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렛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여러 번 펼쳤다,가 덮기,를 반복했다. 올해 2월에 친구들과 부산여행을 갈 때에, 왁자지껄해서 읽지 못할 줄 알았던 - 하지만 깊은 새벽, 금새 곤한 잠에 빠져든 친구들 사이에서 펼쳤었고, 언젠가 그를 만나러가는 기차 안,에서도 펼쳤었다. 하지만 계속 이어나가질 못하고, 그대로 덮어둔 채로 방치해두었더랬다. 그리고 살랑살랑 그러나 비가 온 뒤에 약간은 쌀쌀한 가을 바람이 부는 구월 중순에 펼쳤었다. 그리고 책을 펼친지 일주일 만에, 그것도 출근 전에, 책을 덮었다. 몇 번의 짧은 만남이 더해져 총 세 번의 만남. 그럼에도 그녀에게 정이 가질 않아 이번에는 많이 아프지 않겠구나, 생각했다. 책을 다 읽은 직후에도 그녀를 품에 안을 수 없었으면서, 출근하는 버스에서 머릿 속에 그녀가 둥둥 떠다니며 기어이 온통 하루를 그녀 생각으로 보내게 했다. 그래서였다. 그날, 그녀의 손을 다시 한 번 마주잡아보겠다고 다짐한 것이. 구월의 끄트머리에서 집어들어 마지막 날인 오늘, 참 많은 숨이 내쉬어졌다. 후우ㅡ.

 

 

 

풀물이 아닌 남애의 푸른 반점이 그녀 눈에 스친다. 아름답구나, 그녀는 생각한다. 내겐 없는 게 네겐 있어. 어린 그녀는 서글퍼지려 한다. 남애 등에만 있는 푸른 반점이 둘만의 결속감을 깨뜨릴 것만 같다. () 미나리지가 내려다보이는 푸른 둑 위에 펼쳐놓았던 옷을 챙겨입는 두 여자아이의 마음은 서로 반대였다. 지금 산이라 지칭된 어린 그녀는 너를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할 거야, 였고 이제 그녀의 삶과 작별할 남애는 너하고의 묘지 위에서의 맹세는 이것으로 끝이야, 였다. 마을에서 기득권을 가진 이씨 성을 가진 아이들의 틈에서 서로 산이야, 남애야, 라고 부르며 결속감을 느끼는 오산이,와 서남애,는 미나리 군락지에서 그 결속감을 깨뜨린다. 그리고 마을을 떠나는 그녀, 산이. 아니, 오산이. 꽃을 돌볼 여종업원 구함’ :: 그녀는 미용사도 아니고, 오퍼레이터도 아니다. 그녀는 이제 화원 여종업원이다. 어느 날, 어떤 사진작가가 바이올렛을 찍으러와서 “바이올렛이 어떤 것이오? (…) 이게 바이올렛이란 말이오? (…) 아가씨도 이 꽃이 좋소? 아, 글쎄 초등학교 여선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꽃을 조사했는데 이 바이올렛이라지 뭐요? 보기나 했는지? 이름만 듣고 그러는 건 아닌지? 아니 이 꽃을 어떻게 표지로 하지? 꽃 생긴 건 생각도 않고 내 사진탓만 할 거 아냐!” 그녀는, 바이올렛을 보며 인상을 있는대로 쓰고 있는 그를 무심하게 바라볼 뿐이다. 그의 첫 대면이 그랬다. 그 남자가 무슨 옷을 입고 있는지 키는 어느 정도이며 눈의 윤곽은 어떠한지 무슨 신발을 신었으며 뒷덜미는 어떠한지…… 그녀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 남자가 철제 책상 위에 걸리적거리는 잡지를 던졌듯이 그녀 또한 그 남자가 화원을 나간 후 그 남자의 명함을 다른 명함들 속에 던져놓았을 뿐이다.

 

 

 

나, 할말이 있어. 이런 말 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솔직히 말하면 지난번 그놈의 바이올렛 때문에 당신을 처음 봤을 때 내 가슴이 얼마나 뛰었는지 알아? 당신 내 카메라 바라보느라 눈 내리깔고 있을 때, 이 세상에 저렇게 아름다운 눈썹도 있구나, 내내 생각했지. 내 마음 몰랐지요?” 그 한 마디에,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봐준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그대로 무너져버린다. 그렇게 그가, 아차 - 하는 순간, 마음 속에 들어 가부좌를 틀어 앉아 버린 것이다.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시작되버린 것. 물이 범람하듯 하룻밤 사이에 그녀의 의식 속으로 진입해버린 그 남자. 그 남자로 인해 허둥거리고 있는 그녀. 그녀를 어쩌면 좋을까. 너무나도 가엾은 그 여자를. 도시의 미술관 공터 포크레인 아가리에 들어앉아 있는 그녀,의 손을 나는 잡았다,가 기어이 그녀의 손에 만년필을 쥐어준다. 지난 여름 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로 끝난 문장에 가을로 - 혹은 가을이 - 혹은 가을에서 -로 시작될지도 모를, 혹은 어쩌면 완전히 다른 문장의 첫 시작이라 하더라도, 어쨌든 그것은 희망찬 문장이기를, 꼭 그럴 수 있기를, 꼭 그래야만 하는 것임을 바라면서 말이다.

