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미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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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구병모 작가의 신간이 세상에 벌거벗은 채 태동되다는 소식을 접함과 동시에, 재작년 즈음에 읽었던 「위저드 베이커리」를 떠올리며 한껏 웃음을 짓는다. 타임 리와인더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에 따라 두개로 나뉘던 결말은 내가 읽어왔던 책들 중 손 꼽히는 특이한 것이었다. 또한, 작가의 상상력이 한껏 가미된 「위저드 베이커리는 결코 현실과 완전한 결합을 이루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구성을 띠고 있었다. 현실이 될 수 없으면서, 현실일 수밖에 없는 그것. 그것을 나는 타협이라 부르고 싶다. 그것이야 말로, 저자가 책 속에서 영롱하게 빛날 수밖에 없매력이지,싶다. 그 책을 읽고 작가의 또 다른 책을 만나보려 했으나, 작가들의 단편들을 실어놓은 또 다른 책 한 권이 보일 뿐, 그렇다 할 작품은 없었다. 그런데 그런 작가가 「아가미」를 독자들 품에 안겨주었다. 실로, 오랜만에 재회하는 친구를 만나는 기분으로 들떠서 이 책을 손에 쥐어본다. 하지만, 애초에 이것은 다분하게 의도적인 책 읽기가 아니었다. 재미를 추구하여 삶에 윤활제를 칠해주고자 읽어왔던 것이 그동안의 주된 책 읽기였다고 한다면, 이 책은 자기 직전에 긴 호흡을 가지고 읽어내려 일과 공부에 파괴된 나의 심신을 차분하게 내리깔아줄 얇디 얇은 한 권의 책이 필요했는데, 실수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치명적이다.

 

 

 

“제가 슬프다고 한 건, 저렇게 천편 일률적인 방식으로 고통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만큼 사람들마다 삶의 무게가 비슷하구나 싶어서입니다.나, 조창인의 「가시고기」같은 경우, 셀 수 없을 만큼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읽었는데, 그것을 읽고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넘쳐서 읽을 때마다 눈물을 흘렸고, 신경숙의 「외딴방」을 읽고 ‘나’의 상황을 내 상황과 접목시켜 애달파하고 결국 ‘나 외딴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으며, 할레드 호세이니의 「연을 쫓는 아이」에서 아미르에 대한 하산’의 충성심과 그의 삶에 눈물을 흘렸다면, 이 책, 구병모의 「아가미」의 책장을 덮는데 눈물이 났다. 무엇이 그리 서글펐는지, 모르겠다. 물 속에선 물빛을 닮은 찬연한 아가미가 슬펐고, 물 밖에선 함초롬한 아가미가 슬펐다. 아름다운 물고기, ‘곤’의 름이 슬펐고, 끝내 그 이름을 불러주지 못한 ‘강하’가 슬펐으며, 더이상 강하의 연못에서 헤엄칠 수 없는 곤이 슬펐다. 치명적일 만큼 아름다운 문장이었다. 실은 나, 어떤 책을 다 읽고 나서 좋다, 라는 생각을 가진 적이 많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적보다, 뭐 이런 식이야? 라고 끝내며 온갖 불평·불만을 토로해낸 적이 더 많은 나로서는 이런 감정이 오랜만이어서 어떻게 표출을 해야할 지 모르겠다. 책을 읽다가 이런 책을 만나면 나는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그 날 하루를
온통 그 책 생각으로 서성이게 되는 것이, 일종의 통과의례인 셈이다.

 

 

 

이 책 역시, 「위저드 베이커리」에서 느꼈던 시니컬한 저자의 말투가 고스란히 느껴지지만, 역시 그 속에서 따뜻함이 배어져나오는 것을 알아채는 그 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날 죽이고 싶지 않아?…… 물론 죽이고 싶지.그래도 살아줬으면 좋겠으니까.” - 세상에 동떨어진 것만 같던 그였다. 노인과 이녕, 강하가 가족이라면, 그는 철저한 남이었다. 함께 있어도 함께라고 자각하지 못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 또 다른 슬픔이었던 게다. 그런 그에게 살아줬으면 좋겠다,니. 울컥하는 마음을 달랠 길이 없다. 다행스러우면서도 애잔했다. 애잔한 마음이 비추어 비늘을 반짝이게 한다. 반짝이는 비늘이 내 눈의 망막을 찔러 결국 눈물샘을 터뜨린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가 앞서 말한 자기 전에 가벼이 읽을 책으로 실수를 했다고 한 까닭이고, 졸린 눈을 끔뻑거리면서도 책의 마지막까지 치달을 수밖에 없던 까닭이다.

