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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최인호 작가, 오랜만이다. 작년(2010)즈음에 「최인호의 인연」으로 만나 우리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작가와 독자’라는 끈으로 나는 저자의 보이지 않는 그의 또 다른 ‘인연’이 되었다. (그가 수긍할런지는 모르겠지만. 큭큭.) 물론 그의 작품 「인연」은, 「최인호의 인연」으로 한정되어 있어 약간의 지루함이 동반되기도 했지만, 저자는 자신의 인연들을 향한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그가 써내려가는 글에 무게를 실었고, (여기서 무게는 결코 책의 내용이 무겁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나는, 오롯하게 받아내는 동시에 회의감을 느끼며 ‘나는?’하고 되물음을 했었다. 그렇게 그의 인연들을 소개받는 도중에 잠시 자리를 빠져나와, 나의 인연들을 하나 둘 떠올렸고 당연하다 생각했던 내 곁에 있는 그들의 소중함을 다시금 느꼈고, 책을 덮고 나서는 오랜만에 몇몇 친구들에게 먼저 연락을 취했었던 것을 기억해낸다. 나에게 ‘에세이’는 언제나 ‘가벼움’이란 생각이 강했었는데, (물론, 이것 역시 무겁지 않았지만) 저자의 이야기를 듣고, (감성에세이가 아닌 경우에) 내 이야기를 펼쳐놓기는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이번 작품을 읽기 전에, 그를 처음 만났던 바로 그 작품을, 잠시 들었고, 내가 그의 책에서 가장 인상깊다 생각했던 부분에 붙여놓은 포스트잇 플래그부터, 다시 읽는 것이다. 그 부분은 아내,에 대한 그의 조용하지만 넘쳐 흐르는 애정,에 대한 부분이었고 역시나, 다시 읽어도 그것은 내게 미소를 띠게 만든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그의 작품에 대한 기대의 이유.
K의 이야기. 왜 이름이 아닌 K가 되는가. 사실 난 이렇게 이름이 붙여있지 않은, 이를테면 이 작품과 같이 K라던지, 김씨라던지, 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저자가 인물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어쨌든, 그의 이야기는 토요일 아침 일곱시에, 느닷없는 자명종 소리에 깨어버린 K로부터 시작된다. -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토요일인가. 그렇지. 어제는 아내와 전야제(前夜祭)를 벌였고, 그것은 휴일 전날 밤에만 가능한 것이었으니. 그렇다면 자명종은 왜 울렸을까. 전날 술을 마시고 집에 늦게 들어왔어도 정신이 없거나 기억을 잃을 만큼 과음한 것도 아닌데. 그런데, 내 잠옷. 어디 가고 난 이렇게 발가벗고 있지. 왜 스킨 브랜드가 V가 아니라 Y인거야. 저기에서 채소를 썰고 있는 여자는 분명 내 아내고, 나에게 와락 안기는 이 아이는 내 딸이 맞는데. 아얏, 저 개도 분명 내 개가 맞는데, 이제 주인도 못 알아보고 물어뜯다니. 낯익은데, 왜 낯설기만 하지. 왜. - K의 낯익은 혹은 낯선 타인들의 도시.
우리는 흔히, 어디서 본 사람인데, 어디서 맡은 향인데, 어디서 먹어본 음식인데, 어디서 들은 음악인데,와 같은 말을 습관적으로 내뱉는다. 여기서 ‘어디서 ~한’이라는 것은 ‘낯설지 않음’과 직결되고, 그것은 ‘낯익음’으로 점철되어 진다. 그런데, 저자의 이번 작품을 읽다보니 낯익다,는 단어 만큼 낯선 단어가 또 어디 있으랴, 싶다. 도대체 무엇이 낯익고 무엇이 낯선가. 말 그대로 해석한다면, K는 자신의 방이 낯익고, 아내가 낯익고, 자신의 딸아이가 낯익고, 키우는 강아지가 낯익다고 했다. 반대로, 그가 쓰던 스킨이 V사의 브랜드가 아니라 Y사, X사, D사의 브랜드가 낯설다고 했고. 그렇다면 K, 자신은 낯익은가, 낯선가. 그곳에 물음을 제기하려다가 책 전체에 물음표 기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 또한 건조한 바람을 폐로 들이마신 후, 건조하게 묻는다. 나는, 나인가. - (여담이지만) 요즘 들어 나는, 내면과의 만남이 잦아졌다. (사실 이런 것은 너무나도 사소해서 내면과의 만남이라고 칭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내 감각 기관 모두를 동원하여 공유한다. 가끔 답답할 때에는 걸으면서 생각들을 정리하곤 하는데, 며칠 전엔 생각이 너무 깊은 곳에 뿌리를 심은듯 박혀있어서 그것을 들여다보느라 걷고 있는 게 내가 아니라, 걷고 있는 누군가에게 내 몸을 얹어놓은 것만 같다는 착각마저 일었던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땐 정말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건 아닌가,하는 괴상한 생각이 든다. - 하지만 K는,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주변환경에 그가 나동그라진 것. 때문에 그는 자신을 에워싸던 관계의 고리에서 약간 벗어나 철저하게 벗어나 자신을 관찰한다. 그리고, 합일점을 찾는다. 혹은 찾아진다. 혹은 찾아온다.
작품의 K에게 애처로움을 느낀 것이 비단 ‘암 투병’을 하고 있는 작가였기 때문은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런 마음이 혹 K에서 비롯된 걸까. K가 자아를 찾는 과정에서? ... 글쎄. 사실, 내가 「작가의 말」을 읽지 않았다면, 이 작품을 이렇게 아릿하게 읽을 수 있었을까. 남성 작가 특유의 단 한 번의 흔들거림도 없었을 동공으로 썼을 법한 딱딱한 문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릿함. 아,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하지. 일종의 섬찍함, 같은 거랄까. 손톱과 발톱이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손톱에 골무를 끼워서 썼을 이책에 대한 표현을 무척이나 부정적인 뜻을 담고 있는 ‘섬찍함’으로 종결짓다니. 국어사전을 찾아본 후에, 이 단어가 이런 의미밖에 없던가. 하, 머리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말고는 떠오르는 단어가 없는데. 내가 그것을 느끼는 것은 저자와 K를 동일시한 까닭일지도 모르겠다. 앞서, 이니셜로 칭하기에 애정을 느낄 수 없다 하였는가, 아니었다. 멋대로 단정지은 내가 오만했다. 저자의 인물을 보는 시선은 나무라도 부러질 것만 같은 무뚝뚝함이었지만, 그 속에 애정이 서려있다. 아니, 방울방울 서려있는 것 뿐만이 아니라, 차고 넘치는 포화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금 빗겨난 이야기지만) 자신의 정신과 육체가 함께일 때엔, 질타할 수도 있고, 미워할 수도 있지만, 정신과 육체가 따로인 상태에서 자신을 앞에 세워두고 관찰한다,라... 너 왜 그렇게 사냐, 정말 못났다,며 질타할 수 있을까. 아니, 그대로 두 팔을 뻗어 자신을 끌어안는 게다. 이번 작품에서 그걸 느꼈다. 어쩌면, ‘선생일지도 모르겠군요.’ 하는 그런 거 말이다. 따라서 K를 바라보는 독자라는 이름을 가진 내 시선 역시, 그윽하다. - 케이, 그의 이야기 끝은, 소멸일까, 시작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