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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명의 백인 신부
짐 퍼커스 지음, 고정아 옮김 / 바다출판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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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천 명의 백인 신부를 우리에게 달라. 그러면 우리는 당신들에게 말 천 마리와 평화를 줄 것이다.” ㅡ 샤이엔 족의 대족장 리틀 울프의 제안. 천 명의 백인 신부와, 말 천 마리. 덤으로 평화까지. 얼토당토않은 제안에 허허허, 너털 웃음만 나오게 만들어 버린다. 그렇다. 작품은, 그것이 이야기의 핵심이자, 또 이야기의 전체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가족에게서 ‘도덕성 문란’이라는 죄목으로 정신병원에 수감되어야만 했던 메이 도드. 그녀는 그곳에 갇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행방을 알 수 없을 뿐더러, 그토록 사랑하는 아이들조차도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채로 평생 살아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옥죄어 옴을 감출 길이 없다. 그런 그녀에게 실낱같은 구출의 희망이 반짝,하고 빛나는 것을, 그녀가 놓칠리 없었다. 특명, ‘인디언의 아내가 되어라!’- 그래서, 그녀는, 인디언의 아내, 그것도 인디언 추장의 아내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작품은, 인디언의 아내로 살아가는 메이 도드, 그리고 다른 백인 신부들의 모습을 조명한다. 메이 도드 외에 다른 백인 여인들 역시, 벼랑 끝에서 간신히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상태에서 그곳으로 가게 된 것. 아, 이 얼마나 무자비한가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에게도 역시, 매이 도드가 느꼈을,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점철지어진 구원의 손길이었으리라. 그렇기에 그녀들은 또 다른 생을 살아가듯, 매우 자연스럽고, 또 자신의 방식대로 인디언 아내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들이, 자칫 동정을 이끌기에 충분한, 어쩌면 가련한 여성상을 내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안에서 만큼은, 그 어떤 누구보다 당당함으로 똘똘뭉친, 인디언의 백인 신부일 수 있었다,고 그렇게 얘기할 수 있다.

 

 

 

꽤나 흥미가 돈다. 하지만 책을 함께 하는 한 달 여 동안, 흥미가 일었다가, 사라졌다가, 일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는데, 그것은 아마 바쁜 일상 속에 치여있던,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던 나에게 작품의 몰입이 한순간에 폭풍이 몰아치다가, 그럼에도 쌓인 피곤을 이기지 못해 쉬이 잠들어버린, 까닭일지도 모르지, 싶다. ㅡ 실은 나, 이 역사를 제대로, 아니 전혀 모르는 까닭에, 검색한 바에 의하면, 이 모든 것은 허구다. 허구도 이런 허구가 없다. 역사를 다시 원점에 두고, 인디언(샤이엔족)에게 천 명의 백인 신부를 주기를 거절했던 미국 정부가 수락하는 장면이니, 논픽션이자, 인 셈이다. 그런 제안은 있었으나, 실제로는 성사되지 않은 제안. 그것을 두고 작가는 고민했으리라. 하지만, 이렇게 끝을 내버리기엔 인디언들이 너무 가엾지 않은가. 인디언들과 백인들의 평등한 사회 구현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 하지만, 이러면 어떨까. 그녀들의 위치는, 비록 인디언의 아내,였지만, 그녀들은 오롯한 백인이었으니, 어쩌면 약간 더 시간이 있었다면, 평등 사회는 충분히 구현될 수도, 있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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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는 아니지만 - 구병모 소설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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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뭐랄까, 어떤 것이 말간 모습을 하고 나를 향해 걸어왔다. 뚜벅뚜벅. 그리고, 마치, 헤어졌다 만난 연인을 만나듯이, 두 팔을 벌리는 것. 그것이 내가 은밀히 친애하는 저자의 작품을 만난 반가움을 표시하는 방법이었다. 어쩌면, 조금은 두려움이 도사렸을지도 모르지, 나에겐 전작인 「아가미」의 야릇하고 오묘한, 그러나 손을 댈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아가미의 ‘곤’이 그러했으니, 올해에 나는, 그보다 더 찬란한 빛깔을 지닌 이를 본 적이 없었노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어쩌면, 아니 실제로도 나는, 그와 사랑에 빠졌을런지도 모른다. ‘강하’라는 강에서 헤엄치는 물고기 ‘곤’은, 또 물고기 ‘곤’을 품고 있는 ‘강하’라는 강은 내게 그만큼의 여운을 가져다 주었던 것. 그 까닭이었다. 그런데 그들을 탄생시킨 조물주, ‘구병모’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이 막 세상에 태동시킨, 탯줄은 잘렸지만, 생김새는 보이지 않는 어떤 아이를 안아들고.