 

 

 

나 혼자만 간직하고자 하는 비공개 서평이었더라면, -어차피 결국은 나 혼자만 간직하는 서평이지만, 공개적일 수밖에 없기에- 이미 책의 이야기를 다 써버리고도 남았을 터. 하지만 내용을 적지 않는 것은 적어도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누군가에게 김을 팍 새게 만들어버릴 어떠한 구실도 하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책을 덮고 그에게 전화를 걸어 “책을 다 읽었는데, 별 다섯 개를 주고 싶은데 그러기엔 뭔가 아쉽다”는 나의 말에, “이러다가 작가한테 전화해서 더 써달라 얘기할 것 같다”고 그가 대답했다. 실은 나도, 그러고 싶다. 작가에게 조금 더 행복한 인어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없겠느냐고 억지라도 부리고 싶을 만큼,- 아직도 곤이 강을 유영하는 모습이 뇌리에 이토록 선연한 것이 아쉽고, 또 아쉽다. 하지만 “여기서 작가가 더 쓰면 그게 무슨 내용이건, 실망일 것 같다.”는 말로 이 책은 손에서 떠나 내 머릿 속에서 유영한다. 누군가 당신의 호흡을 틀어막는다고 생각하는가. 잊지 말라, 당신의 아가미가 매초롬하게 당신이 그곳으로 호흡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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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의 고군분투 생활기>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시인들의 고군분투 생활기
제스 월터 지음, 오세원 옮김 / 바다출판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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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누군가가 작정하고 나를 파멸시키려고 하는 것이 틀림이 없다,에서 심지어는 세상이 나를 버렸다,라는 생각마저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실타래가 엉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모르는 상황과 맞닥뜨릴 때가 있다. 매듭을 풀고자 손을 댔는데, 그것이 생각과 달리, 더욱 엉켜버릴 때, 세심하지 못한 성격에 그것을 힘으로 해결하려 들고, 그럴수록 더 팽팽해지는 끈들에 있는 짜증을 다 내며 가위로 싹둑 자르는 나와 같은 이가 있는가 하면,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다잡아 그것을 찬찬히 들여다 보며 풀어내려 안간힘을 쓰는 이도 있고, 혹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대로 손을 놓고 그 상황에 휩쓸려 가게 되는 이도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 실타래를 움켜 잡은 한 남자가 있다. 그것은 그의 손을 지나 몸 전체를 휘감아 그를 밑바닥으로 추락시키고 있다. 그는 그것을 잘라낼 것인가, 풀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인가, 그냥 손을 놔버릴 것인가.

 

모든 것이 …… 파괴되었다. 아내와 나, 우리는 정상이 아니다. 우리 사이의 소중한 뭔가에 금이 갔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어떻게 고쳐야 할지 모른다. 아니, 어떻게 하면 우리집을 차압에서 지킬 수 있을지, 아니, 아니, 심지어는 아이들 놀이집을 짓는 방법조차 난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내 주머니에 채 1만 달러도 안 되는 수표가 달랑 한 장 들어있다는 것. 그 수표는 우리가 퇴직 후 마지막으로 기댈 수입원인 연금을 한꺼번에 현금화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p96

 

경제 담당 기자였던 ‘맷’은 시장에 관해 일 년 내내 글을 써서 번 돈보다 시장에 투자를 해서 번 돈이 더 많았을 뿐만 아니라, 강아지를 훈련시켜 신문의 주식 면에 용변을 보게 한 뒤 똥이 떨어진 곳에 있는 주식을 사더라도 연 20퍼센트의 수익은 올릴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이유로 90년대 후반에 잘 다니고 있던 신문사를 그만 두고, 금융 사업에 뛰어 들어 그것을 시(詩) 형태로 제공하는 사이트를 개설한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만큼의 돈벌이가 되지 못했고, 결국 실패로 돌아가면서 다시 신문사에 복직을 하지만, 경영 악화로 인해 단 4개월만을 근속 기간으로 인정받고 해고를 당하게 된다. 그런 그의 앞에 놓인 것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해 당장 7일 안에 3만 달러에 달하는 밀린 할부금을 주택 담보 대출 회사에 갚지 못하면 차압당할 집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단순하게 흘러가는 대로 살면 되지, 라고 치부해버리기에 그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와 상당한 미모를 지닌 아내 ‘리사’와 사립학교를 다니고 있는 아들 ‘테디’ , ‘프랭클린’이 있는 집에서의 가장이다. 그럼에도 그 모든 사실을 아내인 리사에게조차 털어놓지 못하는데, 아내의 동태에 요즘 들어 미심쩍음을 느끼고 있던 참인 까닭. 그러는 사이에 단 7일이라는 기한은 그의 숨통을 죄어온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세븐일레븐에서 만난 젊은이들에게 마리화나를 얻어 피운 그는 불현듯 무엇인가가 머리를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낀다. 아! 마약상을 하면 되겠구나!

