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
서하진 지음 / 현대문학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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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즈음에 김이설 작가의 「환영」을 읽은 직후 ‘여성의 삶’에 대해 관심이 갔다. 뿌리에서부터 우울해서, 어느 부분에서라도 웃음 한 모금 제대로 퍼올리지 못하는 윤영의 삶에서 머리가 아플 정도로 혼동과 지진을 전해받았던 때가 여성들의 또 다른 삶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무렵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눈길이 가 닿았던 서하진의 「나나」였다. 표지의 묘연의 여인은 매혹적이라기보다는 무척이나 음울해 보인다. 침대의 귀퉁이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긴 하지만, 나는 그녀의 옆에서 바라보고 있기에 정확히 어떤 표정으로 어떤 물체를 바라보고 있는지 알지는 못하지만, 그녀의 목덜미에 가 있는 오른 손이, 그녀의 허벅지에 얹어진 왼 손이, 그녀의 곧은 두 다리가, 바닥에 닿지 못하고 떠 있는 두 발이 처연해보이는 건 사실이다.

 

 

 

 

 

기억은 스쳐 가고 잊히지만 때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 [p135] 인영은 정섭과 술 한 잔 하는 자리에서 그 애의 이름을 듣는다. 정섭이 꺼낸 “나나말이야…….” 나나, 그녀는 누구일까. 나나라는 이름이 입가에 맴돈다. 눈이 수북히 쌓인 밤에 국도. 쿵, 범퍼가 부딪히는 소리가 나며 그의 몸에 묵직한 충격이 전해왔다. 앞차의 여자가 내려 도로 위의 검은 물체에게 다가간다. 죽은 노루. 그게 그녀와 첫 만남이었다. 그녀, 애란. 인영과 그녀의 거리가 가까워질 무렵, 인영의 집에서 마주친다. 인영, 애란, 나나 ㅡ 이마를 가린 머리카락을 슬쩍 넘기는 인영의 마른 손가락을 애란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가르마 부분, 하얀 세치가 두어 올 솟아 있었다. 그를 무릎에 누이고 찬찬히 세치를 뽑아주고 싶었다. 오래 함께 산 사람들처럼, 가만히 좀 있으라 나무라면서. [p143] 인영이 나나에게서 벗어날 수 있기를, 나나에게 무참하게 휘청이는 그를, 애란이 구출해낼 수 있었음,하고 간절히도 바랐다. 하지만…….

 

 

 

 

 

실은 나, 책을 다 읽은 후에 어떤 것을 느껴야 좋을지 몰랐다. 팜므파탈의 전형인 나나의 영리함의 과부하로 오류의 결과인 영악함과 결코 좋은 일에 쓰일 수 없는 매혹적임을 느껴야 했던 걸까, 평생 이복누이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그를 안쓰럽게 느껴야 했던 걸까. 그도 아니라면, 뭘까. 싶었다. 작품해설을 도중에 읽다가 말았지만 세속적인 욕심때문에, 외로움때문에 몇 겹씩이나 옷을 껴입는 나나를 이해해야 했던 걸까. - 어쩌면, 결국, 또, 삶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해한거라곤, 그들을 불행하게 할 걸 알면서도 그 삶 속으로 다시 회귀했다는 것, 그 뿐이었으니까. 나나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인영, 거짓으로나마 부를 누리고 싶어했던 나나, 새롭게 찾아온 사랑을 잡고 싶어했던 애란, 번듯한 소설가로 등극하고 싶었던 정섭. 그 누구도 자신의 삶에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또, 삶. [ps.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은 사람과 소통을 하고 싶기도 하다. 이 책에 타자는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서평이 별로 없음에 아쉬움이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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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3-08-03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은 걸레...
삶은 계란...

