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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너머로 여자를 말하다 - 네이버 최고의 아트 블로거 강은진의 그림 에세이
강은진 지음 / 케이펍(KPub)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몸서리가 쳐지도록 외로웠던 나날이었다. 제 2의 사춘기가 찾아오는 듯한 그런 상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읽고 있던 소설책을 옆에 가지런히 놓아두고 마음을 평온하게 해줄 그림들을 감상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늘 그래왔었으니까. 그 그림이 이번엔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라는 화가의 그림으로 점철된 마로니에북스 책이 아닌 친애하는 이웃님의 ‘아트 talk talk’ 님의 책, 「그림 너머로 여자를 말하다」라는 것이 조금 다를 테지만. 저자의 블로그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불과 몇 달 전. - 싱숭생숭한 어느 날에 마음을 차분히 해줄 그림을 감상하려고 몇 번의 검색 끝에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공간을 찾아내었다. 그곳이 저자의 블로그였던 것. 내가 늘 위안을 받는 공간을 가꾸던 사람이 쓴 책이라 - 왠지 안면에 옅은 미소가 배어나온다. 책을 집는 순간부터 흐트러졌던 마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모양새를 보이는 것을 느낀다. 그래, 이거지. 이런 정돈되는 느낌을 원했던 거다.
늘 그렇듯, 그림 에세이라는 것은 하루만에 다 볼 분량인 것은 자명한데, 난 늘 쉬이 넘기지 못하고 그림 하나하나와 오래도록 마주하게 된다. 그것이 내게 있어서 그림에 대한 애정이라면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이리라. 한 마리의 고양이가 따사로운 햇빛이 작열하는 곳에 자리를 잡고 낮잠을 청하고 있는 모양새를 바라보듯, 그렇게 모든 것을 감싸 안아줄 양 포근함이 가득 담긴 아늑한 눈길로 바라보는 것. 그 눈길엔 고아한 척, 고매한 척 하는 그 어떤 인위적인 것도 들어차 있어선 안되는 것. 난 분명 이 책을 그림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얻으려고 펼쳐 든 것이 아닌,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줄 것을 헤매다 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 까닭이 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모든 그림이 나를 만족케 시켜줄 그러한 그림들은 아니었다. 개중엔 나를 지레 겁을 먹게 만드는 것도 있게 마련이었다.
구스타브 카유보트 - 「비오는 파리 거리」
책에 있는 다른 그림들을 보고 이 그림을 본다면, 아 - 무척 사실적이구나, 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그림에 대해 아는 것 전혀 없는 바인 나조차도 느낄 수 있음에 괜스레 기뻐진다. 실은 나, 이런 그림을 좋아한다. 하지만 요즘은 그냥 따뜻한 그림을 더 많이 찾게 됨에 무뚝뚝하게만 보이는 이 그림이 달가울리 없다. 마음에 조금 더 여유로움이라는 햇빛이 찾아들었다면, 나 역시 이 그림을 보고 청량한 블루 레인! 이라고 칭한 저자의 글을 보며 고개를 주억거리며 저자와 함께 했을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각기 다른 빨간 우산, 파란 우산, 찢어진 우산 -은 아니고- 이 아닌 똑같이 생긴 우산들을 보며 생각이 가지를 쳐서 급기야 산업화라는 것을 떠올리게 하고, 대량생산되어 누구나 다 똑같은 물건을 쓰고 있는 사진 아니, 그림 속의 인물들은 모두 쌀쌀맞고 퉁명스럽게만 보인다.
구스타프 클림트 - 「사포」

앙투안 장 그로 - 「류카테 절벽의 사포」
그리스 여류 시인 ‘사포’ - 당대 남성 우위의 위계질서에서 군계일학으로 자리메김하여 여성들과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쳤다던 그녀. 만일 내가 찾아낸 구스타프 클림트의 「사포」가 위와 같이 붉은 빛을 띄었다면야, 나에게도 혼동은 오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흑백으로 이루어진 그림은 뜨악함을 안겨주었다. 옆에 서있는 소녀(?)는 마치 혼령이야? 도대체 뭐야? 라는 식의 의문을 자아내고 이 화가는 이 분위기를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라는 생각마저 들었으니…. -흑백인지 혹은 붉은 빛인지 무엇이 진정한 그의 그림인지는 모르지만.- 계속해서 그림에 대해 풀어놓은 책에서도 이 그림에게 만큼은 자애롭지 못했던 듯 하다. 이 그림의 옆 페이지엔 사포라는 여인을 설명하기에만 급급했던 듯 하다. 옆의 그림은 뱃사공 ‘파온’이라는 남성을 열렬히 사랑했으나, 사랑의 고통으로 이내 바다에 목숨을 던졌다는 그 가슴 아픈 이야기. 오롯하게 ‘앙투안 장 그로’라는 화가의 무한 상상에서 나온 이 그림은 가슴을 저릿하게 만든다. 우리가 살아가다보면 사랑의 고통뿐 아니라, 거친 파도에 노출된 배처럼 자의적이 아닌 타의적으로 움직일 때가 있을 터다. 인생이라는 것이 그런거지, 라고 치부해 버리기엔 조금 무리가 있는데,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제 2의 사춘기가 찾아온 것만 같은 지금의 내 상태로 이 그림을 마주하기에 울컥하는 마음이 금세 다른 그림으로 옮겨가게 한다. 조금 더 오랫동안 바라보았더라면 나도 모를 눈물이 흘렀을지도 모르겠다. 무엇때문인지도 모르면서.
「실내」