 

책 속에서 그의 생활은 정말이지, 길고 긴 터널 속에 갇힌 것과 같이 막막,하다는 것이다. 마리화나 밀매를 하겠다는 어리숙한 그의 생각이 멍청해보이기도, 미련해보이기도, 심지어는 철이 없어 보이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내게 있어 그를 미워 할 수 없는 것은 단연코 삶에 대한 의지였는데, (물론, 그것이 자신을 위해서,보다 가족들을 위해서,라는 것이 나를 감동케 했지만) 끄나풀을 잡고야 말겠다,는 마지막 발악이었던 마리화나가 또다시 수포로 돌아가면서 나 역시 책의 표지에 있는 그와 함께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매번 올라가지 못하고 아래로만 떨어지는 그의 삶이 처량하고 안쓰러워서 어루만져 주고도 싶지만, 그는 독자로부터 동정표를 받는 것, 그것을 당당하게 제지한다. 세상에.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일은…… 스스로 자신을 가엾게 여기는 짓거리이다. p419 스스로를 가엾게 여기지 않는다는데, 내가 그를 동정할 까닭은 전혀 없다. 그런데 하나 이상한 것은 분명 나는 멀리, 낯선 곳에 살고 있는 낯선 이의 삶을 건너보고 있는데, 왜 나의 아버지가 그 삶에 자연스레 포개어지는가. 읽으면서 그의 행동때문에 실소가 뿜어져 나오는데, 그 실소에 씁쓸함이 배어져 나오고, 한숨이 포옥,하니 새어져 나오더란 말이다. 웃으면서도 웃을 수 없는 연유는 그것이었다. 우리집 가장, 나의 아버지. 맷, 그가 모든 가장의 자화상,이라고 한다면 너무 억지스러운가.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하나의 책과 다시금 마주했다. 리디 쌀베르의 「회장님의 끝내주는 애완작가」-. 그 책을 통해 이미 비슷한 내용을 경험한 바 있었던 게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곧 물질적인 풍요로움에서 나오는 행복이라는 것은 진정성이 결여된 행복이라고. 「회장님의 ~」에서 토볼드는 자신의 권력이 곧 자신의 행복이라 믿었지만, 그는 누군가 자신을 밟고 일어설까봐, 하는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면, 「시인들의 ~」에서는 가진 것 쥐뿔도 없는 맷이지만, 할부금으로 산 집이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차압당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며칠 밤을 꼬박 새는 것이다. 그 권력이, 또 그 집이 결코 자신의 행복 중 전부가 아님에도 노심초사·전전긍긍하며 그것을 손에 움켜 쥐고 있으려는 꼴이다. 나 역시 하루가 멀다하고 물질적인 무엇이 필요한데, 라는 생각을 은연 중에 하게 된다. 한 손에 떡이 있는데도 양 손에 떡을 쥐고 싶단 욕심이다. 그것이 꼭 있어야만 내가 행복한 것은 아닐진대, 나는 그것이 내 행복의 한 부분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게다. 책을 놓고 나서도 난 금세 물리적 행복을 소유하기 위해 뭐가 필요한데,- 라며 인터넷 세상을 떠돌며 쇼핑을 하겠지만 말이다. 책에 대한 감상(이랄 것도 없지만)을 적고 있노라니, “실은 나, 이 책의 엔딩에 대해 불만족스러움을 표시한다.”라는 말이 쏙 들어간다.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야 만족스럽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책에서 우리는 ‘희망’을 보지 않았는가. 치매로 모든 것을 잊었으나, 나무집을 짓는 방법은 끝내 잊지 않은 아버지의 망치질에서, 아이스크림 하나에 옥신각신하는 맷과 리사의 모습에서, 맷이 세 달에 걸쳐 모은 20달러로 영화를 보고 있는 아이들 모습에서 희망을 보았으니, 그거면 충분하다.

