 빅토르는 광장이나 거리에서도 언제든 악기를 펼쳐 공연했다. 버스 한대에 연주자와 가수들을 싣고, 전국을 누비며 언제 어디서든 관객과 한껏 어우러진 음악 공연을 창출한 것은 이들의 활달한 활동 덕분이다.
5. 칠레 민주정부 - 아름다운 3년
아옌데 민주정부 수립에서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민주정부가 무너지기 전. 그 3년의 기록은 국민들이 모든 활동에 팔을 걷고 적극적으로 나설 때, 사회가 얼마나 활력 넘치는지 보여준다.
빅토르 하라는 그의 팬인 노동자의 초대로 시골 마을 달동네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민주화 혁명 전에 달동네를 찾았을 때, 가난한 노동자의 아내는 고단과 가난으로 시들어 있었고, 낯빛은 그늘지고 주름이 그득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후에 찾은 노동자의 집. 가난은 여전했지만, 수도꼭지는 고쳐졌고, 천정은 수리를 했으며, 부서진 곳은 손질이 돼 있었다. 부인의 표정은 밝고 당당했다. 가난한 삶을 한탄하는 것으로 가득했던 그의 이야기는 마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바뀌었고, 조합에 대한 이야기를 하느라 얼굴에는 밝은 빛이 서렸다. 민주정부가 집권했던 3년 동안 칠레 민중들은 국가의 주인이었다.
6. 파시스트의 테러와 폭압이 남긴 노래
민주화 운동에 대한 테러와 쿠데타 이후 벌어진 극심한 폭력은 칠레 곳곳에 상흔을 남겼다. 민중에게 꿈을 안겨 준 아옌데는 쿠데타군의 폭격으로 숨을 거뒀다. 칠레 민중의 가슴에 숱한 노래를 남겼던 빅토르 하라는 그가 공연해오던 체육관에서 학살당했다. 하지만 억압자의 폭력은 오히려 빅토가 노래하게 만드는 기폭제였고, 더 많은 노래를 쏟아내게 한 동력이 됐다. 쿠데타 군 대위의 총탄에 쓰러지기 직전까지 빅토르는 미완의 시를 썼다.
"프에르트몬트에 대한질문"은 오늘 용산참사를 떠올렸다. "프에르트몬트에 대한 질문"은 오지 시골마을인 ‘프에르트 몬트’ 농민들이 단지 농성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총격을 받아 수십 명이 숨진 사건을 다뤘다. ‘프에르트몬트 학살’은 1960년 후반 오지 시골마을에서 벌어진 일이고, ‘용산 참사’는 2009년 서울 한복판 노른자위 땅, 그것도 대로 옆 빌딩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만 다르다.
"69 ’어느 한 농민을 위한 기도"는 고요하게 시작되어 격정으로 치닫는다. 빅토르는 가난한 농민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불렀으나, 그 노래를 듣는 농민은 난생 처음 듣는 ’자신처럼 미천한 사람’을 위한 노래였다. 그 노래를 들은 농민, 노동자들은 노래를 통해 자신의 삶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빅토르 하라가 못 다 하고 간 그의 삶은 모두 혁명이었다. 생각해본다. 성실한 연출가요, 작곡가요, 사랑스런 남편이며, 교사였고, 다정한 아빠였던 빅토르 하라의 심장을 불태웠던 요소가 무엇일지를…. 그의 모든 삶은 사랑이었으리라. 노래에 대한 사랑, 칠레에 대한 사랑, 어머니에 대한 사랑, 동료 예술가요, 아내였고 동지였던 조안 하라에 대한 사랑, 그리고, 아이들에 대한 사랑.
빅토르는 묻혔으나 그는 살아 있다. 그가 남긴 노래와 그의 딸 마누엘라와 아만다가 여전히 살아가는 아름다운 칠레의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지구 반대편에서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시들지 않는 청춘의 모습으로, 지지 않을 노래로 살아 있다.
<선언>
내가 노래하는 것은 목소리가 좋아서나
노래하기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내 기타도 이성도 감정도 다 있기 때문에
노래하게 되는 것이다.
내 기타는 대지의 마음과
비둘기의 날개를 가지고 있네.
기쁨과 슬픔을 다 축복하는
성수(聖水)와 같은 존재.
비올레타가 말하던 것처럼
나의 노래는 목표를 찾았네.
노동하는 기타
봄 내음이 풍기는 기타.
내 기타는 부자들을 위한 게 아니다.
절대, 그런 것은 아니다.
나의 기타는 사다리
우리가 별에 오르기 위해 만드는고동치는 노래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나의 노래는 덧없는 게 아니다.
나의 노래는 이 좁다란 나라를 위한 것
땅 속 깊이까지 이 나라를 위한 것.
만물이 여기 잠들고
모든것이 시작되는 이곳에서
그동안 용감했던 그 노래는
영원히 새롭게 태어나리라.
<어느 농민에게 바치는 기도>
일어나라.
저 산맥을 바라보라.
바람과 태양과 물의 원천을
강물 씨를 뿌리는 그대여
일어나라.
너의 두 손을 바라보라
너의 형제들에게 손을 내어 주고 함께 자라나라.
피로 뭉친 우리는 함께 나아가리니
오늘은 우리의 장래를 만들어 가는 날.
우리를 비참함 속에 가두어 두는 주인의 손에서 해방시키시고
정의와 평등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높은 산길에서 들꽃을 바람에 날리게 하듯 우리에게 불어오시며,
불처럼 내 총의 총구를 깨끗이 해 주시며,
당신이 이 땅에서 마침내 뜻을 이루시듯
우리에게 힘과 투쟁할 용기를 주소서.
일어서라.
너의 두 손을 보아라.
너의 형제들에게 손을 내어 주고 함께 자라나라.
피로 뭉친 우리는 함께 나아가리라.
지금도, 우리가 죽는 그 시간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