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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문장
김애현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1월
평점 :
봄이다. 봄, 봄, 봄. 차가운 바람에 몸이 오들오들 오한이 이는 것이 완연한 봄이라고 명백하게 말할 순 없지만, 지상으로 내리는 햇빛이 이토록 찬란하니, 영락없는 봄이 찾아오려는가 보다. 햇빛이 내리쬐어야 비로소 마음에 따뜻한 온기가 머금어지는 나로서는 그런 날이 반갑기만 하다. 햇빛이 가장 찬란하다 생각되는 시간인 오후 1시에서 3시 사이. 운 좋게 그 날은 토요일이었고, 오전근무에 퇴근하는 길, 공원 벤치에 앉아 읽던 책을 펼쳐든다. 「오후의 문장」 -. 참 예쁘기도 하지. 그 날 오후의 문장은 〈백야〉 , 〈래퍼K〉 , 〈빠삐루파, 빠삐루파〉 , 〈오후의 문장〉 , 〈K블로그〉 , 〈푸른 수조〉 , 〈화이트 아웃〉 , 〈실러캔스〉 , 〈카리스마스탭〉 이라는 각기 다른 제목이 햇빛에 반사되어서 책 속의 활자들이 반짝거리며 내 동공 속에서 너울너울 춤추며 반짝인다.
언제부터 내 몸에서 빛이 나기 시작한거죠? / 몰라. 그냥 해가 져도 어둡지 않았어. 그래서 불을 켜지 않은 거다. 그게 다야. ‘광채’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의 몸에서는 빛이 나고 그런 그가 이목을 끌며 팬카페가 형성된다. 정모라는 이름으로 모인 자리에 (친절한) 금자(씨)라는 여인 한명만이 나왔는데, 그 여인은 외출할 때마다 커다란 선글라스를 껴야하는 감수를 치러야 할 뿐만 아니라, 영화의 눈부신 햇빛마저도 그녀에겐 No, thank you.인 게다. 그런 그녀가 그에게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을 건넨다. 당신의 빛은 은은해요. 두 눈을 찡그리지 않아도 되겠어요. -
다리도 없고, 아내도 없이 친척들에게 고기 대접을 하며 푼돈을 얻어내는 아버지를 가진 키가 작은 사내. 그는 방송국에서 NG! 카메라에 나뭇잎이 잡혀, 누가 좀 떼어 내. / NG! 책상 좀 치워봐, 그림이 안 좋잖아. 라는 소리가 들리는 즉시 총알같이 스튜디오를 향해 뛰어나가 그 잡다한 일들을 해결하는 일을 한다. 그러던 중, 빠삐루파의 역을 맡고 있어서 일명 ‘빠삐’라고 불리는 사내가 어느 날부터인가 나오지 않아 그가 그 역을 맡게 된다. 신나는 빠삐루파, 행복한 빠삐루파…… 나를 짓누르는 빠삐루파. 내 키는 자라지 않을 것이다. -
이사를 한 집에 한 여자가 찾아와서 미르, 헤르 어딨어? 라는 문장이 쓰인 신발장의 낙서가 그녀의 잃어버린 아이의 마지막 흔적이라는 이야길하며, 가끔, 절대 자주는 아니고요, 아주 가끔 와서 저걸 보면 안 될까요? 마음이, 그러니까 제 마음이 아주 너덜거릴 때만……. 이라며 부탁한 뒤에 찾아오게 된다. 마음이 너덜거리는 간격은 일정치 않다. 일주일, 이틀, 하루……. 그와 동시에 책 속의 ‘나’의 일상도 함께 흘러간다. 현재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그녀. 그리고 모래그림… 해가 지고 있다. 추장 딸이 그렇게 말했을 때 난 좀 의아했어요. 왜냐면 그 모래그림에는 해처럼 보이는 것도 있고 산처럼 보이는 것도 있고 바다처럼 보이는 것도 있길래 그날 아침, 바닷가풍경을 그렸겠거니 생각하던 참이었거든. 하지만 그건 그림이기 이전에 하나의 문장이었던 거요. -
이 말고도 여섯 편의 이야기에는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에 씨앗을 심어준 ‘래퍼K’ , 동성동본을 가진 부모를 가진 딸, 드라마 제작을 위해 희생된 물고기, 201호에 이사온 가정을 부러워하는 이혼남, 안락하게 살기 위해 간 실버타운에서 온갖 일을 맡아서 하는 노인, 그런 노인이 마땅찮은 실버타운 직원들, 완판이라는 실적을 올리기 위해 날씬하고 볼륨감있는 몸매를 가꾸지만, 도리어 자신의 건강은 챙기지 못하는 ‘바비’ -
‘삭막한 현실에서 따뜻한 이야기를 쓰고자 하는 이가 있다. 그가 쓰는 이야기엔 우리의 이상의 혹은 이하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응원하는 이들이 있지만, 살아내는 것조차 버거워한다. 하지만 그들은 각자의 소리를 낸다. 그것은 조화를 이루고 결국 그것이 우리의 마음에 불어닥칠 것이다. 그것이 지금도 무표정한 얼굴로 타이핑을 써내는 내 얼굴에 웃음을 짓게 만들어줄지, 누가 알랴.’ 라는 생각으로 이 책을 읽길 원했었다. 하지만, 내가 읽은 이 책은 나의 안면에 미소짓게 하기는커녕, 미간이 찌푸려지기에 충분했다. 충분히 그렇게 끝낼 수 있는 책이었다. 하지만 작가가 원하는 바를 알아차리지 못한 거겠지, 라는 생각으로 두번 째 책을 폈고, 〈K블로그〉,〈푸른 수조〉,〈실러캔스〉같은 경우는 서너 번 반복하여 읽은 것 같다. 곱씹으면 곱씹을 수록 문장의 행간이 좁혀짐을 느낀다. 분명 이는 첫번 째 읽을 땐 감지하지 못했던 무언가였다. 그제야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단편이라고 치부하고 쉬이 읽어내리기엔 (확실히) 무리가 있는 작품임엔 틀림이 없다. 그렇게나마 현실에 타협하며 살아가는 그들을 보며, 오늘 내 하루를 손가락으로 되짚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