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나서 - 152 True Stories & Innocent lies 생각이 나서 1
황경신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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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받아들고 그 자리에서 맛배기로 조금 읽어볼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금세 그것은 ‘요건 봄이 오면 읽자’라는 다짐으로 바뀌어 책장 깊숙히 밀어두었다. 이미 에세이라면 최갑수 작가의 「잘 지내나요, 내 인생」을 접한 뒤여서 당분간은 괜찮겠지, 싶던 터였다. 하지만 이 책을 향해 손을 뻗었던 까닭은 추위, 그것이다. 그것이 사람을 차게 만든다. 추위를 단숨에 녹여줄 만한 무언가가 필요했고, 나는 그것으로 이 책을 선택했다. 그 뿐이다. 황경신 작가 - 처음 아니, 오랜만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 작가를 만난 것이 이 책이 처음이 아니다. 08 혹은 09년에 만났던 「슬프지만 안녕」이 있었다. 그 시절, 누구보다 시니컬한 표정과 말투 그리고 마음. 그렇게 메마를 대로 메마른 내 감성을 콕콕 찌르기엔 역부족이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니 이제서야 아, 그 책. 읽어본 적 있는 것 같은데_라며 찾아보니, 그렇다. 읽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 미처 와닿지 못한 것들이 허공을 유영하다 그대로 어느순간 자취를 감춰버려서, 그래서 내 기억 속에 제대로 자리메김하지 못했을거란 생각과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천차만별로 다름을 느끼며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다가 커피를 타와서 그녀의 펜 끝이 미끄러지듯 쏟아내는 문장들을 본다. 그리고, 소리내어 읽는다. 그제서야 마음이 꽉 찬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책의 내용에 공감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와는 또 다른 문제인 것이다.- 달콤한 커피향이 황경신의 문장들과 어우러지고 그것들의 향연이 코 끝을 간지럽힌다.

  

-077, 03 FEBRUARY 그러니까 대체로
 

그러니까 대체로
문제를 해결하는 건 시간이다.
다시 말해
시간은 대체로 여러가지 문제를 해결한다. 

시간이 흐르면 대체로
기다리던 순간이 오고
기다리던 사람이 오고
기다리던 무엇이 온다.

시간이 흐르면 대체로
상처는 흐려지고
마음은 아물고
아픈 기억은 지워진다.

시간이 흐르면 대체로
용서할 수 없었던 무엇을 용서하게도 되고

시간이 흐르면 대체로
참을 수 없었던 무엇을 참게도 되고

시간이 흐르면 대체로
가질 수 없는 것들을 포기하게도 되고
 
무엇보다
대체로
사랑을 다시 믿을 수도 있게 된다.

그러니까
지금도 어디선가 나를 위한 좋은 일 하나가
예쁜 상자 안에 담겨
배송일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을 위한 작은 선물은 이미 오래전에 만들어져
어느 가게 쇼윈도에 가만히 놓여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발견하기를.
내가 당신을 떠올리고 걸음을 멈추기를.

시간은 종종 나쁜 것들도 가져오지만
그러나 대체로
좋은 것들을 꽁꽁 숨겨둔 채
우리의 마음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딜레마를 겪는 순간은 그때 그때마다 다르겠지만, 늘 한결같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이유로, 비슷한 감정을 남기고, 또 비슷한 아픔을 겪는다. 그것은 대체로 비슷한 혹은 변화없는 똑같은 결과에 당황하여 내가 데자뷰를 겪고 있나,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기도 한다. 아, 반복이다. 나의 생은 그렇게 반복된다. 내가 그때마다 믿고 싶었던 것은 시간, 시간, 시간이다. 그것 뿐이다. 사실 그것을 잊고 있었다, 말하진 못하겠다. 애초에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녀와 나의 교감이랄 것도 없는 그 무엇인가를, 혹은 공감을 - 이것을 읽으며 처음 느꼈더랬다. 그리고 떠올렸다.  막연하게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내게 주어진 임무라도 되는 듯, 시간만 바라보던 나를. 그것은 문장과 오버랩이 되었다. 그녀의 글 위에 내 생이 얹힌 게다. 다른 부분들을 주욱 읽다가도 생각만 나면 도돌이표처럼 다시 돌아와 다시 읽고, 읽다가도 되돌려 읽는. 그러다가 그 무엇인가가, 내가 그것을 발견하기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정말 그럴까요? 라며 의구심을 가득 품고 묻고 있지만, 입가에 지어지는 나도 모르는 미소는 어찌 할 수가 없다.

