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양장) - 유년의 기억 소설로 그린 자화상 1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작년(2010) 늦여름이라고 하기엔 조금 이른 여름의 절정에서 무당개구리와 꼭 닮은 표지를 지녔던 작가의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와 함께 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때 내가 그 책을 읽으려고 마음먹었던 까닭은 ‘박완서’라는 작가에 대한 애증이 아닌, 그저 그가 준 책이니까 읽어보자_라는 생각이었다. 그 책을 읽고 「친절한 복희씨」는 나중에 내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어 등장인물들의 시점을 오롯하게 바라볼 수 있을 때, 읽어보자 다짐했었다. 그러다가 올해(2011) 1월의 중순, 네이버 검색 순위, 그것도 첫번 째에 노작가의 이름이 떡하니 놓여있는 것을 확인하고 난 ‘이번에 낸 책이 반응이 좋은가.’라는 얼토당토 않은 생각으로 클릭했는데, 내 눈이 보고 있는 텍스트는 ‘박완서 작가 별세’ … 그 생각이 들자마자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서 아기자기하게 텃밭을 가꾸는 노작가의 모습이 상상되는 동시에 안면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또렷해지는 동공은 금세 나를 현실로 데려다 앉혀놓는다. 그러다가 이 책이 손에 들어온 것을 확인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작가의 별세 소식을 알고 있는 이 책을 펴기 직전, 잠시 숙연해지는 것이 통과의례라도 되는 듯이 책 표지에 그려져있는 여자아이의 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나’는 세 살에 아버지를 여의어 할아버지의 각별한 자애를 받고 성장했는데, 할아버지가 동풍으로 무력해지시는 것을 보며 두 번째로 아버지 상실을 느끼게 된다. 그 해에 엄마는 오빠를 데리고 서울로 상경하여 공부를 시키고, 할아버지의 두 번째 동풍이 찾아왔을 때, “너도 서울 가서 학교에 가야지.”라며 느이 아버님 저 모양 되셔 갖고 순전히 쟤 하나 들락날락하고 슬하에서 고물고물하는 거 바라보는낙으로 사신다. 그래도 네가 쟬 데려가야 옳겠냐? 증말 너무한다 너무해.”라고 말하는 할머니에게 종종머리를 땋고 있던 ‘나’의 머리를 단발로 싹둑 잘라버리는 것으로 대답을 하고,  개성 박적골에서 서울 현저동로 상경시킨다. -정확히 말하면 서울의 문밖이지만.- 그동안 ‘나’는 가슴이 두근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것은 내 마음 속에서 평화와 조화가 깨지는 소리였고, 순응하던 삶에서 투쟁하는 삶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본능적으로 감지한 두려움이란 감정을 느끼게 된다. 나는 그것으로 ‘나’의 성장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것임을 감지하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서울의 집으로 가는 동안에 속물이라 불릴 수 있는 근성이 그득하여 송도 거리에서의 당당함이 어딘지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엄마를 따라 자신 역시 처음 보는 것 천지였지만 기죽지 말고 두리번거리지도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서울에 ‘나’의 몸이 담겼고, 그 속에서 태동하게 된다.

 

 

 

나는 불현듯 싱아 생각이 났다. 우리 시골에선 싱아도 달개비만큼이나 흔한 풀이었다. (…) 나는 마치 상처 난 몸에 붙일 약초를 찾는 짐승처럼 조급하고도 간절하게 산속을 찾아 헤맸지만 싱아는 한 포기도 없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나는 하늘이 노래질 때까지 헛구역질을 하느라 그곳과 우리 고향 뒷동산을 헷갈리고 있었다. p89 여기서 ‘싱아’라는 것은 향수(고향의 그리움)를 나타내는데, 어린여자아이의 향수는 또 얼마나 아득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느라 책을 읽다가 멈추어버렸었더랬다. 그리고 짜증으로 똘똘 뭉친 내 마음에 돌연 상냥한 바람이 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름도 모르는 ‘나’를 감싸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 것이다. 그런데 왠걸, 개성으로 수학여행을 간 날, 할머니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완서야, 완서야.” 아, 책에 대한 정보 수집 하나 없이 읽었다 한 들, ‘자전적 소설’임을 모를 만큼 흐리멍텅하단 말인가. 작가의 말은 아껴두었다가 -가장 맛있는 것은 늦게 손에 집는 것과 같이-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읽자고 생각한 나 자신이 원망스러워지는 것을 감출 수 없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제서야 눈이 트이기 시작한다. 일제 치하에 있는 나라의 학교에서 ‘나’(완서)는 일본말을 배우지만, 박적골 조부모께 보낼 편지때문에 한글 역시 소홀할 수 없다. 일본은 패망하고, 더이상 일본말은 배우지 않게 되는 탓에 가갸거겨를 배우는 학생들을 제치고, 대학을 들어가지만,- 6.25전쟁이 발발한다.

 

 

 

나는 밤마다 벌레가 됐던 시간들을 내 기억 속에서 지우려고 고개를 미친 듯이 흔들며 몸부림쳤다. 그러다가도 문득 그들이 나를 벌레로 기억하는데 나만 기억상실증에 걸린다면 그야말로 정말 벌레가 되는 일이 아닐까 하는 공포감 때문에 어떡하든지 망각을 물리쳐야 한다는 정신이 들곤 했다. p295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겨웠을 그 시기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작가에겐 고통이고 시련이며 나아가 처참함이었을 터다. 그 속에서 아름다움은 찾을 수 없다. 오로지 빛이 상실된 어둠뿐이다. 노작가의 글은 기교나 꾸밈없이 정갈하다. 글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도 진정성이 느껴진다. 전에 읽었던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이래서 다른 이들이 박완서 작가의 글을 읽었구나, 싶다. 손이 가지 않아 먼지는 쌓였지만, 때묻지 않은  「친절한 복희씨」를 책장 깊숙히 꽂아두고 ‘그 작가 나는 별로야’라고 말하던 때를 떠올린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까지 쉴새없이 내달린다. 그때 문득 막다른 골목까지 쫓긴 도망자가 획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적으로 사고의 전환이 왔다. 나만 보았다는 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 있다. p312 속편으로 이어지는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지금의 후유증이 조금 멎을 때 즈음 읽어봐야겠다,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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