 

 

 

비유가 법으로 금지된 S시 《마치 …같은 이야기》, 땅 속에 하반신이 묻힌 남자 《타자의 탄생》, 자신의 rule로 차별없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유치원교사 《고의는 아니지만》, 절망을 가진 사람을 먹이로 삼는 , 그리고 떼어진 살점이 부럽다고 생각하는 여자 《조장기》, 대필로 생계를 유지하는 여자가 아이를 잠재우는 방법 《어떤 자장가》, 감정 신경계를 꿰맨 남자 《재봉틀 여인》, 전자발찌를 찬 성범죄자가 성욕이 발생할 때를 조심하라 《곤충도감》 - 궁금한 게 많다. 비유를 법으로 금지한 시장 미무’(쥐와 생김새가 비슷한 그것)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도시는 종국에는, 그대로 비유를 상실한 채로 남아있을까. 하반신이 묻힌 남자는 무엇때문에 그런 상황에 놓여졌고, 끝내는 어떻게 되었을까. 정말, 고의는 아니었지만 유치원교사의 차별없는 혹은 그렇다고 생각하는 그것은 무엇이 문제였고, 그것말고 달리 다른 해결방법이 있었을까. 살점이 승천하는 걸 보며 부럽다고 한 그 여자,는 다시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갔을까. 아니면, 그녀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혹은, 그녀도 하늘로 승천하지는 않았을까. 설마, 세탁기와 전자레인지에 돌려진 아이가 현실은 아니겠지. 정말 말 그대로 환상일 뿐이겠지. 저자가 환상이라 말한 적은, 결코 없지만. 하지만 사람이 미치기 일보직전이면 그럴 수도 있지는 않을까. 남자는 세포를 다시 풀지는 않았을까. 재봉틀 여인이 해주었던 것처럼 흉내를 내며, 그렇게. 여자는, 그것을 해방시켜 놓으려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설마, 그래, 설마 여자의 몸 속에 들어앉은 건 아니겠지. 하는 그런거, 말이다.

 

 

 

사실 이것은 모두 ‘논리의 오류’를 범한다. 그것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다,고 말하기엔 껄끄러운 내가 사는 지금 현재를 표방한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렇기에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어떤 책임감을 부여하고, 그 속에서 내가 그 혹은 그녀가 된다. 그게 싫으면, 철저하게 관찰자가 되던지. 저자는 이야기를, 나와 그리고 다른 그대들과 공유하려는 걸까. 그녀와 내가 만드는 이야기를, 보고 싶은걸까.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아이러니하게 어떤 것이 가장 좋았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우울함이 감도는 이야기들에서 희망을 찾기란, 적어도 나에게는 불가능이다. 일곱 편의 단편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런 이야기가 없다는 것,은 내가 일곱 편의 이야기들의 엔딩을, 해피엔딩으로 내지 않았거나, 이야기를 그대로 끝냈다는 것, 그것이 될게다. 아마 후자겠지. 이야기를 그곳에서 끝내고, 깜빡깜빡이며 떠오르는 물음표들을 책 속에 구겨넣고 그대로 책을 읽어가겠지. 그래서, 없다. 그냥, 다, 똑같다. - 폭발되기 직전의 화산의 움직임을 느꼈고, 폭발된 후의 화산재를 몸으로 맞았으며, 그것에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도 만연체에 호흡이 길게 끌리다가도 이야기가 이어질 수 있었던 순간, 턱없이 부족한 나의 상상력 앞에서 이야기는 끊겼다. 하지만, 최고였다. 현실과 판타지의 사이에는 언제나 간극이 존재하고, 따라서 그것은 존재할 수 없지만, 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없다는 것. 현실이 상상이 되고, 상상이 현실이 된다. 내가 이래서, 구병모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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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포트 피크닉
김민서 지음 / 노블마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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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아이슬란드 화산 폭발로 인해 유럽행 항공기가 결항되어 공항에 발이 묶인 사람들의 집합소, 공항_ 특별한 만남,이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만난다고 한 들, 특별하지 않은 만남이 있을까, 싶기도 한 것은, 나의 부정적 마인드가 다시금 꿈틀거리는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적어도 그들은 같은 상황에 놓여있고, 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 속에서 얽혀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내어놓는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강박되어 있던 자신을 보고, 또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보고, 혹은 자신과는 다른 마인드의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의 자의적이었건, 자의적이지 않았건 간에, 상처받았던 또 상처받은 자신들의 모습을, 타인에 의해 직면하게 된다.