 

 

 

작가는 ‘생각이 나서’ - 라는 이 말이 참 좋다고 했다. 그녀가 좋다니, 나도 한번 읊어본다. 생각이 나서_라고. 누군가에게 연락을 할 때, ‘왠일이야?‘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럴때면 난 무언가에 데이기라도 한듯 깜짝 놀라며 ‘그냥‘ - 이라는 말을 내어놓는다. 컨디션이 괜찮을 때엔, ‘그냥, 보고싶어서’ 라며 능청스레 말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총체적으로 ‘생각이 나서’를 아우르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책을 읽으면 으레 떠오르는 친구가 있는데, 지금 시간이면 일하느라 바쁠 그 친구에게 문자를 한통 보내야 겠다. ‘생각이 나서’라는 책을 읽고 ‘니가 생각이 나서’ 연락했다고. 그러면 그 친구는 그 책에 도대체 무슨 내용이 있느냐고 묻겠지. 쿡쿡. ㅡ 나는 작가의 문장이 섬세하다거나 사실 그런 것은 잘 모르겠다. 그녀의 문체에는 높낮이가 있는 것도 같고, 저마다의 억양이 있는 것도 같다. 하긴_ 소설도 아닐 뿐더러, 152라는 숫자가 붙어있으니 (장마다 이야기하는 것이 다른: 원래 감성 에세이라는 것이 그렇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작가님, 일상을 잘 지내다가 생각이 나면 - 다시 찾을게요.

 
 

 

-082. 12 FEBRUARY 괜찮을 리가 없잖아
 

괜찮냐고 묻지 마. 그럴 리가 없잖아.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물어보면 나는 괜찮다고밖에 대답할 수가 없잖아. 괜찮지 못하다는 말은 배운 적이 없으니. 힘내라고 하지 마. 이미 힘을 내고 있잖아. 그러고 있는데 또 그러라고 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울어버리고 싶은걸. 모든 게 잘될 거라고 말하지 마. 잘되지 않았으니 이렇게 된 거잖아. 잘되지 않았고 잘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당신은 내 곁을 지켜주겠다고만 말해줘. 울고 싶으면 울라고 해줘. 슬퍼하고 속상해하고 아파하라고 해줘. 내가 위로를 구할 때 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냥 함께 있어줘. 그것으로 나는 감사해. 그 힘으로 나는 걸을 거야. 어쩌면 무엇인가 다시 시작할 수도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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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심장부에서>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나라의 심장부에서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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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서 그 여운의 맛이 깊어 책을 손에서 뗄 수 없게 만드는 책이 있는가 하면 내가 이 한 권의 책을 읽었다고 치부해버려도 되는 것인지 의문이 남는 책이 있다. 그것은 책을 다 읽고 현기증이 일도록 아득해져버리는 까닭이다. 그런 책은 다시 읽어야 한다. 내 마음 속에서 밀어낸 책이 아니고서야 그 책은 다시 한번 읽을 가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전에 김은국의 「순교자」가 있었고, 김별아의 「미실」이 있었다. 그것들은 내게는 언젠가 다시 한번 읽고 싶은 책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이 책도 혹시나,하는 마음에 이 책을 덮고 다른 감성 에세이를 접한 뒤에야 숨을 고르고 다시 한번 첫 장을 펼쳤다. 두번 째로 마지막 장을 넘기며 또 한번 하지만,으로 시작할 수 밖에 없는 내가 야속하기만 하다. 처음이 어렵고 두번은 쉽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이 있고, 제외되는 것이 있다. 나에게 있어 이 책은 후자였다. 옮긴이의 말을 제외하면 꼴랑 265페이지라는 결코 두껍지 않은, 소설로서의 알맞은 두께를 자랑하는 이 책은 무척 질척거리는 존재,였다. 마치 마그다가 아비에게 질척거리는 존재였던 것처럼 -

 

 

 

처음부터 끝까지, (1 - 266이라는 번호가 주는 의문점은 끝내 풀리지 않았지만) 스포트라이트가 향하는 곳은 마그다, 그녀 뿐이었다. 그녀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생각이 매듭지어진 견해를 발설할 수 없었고, 그 근처에 근접할 수조차 없었다,고 생각되었다. 심지어 책을 읽고 있는 독자들마저도. 만약 그녀와 헨드릭 - 혹은 클라인 안나 - 혹은 아버지, 혹은 독자인 ‘나’ -. 개중 누구든간에 그녀와 조우하였더라면 아니, 그녀의 ‘나라’에 다른 이의 ‘나라’가 개입된다면 그것은 분명 ‘충돌’이라 규명지어질 것이었다. 그러니, 그것에 대해서는 더이상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저 그녀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밖에는 이 책에 대해 가타부타할 말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실재하는 이야기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 그것은 중요치 않다. 그것은 그녀의 아비였던 요하네스 나리가 도끼에 찍혀 살해당했는지, 총으로 살해당했는지와 연관되는 문제다. 하지만, 난 할 이야기가 남았다. 아직 미처 끝내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녀에 관한 이야기. 가엾은 그녀의 -.

