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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의 간주곡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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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가 진다. 손 끝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깊고 애절한 그리고 집어 삼킬 듯 탐욕스러운 허기가 내 안에 존재하고, 나는 때때로 그것과 마주한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 추악한 그것이 더이상 추악하다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아련하고 슬퍼져서 그만 그것을 어루어 만지게 되는 것이다. 이쯤되면 내가 말하는 허기가 비단 굶주림만이 아니라는 것 만큼은 추측할 수 있을 터. 육체의 구석구석에 고스란히 전달되는 허기의 선연함은 자신 이외에는 감히 아무도 느낄 수 없는 하나의 무언의 대화와도 같아서 그 허기를 채워줄 수 있는 것은 타인이 아닌 오롯한 자신의 몫이다. 헌데, 나는 늘 그것을 나 자신이 아닌 타인에 의해 채우곤 했던 것이다. 허기가 진다는 것 자체는 삶에 대한 깊은 굶주림이고 회한인데, 지금 이 순간, 어쩌면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허기가 지는 때에 그에 걸맞는 제목인 「허기의 간주곡」을 읽게 된 것이.

 

 

 

에텔 - 부르주아 가정의 소녀가 보는 세상, 그리고 그런 그녀의 성장기를 그려낸 한 권의 소설이 여기에 있다. 증조부 솔리망씨가 에텔에게 보여준 연보라색집은 이 책에서 희망이 되는 단 하나의 실체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던 중 혁명으로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을 맞고, 어머니와 언니들과 러시아에서 독일로 도망갔다 마침내 프랑스에 거주하며 연명해나가는 삶이 힘들다는 제니아와 친구가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깊어져 가는 골이, 돈을 둘러싼 다툼들이,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음이 느껴지는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가 에텔 주위를 둘러싸고 있지만,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없는 까닭일까, 친구 제니아의 질척거리는 힘겨운 삶이 에텔에게는 신비로움을 넘어 동경하는 삶으로 싹트는 것이다. 만약 제니아에게, 제니아의 어린 시절에, 그녀가 살아온 삶의 매 순간에 그런 신비로움이 없었더라면 에텔이 그녀를 그처럼 사랑할 수 있었을까? 에텔은 자신의 감정이 순수한 것이 아니라 그런 허접을 안고 있음을 깨닫고 괴로워했다.(p46) 그렇게 에텔에게서 우정과 사랑, 애정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솔리망 씨뿐인 듯했던 그 시절은 지나고, 그것의 화살은 제니아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다른 증조부 솔리망씨가 숨을 거두면서 남긴 유산은 친권자라는 명목 아래 아버지인 알렉상드르에게 넘어가게 되고, 그것은 그녀의 유복할 미래를 몰락으로 몰고가기에 충분한 시나리오를 작성케 한다. 그와 동시에 에텔은 성장하고 있었다. 채 성장이 마치지 못했을 때, ‘전쟁’이라는 소용돌이에 말려든다. 전쟁과 개인이라는 지층은 두텁고도 단단하여 쉬이 깨뜨릴 수 없다. 그렇게 전쟁의 한가운데에 그녀의 몸이, 조금 더 나아가서 한 가정 -브룅 가족-이 던져지며 그렇게 또다른 생이 주어진 것이다. 유년기에서 벗어나 어른이 되어야 했다. 삶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 모든 것에. 그런데 무엇을 위해? 그러니까, 더는 척하지 않기 위해. 삶의 주체가 되기 위해. 중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강해지기 위해, 잊기 위해. 마침내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두 눈의 물기는 말라 있었다. (p159) 그녀는 그렇게 급작스레 어른이 되어버렸다. 더이상 코탕탱 가의 살롱에서 어른들의 대화를 수첩에 받아 적던 어린 소녀가 아니었기에, 공증인 봉디를 만나 자신의 권리를 되찾는 수순을 밟지만….