인터넷 독서록,
익숙치않아서...이제 겨우 더듬더듬 ..그러고 있죠.^^;
아직 종이에 끄적끄적 독서록을 일기처럼 쓰는지라....
저역시 읽은,
하아~~소통. 집에가서 지난 독서록을 좀 보고..
저도 조금 뵈드릴게요..엿보기만하면 염치없으니...
잘읽고 가요.^^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 이병률 여행산문집
이병률 지음 / 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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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벌써 칠 월이구나. 그렇잖아도 장마 기운이 있는 요즘은 아침에도 습하고 더운 날씨인데, 북적거리는 아침 출근 버스에 에어컨도 틀어주지 않는 박한 기사양반,이라며 입 밖에 내지 않을 욕을 하고 빡빡해서 잘 열리지 않는 창문을 있는 힘껏 열어제낀다. 버스가 달리는 속도만큼 바람이 얼굴을,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버스에서 3-40분 동안 바람을 느끼다가 내가 내릴 버스정류장에서 5분이 걸리는 사무실에 도착해 에어컨을 켜고, 선풍기를 켜고, 모닝커피를 한 잔 타고, 내 자리에 앉아 고작 몇 분, 그 사이는 이병률 작가의 글을 음미하기엔 더없이 좋은 시간이다. 간혹, 점심시간에 점심을 먹고 시간이 약간 남아서 책을 펼칠 때도 있긴 했지만, 얼른 업무 준비를 해야한다,는 것때문인지 마음에 여유가 없는 채로 읽는 것이 전부였던 까닭에, 책을 찾았던 것은 오로지 아침 출근 후 여유있는 그 시간 뿐이었다. 그렇게 근 2주, 이병률 작가가 발간한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는, 아침마다 기분좋은 설레임을 안겨주었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넓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사는 곳은 단지 세상의 조각에 불과했어. 나하고 정말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난 겨우 그 사실을 알았고 그건 충격이었지. 다른 기후 속에서 생각을 하고, 다른 음식을 먹고, 다른 꿈을 살고 있었지. 나의 정반대 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적어도 그 시간에 깨어나서 치열하게 뭔가를 붙들고 있었거든. 난 가능한한 세상의 모든 경우들을 만나볼 거야.” [#1. 심장이 시켰다.] ㅡ 나라는 사람, 여행이라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줄곧 생각해왔는데, 올해 들어서 나름대로 여기저기 찾아다니면서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 싶더랬다. 내가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닌 것도 아니고, 아주 멀리까지 다녀온 것도 아니라서 여행이라고 하기엔 너무 거창해서 마실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기도 하다. 난 지금, 마실에 목이 마른 상태다. 다음 달에 있을 일주일 간의 휴가 동안 어디를 갈지 아직 생각하진 않았지만,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휴가를 보내겠다, 생각하며 책의 도입부를 살랑거리며 넘기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위로 받기엔 바람부는 날이 좋다. (…) 세상 그 어떤 시간보다도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시간이 좋다. (…) 사랑하기에는 조금 가난한 것이 낫고 사랑하기에는 오늘이 다 가기 전이 좋다. [#10.] 이번 책에는 여행,만이 담겨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행에세이로 묶여져 있긴 했지만, 작품은 이병률의 사랑타령으로 가득했다. 사실 제목부터가 그랬다.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라니. 진부하기 그지없지만, 이보다 마음이 살랑거리게 만드는 솔직한 말이 또 어디있으랴. 서평을 쓰려니, 어떤 말이 더 필요할까 싶다. 어떤 말을 쓴다 해도, 마음을 서평에 다 담아내진 못할 것을 알고 있는데 말이다. 나는 아마 이병률 작가의 다음 작품을 라면봉지에 콩을 틔우던 불가촉천민처럼 기다리고 있으리. 그리고 여담으로, 이틀 전 그에게 서운함을 토로했던 것이 여전히 마음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는데 서평을 쓰려고 포스트잇 플래그를 붙인 곳을 손으로 어루어만지다가 [#10]을 눈으로 보고 읽고 손으로 타이핑했을 무렵, 점점 빛바래짐을 느꼈다. 사랑하기에는 오늘이 다 가기 전이 좋다던 이병률 작가의 말처럼, 오늘 그에게 냉담한 말 대신 따뜻한 말 한 마디를 건네야겠다, 생각한다.