 

 

 

그녀는 끊임없이 말을 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무언가를 일러주려고 하는 것을 느낀다. 아마 정말 자신의 독백, 그것뿐이었다면 내가 이 책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으리라는 우매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책을 되풀이하여 두번을 읽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상한 기분이 감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마음 한구석이 찌르르 울린다. 그것의 까닭은 알아낼 수 없었지만,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으로 ‘고독’ 혹은 ‘외로움’이라 이름 붙여져 있는 그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나는 혼자 살지도 않고 무리 속에 살지도 않고, 아이들 사이에 있는 것처럼 산다. 이상하고 베일에 가려진 듯한 말이 아니라 신호, 얼굴과 손의 일치, 어깨와 발의 자세, 음색과 어조의 미묘한 차이, 문법이 기록된 바 없는 틈과 부재와 같은 신호를 통해 나에게 의사가 전달된다. p18 이라는 문장에서 ‘외로움’이라는 실체가 없는 것이 그녀의 살갗에 들러붙어 있음을 간접적으로 은근스레 일러준다.

 

그러다가 나는 어둠 속에서 뒤척인다. 미칠 것 같다. 너무 비참하고 너무 외로우면 사람은 동물이 된다. 나는 모든 인간적인 관점을 잃어가고 있다. p103 이곳에서 그녀의 외로움이 가중되는 것을 느낀다. 그녀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어하지만, 누구와도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못한 그녀는 그것을 클라인 안나에게서 찾으려고 한다. 헨드릭에게 돈을 주겠다는 명목 하에 자전거로 이틀이나 가야하는 우체국에 보내고, 그녀에게 털어놓는다. “(…) 나의 혓바닥은 불길이야, 너도 알 거야. 하지만 그것이 모두 쓸데없이 안으로 향하고 있어. 너한테 내 말이 화난 것처럼 들리겠지만, 그건 내 안에 있는 불길이 타닥거리는 소리일 뿐이야. 너한테 정말로 화가 난 적은 없었어. 얘기하고 싶었을 뿐이야. 나는 다른 사람하고 얘기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거든. 늘 말이 나한테 왔고 나는 그것을 전했을 뿐이지. 안나, 나는 진심으로 서로 주고받는 말을 알았던 적이 없어. 내가 너한테 한 말들을 너는 되돌려줄 수 없잖아. 그건 가치 없는 말이야. 알아듣겠어? 가치가 없다고. (…)클라인 안나는 그렇게 그녀에게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듯 했다. 아니, 그래야만 했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그토록 가엾지만은 않았으리라.

 

 

 

책을 한 번 읽을 때와, 두 번 읽을 때 - 그 느낌은 확연히 달랐다,고 해야했다. 하지만 눈에 띌 정도로 확연하게 다른 점은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내면의 아픔이 가중되었을 뿐.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을 얻었다고 생각하며, 나는 생각한다. 한 사람이 쓸쓸함을 느끼는 정도가 환산된다면, 그녀의 쓸쓸함은 어디까지 치솟을 것인가. 나는 감히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주려고 했다. 나도 똑같다고. 나도 제대로 된 대화법을 몰라 사람들과 투닥투닥하며 지내고, 몰랐던 사람들보다도 못하게 지내는 이들이 많다고. 제대로 된 대화법을 알기 위해 책까지 나오는 시대라고.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아주려했다. 하지만, ‘대화한 적이 없다’와 ‘대화법을 모른다’의 간극에는 무수한 점들이 빼곡히 박혀있었다. 그런데 가혹하게도 그녀는 그 간극의 틈을 알아챌 수도 없게, 둘 모두 해당사항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던 거다. 후우 - 나는 여전히 그녀의 삶이 처연하다. 하지만 공감할 수가 없다. J.M.쿳시 - 그가 뱉어내는 단어의 조합으로 인한 문장의 완성은 아름답고, 청아하며, 유려하다고까지 여기게 된다. 하지만 그 문장들이 내게 와서 와닿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그의 잘못은 아니다. 그렇기에 나는 이 책에 별 한개 - 한개반 이상은 줄 수 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쓰기 위해 생각해야만 했던 것들이 많았고, 그 생각하는 시간에 비로소 책을 읽으면서는 홀라당 넘어갔던 것들이 눈에 익기 시작했다는 점, 그것이 이 책에 별 세개라는 나조차도 까무라칠 만한 평을 주게 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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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나요, 내 인생
최갑수 글.사진 / 나무수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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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살아내다가도 내 감정을 제어할 수 없을 때가 참 많음이 불쑥 불청객처럼 나타나 가까스로 견디고 있는 내 하루를 그것으로 인해 모조리 망쳐버릴 때가 있다. 누구에게나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노하우 한가지쯤은 가지고 있을텐데, 아직은 고단한 이 세상을 살아내기가 마냥 즐겁지만 않은 나에게 그것은 숙제와 같이 나를 힘겹게 만드는 거머리와도 같다. 그런 생각이 더 짙어지기 전에, 감성을 폭포수처럼 끌어낼 수 있는 힘을 가진 감성 에세이를 읽어주어야 한다,며 그것을 찾아헤맸다. 책장에 꽂혀진 책들을 보는데 읽지 않은 책들 중 눈에 띄는 것은 황경신 작가의 「생각이 나서」와 최갑수 작가의 「잘 지내나요, 내 인생」 - 이렇게 두 권을 두 손에 움켜쥐고는 어떤 책을 읽지? 하며 손에서 저울질을 해대다가 최갑수 작가의 책은 이 작품을 제외하고는 꼴랑 두 권밖에 읽지 않았는데, 그것으로 인해 나도 모르는 통로로 친밀감이 형성되어 흘러들어왔는가보다. 아니, 혹은 그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책의 제목처럼 내 인생에게 잘 지내느냐고, 묻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인생에게 나는 어떤 물음도 허락하지 않았다. 하물며 주인인 나에게조차도. 그것은 어떤 대답이 들려오고, 듣게 될 것인지를, 구태여 귀를 막지 않는다하여도 ‘……’ 라는 말줄임표를 이미 알고 있어 지레 겁먹고 눈을 꾹 감고 귀를 두 손으로 막아버리는 그런 행동을 취하고 있을 내가 상상되는 까닭일까. 그런 나에 비해 자신의 인생에 물음표를 던지는 저자를 보고 인생을 참, 괜찮게 살았나보다 - 생각한다. 그는 그 물음표 속에서 느낌표, 혹은 마침표 그것도 아니라면 쉼표라도 찾아내었는지, 아니면 아무 것도 얻지 못했는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개중 어떤 것이 이 책을 집게 만든 연유인지는 모른다. 혹은 둘 모두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의 문장이 내두르는 향취가 궁금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읽고 싶었다,라는 것이 거짓 하나 보태지 않고 읽게 된 까닭일 게다. 그렇게 나는 그 곳에서 셔터를 누른 그의 손가락이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하는 그 순간까지 저자가 누르는 정지된 세상 속에 초대된다.

