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나서 - 152 True Stories & Innocent lies 생각이 나서 1
황경신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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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받아들고 그 자리에서 맛배기로 조금 읽어볼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금세 그것은 ‘요건 봄이 오면 읽자’라는 다짐으로 바뀌어 책장 깊숙히 밀어두었다. 이미 에세이라면 최갑수 작가의 「잘 지내나요, 내 인생」을 접한 뒤여서 당분간은 괜찮겠지, 싶던 터였다. 하지만 이 책을 향해 손을 뻗었던 까닭은 추위, 그것이다. 그것이 사람을 차게 만든다. 추위를 단숨에 녹여줄 만한 무언가가 필요했고, 나는 그것으로 이 책을 선택했다. 그 뿐이다. 황경신 작가 - 처음 아니, 오랜만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 작가를 만난 것이 이 책이 처음이 아니다. 08 혹은 09년에 만났던 「슬프지만 안녕」이 있었다. 그 시절, 누구보다 시니컬한 표정과 말투 그리고 마음. 그렇게 메마를 대로 메마른 내 감성을 콕콕 찌르기엔 역부족이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니 이제서야 아, 그 책. 읽어본 적 있는 것 같은데_라며 찾아보니, 그렇다. 읽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 미처 와닿지 못한 것들이 허공을 유영하다 그대로 어느순간 자취를 감춰버려서, 그래서 내 기억 속에 제대로 자리메김하지 못했을거란 생각과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천차만별로 다름을 느끼며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다가 커피를 타와서 그녀의 펜 끝이 미끄러지듯 쏟아내는 문장들을 본다. 그리고, 소리내어 읽는다. 그제서야 마음이 꽉 찬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책의 내용에 공감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와는 또 다른 문제인 것이다.- 달콤한 커피향이 황경신의 문장들과 어우러지고 그것들의 향연이 코 끝을 간지럽힌다.

  

-077, 03 FEBRUARY 그러니까 대체로
 

그러니까 대체로
문제를 해결하는 건 시간이다.
다시 말해
시간은 대체로 여러가지 문제를 해결한다. 

시간이 흐르면 대체로
기다리던 순간이 오고
기다리던 사람이 오고
기다리던 무엇이 온다.

시간이 흐르면 대체로
상처는 흐려지고
마음은 아물고
아픈 기억은 지워진다.

시간이 흐르면 대체로
용서할 수 없었던 무엇을 용서하게도 되고

시간이 흐르면 대체로
참을 수 없었던 무엇을 참게도 되고

시간이 흐르면 대체로
가질 수 없는 것들을 포기하게도 되고
 
무엇보다
대체로
사랑을 다시 믿을 수도 있게 된다.

그러니까
지금도 어디선가 나를 위한 좋은 일 하나가
예쁜 상자 안에 담겨
배송일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을 위한 작은 선물은 이미 오래전에 만들어져
어느 가게 쇼윈도에 가만히 놓여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발견하기를.
내가 당신을 떠올리고 걸음을 멈추기를.

시간은 종종 나쁜 것들도 가져오지만
그러나 대체로
좋은 것들을 꽁꽁 숨겨둔 채
우리의 마음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딜레마를 겪는 순간은 그때 그때마다 다르겠지만, 늘 한결같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이유로, 비슷한 감정을 남기고, 또 비슷한 아픔을 겪는다. 그것은 대체로 비슷한 혹은 변화없는 똑같은 결과에 당황하여 내가 데자뷰를 겪고 있나,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기도 한다. 아, 반복이다. 나의 생은 그렇게 반복된다. 내가 그때마다 믿고 싶었던 것은 시간, 시간, 시간이다. 그것 뿐이다. 사실 그것을 잊고 있었다, 말하진 못하겠다. 애초에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녀와 나의 교감이랄 것도 없는 그 무엇인가를, 혹은 공감을 - 이것을 읽으며 처음 느꼈더랬다. 그리고 떠올렸다.  막연하게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내게 주어진 임무라도 되는 듯, 시간만 바라보던 나를. 그것은 문장과 오버랩이 되었다. 그녀의 글 위에 내 생이 얹힌 게다. 다른 부분들을 주욱 읽다가도 생각만 나면 도돌이표처럼 다시 돌아와 다시 읽고, 읽다가도 되돌려 읽는. 그러다가 그 무엇인가가, 내가 그것을 발견하기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정말 그럴까요? 라며 의구심을 가득 품고 묻고 있지만, 입가에 지어지는 나도 모르는 미소는 어찌 할 수가 없다.

 

 

 

작가는 ‘생각이 나서’ - 라는 이 말이 참 좋다고 했다. 그녀가 좋다니, 나도 한번 읊어본다. 생각이 나서_라고. 누군가에게 연락을 할 때, ‘왠일이야?‘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럴때면 난 무언가에 데이기라도 한듯 깜짝 놀라며 ‘그냥‘ - 이라는 말을 내어놓는다. 컨디션이 괜찮을 때엔, ‘그냥, 보고싶어서’ 라며 능청스레 말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총체적으로 ‘생각이 나서’를 아우르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책을 읽으면 으레 떠오르는 친구가 있는데, 지금 시간이면 일하느라 바쁠 그 친구에게 문자를 한통 보내야 겠다. ‘생각이 나서’라는 책을 읽고 ‘니가 생각이 나서’ 연락했다고. 그러면 그 친구는 그 책에 도대체 무슨 내용이 있느냐고 묻겠지. 쿡쿡. ㅡ 나는 작가의 문장이 섬세하다거나 사실 그런 것은 잘 모르겠다. 그녀의 문체에는 높낮이가 있는 것도 같고, 저마다의 억양이 있는 것도 같다. 하긴_ 소설도 아닐 뿐더러, 152라는 숫자가 붙어있으니 (장마다 이야기하는 것이 다른: 원래 감성 에세이라는 것이 그렇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작가님, 일상을 잘 지내다가 생각이 나면 - 다시 찾을게요.

 
 

 

-082. 12 FEBRUARY 괜찮을 리가 없잖아
 

괜찮냐고 묻지 마. 그럴 리가 없잖아.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물어보면 나는 괜찮다고밖에 대답할 수가 없잖아. 괜찮지 못하다는 말은 배운 적이 없으니. 힘내라고 하지 마. 이미 힘을 내고 있잖아. 그러고 있는데 또 그러라고 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울어버리고 싶은걸. 모든 게 잘될 거라고 말하지 마. 잘되지 않았으니 이렇게 된 거잖아. 잘되지 않았고 잘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당신은 내 곁을 지켜주겠다고만 말해줘. 울고 싶으면 울라고 해줘. 슬퍼하고 속상해하고 아파하라고 해줘. 내가 위로를 구할 때 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냥 함께 있어줘. 그것으로 나는 감사해. 그 힘으로 나는 걸을 거야. 어쩌면 무엇인가 다시 시작할 수도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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