 

 

 


주황은 배고픔의 색깔이다. 사랑을 하고 싶은 사람, 사랑에 굶주린 사람, 사랑에 병든 사람이나 병적인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은 그래서 주황이다. 주황은 마지막 소원의 색이기도 하다. 소원을 불에 태운다면 그 색이 주황이다. 사실 한번 옮겨붙으면 끄기 어려운 불과도 같다. 한 대상에게, 한 인간에게 물입하면 몰입할수록 주황은 더 짙어지고 뿌리를 내린다. [#28.네가 골라놓은 당근을 먹었다.]

 


당신이 좋다,라는 말은 당신의 색깔이 좋다는 말이며, 당신의 색깔로 옮아가겠다는 말이다. 하지만 당신 색깔이 맘에 들지 않는다,라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했을 경우, 당신과 나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지켜야 하는 사이라는 사실과 내 전부를 보이지 않겠다는 결정을 동시에 통보하는 것이다. [#29. 조금만 더 내 옆에 있어 달라고.]


 

살면서 모든 것을 털어놓아도 좋을 한 사람쯤 있어야 한다. 그 한 사람을 정하고 살아야 한다. 그 사람은 살면서 만나지기도 한다. 믿을 수 없지만 그렇게 된다. 삶은 일방통행이어선 안 된다. 루벤 곤잘레스처럼 우리는 세상을 떠날 때만 일방통행이어야 한다. 살아온 분량이 어느 정도 차오르면 그걸 탈탈 털어서 누군가에게 보여야 한다. 듣건 듣지 못하건 무슨 말인지 알아듣건 알아듣지 못하건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 무조건 다 털어놓을 한 사람. [#36. 무조건]

 


당신한테 내가 어떤 사람이었으면 하는가요? 사람을 좋아하는 일은 그러네요. 내가 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의 ‘상태’를 자꾸자꾸 신경쓰게 되는 것. 문득 갑자기 찾아오는 거드라구요. 가슴에 쿵 하고 돌 하나를 얹은 기분. 절대로 나는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한 적 없는데 그렇게 되는 거에요.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와 있다는 건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날씨처럼, 문득 기분이 달라지는 것. 갑자기 눈가가 뿌예지는 것. 아무것도 아닌 일에 지진 난 것처럼 흔들리는 것. [#39. 당신한테 나는.]


 

사는 데 있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것이지만 그것을 알기에 사랑은 얼마나 보이지 않으며 얼마나 만질 수 없으며 또 얼마나 지나치는가.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하고 지나치는 한 사랑은 없다. 당장 오지 않는 것은 영원히 오지 않는 이치다. 당장 없는 것은 영원히 없을 수도 있으므로. 그렇ㄷ라도 사랑이 없다고 말하지는 말라. 사랑은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불안해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믿으려는 것이다. 사랑은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해지는 걸 못 견뎌하는 것이다. 사랑이 변했다,고 믿는건 익숙함조차 오래 유지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뿐이다. 사랑으 있다. 사랑이 없다면 세상도 없는 것이며 나도 이 세상에 오지 않은 것이며 결국 살고 있는 것도 아니질 않은가. 그렇다고 사랑만이 제일이라고 생각하지도 말라. 사랑은 한다고 해서 다가 아니라 사랑할 때의 행복을 밖으로 제대로 드러낼 수 있는 상태가 사람을 키운다. 애써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넘치는 상태만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47. 사랑도 여행이다.]

 


