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차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4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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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유월, 생일선물로 받은 이 책을 시월에 읽게 되다니 - 「스텝 파더 스텝」을 읽은 뒤로, 미야베 미유키라는 작가에 대해 마음대로 흥미를 잃어버린 나였다. 그래서 그랬는지, 재미나다고 칭찬이 자자하다던 「화차」에도 선뜻 손이 내어지지 않더라, 하는 것. 그런데 이것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마음 먹은 것은, 팔랑거리는 내 귀에 살포시 스친 영화화되었다는 무성한 소문, 그 까닭이었다. 하지만 책이 손에 들어왔을 땐, 이미 영화도 훨씬 전에 막이 내린 상태여서 이왕 늦어진거, 좀 더 늦게 볼까? 하는 마음에 책장에 꽂아두었던 것. 그러다가 그동안 시험 공부를 한답시고 책을 좀 멀리 했더니, 읽히는 단어보다 놓치는 단어가 더 많더란 것. 다나베 세이코의 「딸기를 으깨며」와 은희경의 「태연한 인생」 모두 중단하고, 「화차」에 손을 뻗어 무작정 읽기 시작했다. 역시 집중이 안 될 때는 추리 소설이 제격이지! 하는 생각과 함께. 그리고 책을 읽던 중간, 그에게 SOS를 쳤다. “난 「화차」를 읽고 있어요. 이 책을 다 읽고 영화가 무-척이나 보고 싶을 것 같아요. 영화를 다운받아주세요오.”라고.

 

 

 

 

 

혼마 슈스케의 죽은 아내 지즈코가 예뻐하던 육촌 가즈야. 지즈코의 장례식때도 보이지 않았고, 전화로 조의를 표하지도 않은 채로, 삼 년 동안 연락 한 번 하지 않은 (정말이지 이기적이고 괘씸한 녀석) 가즈야가 폭설을 뚫고 난데없이 그를 찾아온다. 사정인 즉, 결혼 준비를 위해 신용카드 발급 심사를 거치던 중, 개인파산 이력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이후 갑자기 사라졌다는 그의 약혼자, 세키네 쇼코 . “(…) 부탁드립니다. 그녀를 찾아주십시오.” - 어차피 근무 중 강도가 소지하고 있던 총에 맞아 잠시 휴직 중인 혼마였기에, 순수한 호기심으로 그러마, 대답했고, 그녀의 자취를 역으로 밟아가던 중, 미조구치 변호사를 만나 뜻밖의 소리를 듣는다. “이 여자는 내가 아는 세키네 쇼코 씨가 아닙니다. 만난 적도 없어요.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이 여자는 세키네 쇼코 씨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입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 얘기를 했어요.” :: 1990년 1월 25일에서 4월 20일 사이에 180도 방향 전환. 단기간에,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개인적으로 나는, 신용카드를 신뢰하지 못한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 나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일런지도 모르겠다. 내가 신용카드를 처음 발급받은 것은 ‘후불 교통카드’라는 신세계였다. 바쁜 시간에 버스 카드를 충전하는 것이 귀찮기도 하고, 이따금 “잔액이 부족합니다.”라는 소리가 나와 얼굴이 붉어지는 것도 싫어 만들었던 첫 신용 카드. 내가 쓰는 카드의 한도는 5단위가 안 된다 하여, 10만원-으로 정해두고, 매번 그렇게 써왔는데, 신용카드의 혜택으로, 어차피 쓰는 돈, 신용카드로 긁고 혜택을 받자,하여 한도를 서서히 상향시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왠일? 내가 원래 이렇게 많은 돈을 썼던가? 싶을 정도로 많이 나왔던 카드값. 쓰는 만큼 줄어들지 않으니 날이 갈수록 더 많이 쓰는 것이 당연했다. 물론, 지금도 신용카드를 쓰며 혜택을 받고 있지만, 신용카드의 굴레[즉, 화차]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 매주 월, 수, 금은 선결제를 시행하는 날로 땅땅땅, 혼자 정해놓고 몇 달 째 잘 지키고 있는 중이다. 적어도, 월급받아 카드값 막는 그런 생활을 하지 않기 위해. [하지만 이따금 찾아오는 ‘할부’라는 손짓은, 아직까지도 참아내기가 힘들 때가 있다.] :: 살아 있는 유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富의 강물에 떠내려가는 버려진 이들의 무리.

