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로기완을 만났다 - 조해진 :

삶의 근원적인 슬픔을 말하는 동시에 연민과 유대를 통한 희망을 역설하는 작품-.이라는 설명 속에 모든 말들이 녹아있는 것만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인간이라는 어엿한 주체로 살아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요. 저자는 그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다,고.

 

꺼져라, 비둘기 - 김도언 :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왜 이런 글을 썼는지 가늠할 수 없는 책들도 수두룩한데, 그와 반대되는 양상들이 보입니다.

이야기와 줄거리는 간단하다. 인물은 평면적이다. 이보다 친절할 수 있을까요. 작가의 의도가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달될런지요. 글쎄요.- 

 

옷의 시간들 - 김희진 :

상처를 받고, 그것을 끌어안은 채로 곪게 두다가, 그것이 썩어버리면 어쩝니까. 그것을 당신은 어떻게 치유하실 생각이십니까.

빨래방에서의 하루들이 그녀의 상처에 고스란히 치유제가 되어주겠지요. 그것이 바로 사람이 살아가는 시간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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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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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 작가의 신간 소식, 꽤 오랜만임에도 불구하고 멈칫하게 된다. 재작년(09)에 읽은 「내 심장을 쏴라」의 수명과 승민이 상처에 엉긴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처럼 내게 들러붙어 있는 까닭이었다. 나는 한국 소설이라 하더라도, (때때로 그것이 현재 읽고 있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이름들을 기억해내지 못하여, 서평을 찾아 보거나 책을 펼쳐 가장 맨 앞의 장에 오밀조밀 붙어있는 포스트잇을 보고 나서야 간신히 그들을 기억해낼 수 있는 것은 하루이틀이 아니다. 헌데, 구태여 그때 썼던 서평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책을 첫 페이지를 펼쳐보지 않아도, 수명과 승민의 모습이 선연한 것이 경이롭기만 하다. (물론, 난 성까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이렇듯, 저질 기억력은 늘 한탄스럽기만 하다.) 또한, 그 책을 읽으며 느꼈던 기분을 아직까지도 담아두고 잊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작가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애정으로 차곡차곡 쌓아올린 결과임에 틀림이 없다. 그것도 단 한 권의 책을 두어번 읽는 것으로. 하지만, 그 책 - 초반에는 지독하리 만큼 읽히지 않아 읽을 때마다 도중에 책을 몇 번이고 덮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그것을 반복했다. 놓을 듯 말 듯 하면서도 손에 쥘 수밖에 없었던 건, 서평책이라는 명목이 아닌 오로지 세상이라는 틀 속에 갇혀 있는 나를 투영시킨 수명과 승민 때문이었으리라. 정유정,- 이름 석자를 기억할 수 있는 것 또한 오로지 그들의 몫이었고 앞으로도 그들 몫이 될 줄로만 알았다. 헌데, 다른 인물들을 품에 안고 오물조물 만져댄다니. 까닭을 알 수 없는 배신감이 드는 게다. 그렇게 따지고 들자면, 정유정 작가는 평생토록 내게 「내 심장을 쏴라」라는 소설로만 읽혀져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래서, 그러므로, 정유정 작가에 의해 쓰여진, 이 책이 욕심이 났고, 또 어쩌면 그래야만 했다. 작가 박범신의 “그녀는 괴물같은 ‘소설 아마존’이다.”라는 수식어도 영 불편스럽게만 느껴져 책을 받자마자 띠지 먼저 떼어서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버리고, 한참을 쳐다봤다. 읽고 싶다,가 아니라 그저 욕심이었던 게지. 이 책을 꼭, 가져야 겠다,는 추레한 욕망같은 것. 허나, 직접 내 돈 주고 구매했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었기에 언제까지고 책장 속에서 뒤집어둘 수만은 없는 노릇. 아니,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그 핑계가 아니었더라도 난 이것을 사월이 가기 전, 읽었겠지. 팔과 발이 없어 언뜻 배밀이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누군가 남편에게 자신의 삶을 걸고 지켜야 할 ‘어떤 사람’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어떤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기자신을 포함한 모든 걸 버릴 수 있느냐고 물어도 마찬가지 답을 할 것이다. 최종적으로, ‘어떤 사람’을 버리는 것이 지키는 길이라면, ‘어떤 사람’을 버릴 수 있겠는가, 라고 물어도 이 역시 ‘예스’라는 답을 듣게 될 것이다. 서원을 그녀에게 데려가라고 한다는 건 그런 뜻이었다. 서원을 버리는 것 말고는 지킬 길이 없다는 의미.