 


오탈자 : p12 , 10째줄 : 세븐일레븐에서는 4리터들이 우유가 9달러나 한다. (이거, 나만 말이 안된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가.)

            p58 , 4째줄 : 따옴표(”)

            p84 , 12째줄 : 빛 → 빚

            p272 , 7재줄 : 빛 → 빚

 

 

ps. 정말 이 책의 역자는 정말 ‘빚’을 ‘빛’으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갑자기 모든 것이 심란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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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보이지 않는
폴 오스터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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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야기 속의 이야기’ , ‘소설 속의 소설’이라 불리는 액자소설을 나는, 오래전 중·고등교를 다닐 때에 구운몽이라던가, 무녀도, 배따라기 등을 통해 이미 접한 바 있고, 가장 최근에는 치트라 바네르지 디바카루니의 「마지막 고백」에서 만나본 적 있다. 가장 최근에 만나보았던 그 책은 하나의 이야기에 국한되어 있는 것에서 벗어나 또 다른 이야기를 추구하는 것은 분명 매혹적으로 다가오는데도 불구하고 무려 아홉 명의 생을 어루어 만지려니 조금은 벅차게 전개되는 이야기였기에 여운을 느끼기 보다는 그저 활자를 따라가기에 바빴었음이 매우 아쉽게 느껴졌었던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그것은 베일에 쌓인 이야기를 풀어헤쳐 보는 것과 같은 비밀스러움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는데, 이번에 내가 접한 작품 폴 오스터의 「보이지 않는」 역시, 앞서 말한 액자식 구성으로 한 사람의 회고록을 읽어나가게 된다. 시대는 1967년과 2007년. 40년의 간극에 나는 그 속에서 제대로 유영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1967년 봄에 그와 처음으로 악수를 했다. 당시 나는 컬럼비아 대학 2년생이었고 책만 좋아할 뿐 아무것도 모르는 숙맥이었다. 하지만 언젠가 훌륭한 시인으로 이름을 날려 보겠다는 믿음 (혹은 망상) 하나만은 굳건했다. 애덤 워커, ‘’는 기억이 증발되어 누군지 모를 누군가에 의해 어느 파티에서 어울리지 않는 커플처럼 보이는 루돌프 보른과 마고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지만, 어떻게 그 파티장을 빠져나왔는지, 그들에게 작별인사는 했는지조차 모르는 그 이야기가 시발점이 된다. 그러던 어느 날, bar에서 우연치않게 만난 나에게 보른은 문학잡지 창간에 참여를 제안하고, 나는 잠시 주춤,하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수락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이야기에 발동이 걸리게 된다. 보른의 집에 초대를 받은 나는 마고에게 매혹되었느냐, 어느 정도로 매혹되었느냐, 안아보고 싶을 만큼? 동침하고 싶을 만큼? 이라고 묻는 보른에게 이상한 점을 느끼지만, 이내 술에 많이 취했을거라는 판단 아래 가벼이 무시한다. 하지만 나는 보른의 수법에라도 말린 듯 른이 집을 비운 닷새동안 마고와 쾌락을 즐기고, 마고는 결국 보른에 의해 프랑스로 쫓겨나지만, 보른은 그런 나에게 화를 내기는커녕 귀찮은 존재를 정리하게 해줘서 고맙다고 이야기한다. 잡지 제작에 앞서 저녁을 먹기 전, 가볍게 산책을 하던 도중 어린 강도를 보른은 칼로 찔러 죽이는(정확한 것은 아무도 모르지만)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사건이었고, 그 사건으로 결국 수표를 찢어 보른에게 우편으로 보내는 것으로 문학잡지 창간은 물거품이 된다.  여기까지가 제 1장 ‘’이다.

