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빛 매드 픽션 클럽
미우라 시온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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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죽은 영혼을 안고 살면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 자존, 정체성을 잃고 사는 삶에 대한 실존주의적 고찰
 

<검은 빛>은 어두운 물 속 같은 소설이다.첫 장부터 마지막까지 읽는 과정은 마치 물큰하고 차갑고 부유물이 그득한 호수 밑바닥으로 서서히 가라앉는 느낌이다.

<검은 빛>의 주인공은 모두 한 차례씩 죽음을 겪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사는 모양은 눈은 뜨고 있지만 시야를 가리는 탁한 물 속을  버둥거리는 것 처럼 보인다. 버둥거리지만 힘이 없어 다시 솟아 오를 기미는 보이지 않고 그저 서서히 침몰할 뿐이다. 숨 막히는 삶은 너무 적막해서 자칫 평화롭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점점 더 멀어지는 수면 위의 뿌연 불 빛을  하릴없이 바라보며 멀어져 가는 삶이다.

1. 파괴와 폭력을 선명하게 그리기

작은 섬 미하마에 살던 노부유키와 다스쿠, 미카는 이유도 없고 막을 수도 없는 죽음과 폭력을 겪는다. 미우라 시온은 하루 밤 사이 벌어진 커다란 재앙과 그 틈새에 벌어진 거역 못할 폭력을 거대한 수초로 독자의 시선을 휘감듯 써내려간다. 영혼을 잃고서 살아 남은 세 사람을 보며, 일본 화가 이께다 요오손이 그린 ’재화의 흔적’이 떠올랐다. 



죽음과 삶이 엇갈린 경계에 놓인 모습이 태초의 모습인 것 같기도 하고, 아무런 기대 없이 폐허 위에 빈 눈동자로 남은 듯도 한 세 주인공의 모습이 처연하다.

2. 사랑과 죽음의 줄타기

영혼 잃은 사람들의 사랑은 늘 죽음과 맞닿아 있다. 노부유키와 미카, 다스쿠와 나미코, 다스쿠와 노부유키, 다스쿠와 요이치 이들의 관계가 그렇다. 사는 것과 나란히 붙어선 죽음 사이에서 실낱같은 위로를 ’사랑’에서 찾는다. 실은 사랑이라 말하기도 어렵다. 성애에 대한 집착, 유대감에 대한 극한의 공복, 침몰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한 폭력과 얽어매기 등이 이들의 사랑의 방식이다. 수면 위에 떠 있는 뿌연 빛은 현실에는 다시 없다는 뼈 아픈 인식이 선택하는 몸부림에 가깝다.

이들의 사랑을 그림에서 찾는다면 오스카르 코코슈카가 그린 ’바람의 신부’  쯤 된다. 



이미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사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할 수 없다. 작가 미우라 시온은 소설 속에서 노부유키의 생각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동정이나 애정으로는 회복할 수 없는 상처가 있는 한,... 궁극적으로는 자기를 공복으로 몰아넣은 놈을 찾아 죽여서 굶주림을 채우거나, 공복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기다리는 방법, 둘 중 하나뿐이다. -280쪽-"    
   

이미 영혼을 잃은 사람이 선택할 것은 죽이느냐, 죽느냐 둘 중 하나라는 얘기다.


3. 미우라 시온은 왜 이런 소설을 썼을까?

작가는 지독하게 어둡고, 밝은 것이란 한 점도 없는 이런 소설을 왜 썼을까? 폭력과 살인이 부르는 재앙에 대한 경고였을까? 작가 근본에 있는 허무주의가 이런 이야기를 만들었을까?
책에는 작가의 설명 글이 없다. 어떤 의도로 썼는지 밝히지 않으니 추론 할밖에 없다.

<검은 빛>은  현대 사회를 수 많은 은유로 엮어낸 소설로 보인다. 기존의 질서와 관계, 공동체를 단 한번의 쓰나미로 삼켜버린 사회, 개성, 사람에 대한 존중, 가치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남은 것이라고는 붕괴의 조짐이 곳곳에 있는 가정과 일자리로 이어진 불안한 동선 뿐이다. 사랑은 성욕과 역할에 대한 분담만 남기고 사라졌다. 생존을 위한 경쟁은 삶 속에 깊이 뿌리 내렸다. 언제든 (죽음으로)밀려날 것을 염두에 두고 산다. 다른 누군가를 죽이든지, 아니면 조만간에 밀려날 때를 기다리면서 사는 의미를 모르고 살아가든지 둘 중 하나다.

