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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행관람차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7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1년 2월
평점 :

미나토 가나에의 신작 소식은 언제나 가슴 두근거림을 유발한다. 그녀의 작품을 읽어보세요,라고 이야기 한다면, 구태여 까닭을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지만, 그 식상한 까닭이라함은 아마 프레임 자체에서 풍기는 흥미로움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실은 나, 시점이 시시각각 달라지는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시점에서는 조연이라 하더라도, 각자의 시점에선 그 각자가 주연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인물 자체가 주연이 아닌, 그저 그를 통해 주변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집어넣는 식이 많은 것도 한 몫한다. 게다가 이야기의 동선이 교차하는 시점에서 작가가 어떻게 끌어내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이야기가 신선하리만큼 새롭게 시작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이중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스토리를 원한다는 것인데, 이중적인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설명하는 식의 이야기는 사실 짜증이 나리만큼 진부하고 그보다 지루한 이야기는 없을거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애초에 그런 식이라면 3인칭으로 가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작가가 이끌어내는 이야기에 독자들이 완전히 동화되어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어야 하는데, 이야기가 똑같은 부분만 반복되면 주춤주춤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다보면 결국 활자들만 따라가게 되는 경향을 낳는다. 그런데 미나토 가나에의 전작인 「고백」을 읽고 그런 구성에 있어서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곧이어 「속죄」와 「소녀」를 읽었었다. 점점 갈수록 처음과 같은 신선한 충격은 없었지만, 새로운 작가에 대한 눈이 트였고, 이번 신간 소식에도 미나토 가나에의 책이라면… 이라는 말 줄임표에 긍정적인 향내가 퍼졌다.
엔도 가족, 다카하시 가족, 고지마 사토코 - 이렇게 세 개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맞물리는데, 세 개,라는 단어의 표현은 단순히 세 명의 인물이 아닌 엔도 가족이나 다카하시 가족같은 경우에 가족의 구성원의 일원으로서의(개개인의) 시점으로 풀어나가는 까닭이다. 오늘도 엔도 가족의 집에서는 짐승과의 레슬링 한판이 벌어지고 있다. 아니, 일방적인 공격, 아야카의 ‘꺼져, 빌어먹을 할망구야!’의 주체는 엄마인 마유미 -. 그렇게 한바탕 난리가 끝나고 난 뒤, 앞집인 다카하시 가족 중 일원인 막내아들 신지의 고함과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하는 엄마인 준코의 비명이 울려퍼진다. 순찰차가 우리 집 앞에 서 있다. 아니, 다카하시 씨 댁이다. (중략) 대체 그림처럼 행복한 그 집에 무슨 일이 생긴걸까? p33 (중략) 47
책에서는 결코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어머니가 맞느냐,라는 것에 맞춰져 있지 않다. 간혹, 의구심을 제시한다. 정말? 정말 준코가 그랬어? 신지가 아니고? - 하지만, 저자는는 이야기를 그렇게 진행시키지 않는다. 애초에 잡혀져 있는 포커싱이 아닌, 흐릿한 그 뒤의 세계를, 미나토 가나에는 바라보고 있었다. 첫째, 우리는 모두 책을 읽으며 함께 아웃사이더의 입장이었다. 누구나 나, 혹은 가족,이 아니라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남 때문에 내가 귀찮아지는 것을 감당해낼 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단지 싫어서,인 것이 그 까닭이다. 반면에 다카하시 가족은 인사이더였다. 처음부터 누구의 잘못은 없었다. 사람 욕심이 잘못으로 치부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래, 그것이 잘못이다. 그 욕심이 남이 아닌 가족에게 고스란히 물려져 결국 그것이 짐이 되어버리는 순간에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다. 물론 엔도 가족은 살인 사건과 통틀어 보았을 때 우리와 같은 입장에서 서있었을 수는 있었으나, 완벽한 아웃사이더였던 인물은, 독자 말고는 아무도 없다. 아웃사이더로 보였던 엔도 가족도 실은, ‘히바리가오카’에서 ‘언덕길 병’을 앓고 있는 인사이더였던 것이다.
둘째, 첫째에서 말한 그 욕심이란 것. 나는 그리고 우리는 누구보다 더, 어디보다 더, 라는 말을 수없이 듣고 살아왔다. 주체는 ‘나’ 혹은 ‘우리’보다 잘난 사람,이었기에 그 말이 습관처럼 입에 들러붙어 있는 것이다. 완전한 생각이 자립되지 못했을 정도로 어렸던 나이부터 시작하여 특히 대학교 입시 준비를 할 때 가장 두드러졌는데, 그런데 그것은 시간이 점점 더 지날 수록 물러지지 않고 단단해지는 것이 심지어 우리가 스스로와 대화를 할 때조차도 ‘나’ 하나의 주체임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로 ‘나’와 ‘남’을 숱하게 비교해오며, 스스로에게 압박을 주고, 프레임에 갇혀 두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고 있노라니, 가노 도모코의 작품, 「유리기린」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예쁜 외모에, 우수한 성적에, 좋은 가정까지 삼종세트를 두루 갖춘 ‘안도 마이코’. 하지만 유리기린처럼 깨지기 쉬운 여리디 여린 하나의 여고생이었던 것. 우리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아야카도 아직은 유리기린에 불과한 여중생이라는 것과, 이야기 속에서 부유층의 상징이었던 ‘히바리가오카’에 사는 인물들도 나름대로의 애로사항을 가지고 있다는 것.
셋째, 가족 - 가족이었다. 나는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앞에 나열한 모든 것들을 다 버려서라도 이것이길 바라고, 또 그렇다고 믿고 있다. 나는 내 가족이 짐처럼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는 무척 부끄러운 고백을 한다. 위에서 말한 남들보다 좋은 대학이 그랬고, 남들보다 좋은 직장이 그랬으며, 나아가 미래에서는 남들보다 좋은 신랑감이 그럴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마, 맏딸이라서 그런 기대가 더 컸고, 현재도 크지 않나, 생각해보지만, 그럴 수록 내가 매고 있는 가방은 점점 무거워지고, 결국은 내팽개 쳐 버리고 싶었고 결국 신지와 같은 상황이 되고 만 것. 그래서 앞으로의 1년 계획을 세워 미래의 발돋움이 되어줄 고등학교 3학년의 생활인 수 개월을 자포자기한 듯 살아갔었다. 짐이라고 생각했던 가족이었는데, 그때마다 토닥거려준 것은 역시 가족이었고, 그때문에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성향은 물론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그것은 결코 다른 무엇과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되지 못하며, 그가 주는 위력 또한 다르지 않다. 진상은 단 하나. 애도할 상대도, 책망할 상대도, 위로할 상대도 전부 가족이라는 사실. 그뿐이다. p326
「야행관람차」라는 제목이 내게 주는 어떤 신비로움은 여느 책들의 제목을 접할 때의 어떤 면에서도 색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떤 은유법을 써놓은 제목은 아니었을 거다, 라는 막연한 생각만이 자리잡았었더란 말이다. 사실 난 제목을 접하고 기노시타 한타의 「악몽의 관람차」를 가장 먼저 떠올렸고, 「악몽의 관람차」와 같은 밀실은 아니겠지만, 「야행관람차」 역시, 그 제목과 부합한 이야기를 가지고 추리 소설을 썼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야기는 추리 소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아니, 추리 소설이라기엔 어정쩡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을 방망이로 맞은 듯한 기분으로 책을 덮었다. 야행관람차가 완공되는 날에 탑승하여 지상을 내려다 보면, 다른 곳보다 높게만 보이는 ‘히바리가오카’도, 아래에 있는 동네들도, 어우러져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