 

 

 

나는 나의 접근 방법이 틀렸음을 알았다. 나 자신을 1인칭으로 서술함으로써, 나는 나 자신을 질식시켰고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내가 찾고 있던 것을 찾는 게 불가능해졌다.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떨어트릴 필요가 있었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나 자신과 나의 주제 (바로 나 자신) 사이에 약간의 공간을 두는 것이 필요했다. p96 보른을 떠나보낸 봄의 자리에 나뭇잎이 푸르딩딩한 여름이 차지했다. 현재 ‘’는 <하품의 성>에서 지루한 작업들을 하고 있고, 웨스트 107번가에선 누이 그윈과 함께 살고 있으며 부모님의 차가운 관계에 대해서, 남동생 앤디의 죽음에 대해서, 여러 해 전 봄 방학 때 함께 쓴 희곡에 대해서 얘기를 한다. 그러나 금지된 동거는 근친상간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1장에서 이야기의 축이 보른이었다면, 2장에서는 그윈이 된다. 3장, 가을. 교환학생으로 파리에 간 ‘’는 노천카페에서 우연하게 보른과 재회하면서 봄에 있었던 살인을 보른과 결혼할 여인인 엘렌 쥐앵과 세실 쥐앵을 이용하여 퍼뜨리려 한다. 하지만…, , 여름, 가을,까지 왔으면 겨울도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라는 반응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겨울은, 애석하게도 ‘, , ’ 가 아닌 타자에 의해 완성된다.

 

 

 

이야기는 위와 같이 봄, 여름, 가을로 갈수록 나, 너, 그 (1인칭,2인칭,3인칭)으로 변화된다. 애초에 그 시점 변화를 알고 있던 난 그것이 복잡하고 산만할 것이라고 추측했고, 그것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출근해야지,라고 생각하는 것 만큼이나 따분한 생각이었음을 밝히는 바이다. 시점 변화는 출근해야지, 생각했던 그 날이 바로 일요일인 것 만큼의 흥미로움을 주는 것이다. ‘내’가 ‘그’가 될수록 이야기는 조금 더 객관적이고 세밀해지는데, 그것은 내가 움직이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닌, 내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을 쓰는 것인 까닭이다. 그렇기에 2장에 나왔던 근친상간도 그렇게까지 세밀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이 나,너,그의 현실이든, 허구이든-. 그런데 서평을 쓰다보니, 이건 액자식 구성이 아니다, 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것은 전적으로 액자식 구성의 핵이 되는 짐이 빠진 것이 원인인데, 사실 나는 이 서평에 그의 존재가 부재하길 원했다. 물론 그 인물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니, 짐,은 이 책을 세상에 태동케 만든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라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보이지 않는」이라는 이 작품은 순전히 애덤 워커의 중심인 까닭이리라.

 

 

 

오랜만에 참 재미있는 책을 만났음이 실로 반갑다. 실은,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폴 오스터’라는 작가의 책은 어려워서 이해할 수 없다,라는 말을 보아서 나 역시도 지레 겁먹고 책을 펴기조차 두려워했음이 책을 붙잡고 있었던 일주일이라는 긴긴 시간이라는 증거에 여실히 드러난다. 그래서 재미있게 읽고 있는 동안에도 내가 읽고 있는 이 내용이 맞는 것인가, 자문하고 또 자문해야만 했다. 그렇다. 나는 이 책을 읽을 때, 나는 그런 재미없는 글읽기를 했던 게다. 그래서 책의 2장인 여름을 막 끝냈을 때, 과감히 덮고 새로이 1장의 봄으로 돌아가 시작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 역시 이 책을 오롯하게 이해했다, 말할 수 없는 것이 결말에서 숨이 턱, 막혀버린 까닭이다. 아직도 나는 그 결말에 서서 그들이 망치로 돌들을 내리찍는 걸 보고 있다. 언젠가는 무릎을 탁 치며, 아! 하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은 멈추어 서서 이렇게 바라볼 수밖에 없음을 안다. (역자의 해설은 언제나 이런 아이러니한 부작용을 낳는다. 그럼에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궁금증은 참을 수 없기에 들여다 보는데, 또 긴 한숨이 흘러나온다. 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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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행관람차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7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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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 가나에의 신작 소식은 언제나 가슴 두근거림을 유발한다. 그녀의 작품을 읽어보세요,라고 이야기 한다면, 구태여 까닭을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지만, 그 식상한 까닭이라함은 아마 프레임 자체에서 풍기는 흥미로움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실은 나, 시점이 시시각각 달라지는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시점에서는 조연이라 하더라도, 각자의 시점에선 그 각자가 주연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인물 자체가 주연이 아닌, 그저 그를 통해 주변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집어넣는 식이 많은 것도 한 몫한다. 게다가 이야기의 동선이 교차하는 시점에서 작가가 어떻게 끌어내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이야기가 신선하리만큼 새롭게 시작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이중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스토리를 원한다는 것인데, 이중적인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설명하는 식의 이야기는 사실 짜증이 나리만큼 진부하고 그보다 지루한 이야기는 없을거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애초에 그런 식이라면 3인칭으로 가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작가가 이끌어내는 이야기에 독자들이 완전히 동화되어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어야 하는데, 이야기가 똑같은 부분만 반복되면 주춤주춤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다보면 결국 활자들만 따라가게 되는 경향을 낳는다. 그런데 미나토 가나에의 전작인 「고백」을 읽고 그런 구성에 있어서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곧이어 「속죄」와 「소녀」를 읽었었다. 점점 갈수록 처음과 같은 신선한 충격은 없었지만, 새로운 작가에 대한 눈이 트였고, 이번 신간 소식에도 미나토 가나에의 책이라면… 이라는 말 줄임표에 긍정적인 향내가 퍼졌다.

