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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미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구병모 작가의 신간이 세상에 벌거벗은 채 태동되다는 소식을 접함과 동시에, 재작년 즈음에 읽었던 「위저드 베이커리」를 떠올리며 한껏 웃음을 짓는다. 타임 리와인더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에 따라 두개로 나뉘던 결말은 내가 읽어왔던 책들 중 손 꼽히는 특이한 것이었다. 또한, 작가의 상상력이 한껏 가미된 「위저드 베이커리」는 결코 현실과 완전한 결합을 이루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구성을 띠고 있었다. 현실이 될 수 없으면서, 현실일 수밖에 없는 그것. 그것을 나는 타협이라 부르고 싶다. 그것이야 말로, 저자가 책 속에서 영롱하게 빛날 수밖에 없는 매력이지,싶다. 그 책을 읽고 작가의 또 다른 책을 만나보려 했으나, 작가들의 단편들을 실어놓은 또 다른 책 한 권이 보일 뿐, 그렇다 할 작품은 없었다. 그런데 그런 작가가 「아가미」를 독자들 품에 안겨주었다. 실로, 오랜만에 재회하는 친구를 만나는 기분으로 들떠서 이 책을 손에 쥐어본다. 하지만, 애초에 이것은 다분하게 의도적인 책 읽기가 아니었다. 재미를 추구하여 삶에 윤활제를 칠해주고자 읽어왔던 것이 그동안의 주된 책 읽기였다고 한다면, 이 책은 자기 직전에 긴 호흡을 가지고 읽어내려 일과 공부에 파괴된 나의 심신을 차분하게 내리깔아줄 얇디 얇은 한 권의 책이 필요했는데, 실수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치명적이다.
“제가 슬프다고 한 건, 저렇게 천편 일률적인 방식으로 고통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만큼 사람들마다 삶의 무게가 비슷하구나 싶어서입니다.” 나, 조창인의 「가시고기」같은 경우, 셀 수 없을 만큼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읽었는데, 그것을 읽고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넘쳐서 읽을 때마다 눈물을 흘렸고, 신경숙의 「외딴방」을 읽고 ‘나’의 상황을 내 상황과 접목시켜 애달파하고 결국 ‘나’가 외딴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으며, 할레드 호세이니의 「연을 쫓는 아이」에서 아미르에 대한 ‘하산’의 충성심과 그의 삶에 눈물을 흘렸다면, 이 책, 구병모의 「아가미」의 책장을 덮는데 눈물이 났다. 무엇이 그리 서글펐는지, 모르겠다. 물 속에선 물빛을 닮은 찬연한 아가미가 슬펐고, 물 밖에선 함초롬한 아가미가 슬펐다. 아름다운 물고기, ‘곤’의 이름이 슬펐고, 끝내 그 이름을 불러주지 못한 ‘강하’가 슬펐으며, 더이상 강하의 연못에서 헤엄칠 수 없는 곤이 슬펐다. 치명적일 만큼 아름다운 문장이었다. 실은 나, 어떤 책을 다 읽고 나서 좋다, 라는 생각을 가진 적이 많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적보다, 뭐 이런 식이야? 라고 끝내며 온갖 불평·불만을 토로해낸 적이 더 많은 나로서는 이런 감정이 오랜만이어서 어떻게 표출을 해야할 지 모르겠다. 책을 읽다가 이런 책을 만나면 나는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그 날 하루를 온통 그 책 생각으로 서성이게 되는 것이, 일종의 통과의례인 셈이다.
이 책 역시, 「위저드 베이커리」에서 느꼈던 시니컬한 저자의 말투가 고스란히 느껴지지만, 역시 그 속에서 따뜻함이 배어져나오는 것을 알아채는 그 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날 죽이고 싶지 않아?” “…… 물론 죽이고 싶지.” “그래도 살아줬으면 좋겠으니까.” - 세상에 동떨어진 것만 같던 그였다. 노인과 이녕, 강하가 가족이라면, 그는 철저한 남이었다. 함께 있어도 함께라고 자각하지 못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 또 다른 슬픔이었던 게다. 그런 그에게 살아줬으면 좋겠다,니. 울컥하는 마음을 달랠 길이 없다. 다행스러우면서도 애잔했다. 애잔한 마음이 비추어 비늘을 반짝이게 한다. 반짝이는 비늘이 내 눈의 망막을 찔러 결국 눈물샘을 터뜨린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앞서 말한 자기 전에 가벼이 읽을 책으로 실수를 했다고 한 까닭이고, 졸린 눈을 끔뻑거리면서도 책의 마지막까지 치달을 수밖에 없던 까닭이다.
나 혼자만 간직하고자 하는 비공개 서평이었더라면, -어차피 결국은 나 혼자만 간직하는 서평이지만, 공개적일 수밖에 없기에- 이미 책의 이야기를 다 써버리고도 남았을 터. 하지만 내용을 적지 않는 것은 적어도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누군가에게 김을 팍 새게 만들어버릴 어떠한 구실도 하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책을 덮고 그에게 전화를 걸어 “책을 다 읽었는데, 별 다섯 개를 주고 싶은데 그러기엔 뭔가 아쉽다”는 나의 말에, “이러다가 작가한테 전화해서 더 써달라 얘기할 것 같다”고 그가 대답했다. 실은 나도, 그러고 싶다. 작가에게 조금 더 행복한 인어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없겠느냐고 억지라도 부리고 싶을 만큼,- 아직도 곤이 강을 유영하는 모습이 뇌리에 이토록 선연한 것이 아쉽고, 또 아쉽다. 하지만 “여기서 작가가 더 쓰면 그게 무슨 내용이건, 실망일 것 같다.”는 말로 이 책은 손에서 떠나 내 머릿 속에서 유영한다. 누군가 당신의 호흡을 틀어막는다고 생각하는가. 잊지 말라, 당신의 아가미가 매초롬하게 당신이 그곳으로 호흡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