 

세상은 ‘지난밤 일’을 ‘세령호의 재앙’이라 기록했다. 아버지에게 ‘미치광이 살인마’라는 이름을 붙였다. 나를그의 아들’이라 불렀다. 그때 나는 열두 살 이었다. 날 먹은 술이 문제였고, 눈을 시리게 만들 정도로 뿌연 안개가 문제였고, 그 속에서 급작스레 튀어나온 여자아이가 문제였다. 죽은 줄 알았던 아이의 입에서 신음소리처럼 나왔던, “아빠.”라는 소리를 막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그는, 한 순간에 살인자가 되었다. 서원의 눈에 반달 같은 미소가 번졌다. 애정과 믿음이 담긴 눈웃음이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표정이었다. 초라한 삶을 견디게 하는 달빛이었다. 그랬기에 서원이 아빠를 살인자로 기억하는 건 죽음보다 끔찍한 일이었다. 최서원이란 이름 뒤에 붙을 ‘살인범의 아들’이란 딱지가 죽음보다 무서웠다. 여자아이의 “아빠.”라는 소리만큼, 어쩌면, 아니 틀림없이 그보다 더 막고 싶어 했을 ‘살인범의 아들’ - 하지만 서원은 아빠에 의해 자신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했던 여자아이도, 그 아이의 아빠도, 자신의 엄마도, 나아가 동네주민까지도 죽어 ‘미치광이 살인마’의 아들,이 되어 버렸다. 나도 살아야 한다 그러려면 당황하고, 분노하고, 수치심을 느끼고, 누군가에게 곁을 내줘서는 안 된다. 거지처럼 문간에 서서, 몇 시간씩 기다려서라도 일한 대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세상을 사는 나의 힘이다. 아니, 자살하지 않는 비결이다. 그래서였다.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아빠를 죽도록 미워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 아빠에 대한 분노와 증오와 미움의 덩어리가 서원을 세상으로부터 거부를 당할지언정 추방당하지는 않게 칠년이란 세월을 살게 한 게다. 그런데, 서원에겐 무엇이 우선이었을까. 사실과 진실의 간극 속에 새근새근 잠든 ‘그러나’였을까, 소록소록 잠든 ‘그러니까’였을까.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이의 입술 사이에서 “아빠.”라는 소리로 어둠이 세상을 삼켰을 때 최현수가 한 일은 분명 더 이상 변명의 여지도 없기에 ‘가해자’라고 일컬어져도 어떤 명분거리도 없음은 분명하다. 헌데, 그의 아비 오영제는 어찌하여 명백한 ‘피해자’ 범주에 들어가는가. 누가, 어떤 이유로 ‘피의자’가 아닌 ‘피해자’로 만들어 망아지새끼처럼 날뛰는 그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게만 했는가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피해자’는 누구이고, ‘가해자’는 누구인가. 전에 읽었던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때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된 여선생을 보며,피해자가 직접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는 권리를 내주어도 좋은가,에 대한 생각에 빠졌던 적이 있었다. 그때 분명 여선생은 한 순간의 장난으로 딸아이를 잃은 직접적인 피해자였기에 그것에 대한 생각은 더욱 더 깊어져만 갔었더랬다. 하지만, 오영제, 그는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교정’할 수 있는 소유물이 자신이 정해준 위치인 제자리에 있기를 바랬던 게다. 사고 당일, 오줌 지리도록 무서운(글을 읽고 있던 나조차도 오금이 저릴 정도의) ‘교정’을 받은 세령이 할 수 있었던 일이 무엇이었을까. 태어난 생일에, 곤히 자고 있는 침대에서, 그리고 여느 곳보다 안락할 집에서 아이를 내 몬 것은 누구란 말인가. 이래도, 그를 끝까지 ‘피해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말이다.