 

 

 

엔도 가족, 다카하시 가족, 고지마 사토코 - 이렇게 세 개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맞물리는데, 세 개,라는 단어의 표현은 단순히 세 명의 인물이 아닌 엔도 가족이나 다카하시 가족같은 경우에 가족의 구성원의 일원으로서의(개개인의) 시점으로 풀어나가는 까닭이다. 오늘도 엔도 가족의 집에서는 짐승과의 레슬링 한판이 벌어지고 있다. 아니, 일방적인 공격, 아야카의 ‘꺼져, 빌어먹을 할망구야!’의 주체는 엄마인 마유미 -. 그렇게 한바탕 난리가 끝나고 난 뒤, 앞집인 다카하시 가족 중 일원인 막내아들 신지의 고함과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하는 엄마인 준코의 비명이 울려퍼진다. 차가 우리 집 앞에 서 있다. 아니, 다카하시 씨 댁이다. (중략) 대체 그림처럼 행복한 그 집에 무슨 일이 생긴걸까? p33 (중략) 47

 

 

 

책에서는 결코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어머니가 맞느냐,라는 것에 맞춰져 있지 않다. 간혹, 의구심을 제시한다. 정말? 정말 준코가 그랬어? 신지가 아니고? - 하지만, 저자는는 이야기를 그렇게 진행시키지 않는다. 애초에 잡혀져 있는 포커싱이 아닌, 흐릿한 그 뒤의 세계를, 미나토 가나에는 바라보고 있었다. 첫째, 우리는 모두 책을 읽으며 함께 아웃사이더의 입장이었다. 누구나 나, 혹은 가족,이 아니라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남 때문에 내가 귀찮아지는 것을 감당해낼 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단지 싫어서,인 것이 그 까닭이다. 반면에 다카하시 가족은 인사이더였다. 처음부터 누구의 잘못은 없었다. 사람 욕심이 잘못으로 치부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래, 그것이 잘못이다. 그 욕심이 남이 아닌 가족에게 고스란히 물려져 결국 그것이 짐이 되어버리는 순간에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다. 물론 엔도 가족은 살인 사건과 통틀어 보았을 때 우리와 같은 입장에서 서있었을 수는 있었으나, 완벽한 아웃사이더였던 인물은, 독자 말고는 아무도 없다. 아웃사이더로 보였던 엔도 가족도 실은, ‘히바리가오카’에서 ‘언덕길 병’을 앓고 있는 인사이더였던 것이다.

 

 