 

 

 

아르튀르 랭보의 「허기의 축제」를 인용하며 출발하기에, 나는 허기를 잘 알고 있다,라는 문장이 첫 스타트가 되며 육체적인 허기를 이야기하기에 보이는 그대로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허기를 잘 알고 있다는 문장의 끝은 다음에 이어질 이야기는 그것과는 또다른 허기에 관한 것이다. (p14) 이었기에 그와 반대되는 정신적인 허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심지어 책을 다 읽고 난 뒤 서평을 쓰면서조차도 - 허기에 대한 본질적 의미는 그대로 밑바탕에 깔아두고, 현상적 의미를 끌어올리려 애썼다. 가까스로 끌어올렸는데, 나는 나를 의심하고 있었다. 이게 맞는가, 자문하고 있었던 게다. 그러다 문득, 아무렴 개개인의 독자가 받아들이는 것 말고 또 다른 정답이 있을까, 싶었더랬다. 어쨌든, 그것은 에텔의 우정과 사랑, 애정을 받을 수 있는 단연코 한 사람뿐인 솔리망씨의 상실에 대한 허기였다. 좀 더 나아가 에텔의 로망이자 꿈이었던 연보라색집의 상실로 인한 허기였고, 고향에 대한 애수(향수)에 대한 허기였으며, 앞으로 자신의 삶에 대한 허기인 것이다. 그런 허기들이 하나의 음을 되찾고, 결국 그것은 웅장한 교향곡 사이사이에 끼어들어가 간주곡이 된다. 그녀가 울리는 허기의 간주곡을 들어볼 생각이 없는가. 당신이 조금 허기진 상태에서 듣게 된다면 그것을 채워줄지도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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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너머로 여자를 말하다 - 네이버 최고의 아트 블로거 강은진의 그림 에세이
강은진 지음 / 케이펍(KPub)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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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서리가 쳐지도록 외로웠던 나날이었다. 제 2의 사춘기가 찾아오는 듯한 그런 상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읽고 있던 소설책을 옆에 가지런히 놓아두고 마음을 평온하게 해줄 그림들을 감상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늘 그래왔었으니까. 그 그림이 이번엔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라는 화가의 그림으로 점철된 마로니에북스 책이 아닌 친애하는 이웃님의 ‘아트 talk talk’ 님의 책, 「그림 너머로 여자를 말하다」라는 것이 조금 다를 테지만. 저자의 블로그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불과 몇 달 전. - 싱숭생숭한 어느 날에 마음을 차분히 해줄 그림을 감상하려고 몇 번의 검색 끝에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공간을 찾아내었다. 그곳이 저자의 블로그였던 것. 내가 늘 위안을 받는 공간을 가꾸던 사람이 쓴 책이라 - 왠지 안면에 옅은 미소가 배어나온다. 책을 집는 순간부터 흐트러졌던 마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모양새를 보이는 것을 느낀다. 그래, 이거지. 이런 정돈되는 느낌을 원했던 거다.

 

 

 

늘 그렇듯, 그림 에세이라는 것은 하루만에 다 볼 분량인 것은 자명한데, 난 늘 쉬이 넘기지 못하고 그림 하나하나와 오래도록 마주하게 된다. 그것이 내게 있어서 그림에 대한 애정이라면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이리라. 한 마리의  고양이가 따사로운 햇빛이 작열하는 곳에 자리를 잡고 낮잠을 청하고 있는 모양새를 바라보듯, 그렇게 모든 것을 감싸 안아줄 양 포근함이 가득 담긴 아늑한 눈길로 바라보는 것. 그 눈길엔 고아한 척, 고매한 척 하는 그 어떤 인위적인 것도 들어차 있어선 안되는 것. 난 분명 이 책을 그림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얻으려고 펼쳐 든 것이 아닌,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줄 것을 헤매다 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 까닭이 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모든 그림이 나를 만족케 시켜줄 그러한 그림들은 아니었다. 개중엔 나를 지레 겁을 먹게 만드는 것도 있게 마련이었다.