 

 

 

책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 무엇보다 내가 유심하게 지켜본 것은 사형제도. (저자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음을 알지만.) 우리나라는 현재 사형제도가 존재한다. 글쎄. 좋은 방법일까. 현재 읽은 책 중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다카노 가즈아키의 「13계단」, 나카무라 후미노리의 「모든 게 다 우울한 밤에」 - 이것들의 공통된 것은 사형제도라는 틀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인데, 글쎄. 나는 사형제도에 ‘결사반대’, ‘절대찬성‘ 중 그 무엇도 아니지만, ‘어느정도의 찬성’에 동의한다. 그런데, 위에 나열한 책들은 항상 내 머릿 속의 그 생각들을 뿌리채 뽑아놓으려 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도 아닌, 그 무엇도, 어떤 것도 대용할 수 없는 사람의 생명이 좌지우지되는 법률이기에 안락사도 그와 마찬가지인 이유로 현대사회에서 논란이 끊이질 않는 이유일 게다. 死刑 -. 어디까지 옹호해야하고 배타해야하는 것인가. 당신이 상대의 생명을 당신의 손바닥이라고 생각했다면, 당신의 목숨은 누군가의 손바닥이라는 것을 왜 모르는가. 그러던 중 간밤에 김길태가 무기징역으로 확정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형제도는, 필요하다.

 

 

  

그래서였어. 그래서…… 넌 아니기를 바란 거야.

 

책을 다 덮고 난 뒤에 오는 안도감이 벌게진 얼굴을 식힌다. 눈시울이 붉어진 것이, 결코 하고 있던 팩이 속눈썹에 아롱진 까닭은 아니었다. 영영 사람들의 입방아에 ‘살인범’으로 남을 현수가 가여워서도 아니요, ‘살인범의 아들’로 살게 될 서원이 가여워서도 아니요, 오영제의 결말(ex. 권선징악)을 보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어렸을 적 조창인의 「가시고기」를 몇 번이고 되돌려 읽으면서 분명, 소극적일지라도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이보다 더하게 표현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었고, 김민기의 「눈물의 아이」를 읽으며 그것을 다시 한번 되새겼었다. 「7년의 밤」 이 역시 그와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오영제에게 ‘교정’이 그의 가족을 사랑하는 방법이었다면, 최현수에게는 지키기 위한 것이 사랑이었던 게다. 물론, 극과 극의 인물을 제시했기에 조금 더 역동적으로 다가오진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지만 말이다. 앞서 박범신 작가가 아마존 같다고 했었나. 아니, 세령호였다. 세령호에 마음먹고 물을 채운다면 얼마의 깊이까지 찰 수 있는지는 몰라도 난 딱 그 정도라고 하겠다. 그럼에도 별 다섯 개인 이유는, 그는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정유정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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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보스 문도스 - 양쪽의 세계
권리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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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이 서점과 도서관 직원들을 혼란스럽게 했으면 좋겠다. 여행기에 놓아야 할지, 철할에 놓아야 할지, 예술 일반에 놓아야 할지, 아니면 문학과 취미 사이 애매한 선반에 애매하게 놓아두어야 할지.’ 이것이 오롯한 여행기가 될 수 있을까, 라는 갈등을 한 것도 잠시 아니, 라는 대답과 함께 에세이로 밀어넣는다. 비단 여행한 흔적을 증명할 사진이 없다는 이유같지 않은 이유로 여행기에 분류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만으로 여행기네, 아니네를 따지자면, 일전에 읽었던 작가 박준의 「책여행책」도 사진 한 점 없다는 이유로 여행기가 아니라는 것과 같은데, 우리는 그것을 한치의 의심도, 어떠한 일언반구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 여행기라 일컫고 있다. 하지만 작가 권리의 「암보스 문도스」 - 이것을 여행기라 치부해 버린다면, 이 책은 결코 (지극히 주관적인 내 판단 아래) 좋은 책이 될 수 없을 게다. (적어도 나에겐) - 이렇듯 내가 이 책을 여행기에 넣지 않는 까닭은, ‘여행기’라는 한정된 장르에 얽매여 있기에는 작가만의 냉소적이지만, 결코 냉소적이지 않은 내면들이 박탈당하는 것만 같달까. 하지만 그런 모든 것들이 여행이라는 직접 발로 걷고, 눈으로 보고, 느끼는 곳에서 응어리진다. 그래서 일거다. 이 책의 장르를 명료하게 구분짓지 못하는 것이.