   
  "죄 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 있는 것은 불합리와 폭력 뿐이다. -264쪽-"  
   


아무일도 없었던 듯이 생활로 돌아와서 피부처럼 붙어 있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붙이고, 가정과 일터로 돌아 온 노부유키의 모습을 보면서 나름의 해석에 확신을 더한다.

’그 날, 덮쳐오는 쓰나미를 얼려버릴 수 있었다면’ 나즈막히 내뱉는 노부유키의 한숨이 가슴에 스산한 바람을 일으켰다.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극한의 폭력이 천연덕스럼게 재생되는 현실을 뉴스와 사람들 사는 모습에서 본다.

<검은 빛>. 무겁고 음습하지만 잘 된 소설이다. 또, 이영미 씨의 좋은 번역에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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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란
현기영 지음 / 창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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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란>은 386 세대, '허무성'이 87년부터 2004년까지를 통과하는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 간만에 소설 한 번 읽으려다가 정말 된통 당했다. 참 읽기 힘든 소설이다. 글이나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집요하고 끈질긴 작가의 '물고 늘어지기' 때문이다.

<누란>은 허무성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지만 지금을 사는 기성세대를 말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음험하고 무겁고 공포스러운 역사 속에서 경험했던 고통의 감각을 작가는 집요하게 들쑤셨다.

소설의 첫 장면은 허무성이 남산에 끌려가서 고문을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파시즘의 신봉자 김경장이 허무성을 1박 2일 고문하는 장면만 25쪽을 빡빡하게 채운다. 뒷 부분에서 김의원으로 진화한 세련된 파시스트 김일강과 허무성이 술집에서 나누는 대화는 166쪽부터 216쪽까지 꼬박 50쪽을 채운다. 둘의 대화에서 맡아지는 폭력과 좌절과, 마조히즘적인 분열증과 포식자의 피냄새 나는 언사를 50쪽에 걸쳐서 참고 읽어야 한다.
작가는 TV라면 리모큰을 들어서 끄고 싶고, 영상이라면 고개를 돌리고 싶은 장면들의 생생한 묘사로 386 세대가 공히 겪었음직한 트라우마를 후벼낸다. 읽는 동안 허무성의 통증이 내게도 옮겨와서 풀 곳 없는 분노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미는 것을 수차례 참아 견뎌야 했다.
또, 이 사회 포식자들의 생각 층과 생활을 근거리에서 보는 것 역시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작가는 후기 마지막에 

   
  "철저하게 절망하여 그 밑바닥에 닿으면 거기에서 새로운 정신, 새로운 자아가 탄생하고, 그때 우리는 바닥을 걷어차고 힘차게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의 의도대로 소설은 극한의 좌절, 그 밑바닥을 남김없이 훑는다.

 
다만, 허무성이 좌절의 극한에서 내리는 마지막 결정, 절실했던 사랑을 밀어내고, 도전하고 부딪히려는 다음 세대의 주자가 내민 손도 마저 놓으며 내리는 마지막 결정, 그 유약한 결정에서 희망에 대한 절절한 갈구를 읽을 뿐이다.

읽는 동안은 힘들었지만, 트라우마를 직시하는 것은 치유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을 믿는다. 작가의 집요한 물고 늘어지기를 견딜 수 있는 한, 읽어볼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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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드 feed
M. T. 앤더슨 지음, 조현업 옮김 / 지양어린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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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 앤더슨의 <feed 피드>는 미디어가 통제하는 사회의 극단을 보여준다.  ’미디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떤 작용을 한 쪽에서 다른 한 쪽으로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 나온다.  미디어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오늘을 생각해보면 이미 의식의 절반 정도는 미디어에 내준 꼴인지도 모르겠다. <피드>가 보여주는 세상이 얼마 지나지 않아 닥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책 읽는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피드>와 미디어 악법이 끔찍한 까닭

<피드>는 미래사회 개개인의 뇌에 장착된 컴퓨터다. 다수의 사람들이 태어나자마자 뇌에 ’피드’를 심는다. 피드는 중앙컴퓨터에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다. 중앙컴퓨터는 자본의 것이다. 네트워크이기 때문에 쌍방향으로 길이 나 있기는 하다. 허나 피드가 제공하는 것은 상품과 연관된 정보이고 개인이 피드에 보내는 것은 신용에 기댄 상품구매 의사이다.
피드에서 음악을 골라 들으면 그 음악이 수록된 음반 정보와 가격, 그 음악이 삽입된 상품 소개와 가격들이 팝업 배너처럼 떠오르고, 가사 중에 나오는 아릿다운 아가씨를 보여주고 그 아가씨가 입은 옷의 상품 정보, 가격, 등등이 어지럽게 떠오른다. 수 많은 정보들은 피드에 지배되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동일한 미의식과, 가치체계를 전달한다. 가장 가치로운 것은 높은 가격에 있고, ’피드’가 통제하는 세상에서 최고의 사람은 최고의 소비를 하는 사람이다.