둘째, 첫째에서 말한 그 욕심이란 것. 는 그리고 우리는 누구보다 더, 어디보다 더, 라는 말을 수없이 듣고 살아왔다. 주체는 ‘나’ 혹은 ‘우리’보다 잘난 사람,이었기에 그 말이 습관처럼 입에 들러붙어 있는 것이다. 완전한 생각이 자립되지 못했을 정도로 어렸던 나이부터 시작하여 특히 학교 입시 준비를 할 때 가장 두드러졌는데, 그런데 그것은 시간이 점점 더 지날 수록 물러지지 않고 단단해지는 것이 심지어 우리가 스스로와 대화를 할 때조차도 ‘나’ 하나의 주체임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로 ‘나’와 남’을 숱하게 비교해오며, 스스로에게 압박을 주고, 프레임에 갇혀 두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고 있노라니, 가노 도모코의 작품, 「유리기린」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예쁜 외모에, 우수한 성적에, 좋은 가정까지 삼종세트를 두루 갖춘 ‘안도 마이코’. 하지만 유리기린처럼 깨지기 쉬운 여리디 여린 하나의 여고생이었던 것. 우리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아야카도 아직은 유리기린에 불과한 여중생이라는 것과, 이야기 속에서 부유층의 상징이었던 ‘히바리가오카’에 사는 인물들도 나름대로의 애로사항을 가지고 있다는 것.

 

 

셋째, 가족 - 가족이었다. 나는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앞에 나열한 모든 것들을 다 버려서라도 이것이길 바라고, 또 그렇다고 믿고 있다. 나는 내 가족이 짐처럼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는 무척 부끄러운 고백을 한다. 위에서 말한 남들보다 좋은 대학이 그랬고, 남들보다 좋은 직장이 그랬으며, 나아가 미래에서는 남들보다 좋은 신랑감이 그럴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마, 맏딸이라서 그런 기대가 더 컸고, 현재도 크지 않나, 생각해보지만, 그럴 수록 내가 매고 있는 가방은 점점 무거워지고, 결국은 내팽개 쳐 버리고 싶었고 결국 신지와 같은 상황이 되고 만 것. 그래서 앞으로의 1년 계획을 세워 미래의 발돋움이 되어줄 고등학교 3학년의 생활인 수 개월을 자포자기한 듯 살아갔었다. 짐이라고 생각했던 가족이었는데, 그때마다 토닥거려준 것은 역시 가족이었고, 그때문에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성향은 물론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그것은 결코 다른 무엇과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되지 못하며, 그가 주는 위력 또한 다르지 않다. 진상은 단 하나. 애도할 상대도, 책망할 상대도, 위로할 상대도 전부 가족이라는 사실. 그뿐이다. p326

 

 

 

「야행관람차」라는 제목이 내게 주는 어떤 신비로움은 여느 책들의 제목을 접할 때의 어떤 면에서도 색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떤 은유법을 써놓은 제목은 아니었을 거다, 라는 막연한 생각만이 자리잡았었더란 말이다. 사실 난 제목을 접하고 기노시타 한타의 「악몽의 관람차」를 가장 먼저 떠올렸고, 「악몽의 관람차」와 같은 밀실은 아니겠지만, 「야행관람차」 역시, 그 제목과 부합한 이야기를 가지고 추리 소설을 썼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야기는 추리 소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아니, 추리 소설이라기엔 어정쩡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을 방망이로 맞은 듯한 기분으로 책을 덮었다. 야행관람차가 완공되는 날에 탑승하여 지상을 내려다 보면, 다른 곳보다 높게만 보이는 ‘히바리가오카’도, 아래에 있는 동네들도, 어우러져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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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스트레스에 마침표를 찍다
데비 맨델 지음, 김혜숙 옮김 / 팜파스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위의 책이 내게로 왔을 그 당시에, 나는 무척이나 흥미진진한 소설책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책에 자꾸만 눈에 밟힌 까닭은, 그동안 나도 모르게 차곡차곡 쌓인 스트레스와 내가 충돌한 상태에서 내가 먼저 더 이상 버틸 힘도 없이 나자빠져있던 참이었으니까. 스트레스와의 정면 충돌은 결국 무력감과 나태함, 권태를 가져옴과 동시에 자존감을 낮추는 기능까지도 하더라, 그 말이다. 나의 스트레스는 주로 직장 생활이 요인이 되지만, 때때로 득과 실로 연결된 인간관계에서 오는 혐오스러움과 자연스레 맺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불충분함,과 가정에서는 맏딸이라는 책임감 등등이 있겠지만, 내 자신에게서 오는 스트레스도 빼놓을 수는 없다. 긍정적 마인드가 있을까, 싶을 만큼 부정적 마인드가 가득 들어앉아서 그것들이 내 모든 생각들이 횡단하는 것에 장애물이 되는 것부터 시작하여, 쉽게 짜증을 냄으로 인해서 내 몸에 독기처럼 퍼지는 우울함. - 이 모든 것은 나에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누군가에게 떠미는 것이 전부,였다. 그랬기에 지금 나는 미처 성장하지 못한 채, 사춘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때때로 그와 비슷한 성향을 띤 것이 내게 찾아오는 날이면 오춘기, 육춘기를 겪고 있다,고 자연스레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본론으로 채 들어가기도 전에 프롤로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스트레스 중독은 주체성을 빼앗긴 상태와 같다. 우리는 스스로 즐거움과 자발성을 강탈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잊은 지 이미 오래다.’ - 이것이 핵심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책의 p256 모두가 이 문장에 모두 들어앉아 있는 모양새를 보인다. 자아를 찾으라는 것. 그것이다. ‘스트레스 중독은 주체성을 빼앗긴 상태와 같다. 우리는 스스로 즐거움과 자발성을 강탈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펜 끝에서 응어리지는 글자들을 따라가며 우리는, 자아를 찾는 일 중 (단지) 몇 가지만 배울 것이다.