 

 

 

나는 문학이라는 여정이 마치 평생의 배우자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이런저런 남편들 사이를 기웃거리고 다녔다. (…) 카프카는 우울할 때만 연락해 함께 침대에서 뒹굴며 술을 마시고픈 남편이었다. (…) 도스토옙스키가 술과 도박과 여자라는 3대 악에 찌든 방탕한 남편이라면, 카뮈는 남편이 없는 사이 바람을 피우고 싶은 상대였다. 전자가 나랑 한바탕 싸우고 집을 나가버릴 것 같은 남편이라면, 후자는 내게 외투를 입고 정오에 산책을 나가자며 차를 대기시키고 있을 것 같은 남편이었다.

 

그녀에게 몽상가적 기질이 있다는 것은 책의 앞부분을 읽으며 약간의 의구심을 품는 것이 전부였지만, 러시아를 경유해 유럽으로 가면서, 그녀에게 ‘글을 쓰게 한 요인’을 이야기하기 위해 넌지시 ‘남편론’을 꺼내어 놓은 것을 들음으로써 명료해졌다. 그녀의 남편들을 소개받으며, 나와 그녀 간에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아쉬웠음은 물론, 나도 그 남편들을 가져본 후 그것을 느껴보다, 생각하지만, 아직까지 그들 모두는 나에게 가까이 하기엔 먼 당신들,일 뿐이다. 그렇게 또 언젠가,..라며 미뤄두는 내가 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아니, 정확히는 수전 손택의 글을) 약간 모방하여 말한다면 나도 그 못지않은 남편들이 있다. 비오는 수요일이면 장미꽃을 건네줄 것만 같은 기욤 뮈소가 있는가 하면, 평생 잊고 살 것처럼 돌아서놓고 삶이 권태롭다거나 지독한 슬럼프에 빠져있을 때에 찾으면 씨익 미소짓지만 등 뒤에 칼을 가지고 있을 것만 같은 히가시노 게이고가 있고, 지독한 열애가 끝난 뒤엔 달려가 품에 안기고픈 츠지 히토나리가 있으며, 자기 전에 머리맡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목울대에서 울리는 감미로운 음성으로 시를 읊어주는 윤동주가 있지 않은가. 그뿐인가, 밤새 육체의 고통으로 끙끙 앓는 나를 밤새 간호해줄 조두진도 있다, 그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펜대를 쥘 힘을 주지는 못했다. 그저 품 속에서 알량한 감정들을 속삭였을 뿐. 헌데, 그녀는 그들이었다고 이야길 한다. 그녀가 자발적으로 글을 쓰게 만든 것이. 하지만 비단 그뿐이었을까. 그들이 그녀의 글쓰기의 전부였을까 말이다. 시간이 지나자 글쓰기는 헤어진 연인처럼 여러 의미로 퇴색되어갔다. 처음에 그것은 종교였으나, 이내 오락이나 시간때우기로 생각되다가, 어느 순간에는 고통의 도구였다가, 허기진 마음을 채우는 두레박이 되기도 하였다. 이제 나는 미치지 않기 위해 글을 쓴다. 글은 영혼에서 멀어지려는 나를 붙들어 매어준다. 실은 나, 그녀의 글을 쉬이 이해할 수 없었을 적도 있었는데, 그것은 아마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오롯한 그녀의 글쓰기인 까닭은 아닐까. 그러니까, 자신의, 자신에 의한, 자신을 위한 글쓰기라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그런 글쓰기가 있듯이. 혹은, 낙서와 같은 사소한 한 줄의 문장이 마음에 새겨져 지우개로는 지워질 수 없는 것과 같이.