최세진 씨는 그의 책에서 "게이머가 처음 게임을 시작할 때는 단지 게임의 규칙을 익힐 뿐이지만, 점차 컴퓨터의 요구에 ’즉각 반응’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지면 이제 그 게임의 규칙이 게이머의 생각을 지배한다. 즉 게이머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게임의 규칙처럼 움직인다는 이야기이다."라고 지적했다. 비단 게임 뿐일까? 이미 우리는 미디어의 작동 시스템을 따라서 많은 것을 결정한다. 베스트 셀러를 비롯해서, 세련된 의상, 좋은 취미, 좋은 운동법, 살빼기법, 좋은 집, 좋은 직업, 연애, 결혼, 육아 등등을 의도를 가지고 운영되는 미디어의 추천을 따른다. 그것들은 슬며시 자신의 지향이 되고, 누적된 지향은 가치관이 되어 버린다. 무서운 일이다.
헌데, 그 강력한 추천자를 사익추구에 눈 벌건 자본의 독점으로 내어준 사회가 ’피드’가 지배한 사회이고, ’피드’의 세계로 한 걸음 성큼 내디딘 것이 미디어 악법이다.


피드가 있는데 왜 생각을 하지?

<피드>를 끌어가는 갈등의 주된 선은 바이올렛과 타이터스 간의 갈등이다. 10대에 <피드>를 장착한 바이올렛은 뇌의 일정한 영역이 <피드>와 독립적으로 활동 가능하다. 숲 속의 맑은 공기를 피드의 간섭을 받지 않고 투명하게 감각할 수 있고, 책을 읽을 줄 알며, 글을 쓸 줄도 안다. 피드가 없이 생각할 수 있고,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바이올렛의 뇌가 하는 그 모든 일을 타이터스는 할 필요가 없다.
생물학적인 뇌가 움직이기도 전에 피드의 분석에 따라 떠오르는 배너와 몇 줄의 정보를 자신의 생각이라 여기는 타이터스에게 바이올렛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이다. 바이올렛과 대판 싸우고 집으로 돌아 와 앉은 타이터스는 바이올렛의 말을 떠올린다. "너도 생각이라는 걸 좀 해 봐." 타이터스는 잠깐 내뱉는다. "생각은 어떻게 하는 거지?"
아이가 숙제를 하는 모습이 겹쳐졌다. 컴퓨터를 켜고 선생님이 제시한 내용을 검색창에 친다. 그대로 노트에 옮겨 적거나 프린트만 하면 되는 완성품 숙제들이 모니터에 주욱 뜬다. 아이에게 한 소리 한다. "그렇게 숙제를 하면 어떻게 하니? 네가 책을 보고 찾아야지." 아이는 "컴퓨터가 있는데 뭐하러 복잡하게 찾아?"
자신이 접속할 수 있는 정보는 내가 아는 것이라 착각하며 사는 세상에 정보를 만나는 접속창인 미디어는 수백년 인간의 머리 속을 지배챘던 종교보다도 신보다도 세다. <피드>와 미디어 악법이 끔찍한 까닭이다.


그래도 희망적인 것
피드가 지배하는 세계. 생생하게 그려진 디스토피아의 모습은 암담하다. 뭔가 구원의 손길을 기대하던 독자의 기대를 매튜 앤더슨은 단호하게 잘라 버린다. 허나 그는 희망도 남겨 두었다. <피드>에 지배받지 않는 30%의 사람들, 가난해서 피드를 사지 못한 사람들, 피드가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타자화된 사람들, 그래서 넷 망 안에서는 존재 가치가 없는 사람들과 피드넷 밖의 지구동맹 등이 그렇다. 강력한 힘으로 파멸로 끌어당기는 것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힘의 영향력 밖과 그 힘의 반하는 것이 희망의 출발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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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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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는 그냥 오늘이고, 현실이다. 소설 속 사건이 충격적일 것은 없다. 그러나 충격이다.  내가 인상 찡그리고 비껴 지나친 끔직한 현실을 눈 앞에 열어 보여주기 때문이다.