 

 

 

 

 

남들 같은 삶을 살고 싶다. 쫓겨다니는 불안에서 해방되고 싶다. 평범하고 행복한 결혼을 하고 싶다. 원하는 것은 단지 그것뿐이다. - 그녀의 정체가 밝혀진 이후, 그녀는 어디에서 무얼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 속을 장악했다. 십자매 삐삐의 무덤을 듣고 친구 대신 왔다,는 말과 졸업사진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미야베 미유키는 그녀를 단지 행복해지고 싶은 여자,로 국한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또 다른 음모는, 등골을 싸-하게 했음이 분명했다. 행복해지고 싶다, 했지만 타인의 인생을 살 수밖에 없어썬 그녀는 정말 행복했을까? (정말로?) :: 혼마는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들었다. 신조 교코는 고독했기 때문에, 외톨이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신분을 사칭하고 가로챌 수 있지 않았을까. 쫓기고 도망치는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고 구원의 손길을 뻗어주려는 남자가 단 한 사람이라도 곁에 있었다면 그녀는 ‘신조 교코’라는 자기 이름을 버리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협력자의 힘을 빌려 온전히 신조 교코인 채로 도망치는 길을 고민했을 것이다. 이름이란 타인에게 불리고 인정받음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다. 신조 교코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그녀와 떨어질 수 없는 인간이 주위에 존재했다면, 그녀는 결코 펑크 난 타이어를 버리듯 간단하게 ‘신조 교코’라는 이름을 내동댕이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이름에는 사랑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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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
비프케 로렌츠 지음, 서유리 옮김 / 레드박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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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레드박스에서 출간한 니나 슈미트의 「내 남자친구의 전 여자친구」를 접했던 적이 있는데, 그토록 깔깔거리며 책을 읽은 적이 있었는가 - 싶을 정도로 참 재미있게 읽었더랬다. [지금 역시도 문득 그 책 생각을 하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먼저 비집고 나온다. 크크크.] 그걸 읽은 후에 “아! 어떻게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있지?”라며 한동안 비슷한 류의 소설을 찾아보려고 했으나, 여전히 찾지 못했다. 그리고 반갑게도 레드박스에서 출간한 비프케 로렌츠의 「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 -.

 

 

 

 

친구인 팀이 사장으로 있는, ‘드링크스&모어’라는 술집에 알바생으로 일하고 있는 찰리. 그런데 그곳에 동창회 초대장이 날아오고, 모리츠도 온다. 모리츠-. 그녀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 처음 잠자리를 가졌던 남자. 장소는 모리츠네 집 차고, 그것을 몇몇의 친구들이 보았고, 그 후로 모리츠의 태도가 변해버렸다는, 끔찍한 새드 엔딩,으로 끝난 그들의 관계. 암튼 그렇게 끝난 관계의 당사자, 모리츠가 찾아와 동창회를 가자고 제안한다. 그녀는 자신의 현재가 초라해 가지 않으려고 마음 먹었었지만, 모리츠의 권유에 가보지, 뭐. 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내가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해?내가 너라면 다른 사람의 인생하고 바꾸고 싶지 않을 거야. 너는 네가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을 선택할 자유가 있어. 아무도 너한테 뭘 하라고 강요하지 않잖아. 너는 온전히 너 자신으로 살아갈 수가 있잖아. 이거야말로 가장 멋진 거지!” (Tim) 그 동창회를 간 것이 그녀의 실수라면, 실수였다. 동창회에서 그녀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혹은 지워버리고 싶은 일을 겪게 되었고, 그 이후로 삶의 무기력함, 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감정을 가지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던 차에, 헤드헌팅 회사로부터의 과거를 지워주겠다,는 은밀한 제안을 받게 된다. 그리고 - 지웠다. 그 중에서도 가장 최악이었던, 모리츠와의 차고에서의 첫 경험,을. 이제 그 과거는 내 것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고 살면 되는 것이다. 실제로, 그 과거는 이제 지워졌으니, 그녀의 과거가 아니다. 그런데 - 내 생각에 행복은 늘 오늘에 달린 거 같아. 어제나 내일이 아니라 오직 오늘이 가장 중요해.” (Tim)

 

 

 

 

