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관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1 케이 스카페타 시리즈 1
퍼트리샤 콘웰 지음, 유소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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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매니아층을 거느리고 있는 퍼트리샤 콘웰이라는 작가는 나에게 범접하기 힘든, 예를 들면 마이클 코넬리, 로버트 해리스, 제프리 디버, 버나드 콘웰과 같은 작가라 할 수 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어려워 보여서’라고 말하면 타인의 비웃음을 살런가. 나는 책을 읽으며 어려워보이는 책은 읽기가 싫다. 취미로 읽는 책을 구태여 과제처럼 생각하고 그 책들을 읽어야 하는지 모르는 까닭이다. 그렇기에 난 이들 작가의 책엔 감히 손도 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작년 즈음 로버트 해리스의 「고스트 라이터」와 마주 앉아 몇 일을 함께 했다. 쉬이 읽혀지는 책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뇌리에는 괜찮았던 책,이라고 박혀있는 까닭이다. 그런데 어렵게 느끼는 또 다른 작가의 책에 또 다시 슬쩍 손을 내밀 수 있었던 것은 「법의관」이라는 제목을 가진 까닭이었다.

 

 

 

책의 원제는 부검, 검시의 뜻을 지닌 《postmortem》 - 그것은 법의관이라는 직업을 설명하는 가장 최적의 단어가 아니던가. 하지만 나에게 법의관이라는 특정한 직업이라는 것이 생소하게만 느껴졌다. 물론 지금이야, 책을 읽었으니 그나마 조금 아는 척을 해보이는 것 뿐일 테지만, 실은 나, 법의관이라는 정확한 뜻을 몰라 법과 의학을 종횡무진하는 -의학이 소송까지 치닫게 되는(혹은 메디컬 드라마의)- 그런 직업으로만 생각했더랬다. 이 얼마나 무지몽매한 두뇌를 가지고 있는가 말이다. 요즘 박신양, 김아중 주연의 〈싸인〉이라는 드라마를 시청 중이라면 법의관이라는 직업이 낯설지 않게 다가왔을까. 이러쿵 저러쿵 할 것 없이, 사전을 뒤적여보는 수밖에. 사전에서 법의관은 ‘경찰의 범죄수사에 도움을 주거나 사인과 사망경위를 밝혀 인권을 도모하는 일을 주업무로 하는 학자’라고 명명하고 있다. 이런 매력적이고 매혹적인 직업을 가진 이가 이 책에 나온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피해자의 인간적인 존엄성을 지켜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일단 피해자가 사건 번호로 불리기 시작하고, 증거물이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면 나도 어쩔 도리가 없다. 꺼져버린 생명처럼, 개인의 프라이버시 역시 무참하게 짓밟히는 것이다. p17

 

 

 

이 책을 읽기 바로 전에 스티그 라르손의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1」을 읽었고, 채 읽지 못한 2권의 씁쓸함이 입 안으로 닥쳐와 쩝쩝 거리며 입맛을 다시고 있던 중이었다. 그 불충분한 것을 잠시 잊게 해줄 간식거리가 필요했고, 그것으로 나는 「법의관」을 손에 집었다. 집었을 때 두툼한 두께에 나도 모를 안도감을 느꼈는데, 요즘은 추리 소설을 대할 때 만큼은 두께가 이정도는 되니 결코 시시껄렁하지만는 않을거야, 라는 식의 두께로 책의 질을 가늠하는 괴상한 습관이 생겨버렸다. 어쨌든, 이 책은 「법의관」이라는 낯설지만 흥미로운 제목부터, 시작 하기도 전에 기대치는 넘칠 듯 끓어오르는 상태였다. 그 기대를 충족시켜줄 수 있을 것인가.