 

 

 

 





구스타브 카유보트 - 「비오는 파리 거리」

 

 

책에 있는 다른 그림들을 보고 이 그림을 본다면, 아 - 무척 사실적이구나, 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그림에 대해 아는 것 전혀 없는 바인 나조차도 느낄 수 있음에 괜스레 기뻐진다. 실은 나, 이런 그림을 좋아한다. 하지만 요즘은 그냥 따뜻한 그림을 더 많이 찾게 됨에 무뚝뚝하게만 보이는 이 그림이 달가울리 없다. 마음에 조금 더 여유로움이라는 햇빛이 찾아들었다면, 나 역시 이 그림을 보고 청량한 블루 레인! 이라고 칭한 저자의 글을 보며 고개를 주억거리며 저자와 함께 했을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각기 다른 빨간 우산, 파란 우산, 찢어진 우산 -은 아니고- 이 아닌 똑같이 생긴 우산들을 보며 생각이 가지를 쳐서 급기야 산업화라는 것을 떠올리게 하고, 대량생산되어 누구나 다 똑같은 물건을 쓰고 있는 사진 아니, 그림 속의 인물들은 모두 쌀쌀맞고 퉁명스럽게만 보인다.

 

 

 

 

 

 

 

 

  

구스타프 클림트 - 「사포」



앙투안 장 그로 - 「류카테 절벽의 사포」


 
 


 

그리스 여류 시인 ‘사포’ - 당대 남성 우위의 위계질서에서 군계일학으로 자리메김하여 여성들과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쳤다던 그녀. 만일 내가 찾아낸 구스타프 클림트의 「사포」가 위와 같이 붉은 빛을 띄었다면야, 나에게도 혼동은 오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흑백으로 이루어진 그림은 뜨악함을 안겨주었다. 옆에 서있는 소녀(?)는 마치 혼령이야? 도대체 뭐야? 라는 식의 의문을 자아내고 이 화가는 이 분위기를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라는 생각마저 들었으니…. -흑백인지 혹은 붉은 빛인지 무엇이 진정한 그의 그림인지는 모르지만.- 계속해서 그림에 대해 풀어놓은 책에서도 이 그림에게 만큼은 자애롭지 못했던 듯 하다. 이 그림의 옆 페이지엔 사포라는 여인을 설명하기에만 급급했던 듯 하다. 옆의 그림은 뱃사공 ‘파온’이라는 남성을 열렬히 사랑했으나, 사랑의 고통으로 이내 바다에 목숨을 던졌다는 그 가슴 아픈 이야기. 오롯하게 ‘앙투안 장 그로’라는 화가의 무한 상상에서 나온 이 그림은 가슴을 저릿하게 만든다. 우리가 살아가다보면 사랑의 고통뿐 아니라, 거친 파도에 노출된 배처럼 자의적이 아닌 타의적으로 움직일 때가 있을 터다. 인생이라는 것이 그런거지, 라고 치부해 버리기엔 조금 무리가 있는데,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제 2의 사춘기가 찾아온 것만 같은 지금의 내 상태로 이 그림을 마주하기에 울컥하는 마음이 금세 다른 그림으로 옮겨가게 한다. 조금 더 오랫동안 바라보았더라면 나도 모를 눈물이 흘렀을지도 모르겠다. 무엇때문인지도 모르면서.

 

 

 

「실내」
 



「실내」



「실내」



「등을 돌린 젊은 여인」



모두 ‘빌헬름 함메르쇼이’의 작품이다. 왜 그는 무슨 연유로 이렇게 등을 돌아 있는 여인들만을 그려냈을까. 분명 여인이 서있는 자리를 그린 것이 분명할진대, 쓸쓸하고, 적막하기까지 하다. 이 그림을 보고 있자면 꼭, 외면받는 듯한 그런 기분이다. 그냥, 그런거, 나는 바라보고 얘기를 좀 하고 싶은데, 저 사람은 등을 돌리고 나를 바라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 그래서 풀 죽어 있는 것 같은. 이 그림은 자꾸 그런 느낌을 받게 만든다. 한도 끝도 없이 쓸쓸해지게.