누구를 강렬하게 좋아하는 마음이 빨강이라면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도 빨강입니다. 문득 치받쳐오르는 것도, 그게 그렇게 오래 달라붙어 있는 것도 빨강입니다. 적어도 사랑은 붉게 오리란 걸 알고 있습니다. 예감은 그런 것 아닌가요. 난데 없는 것. 금방이라도 붉게 물들어버릴 것 같은 것. 사로잡히는 것. 문득 어느 날 첫눈이 내려도 흰색의 눈발이 아니라 붉은 눈발이 흩뿌릴 것 같은 것. 그렇게 심장의 통증이 시작되는 것. [#55. 당신이 행복할 것이니 난 미안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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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까지 직업에서 곤란을 겪지 않는 법 - 20대에 만나야 할 100가지 말
센다 다쿠야 지음, 최선임 옮김 / 스카이출판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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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어야겠다, 생각한 때와 일이 나에게 맞지 않다,는 생각이 비례하던 때였다. 함께 일하는 사람이 싫은거라면, 그동안의 내공을 발휘해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헤쳐나갈 수 있을거라 생각했으나, 일이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드니 가지고 있던 모든 의욕이 추락하더란 말이다. 또, 일이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서 무척이나 당황스러워서, 혼자 끙끙 앓으며 때로는 막막한 마음에 울기도 많이 울었었다. 퇴근하고 집에 걸어가는 한 시간 이십 분동안 이 일이 내게 맞지 않는다면,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어떤 것이 있고, 나는 그 문항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들에 시간을 많이 할애했다. 아직도 그 문제는 -ing로 현재진행형지만, 내가 이 일을 배움으로써 ‘득’이 되면 됐지, ‘실’은 될리 없다는 생각과 나의 꿈인 그것은 이 일과 절대 별개일 수 없다는 생각에 끊임없이 해야한다, 혹은 해봐야겠다,라는 생각으로 굳어가는 상태다. 평소 자기계발은 진부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들만[왜 매번 내가 생각한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의문이지만] 늘어놓고 있어, 그때뿐이라며 읽지 않는 이유 중 하나였는데, 이번에는 내가 필요하니 선뜻 손이 내밀어지더란 것.

 

 

 

 

즐거운 일은 없어도, 즐거운 듯이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있다. 처음부터 일이 즐겁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완전히 새로운 일이었고, 처음 2-3주 동안은 새로운 것에 대해 배우는 날들이 설레였다. 하나를 배우면 둘을 배우고 싶어지는 그러한 일이었는데, 그것도 잠시였더란 것. 그것은 아마 내 마음가짐부터가 잘못된 것이 아니었나, 싶다. 어느 순간부터 이해할 수 없다,가 아니라 이해하기 싫다,로 변모되었던 게다. 즐거운 일이 왜 없겠는가. 분명 자기에게 맞는 일은 즐거울텐데. 물론, 그것이 오래 가든, 오래가지 못하든 그것은 개인의 차이에 달렸겠지만. 나는 으레 일을 할 때, 웃으면서 하는 일보다는 인상을 찌푸려진 채로 하는 때가 대부분이다. 가끔 책상 앞에 놓인 거울을 슬쩍 들여다 볼 때마다 놀랄 때가 많은데, 그건 그 때문이다. 일이 하기 싫어서 혹은 너무 많아서 인상을 찌푸릴 때도 있겠지만, 그게 그러다보니 습관이 된 모양이다. 어차피 내가 맡아서 해야하는 일이라면, 웃으면서 즐겁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최면을 걸어본다.

 

 

 

 

기한도, 합격점도 모두 스스로 정한다. 사회인의 공부 기한과 합격점은 모두 스스로 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얼핏 보면 굉장히 편한 것 같다. 하지만 정말로 좋아하는 것을 깊이 파고들려고 마음먹으면, 기한도 합격점도 굉장히 엄하게 잡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 정한 기한이나 합격점이 학교에서 주어진 그것보다 느슨하고 질질 끌게 되면, 별로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사람은 정말로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엄해진다. <check point. 다른 사람이 정해 주는 것은 하나도 없다. 자기가 좋을 때 시작해 자기가 좋을 때 끝내면 된다.> 바로 이번 주부터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한 번 시작했다가 실패한 공부는 두 번은 안 하게 되는데, [이건 정말 나쁜 버릇이자 못된 습관이다.] 배우고 싶다는 욕구도 강했고, 이 공부를 해야 내가 지금 일을 하는 것도, 또 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에도 도움이 될거라는 생각에 다시 시작하게 되었는데, 100% 동감하는 까닭에 공부를 시작했을 때 이 부분을 읽게 된 것은 참 다행이라 생각한다. 학교를 다닐 때 누가 방망이를 들고 쫓아오는 것을 피하듯 헐떡거리며 정해진 분량을 공부할 때와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이고 하고 싶은 것이다, 생각하니 내가 정해놓은 것까지는 꼭 하고 자야지, 하는 마음에 다음 날 신체적인 무리[가령, 피곤이라던가 멍한 상태]가 올 걸 알면서도 하게 되는 것. 그게 정답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름, 의미를 부여해 즐겁다,고 생각한다. 뭐, 그거면 된 것 아니겠는가.