 

 

 

나는 책임질 수 없는 자식을 뿌리는 수컷처럼 수많은 사진을 찍어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는 그 흔한 사진 한장 없다. 왜? - 무차별적으로 찍는 동안 사진이 기억을 대신한다. 뇌는 기능을 멈추고 오로지 장전된 총만 바쁘게 돌아간다. 왜 우린 찍는가? 왜 찍지 않으면 죄의식이 드는가? ‘기억하지 못할까 봐’라는 말에는 너무나 많은 핑계가 숨어 있지 않은가? 우리는 사실 충분히 기억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억하기를 회피해버린다. 기억의 단초를 만들기 위해 사진으로 남겨둔다지만, 몇몇을 제외하면 대개는 기억을 위한 기억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찍는다. 내재된 폭력성과 소유욕이 빚어낸 불안한 습관. 기억을 위한 기억,이라고. 참 씁쓸하기 그지없는 말이 아닌가. 그러면서도 옳은 문장들의 행진에 절로 고개가 주억거려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우리도 흔히 어느 곳에 놀러간다,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챙기는 것이 카메라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뿐만 아니라, 찰나의 그 순간을 찍기 위해 우리는 카메라 렌즈를 피사체에 얼마나 오래도록 두고 있었던가.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본 그 풍경이, 그 세상이 내 눈으로 본 것보다 더 값지고 아름다울 수 있는가 말이다. 저자 역시도 이 도시에서는 절대 사진을 찍지 말자, 손가락과 눈과 마음에 자유를 줘보자,라고 결심했지만 그녀 역시 그 욕망을 쉬이 이겨낼 방도가 없더란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카메라를 건드린 것이 아니라 신기하게도 카메라가 저절로 손에 딱 붙어버려 저절로 전원을 켜고 앵글과 구도를 맞추더니 셔터를 누르고 도로 가방 속에 들어가 꼼짝 않았다고. 그렇게 저자는 기억을 위한 기억 몇 장을 또 만들어 냈을 게다.

 

 

 

 

즐거웠다. 여행에 대한 그녀만의 철학을 내세워 정의해놓은 이 책을 읽는 것이. 또, 그 안에 녹아든 여행의 행보를 함께 하는 것이. 그러고보면, 나는 대체적으로 솔직한 글을 좋아하는가 보다. 일전에 작가 윤미나의 「굴라쉬 브런치」를 읽었을 때도 솔직한 여행에세이에 깔깔거리며 읽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이 책에서도 저자의 표현때문에 웃을 일이 좀 있었는데, 기억나는 것만 적어두자면 카지노에서 알바를 하던 중, 이가 하나도 없는 터키 출신 노인이 기계에 떨어진 동전을 집는 것을 보며 동전을 가로채가더니 볼에 뽀뽀를 했다는 것에서 ‘볼이 썩는 것 같았다.’는 표현에 마시던 커피를 도로 뱉을 뻔 한 적이 있는가 하면, 리컨펌을 하지 않고 바로 SBY 티켓(스탠바이티켓)을 발급받았지만, 한시간 전에 탑승 완료가 되어 비행기를 놓치게 되어 막막하던 통에 “호텔 숙박권과 600유로를 드릴게요” 라는 직원을 보고 ‘언젠가 기회가 되면 나는 천사를 본 적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라고 써놓은 문장을 읽고 병원에서 진료 순서를 기다리며 큭큭거리며 웃기도 했었다. 그러나 몇 개월 만에 둑처럼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모기를 잡고 난 뒤 손바닥에 묻은 피를 보고서도 갑자기 엉엉 울고 싶어질 만큼 심신이 지쳐 있었다고. 그래서 마음이 아니라 몸을 괴롭혀보라는 친구의 조언에 내적으로는 종교 생활을, 외적으로는 운동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 운동이라는 것이 브라질에 끌려간 흐인 노예들이 지주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만든 무술인 ‘카포에이라’ - 그것으로 활력을 되찾은 저자는 자신만의 암보스 문도스 왕국에서 벼룩이 득실거리는 개보다 행복하다는 그녀가 진정 행복해보인다. 헌데, 프롤로그에서 보았을 때, 귀향이 본질적인 목표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녀는 그곳은 찾았을까. 그곳이 그녀만의 암보스 문도스에서 멈춰버린 것은 아닐까. 개인적으로는 그녀의 여행이 끝나지 않았음을 바란다. 어디서든지, 그녀의 귀향이 순조롭기를.