 

 

 

자콥 타만 - 「선생님이 돌아서 있을 때」



「큰 모자를 쓴 잔느」

 

「노란 스웨터를 입은 잔느」 

 

하지만 쓸쓸하게 만드는 그림보다는 돌처럼 단단하게 굳은 마음을 몰랑몰랑하게 만들어주는 그림이 더 많았다는 것.  ‘자콥 타만’ - 「선생님이 돌아서 있을 때」라는 그림을 보며 입술 언저리를 실룩실룩거리며 웃기도 했고, ‘모딜리아니’의 시선이 닿는 곳엔 연인 ‘잔느’가 있었다. 「큰 모자를 쓴 잔느」, 「노란 스웨터의 잔느」를 보면서 그녀에 대한 ‘모딜리아니’의 사랑에 오히려 내가 더 두근댐을 느끼게 되면서, 분명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보았을 거야, 라고 호언장담하게 된다. 비록 가슴 아픈 결말이지만, 그들은 아마 지금 누구보다 더 행복한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혹, 그와 그녀의 아이까지 - 세 가족이 그곳에 있을지도 모르지.

 
 

 


   

 

칼 빌헬름 홀소에 - 「창가의 기다림」

 

 

눈을 뗄 수 없어 계속 멍한 상태로 내내 바라보았던 ‘칼 빌헬름 홀소에’ - 「창가의 기다림」과 ‘루이 마리 드 쉬리베르’ -「과일과 꽃을 파는 가게」가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루이 마리드 쉬리베르’의 작품은 나와있지 않은 것 같다. -아니, 내가 찾지 못하는 것이겠지.- 어쨌든 「창가의 기다림」에서 여인은 빌헬름 함메르쇼이’의 작품과 똑같이 뒤돌아 있다. 그럼에도 이 그림은 색감에서 따스함이 감돌고, 커튼 사이로 내미는 햇빛이 외면받는다는 느낌보다는 조금 더 희망적임을 느끼게 된다.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으로- 옆이라도 훔쳐보고 싶은데, 감히 부를 용기가 안난다. 눈물이 송글송글 맺혀있기라도 하면 부른 나도 그녀도 얼마나 민망하겠는가, 모르는 바 아니기 때문. 그녀의 기다림이 애틋하기만 하다. 저자의 아, 내게도 그런 기다림이 있었지. 라고 쓴 한 줄에 나의 기다림도 함께 포개어진다. 그렇게 그림 속의 이름 모를 그녀와 저자와 내가 교감을 느낀다. 그녀의 기다림은 지금쯤은 끝이 났을까 - 혹시 아직도 내내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쉬이 다음 페이지로 넘길 수가 없다. 그러다가 또 한번, ‘루이 마리 드 쉬리베르’의 그림에서 철푸덕 넘어지고 만다. 마치 「과일과 꽃을 파는 가게」에 서있는 여인의 등 뒤에서 몰래 훔쳐보다 넘어진 남자 곁에 나란히. 아이쿠. 부끄러워라. 그런데 여인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 여인의  핑크빛 드레스가, 여인의 아름다운 손짓·몸짓이, 여인의 사랑스러운 표정이 가던 길을 멈추고 여인을 바라보게 한다. 아, 예쁘다 -

 

 

 

 

 