 

 

 

토요일로 넘어가는 깊은 새벽에 울린 전화에서 살인 사건을 전해 듣는다. 이미 전에 몇 차례의 살인이 있었고, 살인 사건의 정황을 살펴보았을 때, 이는 분명 연쇄 살인 사건,이다. 살인 사건을 전해 듣고 자다 깨서 곧장 현장으로 간다. 스카페타 박사가. 바로 그녀의 직업이 앞서 말한 매력적인 법의관이다. 사건은 그녀의 눈을 통해 전달되고 독자는 그것을 읽는다. 범인은 여성들을 강간하고, 전화선으로 결박하고 손가락, 갈비뼈 등을 부러뜨리며 끝내는 교살한다. 그런 그가 남긴 흔적이라고는 그의 손을 스친 시체의 몸에는 반짝이는 물질과 다리에 흘려놓은 비분비형의 정액뿐이다. 두가지 단서로 범인을 잡기에는 무리수가 뒤따른다. 게다가 범인을 잡기도 전에 스카페타는 함정에 빠진다. 컴퓨터 해킹으로 인한 정보 유출과 실험실에 있어야 할 -그러나 박사의 서명조차 없는- PERK의 라벨이 붙어 있는 것(샘플)이 냉장고 안에 있었던 것. 누군가 그녀를 함정에 빠뜨리려 하는 것인가?

 

 

 

여느 추리 소설이 그렇듯 이 책도 추리 소설이라는 정해진 프레임에서 벗어나진 못했음이 실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대부분의 추리 소설의 1인칭은 대부분 남성이다. 그들은 힘이 있다. 남성적인 힘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이끌어갈 힘이 있다는 것이다. 와카타케 나나미 「의뢰인은 죽었다」의 여탐정 하무라 아키라도, 기시 유스케 「도깨비 불의 집」의 변호사 아오토 준코도 곁에는 도와주는 남성이 있었다. 그들 또한 힘이 없었고, 또 연약했다. 그런 내 생각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 스카페타 박사도 역시나,다. 게다가 소극적이기까지 하다. 옆에 형사 마리노가 있지만, (후..) 뭐라고 해야하나. 마리노 형사는 입방정 좀 떨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는 스카페타에게 말하지 않아야 했다는 것이 아니다. 형사라면 증거 불충분이란 명목 아래 그 누구도 쉽게 용의자로 몰아가선 안되고, 단정 지을 수 없는데, 그는 너무 쉽게 단정지어버리는 것에 있다는 점이다.- 그의 입은 너무 쉽다. 또한 앞서 스카페타는 소극적이라고 말했다. 그 소극적은 우유부단함과도 결부되는데,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노선이 시도때도 없이 바뀌어버리고, 그러면서 독자의 노선도 함께 바꾸려 시도한다. 그러니까 범인의 포위망을 점점 좁혀가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 저 사람 꾹꾹 찔러본다고 말해야할까. 그와 함께 동참하는 독자가 있는가 하면, 아닌 독자도 있는 게지. 처음엔 나도 스카페타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이러다간 죽도 밥도 안되겠다는 생각에 내 입지를 점점 좁혀나갔다. 책 속에서 범인을 찾을 사람이 백이면 백, 1인칭일진대 그 사람을 믿지 않고 내 위주로 범인을 찾아 내겠다니, 그런 나도 어처구니가 없지, 생각한다.

 

 

 

범인의 정체는 놀라웠다. 잘 짜여맞춘 트릭이 아닌 예상 외의 인물이었기 때문일까. 왜 이 사람이 범인인가 싶을 정도로 얼토당토하기까지 했으니 말 다했지,싶다. 사건은 벌려놨지, 주위에 끌어들일 사람은 다 끌어들였지, 결국 그자를 프레임 밖에서 데리고 왔다. 이미 스포일러가 된 것도 같지만, 더 이상은 말하지 않겠다. 어쨌든 400페이지 모두 범인을 잡는데 할당되고 있다. 하지만 정말로 범인을 위해 쓴 페이지는 얼마나 되는가,라는 말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내 생각으로는 전체 페이지 중 11분의 1, 딱 그 정도. 그것으로 범인을 찾았으니 그대로 고개를 돌려 책을 덮기엔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이 너무 달짝지근하지 않은가. 라섹을 하고 난 뒤,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아가며, 시려서 잘 떠지지도 않는 눈에 강약으로 힘을 주어가며, 10페이지를 읽을 때마다 세개의 안약을 번갈아 넣어가며, 그렇게 읽었는데,... 그래도 그렇게 해서 읽은 연유는 책의 재미 때문이었겠지. 하지만, 퍼트리샤 콘웰이라는 이름으로 이제껏 읽지 않았다,고 이야기 하기엔 그녀의 첫 작품은 내게 너무 실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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