 

 

 

 

p118 , 2번째 줄 : 여기서 다분히 아옌데의 약녀 기질이 드러난다 → 약녀의 뜻이 ‘어린 딸’이라고 나와 있는데, 글쎄, 맞을까. 그냥 의문이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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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시절
공선옥 지음 / 창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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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 작가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작년 11월 말에 만났다가 올 4월에 만난 것이라고 한다면, 꽤 오랜만법도 하건만, 아직 「영란」에서 영란의 행보가 한 발자욱, 한 발자욱 또렷하게 각인되는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를 읽고 거진 일 년만에 「영란」을 접했었는데, 전작을 읽을 때는 몰랐던 어떤 괜찮음,을 발견했었다. 대체적으로 그것이 내 지독했던 슬럼프를 깨뜨려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말하기 어려운 어떤 매력을 느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에게 있어 공선옥이라는 작가의 이미지는 순수함,인데, 어떤 기준으로 그렇게 정해놓았는지도 불분명하다. 그녀가 만들어내는 인물은 모두 소박하고, 순수하다. 그런 영혼들이 공선옥, 그녀를 거쳐 나왔으니 짐짓 그럴거라 생각하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래서 그것에 한치의 의심도 품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 그리 받아들이고 있는 겐가. 인물의 순수성은 글을 통해 느낄 수 있는데, 문장들은 군더더기가 없고 간결하다. 때로는 그것이 오인되면 무뚝뚝하게 느껴질 때도 없잖아 있다. 그렇기에 그와 상반되는 방정맞다거나 호들갑스러움이 없는데도 나는 그녀의 책을 받아들 때면 어쩐일인지 엄청 재미있게 쓰여진 책을 눈 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스레 달뜨게 된다. 그래서 이번에 만나게 된 그녀의 책이 마냥 반가운 까닭이다. 꽃 같은 시절 - 처음엔 요목조목 쓰인 글자가 예뻐서, 또 단어가 예뻐서 한참을 쳐다보았더랬다. 처음에 표지를 언뜻 보고는 가족 구성원을 그려놨나, 하여 가족 소설인가 싶었는데, 다시 보아하니 죄 노인들뿐이기에 노인들의 꽃 같았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려나 보다, 했다. 헌데, 이야기가 왜 돌공장에서 나오는가.

 

 

 

오명순씨의 시위참여 동기는 조용히 살고 싶어서.조용히 살다 죽을라고까지 혀.죽을라고까지 어떻게 쓴답니까. 그냥 살고 싶어서.조용히 살다 죽을라고.

 