이 말고도 이 책엔 수십 장의 아름다운 명화들이 있는데, 개중 어떤 것이 더 아름다운가를 판가름할 수도 없는 명화들이 가득하다. 자신의 마음가짐에 따라 조금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고, 혹은 조금 더 애정 듬뿍 바라볼 수도 있는 게다. 이 책의 1부에서는 각 19개의 주제를 제시하고 그에 맞는 명화들을 일러주고 있는 형식이라면, 2부에서는 화가의 생에 대해 일러주며, 화가의 특색을 잘 일러준다. 또한, ‘그림에 재미를 느끼는 여덞 가지 통로’를 제시하고 있어 여러 시각에서 좀 더 폭 넓게 그림을 바라볼 수 있게 도와준다. 올해(2011)에 첫 번째 그림 에세이를 읽으며 괜찮은 화가들을 여럿 만났고, 난 여전히 ‘그림’의 ‘그’자도 모르지만, 이번에도 즐거운 나들이를 감행했다. 그림 에세이는 늘, 눈과 마음이 즐겁다. 무한 상상에 도전해 보는 것도 그림을 보는 즐거움이 아니던가 - 당신의 상상을 저자의 상상에 포개어 둘만의 교향곡을 들어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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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관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1 케이 스카페타 시리즈 1
퍼트리샤 콘웰 지음, 유소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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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매니아층을 거느리고 있는 퍼트리샤 콘웰이라는 작가는 나에게 범접하기 힘든, 예를 들면 마이클 코넬리, 로버트 해리스, 제프리 디버, 버나드 콘웰과 같은 작가라 할 수 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어려워 보여서’라고 말하면 타인의 비웃음을 살런가. 나는 책을 읽으며 어려워보이는 책은 읽기가 싫다. 취미로 읽는 책을 구태여 과제처럼 생각하고 그 책들을 읽어야 하는지 모르는 까닭이다. 그렇기에 난 이들 작가의 책엔 감히 손도 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작년 즈음 로버트 해리스의 「고스트 라이터」와 마주 앉아 몇 일을 함께 했다. 쉬이 읽혀지는 책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뇌리에는 괜찮았던 책,이라고 박혀있는 까닭이다. 그런데 어렵게 느끼는 또 다른 작가의 책에 또 다시 슬쩍 손을 내밀 수 있었던 것은 「법의관」이라는 제목을 가진 까닭이었다.

 

 

 

책의 원제는 부검, 검시의 뜻을 지닌 《postmortem》 - 그것은 법의관이라는 직업을 설명하는 가장 최적의 단어가 아니던가. 하지만 나에게 법의관이라는 특정한 직업이라는 것이 생소하게만 느껴졌다. 물론 지금이야, 책을 읽었으니 그나마 조금 아는 척을 해보이는 것 뿐일 테지만, 실은 나, 법의관이라는 정확한 뜻을 몰라 법과 의학을 종횡무진하는 -의학이 소송까지 치닫게 되는(혹은 메디컬 드라마의)- 그런 직업으로만 생각했더랬다. 이 얼마나 무지몽매한 두뇌를 가지고 있는가 말이다. 요즘 박신양, 김아중 주연의 〈싸인〉이라는 드라마를 시청 중이라면 법의관이라는 직업이 낯설지 않게 다가왔을까. 이러쿵 저러쿵 할 것 없이, 사전을 뒤적여보는 수밖에. 사전에서 법의관은 ‘경찰의 범죄수사에 도움을 주거나 사인과 사망경위를 밝혀 인권을 도모하는 일을 주업무로 하는 학자’라고 명명하고 있다. 이런 매력적이고 매혹적인 직업을 가진 이가 이 책에 나온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피해자의 인간적인 존엄성을 지켜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일단 피해자가 사건 번호로 불리기 시작하고, 증거물이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면 나도 어쩔 도리가 없다. 꺼져버린 생명처럼, 개인의 프라이버시 역시 무참하게 짓밟히는 것이다. p17

 

 

 

이 책을 읽기 바로 전에 스티그 라르손의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1」을 읽었고, 채 읽지 못한 2권의 씁쓸함이 입 안으로 닥쳐와 쩝쩝 거리며 입맛을 다시고 있던 중이었다. 그 불충분한 것을 잠시 잊게 해줄 간식거리가 필요했고, 그것으로 나는 「법의관」을 손에 집었다. 집었을 때 두툼한 두께에 나도 모를 안도감을 느꼈는데, 요즘은 추리 소설을 대할 때 만큼은 두께가 이정도는 되니 결코 시시껄렁하지만는 않을거야, 라는 식의 두께로 책의 질을 가늠하는 괴상한 습관이 생겨버렸다. 어쨌든, 이 책은 「법의관」이라는 낯설지만 흥미로운 제목부터, 시작 하기도 전에 기대치는 넘칠 듯 끓어오르는 상태였다. 그 기대를 충족시켜줄 수 있을 것인가.