 

 

 

신경숙은 아니, 신경숙의 글은 항상 그렇듯 마음을 너무 요란스럽게 만들어버린다. 온통 하루를 그 생각으로 서성거리게 만드는 것. 오산이 - 나, 그 여자에게 정이 없다, 그렇게 단언하며 책을 덮었는데, 이제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녀에게 정을 주고 있었나보다. 그것은 아마 그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오산이, 당신 존재만으로 충분히 아름다웠다고. 당신 존재의 아름다움은 어디서든 빛을 발했을거라고, 나는 그렇게 믿는다고. 그 남자가 노란 수선화를 찍는 동안 사진 속의 그 여자는 철제 책상 위에 놓여 있다. 이제 그 여자는 그토록 열망했던 그 남자오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 놓여 있다. 깨우지 마라 모두 잠들었네. 글라디올러스와 흰 백합. 내 슬픔을 꽃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내 눈물을 보면 죽어버릴 테니까. 그리고 나, 어쩌면 얼마 동안은 더 서성일 것 같다. 포크레인을 보고, 그 아가리에 그녀가 들어앉아 있진 않을까- 하여 고개를 있는 힘껏 곧추세우는, 그런 것,처럼.

 

 

 

 

 

간혹 내가 나쁜 인간이다, 라고 생각될 때가 있다. 속이 뒤틀려 있을 때다.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산만해지는 건 둘째 치고 나중에는 서성거리는 것조차 가능하지가 않아 가슴팍을 방바닥에 대고 엎드려 있는 나를 보게 된다. 속상함이 다스려지지 않으니 몸이 자근자근 아픈 것이다. 나쁜 인간이란 마음에 그리움이 생길 수 없게 하는 인간이다. 머리는 터질 듯하고 어깻죽지가 저려오며 다리에 힘이 쭉 빠져버린다. 하루를 엎드려 있기도 하고 때로는 일 주일을 엎드려 있기도 한다. 가슴속에서 펑 소리가 날 때까지. 더이상 잃을 것이 없다고 느껴질 때까지. 너무 멀리 나온 길을 이제 혼자 돌아가야 한다는 고독이 움틀 때까지. 내가 이런 인간이었구나, 내 속을 상하게 한 대상을 나 역시 가슴속에서 펑 소리가 날 때까지 상하게 하는 그런 인간이었구나, 를 깨닫는 건 덧없고 서글프다.

 

 

뭔가를 털어버리듯 천변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수애의 이름을 부르며 뛰기 시작하는 그녀. 기억이란 느닷없는 방문객 같은 것이다. 몸 속에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다가 어느 순간 돌연 현실을 노크해와 고함을 지르게 하는 것이다.

 

 

그날, 그녀는 끈질기게 자신이 그날 소매가 없는 자주색 실크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소매가 없는 자주색 실크 블라우스 아래 좁쌀만한 소름이 돋은 채로 얌전하게 놓여 있던 그녀의 팔은 추운가보군, 무심한 그의 한마디로, 무슴한 그의 쓰다듬음으로, 그랬다, 내내 욕망을 품어왔던 것이다. 추억이 되지 못한 욕망은 여름 내내 너무 파릇파릇하거나 격렬하게 불타올라 그녀를 방심 상태로 이끌어가곤 했다. 소통되지 않는 욕망으로 인해 슬픔에 사로잡힌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하지만 바로 눈앞에서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누구신지? 하고 물었던 그 남자로 하여 지금 그녀는 야릇해져 있다.

 

 

오산이. 이 여자에게 이 이름을 지어준 지가 꼭 일 년이 되었다. 오산이는 내 단편 「배드민턴 치는 여자」 의 분신이다. 이 여자를 바로 세상에다시 내보내려 했는데 다른 작품에 밀려 이제야 이루었다. 빚어지지 못한 채로 내 마음속에서 십여 년을 함께 산 셈이다. 오해 많은 세상에 이 여자를 내보내려 하니 미안해 죽겠다. 제대로 맛있는 것도 먹이지 못했고, 좋은 옷도 입히지 못했으며, 종내는 꿈과 욕망조차 바스러지게 했으니 이 여자의 어머니 되는 듯 마음이 쓰리다. 이 여자를 통과해가는 시선 속에서 이 여자가 새로 부활하기를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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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3-08-03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보려고 들어왔어요.
더러 제가 읽은 책도 있고..아직인 것들도 많고...이렇게 엿봐도 되는지..미안해지려고해요.
신경숙작가의 글체가 저는 좋거든요.
그 망설임.
머뭇거림...조심스러운 얼굴과 손길이 다가오듯 그러다..아, 이게 아니지~라며
멈춰선 장면같은 글들.이요..
음,,하늘보리님 글도..
여기에선 그 미련스런 애징(?!)이..뚝뚝 떨어지네요.
반가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