과거를 지워주겠다는 말에 혹할 것 같긴 하지만, 나한테 과거를 지울 만한 일이 있을까 - 싶을 정도로 최악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친구와 싸웠던 일들 중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게 만들어 버린 일도 있지만, “그땐 그랬었어.”라며 당시의 사건들을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기도 하고, “그런데 왜 그런 것 때문에 싸웠나 몰라. 크크크.” 거리며 사이를 더 돈독하게 만들기도 했고, 전 남자친구들과의 만남 역시 마찬가지로, [나는 타인과의 만남에 쉽게 정을 주는 성격이 되지 못해서]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때 만남에 대한 후회도 없고, 이별에 있어서는 이별한다는 자체가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나쁘게 이별한 적도 별로 없으니 딱히 지우고 싶다, 라는 생각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저 좋지 않은 이별을 겪고 나서 당시에는 “이런 미친 자식. 다시는 너같은 남자를 만나지 않을거야.”라는 교훈을 보너스로 주었기에 뭐, 그런대로 괜찮다. 그러면서 남자 만나는 눈 역시 높아졌으니, 굳이 지울 만한 거리도 못 되고, 함께 만나는 동안에는 그래도 좋았을테니, 그거면 된거라고.

 

 

 

 

너는 네 인생을 알아서 꾸릴 수 있는 충분한 나이야. 네 인생이라고. 너 말고 네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Mom) 그냥, 나는 그렇다.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도 내 삶의 일부라고 - 그것까지 모두 끌어 안고 살아 가려는데, 그게 쉽지만은 않다는 것. [사실 과거를 지울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이 생각도 점차 사그라들겠지만.] 여담으로, 올해 유 월의 마지막 주에 불현듯 오래 전의 우리가 참 예뻐보여서 많이 보고 싶어했는데, 그때 그에게 말했다. “우리, 별거 아닌 일에도 뭐가 그렇게 좋았는지 서로 얼굴만 쳐다보며 웃기도 하고, 그때는 참 좋았었는데. 그래도 그때의 우리가 있으니 지금의 우리가 있겠지.”라고. 뭐 - 삶 역시 그런 것 아니겠는가. 아무리 지우고 싶은 과거라 하더라도 그때의 내가 있으니, 지금의 내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과거는, 그리고 기억은, ‘나’의 인생을 완성하게 하는 하나의 퍼즐같은 것. [ps. 책을 읽으며 소피 킨셀라의 「리멤버 미」가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더라,라는 것은 내가 책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한 것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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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렛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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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번 펼쳤다,가 덮기,를 반복했다. 올해 2월에 친구들과 부산여행을 갈 때에, 왁자지껄해서 읽지 못할 줄 알았던 - 하지만 깊은 새벽, 금새 곤한 잠에 빠져든 친구들 사이에서 펼쳤었고, 언젠가 그를 만나러가는 기차 안,에서도 펼쳤었다. 하지만 계속 이어나가질 못하고, 그대로 덮어둔 채로 방치해두었더랬다. 그리고 살랑살랑 그러나 비가 온 뒤에 약간은 쌀쌀한 가을 바람이 부는 구월 중순에 펼쳤었다. 그리고 책을 펼친지 일주일 만에, 그것도 출근 전에, 책을 덮었다. 몇 번의 짧은 만남이 더해져 총 세 번의 만남. 그럼에도 그녀에게 정이 가질 않아 이번에는 많이 아프지 않겠구나, 생각했다. 책을 다 읽은 직후에도 그녀를 품에 안을 수 없었으면서, 출근하는 버스에서 머릿 속에 그녀가 둥둥 떠다니며 기어이 온통 하루를 그녀 생각으로 보내게 했다. 그래서였다. 그날, 그녀의 손을 다시 한 번 마주잡아보겠다고 다짐한 것이. 구월의 끄트머리에서 집어들어 마지막 날인 오늘, 참 많은 숨이 내쉬어졌다. 후우ㅡ.