 

 

 

토요일로 넘어가는 깊은 새벽에 울린 전화에서 살인 사건을 전해 듣는다. 이미 전에 몇 차례의 살인이 있었고, 살인 사건의 정황을 살펴보았을 때, 이는 분명 연쇄 살인 사건,이다. 살인 사건을 전해 듣고 자다 깨서 곧장 현장으로 간다. 스카페타 박사가. 바로 그녀의 직업이 앞서 말한 매력적인 법의관이다. 사건은 그녀의 눈을 통해 전달되고 독자는 그것을 읽는다. 범인은 여성들을 강간하고, 전화선으로 결박하고 손가락, 갈비뼈 등을 부러뜨리며 끝내는 교살한다. 그런 그가 남긴 흔적이라고는 그의 손을 스친 시체의 몸에는 반짝이는 물질과 다리에 흘려놓은 비분비형의 정액뿐이다. 두가지 단서로 범인을 잡기에는 무리수가 뒤따른다. 게다가 범인을 잡기도 전에 스카페타는 함정에 빠진다. 컴퓨터 해킹으로 인한 정보 유출과 실험실에 있어야 할 -그러나 박사의 서명조차 없는- PERK의 라벨이 붙어 있는 것(샘플)이 냉장고 안에 있었던 것. 누군가 그녀를 함정에 빠뜨리려 하는 것인가?

 

 

 

여느 추리 소설이 그렇듯 이 책도 추리 소설이라는 정해진 프레임에서 벗어나진 못했음이 실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대부분의 추리 소설의 1인칭은 대부분 남성이다. 그들은 힘이 있다. 남성적인 힘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이끌어갈 힘이 있다는 것이다. 와카타케 나나미 「의뢰인은 죽었다」의 여탐정 하무라 아키라도, 기시 유스케 「도깨비 불의 집」의 변호사 아오토 준코도 곁에는 도와주는 남성이 있었다. 그들 또한 힘이 없었고, 또 연약했다. 그런 내 생각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 스카페타 박사도 역시나,다. 게다가 소극적이기까지 하다. 옆에 형사 마리노가 있지만, (후..) 뭐라고 해야하나. 마리노 형사는 입방정 좀 떨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는 스카페타에게 말하지 않아야 했다는 것이 아니다. 형사라면 증거 불충분이란 명목 아래 그 누구도 쉽게 용의자로 몰아가선 안되고, 단정 지을 수 없는데, 그는 너무 쉽게 단정지어버리는 것에 있다는 점이다.- 그의 입은 너무 쉽다. 또한 앞서 스카페타는 소극적이라고 말했다. 그 소극적은 우유부단함과도 결부되는데,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노선이 시도때도 없이 바뀌어버리고, 그러면서 독자의 노선도 함께 바꾸려 시도한다. 그러니까 범인의 포위망을 점점 좁혀가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 저 사람 꾹꾹 찔러본다고 말해야할까. 그와 함께 동참하는 독자가 있는가 하면, 아닌 독자도 있는 게지. 처음엔 나도 스카페타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이러다간 죽도 밥도 안되겠다는 생각에 내 입지를 점점 좁혀나갔다. 책 속에서 범인을 찾을 사람이 백이면 백, 1인칭일진대 그 사람을 믿지 않고 내 위주로 범인을 찾아 내겠다니, 그런 나도 어처구니가 없지, 생각한다.

 

 

 

범인의 정체는 놀라웠다. 잘 짜여맞춘 트릭이 아닌 예상 외의 인물이었기 때문일까. 왜 이 사람이 범인인가 싶을 정도로 얼토당토하기까지 했으니 말 다했지,싶다. 사건은 벌려놨지, 주위에 끌어들일 사람은 다 끌어들였지, 결국 그자를 프레임 밖에서 데리고 왔다. 이미 스포일러가 된 것도 같지만, 더 이상은 말하지 않겠다. 어쨌든 400페이지 모두 범인을 잡는데 할당되고 있다. 하지만 정말로 범인을 위해 쓴 페이지는 얼마나 되는가,라는 말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내 생각으로는 전체 페이지 중 11분의 1, 딱 그 정도. 그것으로 범인을 찾았으니 그대로 고개를 돌려 책을 덮기엔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이 너무 달짝지근하지 않은가. 라섹을 하고 난 뒤,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아가며, 시려서 잘 떠지지도 않는 눈에 강약으로 힘을 주어가며, 10페이지를 읽을 때마다 세개의 안약을 번갈아 넣어가며, 그렇게 읽었는데,... 그래도 그렇게 해서 읽은 연유는 책의 재미 때문이었겠지. 하지만, 퍼트리샤 콘웰이라는 이름으로 이제껏 읽지 않았다,고 이야기 하기엔 그녀의 첫 작품은 내게 너무 실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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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 소설 속의 소설, 이라는 소재는 무척이나 독특하다. 처음 이 책의 구성을 보고 치트라 바네르지 디바카루니의 「마지막 고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또한 소설 속의 이야기라는 소재로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것이 같다는 점에서. 또한 시점이 1인칭만을 고집하지 않고, 2인칭, 3인칭_ 이렇게 세가지의 시점을 통솔하고자 하는 작가, 폴 오스터. 게다가 소설의 시점은 1967년과 2007년. 40년의 세월을 넘나드는 시점인데, 그 속에서 난 제대로 유영할 수 있을까.