거짓의 도가니에는 기만과 부패와 폭력이 필연적으로 따라 들어선다. 돈과 협잡과 위선으로 만든 철옹의 권력이 서고, 그와 연관된 것들이 카르텔을 맺고 ’이대로~’를 외치며 맴돌면서 소용돌이의 눈을 만든다. 거짓의 도가니 안에서는 타락과 부패의 맴돌이와 같은 방향으로 돌면 아무 문제 없다. 보라고 눈에 띄게 놔 둔 것들만 주목하고 생각하면서  살면 그뿐이다. 자칫 의혹이 생길만한 일은 권력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짙은 안개가 장막을 쳐서 가려준다. 연약한 죽음조차도.

허나 안개 속은 그저 적막하게 고여 있지 않았다. ’짙은 안개 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고 공지영 작가는 희망의 메시지를 던진다. 불의의 도가니에서는 아무런 존재감 없이 하찮게 버려져 있던 이들이 그들에게도 ’말 ’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누군가 그들의 말에 눈을 맞추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청각장애인 학교 기간제 교사 강인호와 인권단체에서 일하는 신유진이 그동안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으려 했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귀를 기울인 순간 온통 먹통처럼 탁해서 얼마나 썩었는지도 분간할 수 없던 도가니에 한 줄기 빛이 들어왔다. 그 가느다란 빛줄기는 비로소 무진시와 자애학원과 무진을 움직이는 권력이 얼마나 어떻게 오염됐는지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가당치도 않은 싸움이 시작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정직도 정의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쩌면 그들은 더 많은 재물은 가끔 포기할 수 있어요.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거예요. 한번만 눈감아 주면 다들 행복한데, 한두 명만 양보하면-그들은 이걸 양보라고 부르죠-세상이 다 조용한데, 그런데 당신은 지금 그들을 흔들고 있어요.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변화를 하자고 덤빈단 말이지요.”
- 본문 255쪽 -
 
   

   
  “세상 같은 거 바꾸고 싶은 마음,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다 접었어요. 난 그들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우는 거예요.” - 본문 257쪽 -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는 <도가니> 안의 싸움은 용산이고, 쌍용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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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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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것 없고 내세울 것 없고, 남들 눈에 간지도 눈에 띄지 않는 이들에게는 사소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 대신 내어줄 것이 없다. 결국은 육체적인 고통과 자기 정체성에 대한 부정과 파닥파닥 숨 쉬는 목숨까지도 내 걸어야 한다.

< 내 심장을 쏴라>의 두 청년 주인공 승민과 수명이는 젊은 청춘이라는 것 말고는 가진 것이 없다. 수명이는 스스로 세상에 담을 쌓아 자기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살고,  승민이는 세상과 관계에서 내쳐져 정신병동에 갇혔다. 둘이 정신병동 밖에서 어떤 몰골과 어떤 태도로 살았는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또 정신병동 안에서 이성적인 사고를 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할 줄 아는 지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어떤 우여곡절로 들어왔든지 정신병동 안에 들어서면 개성과 요구는 말끔히 지워진 채 규율과 규칙과 ’짜여진 생각하기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슬픈 일은 무엇으로 강제를 하든지, 얼마나 엄청난 폭력과 비정한 모멸 속에 놓인다 해도 심장 에 깃든 욕망과 인간으로서의 자기를 지키려는 요구는 잠들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간 뇌기능과 지각능력이 얼마간 문제를 안고 있는 의학적인 환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승민과 수명의 경우에는 며칠씩 약물로 자유롭게 일렁이는 뇌수를 잠재우려 해도 집요하게 심장이 그들을 붙들고 늘어져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과 자기 요구를 집요하게 송출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심장을 쏴서 쓰러뜨리지 않는 한, 스러들지 않는 삶과 자유의지에 대한 곰질긴 요구가 두 청년을 쌍방향의 극단으로 몰고 간다. 좌절과 희망, 그리움과 냉소로. ..

<내 심장을 쏴라>는 어쩌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마주하는 내 내면의 요구를 극한의 상황에 놓인 인물을 통해 보여주는 좋은 소설이다. 투명하게 보여지고 따뜻하게 만져지는 사람들 안에 깃든 나를 발견하여 그 인물들을 통해 나를 투영하게 하는 작품이다.

광고를 보고 어의없게 오해했다.( ’세계문학상’을 세계적인 문학상으로.)
20대 초반, 비로소 자신의 뜻대로 삶에 발 내딛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청춘. 수명과 승민과 그의 이웃들이 펼쳐 보여주는 나는 불안해서 더욱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그 장면 장면이 짙고 강렬하다. 무엇보다 재 미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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