살던 동네가 재개발되어 유일한 생계수단인 가게가 철거되고, 개업할 때 물고 들어온 권리금과 시설투자금을 날리고 이사비용에 불과한 보상금을 받고 길바닥에 나앉게 된 철수, 영희 부부. 시골동네를 전전하다가 진평리의 한 곳에서 머무르게 되는데, 이곳도 조용하지 않다. 문제는 불법 쇄석 공장 ‘순양석재’가 들어서고 나서부터 날아오는 돌가루와 소음이었다. ‘새끼를 낳던 암소가 돌 깨는 굉음에 놀라 사산하고, 덤프트럭이 질주하는 농로에서 노인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논바닥으로 처박혔다. 먼지는 비닐하우스에 켜켜이 쌓여서 하우스 안은 구름이 낀 것처럼 햇빛이 들지 않았다. 깻잎에 돌가루가 박혀 입에서 싸그락싸그락 돌이 씹혔다. 논바닥에도 돌먼지가 쌓여 햇빛을 차단한 탓에 벼뿌리가 썩어갔다.’ 급기야 주민들은 데모를 하지만, 주민이라고 해봤자 3,40대는 서너 명밖에 되지 않고 노인들이 대다수인데, 형사(“나요? 나 알아서 뭣할라고? 연애할라고?” “이러면 영업방해로다가 현장체포감들이여어, 우리 언니들이 토옹 뭣을 몰라아.”)와 트럭 기사(“칵 갈아버릴까보다 그냥”)의 조롱 어린 말과 행동때문에 화가 난 영희는 메가폰에 대고 몇 마디 한 것으로 덜컥 대책위원장이 된다. 그런데, 그들의 데모라는 게 공장 앞에서 덤프트럭을 막고, 군청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법원에 소송하고, 감사원에 탄원서를 넣는 것 말고도 지나가는 이름 모를 이들에게도 밥을 챙겨주는 것이 눈물나도록 정겹기 그지없는 풍경이라는 게다. 하지만 이곳에서 수줍은 표정으로 꽃 같은 시절을 이야기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지 않나요. - 아니, 당신은 꽃 같은 시절이 어떤 건지나 알고 말하는거요?

 

 

 

‘또르또르또르르르’ 하는 소리의 근원지가 어디인지 알고 있는가. 지렁이 울음소리라고 하면 비웃을 텐가. 소리를 내지 않는다 하여 정말 소리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지렁이에게도 울음소리가 있다는 것을, 믿게 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어쩌면 지렁이 울음소리가 없을 거라 당당하게 말하는 당신도 노인들의 ‘꽃 같은 시절’을 함께 통과하며 그곳에서  지렁이 울음소리를 들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들었던 것처럼. 나는 이 책을 세 권째로 읽으며 그 세 권의 공통점을 발견했는데, 작가 공선옥은 죽으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어떻게든 살려는 사람들을 그렸다는 것. 썩은 동앗줄인 것을 알면서 붙잡았고, 그로 인해 내동댕이 쳐질 것을 알면서도 붙잡은 것은 남은 생을 제대로 살기 위한 발악인 게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의 해금이 그랬고, 「영란」의 영란이 그랬고, 「꽃 같은 시절」의 영희와 노인, 동물과 식물을 비롯한 그곳 주들 모두가 그랬다. 물질적 욕망에 얼룩진 것에 의해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것은 그들이기에, 그들은 모두 돌가루를 뒤집어 쓴 채로 흐드러지게 피는 것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는데, 그것을 통해 원하는 바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예전처럼 살게 해달라,는 단 하나 뿐이라 안쓰러움에 마음이 뭉그러진다. 이렇듯 이 책은 사회적 약자를 편에 서기는커녕, 굽어보지도 않았던 대한민국을 발가벗긴 채로 채찍을 가했던 공지영의 「도가니」, 손아람 「소수의견」을 떠올리게 하며, 진정성이 휘발된 나라에서 두 발을 땅에 딛고 걷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몸서리 쳐지게 소름끼치는 일인 것이다. 책의 이 사건은 실화이지만, 지명을 밝힐 수 없는 것은 -ing로 진행형인 까닭이겠지. 세상 곳곳에서는 여전히 지렁이들의 한맺힌 울음소리로 세상을 메우고 있는, 당신네들 귀는 얼마나 두꺼운 철벽으로 가로막혀 있어 들을 수 없는가. 혹은 들리지 않는 척 하는가. 아무리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는대도, 어떻게 들리는 것이 들리지 않는 것이 되더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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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2
스티그 라르손 지음, 임호경 옮김 / 뿔(웅진)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1부 1권 서평 - http://blog.naver.com/baereerah88/120123209971

 

 

 