 

 

 


병원을 예약해놓고 예약대기실에서 이 책을 읽을까, 고민하다가 책을 읽기엔 아이들의 소란스럽고 왁자지껄한 그곳에서 에이, 읽지 말자 - 라는 생각을 굳히고 그저 책을 뒤집어 본문 중 어떤 한 장을 모조리 발췌해놓은 것, 어떤 글자보다 크고 또렷한 ‘누구나 통과하는 시간, 서른과 마흔 사이’ 가 시야에 가득 찬다. 나에게 이 책의 시작은 그것이었다. 책은 휘리릭, 휘리릭 잘 넘겨진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좋은 것은 아닐 게다. 시야에 가득 담긴 활자와 문장들을 곱씹는 입과 그것을 담으려는 마음과 얼른 페이지를 넘기려고 안달난 손이 고장난 로봇처럼 따로 노는 것이 감성 에세이라는 장르의 책을 읽는 내 방법인데, 그것과는 별개로 휙휙 넘어가더라 그 말이다. 그의 인생이 고루 느껴지는 문장들에 그의 인생은 뒤로 제쳐놓고 내 인생을 포개어놓아 그와 나의 인생을 격리시켜야 했다. 그렇게 해도 공감할 수 있는 것 - 그것이 바로 감성 에세이가 아니던가. 물론, 낯설지 않게 그와 나의 감정이 바특할 정도로 가까이 치달음을 느낄 수 있는 구절은 분명 있었다. 하지만 다음 페이지를 넘김과 동시에 거리감이 느껴지게 할 만큼, 아득함의 깊이를 맛보게 하여 감성으로 차올랐던 마음들이 민망해지게 만들기에 충분한 문장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은 실로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그것은 그와 나의 다른 나이,라는 진부한 까닭때문에 야기된 것이 아니라, 이 책에는 나와 내 인생이 맞닥뜨리게 할 무언가가 있는 것이 아닌 저자의 이야기로 가득참을 느낄 수 있는 것이 그 까닭인 것이다. 나는 내 감성을 똑똑, 두드릴 수 있는 그런 책을 읽고 싶었는데, 그래야할 시기에 이 책이 나를 다독여주지 못했다는 것은 결코 이 책의 잘못이 아니다.