「실내」

「실내」

「등을 돌린 젊은 여인」
모두 ‘빌헬름 함메르쇼이’의 작품이다. 왜 그는 무슨 연유로 이렇게 등을 돌아 있는 여인들만을 그려냈을까. 분명 여인이 서있는 자리를 그린 것이 분명할진대, 쓸쓸하고, 적막하기까지 하다. 이 그림을 보고 있자면 꼭, 외면받는 듯한 그런 기분이다. 그냥, 그런거, 나는 바라보고 얘기를 좀 하고 싶은데, 저 사람은 등을 돌리고 나를 바라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 그래서 풀 죽어 있는 것 같은. 이 그림은 자꾸 그런 느낌을 받게 만든다. 한도 끝도 없이 쓸쓸해지게.
자콥 타만 - 「선생님이 돌아서 있을 때」

「큰 모자를 쓴 잔느」

「노란 스웨터를 입은 잔느」
하지만 쓸쓸하게 만드는 그림보다는 돌처럼 단단하게 굳은 마음을 몰랑몰랑하게 만들어주는 그림이 더 많았다는 것. ‘자콥 타만’ - 「선생님이 돌아서 있을 때」라는 그림을 보며 입술 언저리를 실룩실룩거리며 웃기도 했고, ‘모딜리아니’의 시선이 닿는 곳엔 연인 ‘잔느’가 있었다. 「큰 모자를 쓴 잔느」, 「노란 스웨터의 잔느」를 보면서 그녀에 대한 ‘모딜리아니’의 사랑에 오히려 내가 더 두근댐을 느끼게 되면서, 분명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보았을 거야, 라고 호언장담하게 된다. 비록 가슴 아픈 결말이지만, 그들은 아마 지금 누구보다 더 행복한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혹, 그와 그녀의 아이까지 - 세 가족이 그곳에 있을지도 모르지.
칼 빌헬름 홀소에 - 「창가의 기다림」
눈을 뗄 수 없어 계속 멍한 상태로 내내 바라보았던 ‘칼 빌헬름 홀소에’ - 「창가의 기다림」과 ‘루이 마리 드 쉬리베르’ -「과일과 꽃을 파는 가게」가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루이 마리드 쉬리베르’의 작품은 나와있지 않은 것 같다. -아니, 내가 찾지 못하는 것이겠지.- 어쨌든 「창가의 기다림」에서 여인은 빌헬름 함메르쇼이’의 작품과 똑같이 뒤돌아 있다. 그럼에도 이 그림은 색감에서 따스함이 감돌고, 커튼 사이로 내미는 햇빛이 외면받는다는 느낌보다는 조금 더 희망적임을 느끼게 된다.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으로- 옆이라도 훔쳐보고 싶은데, 감히 부를 용기가 안난다. 눈물이 송글송글 맺혀있기라도 하면 부른 나도 그녀도 얼마나 민망하겠는가, 모르는 바 아니기 때문. 그녀의 기다림이 애틋하기만 하다. 저자의 아, 내게도 그런 기다림이 있었지. 라고 쓴 한 줄에 나의 기다림도 함께 포개어진다. 그렇게 그림 속의 이름 모를 그녀와 저자와 내가 교감을 느낀다. 그녀의 기다림은 지금쯤은 끝이 났을까 - 혹시 아직도 내내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쉬이 다음 페이지로 넘길 수가 없다. 그러다가 또 한번, ‘루이 마리 드 쉬리베르’의 그림에서 철푸덕 넘어지고 만다. 마치 「과일과 꽃을 파는 가게」에 서있는 여인의 등 뒤에서 몰래 훔쳐보다 넘어진 남자 곁에 나란히. 아이쿠. 부끄러워라. 그런데 여인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 여인의 핑크빛 드레스가, 여인의 아름다운 손짓·몸짓이, 여인의 사랑스러운 표정이 가던 길을 멈추고 여인을 바라보게 한다. 아, 예쁘다 -
이 말고도 이 책엔 수십 장의 아름다운 명화들이 있는데, 개중 어떤 것이 더 아름다운가를 판가름할 수도 없는 명화들이 가득하다. 자신의 마음가짐에 따라 조금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고, 혹은 조금 더 애정 듬뿍 바라볼 수도 있는 게다. 이 책의 1부에서는 각 19개의 주제를 제시하고 그에 맞는 명화들을 일러주고 있는 형식이라면, 2부에서는 화가의 생에 대해 일러주며, 화가의 특색을 잘 일러준다. 또한, ‘그림에 재미를 느끼는 여덞 가지 통로’를 제시하고 있어 여러 시각에서 좀 더 폭 넓게 그림을 바라볼 수 있게 도와준다. 올해(2011)에 첫 번째 그림 에세이를 읽으며 괜찮은 화가들을 여럿 만났고, 난 여전히 ‘그림’의 ‘그’자도 모르지만, 이번에도 즐거운 나들이를 감행했다. 그림 에세이는 늘, 눈과 마음이 즐겁다. 무한 상상에 도전해 보는 것도 그림을 보는 즐거움이 아니던가 - 당신의 상상을 저자의 상상에 포개어 둘만의 교향곡을 들어 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