 

 

 

작품은, 치트라 바네르지 디바카루니의 「마지막 고백」과 흡사하다. 예기치 않게 발생한 사고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만남, 그리고 각자의 이야기를 꺼내놓는 것, 말이다. 다만, 「마지막 고백」에서는 자신들이 살아왔던 생애 중 가장 기억에 남을 이야기 하나씩을 꺼내놓는 것, 그것이 중점적인 핵심이었다. 그럼으로해서 독자에게 던져주는 것이, ‘마지막 순간이라 생각되는 때에, 지금까지 당신이 살아온 생에서 꺼내놓고 싶은 단 하나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였다면, 「에어포트 피크닉」은 그와는 조금 다르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한정된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야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 하나 더, 각기 다른 상처를 가진 사람들, 자신의 상처가 타인에게 혹은 타인에 의해 꺼내어졌을 때, 그것을 숨기느냐, 공유하느냐는 둘째치고, 각자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이다. ‘당신은 상처를 어떻게 치유합니까.’도 포함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러기엔 작품은, 터무니없이 밝다, 철부지 아이와 같이. 하지만,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간다. - 하지만, 전자와 후자, 땡! 모두 틀렸다. 두개의 물음표 중 작품의 성질과 어떤 것이 적합하다, 말할 수 없다. 적어도 나에게 작품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타인의 상처와 자신의 상처를 공유하는 것,이었던 까닭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에어포트와 피크닉처럼, 두 개의 제목과 같은 것이라고 해야할까.

 

 

 