 

 


 

 

시간은, 추억은, 세월은 분명 연속적인 것이 아닌 것 같아. 우리는 시간의, 세월의 부분을 건너뛰며 살고 있지. 우리는 선 위를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점 위에 우두커니 서 있어. 그리고 어느 순간 다른 점으로 훌쩍 건너가지. 마치 징검다리를 건너듯. 그랬던 것 같아. 되돌아보니, 모든 것이 그랬어. p156 나는 이 책을 읽고도, 아직도 내 인생에게 잘 지내느냐는 내 마음이 고단함을 느낄 그 질문을 던질 자신이 아직까지도 없다. 그러고보니 나는 나를 위한 시간이 많지 않았음을 느낀다. 시간이 없어서도 아니요, 내 자신에게 관심이 없어서는 더욱이 아니다. 나는 내 자신보다 주위 사람들의 발걸음에 발맞추어 걷고 있었던 게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나의 내면을 들여다볼 시간이 없었다고 - 미안하다고. 책의 사진들을 감상하고, 저자의 인생 수첩과 다를 바 없는 이 책을 읽고 책의 많은 구절을 깊게 음미하며 곱씹을 수 없었지만, 그와 별개로 깨달은 바를, 가만히 앉아 펜을 붙잡고는 끄적거린다. 전년도보다 올해는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가져야겠다고, 나의 내면에서 하는 속삭임에 귀를 바짝 갖다대고 듣겠다고. 서평을 타이핑하는 동안 싸늘하게 식어버린 커피는 식도를 통해 이미 뜨겁게 달구어진 내 몸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데 그것은 내 안에서 솟구쳐 오르는 그 어떤 것을 데일 듯 뜨겁게 만든다. 언젠가는, 지금 물어보지 못하는 그것을 물어볼 날이 오겠지, 잘 지내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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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 - 제2회 중앙 장편문학상 수상작
오수완 지음 / 뿔(웅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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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소개를 채 접하기도 전에, 읽고 싶은 책 리스트에 주저없이 넣을 수밖에 없었던 것에는 책의 제목이 대부분을 차지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 - 나는 한 권의 책에서 다른 책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귀중하게 생각하고 혹여나 그것이 바스라질까, 두 손으로 보듬는 것이-, 그것이 책에 대한 애정이라고, 그렇게 미미하게나마 전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이 구지 어떤 책인지 소개를 보지 않고도, 제목만 보고서도, 끌림이 강했던 까닭이 그곳에 있는 것이다. 자칫 어린아이같은 발상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내가 그러한다는데 - 누가 시시비비를 논하겠는가. 아, 그런데 - 이 책, 생각보다 만만치않다. 언어라는 과목을 특출나게 잘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해력이 딸린 것은 아니라고 자신만만하며 살아왔는데, 이 책을 읽는 순간부터 나는 나의 이해력을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나는 책 시작을 제대로 앞세우지 못하는 작가의 역량덕에 -그것이 의도한 것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나라는 독자에게 호소한 것엔 실패다- 무려 50페이지나 날려버린 셈이다. 그것을 나는 이해하겠다며 읽고 또 읽고, 적어도 세 번은 읽은 것도 같은데, 그것도 잠시뿐, 읽다 보면 알겠지, 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읽어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무척이나 황량한 기분마저 든다.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책을 다 읽고 그 부분에 대해서 읽고 또 읽어 이해를 할 때까지 -자칫 무식하다 생각할 정도로- 읽어왔었는데, 이것은 왠지 구태여 그렇게 할 까닭이 없다는 판단 아래 그냥 지나쳤다. 지금도 여전히 이 책의 50페이지에 대해서는 오리무중이다. 그 50페이지에 대해 장황하다,라는 단어밖에는 딱히 느꼈다고 말할 것이 없는 것이 책의 내용으로 쉽사리 들어가지 못하고 빙빙 돌리고 있는 부분에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아야했고, 손가락 사이에 낀 책장들이 자신들을 넘겨주지 않는다며 펄럭거리기 시작했고, 결국은 그 책장을 낀 손가락을 빼버렸다. 아마 어떠한 압력이 아니었다면, 이 책은 이미 내 손을 떠났을 것이라는 것. 어쩌겠는가. 입 안에서 오물거리던 사탕이 내가 싫어하는 체리맛 사탕이었음을 깨닫고 퉤,하며 뱉어내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 반디라는 별명으로 ‘책 사냥꾼’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던 도형, 그는 어느 연유에서인지 그것을 그만두고 헌책방을 운영한다. -헌책방의 퀘퀘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러나 그것이 아이러니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 도리어 정겹고, 아련하다.- 그러던 그에게 언뜻 제과점 이름이라고 착각할 만한 미도당이라는 곳의 윤선생이 찾아와 ‘베니의 모험’이라는 책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게 되고, 그는 어떠한 연유 덕에 그 모험을 감행하게 된다. - 내가 다른 이들을 위해 일러줄 수 있는 줄거리는 여기까지다. 이것이 혹자에겐 배려라고 할 만한 행동일 수도 있으나, 이 책의 내용에 대한 언급은 가급적 피하고 싶은 것이 내 주관적인 생각이다. 판타지하다는 소설이, 상상력이 기발하다는 소설이, 내게는 그리 와닿지 않은 것이 그 까닭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줄거리를 써놓는 까닭은 훗날 내가 이 책에 대해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할까봐. 책장에 꽂혀있는 이 책을 보고 이 책이 어떤 내용이었더라 - 하는 것을 막기 위해.