 

 

 

책을 다 읽었던 장소는 기차. 승차하기 15분이라는 시간이 남았고, 그 시간동안 나에게 반문했다. 자신이 언제 가장 자랑스러웠는가, 라는 물음에 내가 한 대답은 침묵, 침묵, 침묵이었다. ‘가장’이라는 부사가 앞에 붙어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도 하나의 생각할 거리였을 테지만,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했던 적은 극히 드문 것이 나를 돌아보게 하더란 것이다. 내가 나를 자랑스러워 했던 적 모두에는 ‘누군가’라는 대명사가 있었다는 것에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지인이든, 타인이든.- 그러면서 인정받던 그때를 생각하다가, 바로 그때, 내가 저자의 레이더망에 걸렸다는 것을 눈치챘다. 인정받는 그 순간 모두에 나는 저자의 말처럼 ‘예, 감사합니다.’라는 그 말 대신 ‘아닙니다. 별 말씀을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인걸요. 덕분입니다.’라고 답하며 나 자신의 가치를 깎아내리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자기 비하를 미덕으로 배운 것이지 무엇이겠느냐는 것이다. 가면을 벗어라. 우리는 ‘아니오’라고 말하고 싶을 때도 ‘예’라고 말한다. 남이 좋아하기를 바라고 남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한다. 진짜 내 모습을 숨기고 있다. p63 가면을 벗으면 얼마나 편안한가-. 남들의 잣대에서 휘청거리며 살 필요가 전혀 없다고, 우리는 자아를 확립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그렇게 저자는 강력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거울은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에게 잘 보이기 위해 보는 것이라는 것과 직결되는 것이 그 말일 게다.

 

 

 

무엇보다 chapter 7에 ‘나화나게 하는 것은 나 자신뿐’이라는 문구는 멈칫,하기에 충분했는데, 그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말과 접목되고, 그것은 곧 부정적 성향과도 일치한다, 얘기하는 것과 같은 까닭이다. 그 예로 저자는 추월을 꼽는다저런 식으로 추월을 한다 이거지? 어떻게 하는 게 제대로 추월하는 건지 보여주겠어!’ → 내가 왜 이렇게 화가 났지? 아무도 나한테 해를 입히지 않았잖아. 저 운전자는 나를 알지도 못하는데.’ - 여러가지의 상황을 예로 들고, 그것들이 곧바로 스트레스로 변모되지 않을 수 있게 생각의 전환을 하도록 도와준다. 그것들을 읽으며 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싶은 것이 나의 부정적 성향이 심하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근거들이어서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스트레스 거리를 다름아닌 내가 찾아다니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에 씁쓸함이 가득 메워져왔다. 늘 ‘긍정적 마인드’를 갖자,라며 포괄적으로 생각하기만 했지,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지 않아서 아차, 싶었을 때가 한 두번이 아닌걸. 또 다시 잊어버릴 다짐을 해본다. ‘긍정적 마인드’라는 것이 내 삶에 태동한다면 지금보다 더 예쁜 미소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지 않겠냐고. 이 책 한 권으로 나를 억압하고 있는 트레스에 마침표를 찍었으면 좋겠다, 간절히 바랐지만, 내 삶에 접목시키지 않는 이상 마침표는 끝끝내 찍히지 않을 거라는거. 그래도 이 책을 읽음으로 해서 비로소 여유라고 칭해지는 쉼표가 만들어졌음에 안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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