울분 - 필립 로스.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이다. 그런데 여파가 대단하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순식간에 마음을 휘어잡는다. 책의 소개를 구지 보지 않고도 '울분'이라는 제목에 마음이 동하긴 처음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청춘이란 녀석과 함께 희극과 비극이 교차되는 그 곳에 내가 서있다. 그가 그려내는 청춘의 격정과 분노가 나에게까지 미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것이 울분으로 가득찬 나의 지금을 조금은 가볍게 만들어줄 수 있을까. 필립로스가 그려낸 그곳에서 나의 울분도 함께 터뜨려낼 수 있을것인가.

오후의 문장 - 삭막한 현실에서 따뜻한 이야기를 쓰고자 하는 이가 있다. 그가 쓰는 이야기엔 우리의 이상의 혹은 이하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응원하는 이들이 있지만, 살아내는 것조차 버거워한다. 하지만 그들은 각자의 소리를 낸다. 그것은 조화를 이루고 결국 그것이 우리의 마음에 불어닥칠 것이다. 그것이 지금도 무표정한 얼굴로 타이핑을 써내는 내 얼굴에 웃음을 짓게 만들어줄지, 누가 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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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1 밀레니엄 (뿔) 1
스티그 라르손 지음, 임호경 옮김 / 뿔(웅진)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지독한 슬럼프다. 그것은 활자들을 읽는 재미조차 상실하게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음이 틀림이 없기에, 그에 따른 해결책으로 내 자신은 내게 유예기간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기꺼이 내주었다. 그러니까 난 징그러운 슬럼프와 싸울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아 포기선언을 한 상태. 그런데 내 발목을 붙잡는 것이 있었다. 이름하야 「밀레니엄」 - 그것은 내가 이 책에 빠져들기 직전의 상태였고, 그럼에도 보이지 않는 손과 마주잡았기에 이 책을 오롯이 읽어내고 그에 합당한 서평을 써내야만 했던 것. 밀레니엄, 밀레니엄 -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100페이지까지 내가 이 책을 읽어나가며 이게 뭐가 대단한데? 왜? 어째서? 어떤 부분이? 라고 부정적으로 반문하고 있는 내가 있었다. 당연하지, 그쪽 지방의 실 지명을 댄다한들, 관심을 두지 않아 들어도 모르는 그곳이기에 -한마디로 듣도 보도 못했으니- 페이지가 넘어가는데 진척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 등장 인물들의 이름이야 늘 쓰던 것이라 아무런 거부감도 없었지만, 연습장 한 켠에 지명도 함께 적기는 처음인 것만 같아서 머릿 속에서는 아우성을 치더라 말이다. 결국 그것은 책을 읽는 것에 있어 재미를 반감시키는 요인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어쨌든, 그것에 내가 대응이랍시고 할 수 있는 것은 4일째 하릴없이 페이지를 넘기며 졸음을 머금은 나의 눈이 번쩍 뜨이게 만드는 부분을 만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비로소 그곳과 조우한다. 반갑다. 미치도록. 그제서야 안면에 웃음이 번진다. 하.지.만, -

 

 

 