 

 

 

본래, 소설이란 것은 작가와 독자의 교감 형성이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이 책의 내용을 깊숙히 이해하지 못했을 뿐더러, 이해한다손 치더라도 좋은 결과를 낳진 못했을 게다. 까닭은 반디가 9권의 책을 찾아가면서 독자인 나는 도대체 무얼 했는가, 이 말이다. 나는 그저 반디의 행동반경을 보며 그가 그 다음번에 할 행동을 모색하는 것, 그것뿐이었다. 적어도 추리소설을 염두에 두었더라면 작가 혼자 풀어내는 것이 아닌, 적어도 독자에게도 생각할 여지를 남겨뒀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슬몃 생각해본다. 어떤 아무런 단서없이 어쩔 수 없이 반디의 뒤만 졸졸 따라가는 ‘나같은’ 독자의 입장에서는 솔직히 재미없고, 지루하며, 건조하다. 내가 왜 그의 뒤만을 졸졸 쫓아야만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 아니 - 반디는 따라오라고 한 적도 없는데 내가 따라가는 것, 딱 그 기분이 들었던 까닭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소설이라는 분야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강점인 ‘재미’라는 부분마저 결여된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책을 찾는 것뿐이라는걸. 이 책이 결코 추리에만 집중시키지 않았다는 -혹은, 못했다는- 것은 충분히 알겠으나, 이 책을 읽고 뇌엽에 박히는 것이 얼마 없다는 것이 굉장히 안타깝다. 게다가 그가 다른 책에서 -혹은, 실재하지 않는 책- 발췌해놓은 몇 가지의 문장만 보고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 나를 보니, 나는 지금 어떤 책을 읽고 있는 것인가 - 하는 의구심마저 들더라, 이것이다. 좋게 말해서 책 사냥꾼이 책을 찾아 헤매는 것에 그래, 기발한 발상이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미안하게도 그게 나같은 독자에게는 통하지 않음이 이토록 애통할 수가 없다. 어떤 책에 대해서 기대를 가질 수 있는 것도 독자요, 실망을 할 수 있는 것 또한 오롯한 독자 몫이니, 더이상 왈가왈부하지는 않겠으나 그런 기대마저 없었다면 - 그래, 차라리 그랬다면, 이 책을 읽는데에 있어서 이런 배신감같은 이상한 감정 또한 일지 않았을 게다.

  

 

 