상처받은,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자신이 아니기를 바라고, 또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래서, 종국에는 고개를 돌린다. 그게 내가 상처받았을 때 하는 행동이다. 그런 모습을 숨기기 위해서 되려, 더 당당하게, 세상을 다 가진 것과 같이 뻔뻔하리 만큼 당당하게 행동한다. 그럼으로해서 나는 내가 상처를 다 아물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직면이 아니라, 외면하고 회피하는 것이다. 「에어포트 피크닉」에서도 역시나,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자신의 상처과 동행하여 살기보다는, 꽁꽁 숨겨두는_ 작품의 생기발랄한 모습이, 상처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라니. 그것을 다루는 것에서 저자는 결코, 중년이 가지고 있을 법한 중후함과 가까운 진지함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분위기는 언뜻, 저자 고은규의   「트렁커」를 상기시키기도 한다. 전혀 모르는 타인과 상처를 공유함으로써 상처를 치유하게 되는 그런 과정도 그러하겠지만, 무엇보다, 상처를 당연시 여기는 것. 그래서, 그대도, 나올 수, 있다,라는 일종의 암시를 주어 희망을 주는 것, 말이다. 나는 이러한 작가들을 통해, 상처는, 결코 내가 생각했던 물에 젖은 솜과 같은 무거움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것,을 또 한번 느낀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나는, 아직도, 여전히_ 상처가 당연시 되는 것에 익숙해지지 못한다. 그것은, 비단 상처가 크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은 말이지, 올곧하게, 나를 성장시켜줄 그 무언가,라고 생각하는 내 고리타분한 관념같은 게 머릿 속에 뿌리를 내려 누군가가 사정없이 내리쳐도, 흔들리지 않는 그 무언가와 닮았기 때문일까. 그래서, 나는 이 작가를, 다른 작품에서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다. 오밀조밀한 그녀의 문장으로 쓰여진 그녀와 내가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그 무언가, 그런거 말이다. 다시, 만나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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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아버지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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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아빠’는, ‘엄마’와는 또 다른 전율을 일으키게 하기 충분한, 그런 사람. 아빠와 나는, 그렇다. 여느 다정한 부녀지간 부럽지 않은_ 그런데, 그게 우리 가족만 느끼는 것이 아닌, 타인의 눈을 통해서도 따뜻한 미소가 번지게 만드는가보다. 지금 나와 함께 2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 분은, 날 처음 만나고 정말 우연치 않게 우리 부모님을 뵈었을 때, 내가 아빠에게 하는 행동을 보고 그게 참 신기했다며, 자신에게는 그렇게도 안하면서,라는 질투 아닌 질투를 종종 하기도 한다. 여전히 그는, “정말 배RR네 아빠님은 배RR가 없으면 못 사실 것 같아. 배RR도 마찬가지고.” , “나도 배RR같은 딸이 있다면, 퇴근하자마자 곧장 집으로 갈텐데.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게 당연한 부녀지간임에도 남들 눈에 그렇게 보인다는 게 가끔은, 괜히 머쓱해지기도 하고, 더 잘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런거. 여담이지만, 오죽하면 내 이상형이, 우리 아빠랑 같이 목욕탕을 갈 수 있는 남자,겠는가 말이다. 때마침 작품을, 나의 이직문제에서 보이는 아빠와 나의 뚜렷하게 상반된 견해 때문에 가뜩이나 토라지기 일쑤였던 나날이었을 때 손에 잡았었다. 내 아빠한테도 이렇게, 툴툴거리는데 남의 부자지간을 봐서 뭣한담. 했지만, 작품을 읽으며 깨닫는 바에, 내가 아빠에게 먼저 손을 내밀 수도 있겠다, 싶은 마음이 들자마자 바로 읽었더라는 것.

 

 

 

처음 학교를 들어갔을 때, 남들과 다르게 (서양 인형처럼 생긴) 도시에서 온 예쁜 여자아이에게 1점차로 2등을 하는 것으로 시작해 기분좋은 열등감을 느끼게 되면서, 다음 시험을 마음에 드는 여인과의 혼인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기다린다. 드디어 기말고사를 보는 날, 밤새 잠을 자지 않고 야릇한 사랑 같은 흥분된 마음으로 책상에 앉아 기다리지만, 그해부터 시험 방법이 바뀌어 마오 주석의 어록 다섯 구절을 외우면 2학년으로 바로 진급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그는, 단 1점차이로라도 도시에서 온 여자 아이를 넘어설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그것은 도시와 농촌 사이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빈부와 귀천의 차이를 일깨워주었으며 태생적인 도시와 농촌의 편차를 인식하게 해주었다. 그것은, 그가 영원히 농촌의 대지를 벗어나고 싶어했던 시발점이었고, 영원히 넘을 수 없었던 그 1점에 지나지 않는 인생의 편차였기에 그는 더 집착했을런지도 모른다.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인해 둘째 누나와 그, 둘 중 한 명은 남아서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아버지는 이야기하셨고, 둘재 누나는 그에게 고등학교 진학을 양보함으로써 자신을 희생한다. 하지만, 큰 누나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약간이나마 돈을 벌어 부족한 가계를 보충하기 위해, 고등학교 2학년 1학기를 끝으로 학업을 접고, 작은 아버지가 일하고 계신 신샹 시멘트 공장에서 사촌형 수청과 함게 일을 하면서도 그가 가진 욕망, 글쓰기는 놓지 못한다. 후에, 군대 간부의 도움으로 자신의 원고를 발표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지만 장거리 전화를 걸어온 형의 대답은_ “롄커야, 네가 입대한 뒤에 어머님이 매일 밥 하느라 불을 땔 때마다 네가 쓴 소설 원고를 불쏘시개로 써버렸어. 몇 쪽씩 찢어서 불에 태워버렸지.