이제 그것은 하나의 연례행사가 되어 있었다. 남자가 그 꽃을 받은 날은 자신의 여든두 번째 생일날이었다.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헨리크 방예르’의 증손녀 ‘하리에트 방예르’가 그의 생일만 되면 만들어주던 압화(押花)가 그녀가 죽은 36년 뒤인, 그 해에도 역시 날아든 것. 그는 1년이라는 시간에 살해범이 누구인지 알아내면 500만 크로나 -8억의 상당한 금액- 를 주겠다 말하는 것과 함께, “자네에게 한스에리크 베네르스트륌을 넘겨주겠네. 나는 그자가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어. 그는 30여 년 전 바로 우리 회사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네. 나는 자네에게 그의 목을 쟁반 위에 담아줄 수 있어. 수수께끼를 풀게! 그럼 나는 법정에서 망신당한 자네를 ‘올해의 기자’로 만들어주지!” p170-171 라며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그는 안그래도 ‘베네르스륌’과의 소송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그는 위축되어있었고, 그는 그 사건을 맡지 않을 이유가 없어진 셈이다. 아니, 그것은 그에게 있어 잡아야하는 어떤 동앗줄이었을지도 모르리라. 하지만 글쎄, 그가 과연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라는 우리나라의 속담을 빌자면, 강산은 벌써 세 번도 변했고, 이제 네 번째 변할 차례인데, 그만큼 시간이 지나 또렷하지 못한 그토록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까? 그는 나를 믿을 수 있게 해줄까. -하지만 아직까지 그는 아무 것도 하는 것이 없다. 그 뒤엔 언제쯤 보여줄건데? 라고 재촉하는 내가 있다.-

 

스포트라이트는 ‘블롬크비스트’만을 비추는 것은 아니었다.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그녀를 향해 비추고 있었다. 거식증 환자처럼 비쩍 마른 데다, 짧게 커트한 머리, 코와 눈썹에는 피어싱까지 했으며, 목에 2cm의 말벌 문신과 이두박근 둘레에는 끈 모양의 문신, 그리고 견갑골에는 좀 더 큰 용 문신을 한 매력적인 사람임엔 분명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리스베트 살란데르’ - 그녀였다. 그녀의 삶은 어떤 모양새인지, 어떤 상태인지, 그리고 누구에게 어떤 대우를 받았고, 또 받고 있는지_를 다루고 있다. 아직 그녀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자꾸만 기대가 된다. 실은 ‘블롬크비스트’보다 좀 더 기대가 되는 인물이라고 한다면, 그가 기가 죽는 것은 아닐까. 쿡쿡. 어쨌든, 그녀에겐 무언가가 있다. 그녀의 행동 양식이 그걸 말해준다.

 

 

 

나는 1권에서 멈춰있다. 아직 이 책이 어떤 책인지도 모르겠다,는 것이 내가 내릴 수 있는 정확한 대답일게다. 아직 사건에 대한 발돋움은 아직 시작조차 하지 못한 것으로 보여서, ‘헨리크 방예르’가 의뢰한 사건의 진척은 여전히 없어보이고, 손아귀엔 잡히는 것이 없다. 계속 제자리를 맴돌고, 나는 그 곳을 서성인다. 혹자는 -아니, 사실 나를 제외한 모두일지도- 왜 밀레니엄, 밀레니엄. 하는지 알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난 1부 2권을 끝낼 때까지 이 책의 평은 내릴 수 없을 것만 같다. 그저 책이 잘 읽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직 진척되지 못한 부분들에 평점을 내리기엔 그동안 잘 읽혔으나 끝 마무리가 별로였던 책에 대한 예의,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어떠한 대안도 없이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하물며 어떠한 실마리라도 잡히리라 생각했던 나의 예상과는 달리, 무척이나- 소극적인 1권은 아직 내게 눈이 트일 자리가 없다,는 것도 한 몫한다. 다들 열광한다는 책을 읽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슬럼프를 겪고 있는 중이고, 그 슬럼프는 2권을 집는 순간에 끊을 수 있을까, 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으며 그곳에서는 집어삼킬 듯 읽어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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