 

 

 

풀물이 아닌 남애의 푸른 반점이 그녀 눈에 스친다. 아름답구나, 그녀는 생각한다. 내겐 없는 게 네겐 있어. 어린 그녀는 서글퍼지려 한다. 남애 등에만 있는 푸른 반점이 둘만의 결속감을 깨뜨릴 것만 같다. () 미나리지가 내려다보이는 푸른 둑 위에 펼쳐놓았던 옷을 챙겨입는 두 여자아이의 마음은 서로 반대였다. 지금 산이라 지칭된 어린 그녀는 너를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할 거야, 였고 이제 그녀의 삶과 작별할 남애는 너하고의 묘지 위에서의 맹세는 이것으로 끝이야, 였다. 마을에서 기득권을 가진 이씨 성을 가진 아이들의 틈에서 서로 산이야, 남애야, 라고 부르며 결속감을 느끼는 오산이,와 서남애,는 미나리 군락지에서 그 결속감을 깨뜨린다. 그리고 마을을 떠나는 그녀, 산이. 아니, 오산이. 꽃을 돌볼 여종업원 구함’ :: 그녀는 미용사도 아니고, 오퍼레이터도 아니다. 그녀는 이제 화원 여종업원이다. 어느 날, 어떤 사진작가가 바이올렛을 찍으러와서 “바이올렛이 어떤 것이오? (…) 이게 바이올렛이란 말이오? (…) 아가씨도 이 꽃이 좋소? 아, 글쎄 초등학교 여선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꽃을 조사했는데 이 바이올렛이라지 뭐요? 보기나 했는지? 이름만 듣고 그러는 건 아닌지? 아니 이 꽃을 어떻게 표지로 하지? 꽃 생긴 건 생각도 않고 내 사진탓만 할 거 아냐!” 그녀는, 바이올렛을 보며 인상을 있는대로 쓰고 있는 그를 무심하게 바라볼 뿐이다. 그의 첫 대면이 그랬다. 그 남자가 무슨 옷을 입고 있는지 키는 어느 정도이며 눈의 윤곽은 어떠한지 무슨 신발을 신었으며 뒷덜미는 어떠한지…… 그녀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 남자가 철제 책상 위에 걸리적거리는 잡지를 던졌듯이 그녀 또한 그 남자가 화원을 나간 후 그 남자의 명함을 다른 명함들 속에 던져놓았을 뿐이다.

 

 

 

나, 할말이 있어. 이런 말 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솔직히 말하면 지난번 그놈의 바이올렛 때문에 당신을 처음 봤을 때 내 가슴이 얼마나 뛰었는지 알아? 당신 내 카메라 바라보느라 눈 내리깔고 있을 때, 이 세상에 저렇게 아름다운 눈썹도 있구나, 내내 생각했지. 내 마음 몰랐지요?” 그 한 마디에,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봐준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그대로 무너져버린다. 그렇게 그가, 아차 - 하는 순간, 마음 속에 들어 가부좌를 틀어 앉아 버린 것이다.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시작되버린 것. 물이 범람하듯 하룻밤 사이에 그녀의 의식 속으로 진입해버린 그 남자. 그 남자로 인해 허둥거리고 있는 그녀. 그녀를 어쩌면 좋을까. 너무나도 가엾은 그 여자를. 도시의 미술관 공터 포크레인 아가리에 들어앉아 있는 그녀,의 손을 나는 잡았다,가 기어이 그녀의 손에 만년필을 쥐어준다. 지난 여름 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로 끝난 문장에 가을로 - 혹은 가을이 - 혹은 가을에서 -로 시작될지도 모를, 혹은 어쩌면 완전히 다른 문장의 첫 시작이라 하더라도, 어쨌든 그것은 희망찬 문장이기를, 꼭 그럴 수 있기를, 꼭 그래야만 하는 것임을 바라면서 말이다.

 

 

 

신경숙은 아니, 신경숙의 글은 항상 그렇듯 마음을 너무 요란스럽게 만들어버린다. 온통 하루를 그 생각으로 서성거리게 만드는 것. 오산이 - 나, 그 여자에게 정이 없다, 그렇게 단언하며 책을 덮었는데, 이제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녀에게 정을 주고 있었나보다. 그것은 아마 그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오산이, 당신 존재만으로 충분히 아름다웠다고. 당신 존재의 아름다움은 어디서든 빛을 발했을거라고, 나는 그렇게 믿는다고. 그 남자가 노란 수선화를 찍는 동안 사진 속의 그 여자는 철제 책상 위에 놓여 있다. 이제 그 여자는 그토록 열망했던 그 남자오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 놓여 있다. 깨우지 마라 모두 잠들었네. 글라디올러스와 흰 백합. 내 슬픔을 꽃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내 눈물을 보면 죽어버릴 테니까. 그리고 나, 어쩌면 얼마 동안은 더 서성일 것 같다. 포크레인을 보고, 그 아가리에 그녀가 들어앉아 있진 않을까- 하여 고개를 있는 힘껏 곧추세우는, 그런 것,처럼.