 

 

‘아버지’는, 그, 저자에게 죄업으로 남아있다. ‘어쨌든 우리 아버지가 전쟁 기간에 병으로 쓰러지신 것은 내가 농촌을 벗어나 군대에 들어갔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대목만 보아도 알 수 있는데, 실재로도 그가 군에 입대한 것은, 연말에는 농토에서 벗어나고 말겠다는 것. 오로지 그 하나였던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16밀리 영사기를 들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영화를 상영해주는 장사가 유행했는데, 영화를 한 편 상영하는데 드는 비용이 10위안이었다. 그의 수중에는 17위안이 있었지만, 그의 쩨쩨한 성격, 절약 정신, 그리고 당시의 가난한 형편이라는 것도 있었겠지만, 어려서부터 아버지에 대한 극진한 효성과 사랑을 몸에 익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아버지가 병상에 계실 때,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한 우리 집은 좋은 세월을 보내기 어렵다.’는 사악한 생각이 똬리를 트는 것으로 아버지의 임종을 재촉한 것,이 원인이라 말한다.

 

 

 

작품이, 내 마음을 얼마나 움직일 수 있을까, 싶었던 것은, 그와 나의 나라가 다르다,는 까닭이 아니라 그저 중국의 역사를 알지 못하는 내게, 그의 시대상이 오롯하게 다가올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오다가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것은 아니냐,와 직결된다. 그래서, 소설인 줄 알았던 작품이 에세이임을 알아차렸을 때, 내심 걱정되는 것을 그대로 노출시켰던 것이다. 소설이 아닌 에세이를 접할 때는 작가가 가지고 있는 본연의 깊은 울림이 있는데, 그걸 느끼지 못할가 두려웠던 게지, 싶다. 그래서, 전에 접했던 「딩씨 마을의 꿈」을 너무 괜찮게 읽은 터라, 작가를 관찰해보자,에서 시작된 책 읽기였음을 고백한다. 작품은, 아버지에 대한 회상 중에서, 그리움보다는 죄스러운 마음이 더 큰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렇게 작품을 내어서라도, 아버지에 대한 죄업을 씻을 수 있었을까. 늘 그렇지만, 부모에 대한 마음은, 정성을 다해도 모자라다는 것. 아니, 정성을 다 하지 못하니까, 그러니까 모자라다는 거. 그래, 그렇지. 서평을 쓰는 오늘은 아빠에게 전화 한번 하지 않았는데, 아빠에게 지금 전화를 걸어야겠다. 지금은 집이 아닌 밖에 나와있어서 더 마음이 무겁지, 싶다. 오늘도 감사하다고,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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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소녀들
안드레아스 빙켈만 지음, 서유리 옮김 / 뿔(웅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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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를 느끼는 것에 있어서에도 강도가 있다고 가정할 때, 극도의 공포감까지 밀어넣을 수 있는 상황은 어떤 것이라 생각하는가. 물론 이것은, 개개인의 차이라서 섣불리 ‘사람은 ~에서 가장 공포를 느낀다’라고 명확하게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한번쯤은 생각해 볼 수도 있는 문제가 아닐까. 가령, ‘너를 해치려는 자, 혹은 것을 볼 수 없다.’ 같은 것은 어떨까. 이것은 현재 폭풍적으로 상영되고 있는 「블라인드」 를 연상시킬 수 있는데, 극중 싸이코패스 명진(양영조 분)의 “너 나 보여? 난 너 보이는데”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온 몸에 돋는 소름을 주체할 수 없더랬다. 보이지 않는다, 혹은 볼 수 없다,는 것은 어둠 속에 나동그라지게 만들어버리는 까닭에 그것을 빌미로 무기력해지기 충분하다. 세상에 노출된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당신의 이야기일런지도 모른다. _ 당신이 이 작품에 빠져든다고 가정할 때, 말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방어 혹은 대처할 수 있을 것인가.