책은 사람이 있는 곳에, 그리고 사람이 지나간 곳에 있다. 그래서 가끔 난, 한 권의 책을 찾는 것은 곧 그 책이 지나온 궤적을 더듬는 것이고 그것은 곧 한 사람의 삶의 길을 되짚어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물론 또한 책은 우연과 망각, 부주의로 인해 원래 있어야 할 곳을 떠나 세상으로 흩어지며 퍼져가기도 한다. p126 그러나 공교롭게도 난 이 문장을 보고 그래도, 내가 이 책에 애정을 표할 수 있는 것이 생겼다는 점에 대해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적어도 ‘책’이라는 본질적인 가치는 훼손되지 않았다는 점. 그 뿐이다. 그리고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본질적인 것은 ‘책’이었다는 점이 나를 안도케한다. 어쩌면 그것조차 부재했더라면 나는 이 책에 대한 손톱의 때 만큼의 애정조차도 표하지 않았을 뿐더러, 책장에 비어있는 곳이 있음에도 그곳에도 두기 싫어 책장이 아닌 바닥에 깔아놓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책에게도 삶이 있다. 작가가 아버지라면 장정가는 어머니다. 인쇄소는 자궁이다. 누군가 표지를 여는 순간 책은 책으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어떤 책은 끝까지 다 읽히지 못하고 자신의 비밀을 간직한 채 서가에 잠들어 있다. 어떤 책은 책장마다 무수한 삶의 흔적을 지닌다. 어떤 책은 복되게도 여러 주인을 섬긴다. 물과 불과 칼과 햇빛과 습기와 벌레와 짐승이 책을 병들게 하거나 해친다. 책의 가장 큰 적은 사람이다. 무지한 한 사람은 한 책의 책에 상처를 내고 무지한 100명의 사람은 다락방에 책을 넣고 잊어버리고 무지한 1만 명의 사람은 도서관을 불태운다. 책은 죽을 때 소리를 낸다. p212 잠시 외출을 할 때, 구지 그것을 읽지 않더라 하더라도 옆에서 나와 동행해야 마음이 편한 것. 그러다가 책을 떨어뜨릴 때도 있었고, 나와 맞지 않는 책이라고 하여 집어던질 때도 간혹 있었다. 그것은 책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분노를 그곳에 표출한 것이다. 그럴 때 책은 어떤 소리를 냈을까. 내가 상상하는 으악 - 같은 소리를 냈을까. 지금 나의 책장에서 읽히지 못해 뒤집힌 책들은 어떤 소리를 내고 있을지 - 먼지로 인해 숨이 턱턱 막혀 제대로 된 소리도 못내고 시름시름 앓고 있지는 않을지, - 또한, 나에게 책이라는 것이, 어떤 존재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한번 더 잘근잘근 씹게 한다. 전에는 책이 삶의 지침이었다면, 지금은 동기부여,라는 것. 그렇게 이 책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책’에 대한 깊은 저자의 사색과, 그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책들에 대한 나의 애정을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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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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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올해(2011)에 들어서 첫번째로 읽은 책이 예상 외로 성과가 좋다는 것이 이렇게도 뿌듯할 수가 없다. 괜시리 입가에 미소가 실실 배어나오기까지 하니, 무려 일주일동안 붙잡고 있던 이 책이 성공이라 하여도 무리는 아니다. 작년엔 책을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듯 집어삼키는 것처럼 읽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읽은 것 같기에 올해에는 책을 몇 권 읽지 않아도 좋으니 정독을 하자,라는 남모를 다짐으로 이 책을 시작으로 입을 앙 다물고 책을 손에 들었다. 하지만 전에 읽었던 저자의 「개」와 「공무도하」 모두 집중을 못한 것인지, 이해를 못한 것인지, 그의 딱딱한 문체에 적응을 못한 것인지 책의 줄거리마저도 아스라할 정도인 까닭에 읽기 전부터 지레 겁을 집어먹고 쉽사리 읽어내리지 못한 것은 어쩌면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저자의 책을 읽기 전 맞닥뜨려야 할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책이 손에 들어온 것은 그의 덕이다. 김훈 작가의 이야기가 나온 곳, 그곳은 실소를 머금을지도 모르겠지만 순대국밥집에서였다. 그는 그때 김훈 작가의 이 책을 읽고 있었고, 빌려줄까? 묻는 그에게 아니,라는 말을 내던졌다. 그는 애증이라면 애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김훈 작가의 글이 무척이나 사실적-이라는 까닭때문에 좋다고 했었다. 말을 빙빙 돌리지 않고 ‘-다, -였다, -했다’라고 딱딱 끊어버리는 그 정없는 문체가 좋다니, 나로서는 좋아할래야 도저히 좋아할 수 없는 문체들인데…라고 생각하던 찰나, 그런데 왜 우리가 순대국밥집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며, 그도, 나도, 피식 웃었더랬다. 하지만 이번엔 그는 틀렸다. 그리고 그에게 얘기한다. “이 책은 사실적이지 않아.”

 

 

 

‘나(조연주)’는 오년 여의 직장생활에서 총 두번을 사직한 후, 지리멸렬한 상태에서 한 번의 우회전은 민통선 너머 수목원에서 나무와 꽃과 풀의 모습을 세밀화하는 작업을 하는 일을 시작하게 만들었다. 사진으로 할 수 있는 것을 구태여 손수 작업하는 것이 사진은 꽃과 나무의 생명의 표정과 질감을 표현하기에 미흡한데, 그것이 사진의 사실성 때문이란다. 그래서 생명의 사실을 그리기 위해서는살아 있는 인간의 시선과 인간의 몸을 통과해나온 표현이 필요하다는 것. 그것이 ‘나’가 그곳에서 일하게 된 까닭이다. 그곳의 안실장의 얼굴과 머리통과 어깨의 표정, 하물며 가마 둘레에 머리카락의 회오리까지도 빼닮은 그의 아들 신우의 모습에서 아버지와 자신을 투영시킨다. 아이를 부채질해주는 안요한 실장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문득 아버지를 생각했다. 내가 아버지 생각을 끄집어낸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갑자기 내 마음속으로 쳐들어왔다. 마음의 일은 난데없다. 마음의 일은 정처없어서, 마음 안에서는 이 마음이 저 마음을 찌른다. p198 아버지라는 존재는 자칫 그녀에게 있어서 부재의 존재이지만, 그것을 부재가 아니게끔 환기시켜주는 이는 어머니다. 죽기 두달 전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생식기를 내놓고 발작을 일으켜 ‘좆내논’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가엾은 수말은, 어머니에게 결핍되었지만, 결코 결핍되지 않은 아버지를 연결시킬 수 있는 하나의 도구인 셈이다. 어머니의 머릿 속에서 달그락거리며 등장하는 ‘좆내논’은 계속해서 아버지를 상기시키게 하고 끝내 어머니는 그것을 힘겨워하여 딸에게 전화를 걸어 “자니?” 라고 묻고는 그 대답은 결여되도 상관없다는 듯 말을 이어나간다. 그러면서 “네 아버지가 나오면 갈라서야겠다.”는 말까지 유선을 통해 전하게 되는 것이다. 끝내 어머니와 아버지는 관계를 맺지 못하는 듯 보인다. 둘을 이어줄 끈은 없어보이기 때문,이라고 당당히 말하지만, 아버지의 완벽한 부재(죽음)으로 깊은 울음을 토해내는 어머니를 보고서 관계를 맺지 않았다,라는 말은 그들에게 실례가 됨을, 모르지 않는다. 어머니, 아버지를 제외한 그들도 서로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그것은 한걸음 내딛고 한걸음 다시 물러서는 꼴이다. 관계를 맺기는 하지만 찰나의 순간에 그 한계라는 갸날프고 얄팍한 무언가 인간의 살이라는 가죽 사이로 관통하는 것이 그 까닭이리라.