 

 

 

 

 

간혹 내가 나쁜 인간이다, 라고 생각될 때가 있다. 속이 뒤틀려 있을 때다.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산만해지는 건 둘째 치고 나중에는 서성거리는 것조차 가능하지가 않아 가슴팍을 방바닥에 대고 엎드려 있는 나를 보게 된다. 속상함이 다스려지지 않으니 몸이 자근자근 아픈 것이다. 나쁜 인간이란 마음에 그리움이 생길 수 없게 하는 인간이다. 머리는 터질 듯하고 어깻죽지가 저려오며 다리에 힘이 쭉 빠져버린다. 하루를 엎드려 있기도 하고 때로는 일 주일을 엎드려 있기도 한다. 가슴속에서 펑 소리가 날 때까지. 더이상 잃을 것이 없다고 느껴질 때까지. 너무 멀리 나온 길을 이제 혼자 돌아가야 한다는 고독이 움틀 때까지. 내가 이런 인간이었구나, 내 속을 상하게 한 대상을 나 역시 가슴속에서 펑 소리가 날 때까지 상하게 하는 그런 인간이었구나, 를 깨닫는 건 덧없고 서글프다.

 

 

뭔가를 털어버리듯 천변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수애의 이름을 부르며 뛰기 시작하는 그녀. 기억이란 느닷없는 방문객 같은 것이다. 몸 속에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다가 어느 순간 돌연 현실을 노크해와 고함을 지르게 하는 것이다.

 

 

그날, 그녀는 끈질기게 자신이 그날 소매가 없는 자주색 실크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소매가 없는 자주색 실크 블라우스 아래 좁쌀만한 소름이 돋은 채로 얌전하게 놓여 있던 그녀의 팔은 추운가보군, 무심한 그의 한마디로, 무슴한 그의 쓰다듬음으로, 그랬다, 내내 욕망을 품어왔던 것이다. 추억이 되지 못한 욕망은 여름 내내 너무 파릇파릇하거나 격렬하게 불타올라 그녀를 방심 상태로 이끌어가곤 했다. 소통되지 않는 욕망으로 인해 슬픔에 사로잡힌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하지만 바로 눈앞에서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누구신지? 하고 물었던 그 남자로 하여 지금 그녀는 야릇해져 있다.

 

 

오산이. 이 여자에게 이 이름을 지어준 지가 꼭 일 년이 되었다. 오산이는 내 단편 「배드민턴 치는 여자」 의 분신이다. 이 여자를 바로 세상에다시 내보내려 했는데 다른 작품에 밀려 이제야 이루었다. 빚어지지 못한 채로 내 마음속에서 십여 년을 함께 산 셈이다. 오해 많은 세상에 이 여자를 내보내려 하니 미안해 죽겠다. 제대로 맛있는 것도 먹이지 못했고, 좋은 옷도 입히지 못했으며, 종내는 꿈과 욕망조차 바스러지게 했으니 이 여자의 어머니 되는 듯 마음이 쓰리다. 이 여자를 통과해가는 시선 속에서 이 여자가 새로 부활하기를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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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3-08-03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보려고 들어왔어요.
더러 제가 읽은 책도 있고..아직인 것들도 많고...이렇게 엿봐도 되는지..미안해지려고해요.
신경숙작가의 글체가 저는 좋거든요.
그 망설임.
머뭇거림...조심스러운 얼굴과 손길이 다가오듯 그러다..아, 이게 아니지~라며
멈춰선 장면같은 글들.이요..
음,,하늘보리님 글도..
여기에선 그 미련스런 애징(?!)이..뚝뚝 떨어지네요.
반가웠어요!!
 