 

 

 

‘내 시선을 피할 수는 없어. 난 너의 얼굴을 알고 있으니까!’ - 따뜻한 바람이 귀를, 빨간 머리카락을, 흰색 여름 원피스를 살랑거리게 나풀거리게, 펄럭이게 만들 만큼 그네 타는 것에 도취된 소녀가 있다. 아이는, 어지러움에 그네가 저절로 멈출 때까지 가만히 있다가 고요함이 찾아드는 동시에, 누군가 있음을 알아차린다. 하지만, 아이는 볼 수 없다. 아이는, 깊고 아득한 까만 바탕만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까닭이다. 그렇게 아이는 사라진다, 감쪽같이. 그로부터 10년 후, 10살의 빨간머리의 주근깨를가진 역시 깊고 아득한 까만 바탕만을 보는 눈을가진 아이, ‘사라’가 사라진다....!

 

 

 

작품은, 여러 시선을 교차시킨다. 사라진 소녀, 사라 - 여형사 프란치스카 - 10년 전 사라진 소녀, 지나의 오빠인 막스 웅게마흐 - 그리고, 범인. 바로 전, 「인어의 노래」에서도 여형사, 프로파일러, 범인의 시선이 각기 교차되는 것이, 인물의 심리를 더욱 더 세밀하게 묘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엄지 손가락을 흔쾌히 추켜들었던 서평을 쓴 적이 있다. 역시 「사라진 소녀들」에서도, 앞서 말했듯, 시선의 동선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지지만, 그것을 숫자 1,2,3,4…로 써넣음으로 시선 교차가 이루어지는 것에 불만이 생겼던 것. (하지만 그 방법이 시선의 동선이 명확하다는 점을 모르진 않다.) 특히, 책을 처음 시작하는 1부에서는 인물 소개가 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바로바로 끊길 수 밖에 없었는데, 그 부분은 무척이나 조잡하다는 느낌마저 들었음에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의 당사자(인물)을 알게 되니, 2부로 넘어갔을 땐 한결 나아졌다. 물론, 이야기 자체가 인물 소개에서 사건으로 넘어감과도 연관성이 있지만 말이다.

 

 

 

범인은, 유년기에 부모에게서 받은 학대, 무관심으로 방치된 현대인, 혹은 우리들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그는 그 때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며 자신보다 약하다고 생각되는 어둠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어린 아이들을 자신이 키우고 있는 곤충 (뱀, 거미)의 우리 속에 집어 넣고 아이의 행동 양상(부드러운 굴곡, 떨림과 흔들림)을 낱낱이 살피고 즐기며 자신의 성욕을 분출해낸다. - 하지만, 이 작품, 여타의 작품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열린 범행’... 범인은 아이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작가는 친절하게 일러주지 않는다. 그것은 작가의 의도일지도 모른다. 범행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그것이 공포가 아니라,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아이가 느끼는 두려움이 나의 몸 두려음의 신경계를 건드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난, 작품을 접하는 도중 마다마다에 내 몸에 거미가 지나가고 있는 듯한 착각에 몸을 부르르 떨며 몸을 털어내게 되는 것. 그런데, 당신도 예외는 아닐텐데...._ 혹시 두려움이 사람에 의한 것이라고,만, 생각하는가.어쩌면 두려움은 또 다른 생김새를 가진 어떤 보이지 않는 추상적일 수가 있다는 것. 당신도, 작품을 읽으며 그것과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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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3-08-03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미있게 읽었네요.
인어의 노래는..아직..
창백한죽음은..읽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