1부 1권을 읽고 난 뒤 근 두어 달 만에 접한 2권이었다. 한국 소설이라하더라도 주인공의 이름을 적어두는 내 습관(나중에 아! 하며 상기시킬 수 있는 것은 둘째치고, 당장 읽고 있는 책의 주인공들의 이름을 늘상 헷갈려하는 나이기에)이 특히 이번에 참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다행이다,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이 책을 위한 준비 작업을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창하기 이를 데 없는 그 준비 작업이라는 것이라는 게 사실은 1권을 끝내고 2권을 읽기도 전에 쓴 서평을 다시 읽어보는 것과, 1권의 끝부분을 다시 살펴보는 것. 풉. 1권의 서평에 어떠한 진척도 없었고, 계속 제자리를 맴돌며, 발돋움도 시작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며 이 책의 어떠한 평도 내릴 수 없다,고 말했었다. 그래, 그랬었지. 그래서 왜 밀레니엄, 밀레니엄 하는지 모르겠다며. 사건은 이미 시작이 되었는데, 과거사만 너무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별 세개만을 주려다가 2권은 어떨지 몰라 별 네개를 주었더랬다. 허나, 오랜 간극이 원인일까. 초반에 집중을 하지 못해 허우적 허우적 거리기 일쑤였고, 급기야는 책을 놓고 「압구정 소년들」을 시작했었다. 그리고도 선뜻 바로 들지 못하고, 몇 권의 책을 더 읽은 후에야 다시 들 수 있었는데, 아차, 싶었다. 어느 순간 빠져버린 게다. 그것도 꽤 깊숙히. 아마, 그것은 미카엘 블롬크비스트와 리스베트 살란데르가 함께 한, 그 때가 아닌가 짐작해본다.

 

 

 

1장 , ‘스웨덴 여성의 18퍼센트는 살면서 남성의 위협을 한 번 이상 받은 적이 있다.’ 2장 , ‘스웨덴 여성의 46퍼센트가 남성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3장 , ‘스웨덴 여성 중 13퍼센트는 심각한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다.’ 4장 , ‘성폭행을 당한 스웨덴 여성 중 92퍼센트가 고소를 하지 않았다.’

 

하리에트 방예르
의 사건은 초반에도 좀처럼 실마리를 드러내지 못하다가 둘의 합심으로 조금씩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드디어 범인과, 맞닥뜨린다. 그런데 그 범인이라는 작자가 - 그리고, 홀연히 사라진 하리에트가 - (…) 저자는 스웨덴의 기자라는 투철한 직업 정신으로 똘똘 뭉친 제 2의 스티크 라르손을 만들어내는데, 그 인물이 바로, 미카엘 블롬크비스트. 저자는 그를 통해 스웨덴의 사회상을 고발하는 동시에 기업의 불투명함을 고발하며 그 인물로 베네르스트룀을 지목하고 그를 끌어내고자 한다. 그는 내가 바라는 대로 질질질, 끌려 내려올 것인가. 혹은 그곳에 버티어서서 굳어버릴 것인가. 나는 책을 읽는 도중에 아니, 하리에트의 사건이 끝난 직후에 큰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그 여파로, 일명 ‘복지국가’라고 널리 알려진 스웨덴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는 것이다. 그렇듯 단순한 추리소설로 치부해버리기에는 시사하는 바가 현실적인 까닭에 서평을 쓰는 지금에도 이 모든 것이 씁쓸하게 다가온다. - 이 책을 끝내기 전, 한가지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1권에서 난, 블롬크비스트보다는 살란데르의 매력에 더 빠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2권에서는 그의 매력을 조금 더 볼 수 있겠지,라는 생각을 했었으나, 전혀, 라는 것이 내 대답이다. 사건의 실마리는 주로 살란데르에게서 나왔으며 베네르스트룀을 무너지게 만드는 계기도 그녀가 주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나는 그의 매력을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1권을 이어 2권에서도 역시 2부에서는 그의 활약이 조금 더 돋보였더라면 좋을텐데,라는 아쉬움을 안고 책을 덮어야만 했다. 어쩌면 좋을까. 다들 매력적이라는 당신의 그 매력을, 나는 찾아 주질 못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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