외로움의 온도 - 조진국 산문집
조진국 지음 / 해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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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여자, 참 외로움을 많이 탄다. 혼자라는 사실을 퍽이나 못 견뎌한다. 그래서 누가 무인도에 간다면 뭘 가져갈 것이냐, 라고 묻는 질문에 꼭 나 혼자 가야해? 라고 묻곤 했었다. 그래서 무인도를 가게 된다면, 사네 못사네 하며 지지고 볶고 튀겨도, 사람과 함께 가야한다고 생각했었다. 외로움을 잘 참지 못해서 생긴 병 하나. 사물에 이름을 붙여주고 그것이 마치 살아있는 듯 말을 걸며 생명력을 불어 넣어 주는 것. 까닭이 ‘무엇’이라고 명확하게 짚어서 이야기하기엔 너무 복합적이라서 ‘무엇’ 때문이다, 라고 말하기엔 어려움이 있지만, 외로움이 40도의 고열로 시달리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그 와중에 며칠 전 키우던 다육식물 ‘사월’이가 죽어서 그것을 오랫동안 쳐다보며 참 많이도 멍했더랬다. 옆에서 사수가 ‘야심차게 키우더니 죽었네요.’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그 녀석이 죽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냥, 햇빛이 나지 않아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하고 있었던 것. 그렇게 외로움이 찾아들었다. 하지만 이런 감정, 얼마 동안은 마음에 얹혀 있어서 참 많이 힘들겠지만, 또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니까, 괜찮아 질 거야. 생각했고, 뭐, 그런대로 역시 그랬다.

 

 

 

 

 

 

저자 조진국, 읽기도 전에 떠도는 문구로 인해 꼭 한 번쯤은 읽어보고 싶은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를 노트에 슬몃 위시라고 써놓고는 「외로움의 온도」를 먼저 접하게 되었다. 처음 접하는 작가지만 낯설지 않은 느낌, 꽤 괜찮다,며 잠이 오지 않을 때마다 한 장, 한 장 아껴가며 읽었다. 이야기 하나에 노래 가사가 하나씩 꼭 나오는데, 낯익은 노래들도 여럿 나왔지만, 나중에 한 번 들어봐야지 - 해놓고 들어보지 않은 노래들도 부지기수. 무더운 여름을 나기 위해 깔아두었던 시원한 돗자리에 벌러덩 누워서 이야기 하나를 읽고 그 노래를 들으며, 좋다고. 미래를 막막해하며 소주 한 잔 기울이고 있을 그의 선배 혹은 우리에게 <뜨거운 감자 _ 청춘>을 들려주며 위로를 해주기도 하고, <윤상 _ 결국... 흔해 빠진 사랑 얘기>의 경쾌한 멜로디에 섞인 웃지 못할 가사를 들으며 옛 애인이 느꼈을 감정을 공유했을 저자를 안쓰러워 하기도 하며, <조동진 _ 행복한 사람>을 들으며 모르는 슬퍼보이는 어떤 여자의 까만 눈동자를 생각나게 하기도 하고, 키친을 치킨이라고 하고, KTX를 KFC, KTF라고 하면서도 늙어가는 재미가 쏠쏠하다며 능청스럽게 <장기하 _ 별일 없이 산다>를 듣고 있는 저자를 떠올리며 웃음을 짓기도 하고, 육 천 원의 묵주로 행복을 얻은 그가 들려주는 멜로디 <옥상달빛 _ 가장 쉬운 이야기> 참고로 지금 나는, 여름이 지나려는 문턱에서, 조진국 작가는 올해의 크리스마스 캐럴로 정해놓고 질릴 때까지 들었다던 김동률의 ‘크리스마스잖아요’를 듣고 있다. 참, 좋다. 어떤 말이 더 필요할까.

 

 

 

나는 지금도 사랑을 믿는다. 여전히 사랑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진짜 사랑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이젠 사랑이 변한다는 것도 안다. 아침에는 봄이었다가 저녁에는 겨울이 되고, 어제는 겨울이었다가 오늘은 봄이 되는 2월의 날씨처럼 사랑도 계절처럼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죽을 것 같던 실연의 고통도 어느덧 사라지듯이, 사랑하는 마음도 사라질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고 나서 조금은 편안해졌다. 지금에 와서 어쩌면 사랑은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 앞에 있는 그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미칠듯한 격정과 불안, 행복과 편안함도 받아들이고, 언젠가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사랑이 변하고 사라질 수 있다는 것도 받아들이는 거라고. 사랑이 변한다는 걸 알면서도 왜 사랑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잠깐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돈은 사람을 멋지게 만들어주고, 명예는 사람을 우아하게 만들어주지만,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건 사랑이라는 걸 믿으니까. 내가 사람 냄새나는 사람이길 바라듯 나 또한 그런 사람에게 여전히 끌리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p54-55)