 

 

 

책을 덮음과 동시에 우회전을 하여 민통성 안으로 들어오는 ‘나’와 좌회전을 하여 서울로 나가는 ‘나’의 모습이 오버랩되며 멍해진다. 이야기의 끄트머리에 반전이 가미된 것도 아니요, 여운이 남는 결말 또한 아님을 나는 그의 작품을 이 작품을 세번째로 읽으며 여실히 깨달았다. 그가 이끌어내는 결말은, 도리어 싱거워서 소금이라도 넣어야하는 것은 아닐까 심각하게 고려해보아야 할 만한 결말,이라고 늘 그렇듯이 손 끝에서 활자들의 뭉뚱그려짐으로 채 아롱지지 못한 한 독자의 넋두리인 게다. 그런데 왜? 그것은 허무함과는 또 다르게도 묵직하게 깔린 공허감에 차디차게 식어버린 커피 한 모금을 입 안에 한가득 담고 온갖 인상을 써보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인 셈이다. 몇일 전 「밑줄 긋는 여자」를 읽고 나도 밑줄을 긋는 데 동조를 해야겠다, 마음 먹은 터였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호락호락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난 ‘나’가 수목원에 들어간 그 순간부터 노란 색연필을 들고 밑줄을 긋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만약 그의 책이 아니고, 내가 소장하는 나의 책이었다면 그었을까 - 생각해보지만, 그럼에도 그렇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없는 것은 어느 곳에 밑줄을 그어야할지 모르는 까닭이리라. 풍경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생각해본 적 없는 나에게는 그가 젊은 여성의 탈을 쓰고 풍경을 묘사하는 것이 찬연하다 생각할 정도였으니, 겨울, 봄, 여름, 가을까지 이르기에 밑줄을 죄다 그어버려 책이 너덜너덜해졌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면 어떠리. 나의 마음이, 또 나의 두 눈이 그곳에 시선을 꽂고서 뗄 줄을 모르는 것을.

 

 

 

정작 책 속의 ‘나’는 숲에서 나왔는데, 그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은 나였다. 풍경에 대한 저자의 곡진함이 느껴짐에 괜히 숙연해져 책 속의 ‘나’와 함께 동행을 하지 못하고 그 기분을 만끽하고자 조금 더, 조금만 더 - 를 읊조리며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 울창한 숲에 서서 나는 끝내 이뤄지지 않은 ‘나’와 김중위를 생각한다. 실은 처음에 책을 훑으며 화자가 젊은 여자임을 깨닫고는 아, 어쩌면 사랑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겠다 - 라는 것이 빗나가는 순간이었다. 저자는 마지막에 실린 작가의 말에 자신은 ‘사랑’이니, ‘희망’이니 하는 말을 자신의 책 속에 넣지 않았다 이야기한다. 무엇이 문제일까. 그가 그려내는 사랑이라는 것이 김중위의 고작 제 명함 잘 넣으셨지요?”가 아닌 다른 어떤 형태로 다가올 수 있을까 지레짐작하며 사뭇 궁금해지려는데 그때 내 뇌엽에 사는 것 자체가 ‘사랑’이고, ‘희망’ 아니겠냐 - 라는 것이 어디선가 아득하게 들려오는 쟁쟁쟁 - 거리는 조그맣고도 커다란 울림이 답한다. 그래, 그렇지. 바로 그거지. 그 소리는 무척이나 감미롭게 울려 깊은 밤, 숲 속의 향연에 나를 초대할게다. 나는 그곳에서 나무와 꽃과 풀이 건네는 문장으로 다리를 만들어 그것들에게 다가가고, 그것들이 바스라지기 전에 돌아올테지. 좋다, 그저 한 권의 책을 읽고 내 코 끝 구석구석에 머무는 숲의 향기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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