 

 

 

몸서리치는 그리움의 한가운데서 냄새 하나로 버티고 있는 그녀를 보며 그제야 나는 향기와 냄새의 차이를 알 것 같았다. 같은 향기를 가진 사람은 여럿 있지만, 세상에 똑같은 냄새를 가진 사람은 없다. 냄새는 결코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것, 오로지 그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것, 먼지처럼 때처럼 아무것도 씻어내지 않고 덜어내지 않고 켜켜이 쌓여서 그 사람만의 지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문은 그 사람을 지극히 사랑하는 다른 한 사람의 가슴에 오랫동안 새겨지는 것이다. (p64)

 

 

 

향기는 마지막까지 남는다. 안에 담겨 있던 것들을 다 덜어내고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스라이 사라져도, 보이지 않는 향기만이 남아서 추억을 마지막까지 챙긴다. 그 향기마저 사라질 때, 진정 모든 것이 없어지는 것이다. (p120)

 

 

 

울고 있다고 모진 시간이 빨리 가지는 않는다. 세상에 대고 욕한다고 울분이 풀리는 것도 아니다. 젊음은 한바탕의 서커스다. 곡예를 하는 사람도 지켜보는 사람도 조마조마하지만, 통과한 다음에는 즐거운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서커스다. 그러니 차라리 웃자. 웃다가 다시 울게 되더라도 웃고 있는 동안에는 신나게 웃자.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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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더기 점프하다
권소정.권희돈 지음 / 작가와비평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스무 살하고도 서너 살을 더 먹었을 때였던 것 같다. “난 이제 어른이야”라고 말하는 철부지 딸의 말 한 마디를 들으며 얼마나 웃음이 나셨을까, 생각하곤 한다. 어른이라니. 올해로 스물 다섯 살이나 먹은 딸임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물가에 내 놓은 아이같다,며 나에 대한 근심·걱정이 끊이지 않는 부모님인데 말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가끔 직장에서 부모님을 생각할 때면 괜시리 눈물을 훔치게 되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의 동성 친구들은 아빠보다 엄마에게 더 의지를 많이 한다지만, 나는 그 반대로 아빠에게 더 많이 의지를 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요근래, 아빠와의 대화가 많이 줄어든 것도 사실이다. 내가 애교라도 많은 딸이라면, 살갑게 먼저 다가가기라도 할텐데, 장녀로 커온 나는 무뚝뚝하게 자라 애교는 저멀리 내팽개쳐버리고 같은 말이라도 정말 정(情)없게 툭툭 내뱉는 딸인 까닭이다. 그러던 중 아빠와 딸이 쓴 아날로그 감성에세이라는「구더기 점프하다」에 마음이 뺏겨버렸다.

 

 

 

오십 페이지를 채 넘기기도 전에 “아, 젠장. 낚였다.” 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아빠와 소통을 하기 위해, 다른 부녀지간의 소통하는 모습을 살짝 엿보고 싶었던 것 뿐인데, 소통은커녕, 서로 다른 주제로 글을 써내려가는 부녀의 글을 보며, 이러려면 뭣하러 한 권에 두 사람의 글을 써서 냈을까? 어떤 공통된 주제를 이야기하는 것도 아닌데 - 하는 부정적인 생각들만 가득 들어차올랐던 게 사실이다. 그들 부녀는 공동으로 책을 냄으로써 딸은 아버지의 어린 소년의 모습[유년시절]에서부터 현재는 은퇴를 걱정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고, 아버지는 자신과 공통점만을 가지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딸을 자신과 차이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게 됨으로써 딸을 다시 얻었다,고 이야기하지만, 정작 나에게는 등을 돌리고 각자의 이야기들을 들려주고자 하는 모습밖에는 보이지 않았달까. 그 까닭에 처음부터 끝까지 웃음기 한 점 없는 표정으로 읽어내려갔을 뿐. 책의 소개란에서, 그리고 타자들의 서평에서 보이던 말랑말랑한 감성에세이라는 단어를 나는, 어디에서 찾아야할지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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