 

 

 

 

결단에 시간을 들이면 들일수록 ‘역시 그만둘까’라는 마음이 든다. 인간은 망설이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최종적으로 현상 유지를 선택하게 되어 있다. 배우려고 했던 건축 스케치는 언제쯤 배울것인지 아직도 결단이 나질 않았다. 그때는 하려고 마음먹고 찾아보다가 시간 30분이 맞지 않아 갈팡질팡하고 있었는데, 1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아직 고민 중이다. [지금도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왜 선뜻 하질 못하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스스로 결단하는 것 외에는 결단이 아니다. 누구와 상담해도 좋다. 그 대상이 몇 명이어도 좋다. 하지만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최종적으로 결단을 하는 것은 반드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스스로 결단한 것 이외에는 일체 결단이라 부를 수 없다. 결단에 실패해 인생을 망쳤다고 하자. 그것은 100% 자기 책임이며, 다른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단은 즐겁다. 인생을 망친 것처럼 보여도, 결단하지 않는 인생 같은 건 죽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번 일로 가장 애먹은 사람 중 하나가 옆에 있는 남자친구다. 어쩌면, 내가 이것 혹은 저것 이라고 똑부러지게 결정하지 않는 한, 맨날 똑같은 문제로 고민하는 나에게 지겹다 소리 한 번 하지 않고 오히려 다독거리며 ‘난 이렇게 생각해. 그래서 네가 이렇게 했으면 좋겠어. 하지만 선택은 네 몫이야.’라고 말을 하며, 나로 하여금 현재 상황을 주관적이 아닌 객관적으로 보게 한다. 그래서 [언제까지 유효할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의 결단을 내리게 하는데 큰 도움을 준 사람. 진정으로 자신을 위해 하는 말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도움을 청하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저자의 말처럼 결단은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이라는 것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읽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반발하게 만들 정도로 나와 견해가 다른 점도 있었다. 문구들은 어떤 자기계발에서도 볼 수 있는 말들의 총집합이어서 참 상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모르고 책을 읽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하지만 그런 책을 어느 시기에, 어떤 상태에 놓여 있을 때 읽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이번에 꽤 많은 도움이 되었다. [사실 내가 공감할 수 있었던 부분은 열다섯 안팎이었던 것 같지만.] ㅡ 며칠 전, “실장님, 전 이 일이 맞지 않는 것 같아요.”라고 내가 이야기했고, “이쪽 계통에 들어오면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대부분이에요.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 다르고, 제약도 많으니까. 나도 입사하고 이 일이 맞지 않는 것 같다고 몇 년 동안을 생각했어요. 그런데 하다보니 이 일을 5년이 넘도록 하고 있네요.”라고, 실장님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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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추구 2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공경희 옮김 / 밝은세상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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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선물을 받아 ‘곧 읽어야지!’ 생각하고 있던 더글라스 케네디의 「빅 픽처」가 2년 동안 책장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을, 이번에 출간된 그의 작품인 「행복의 추구」를 펼치려고 할 때, 우연찮게 보게 되었다. 아마 먼지가 한가득 쌓였겠지, 라며 괜히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어서 아주 잠깐, 「빅 픽처」를 먼저 만나볼까, 생각했지만, 그것도 잠시 「행복의 추구」의 고전틱한 표지에 넋을 잃은 것마냥 쳐다보며, 이번 책이 좋으면 너도 곧 꺼내서 읽으마, 했다. 그런데 상당히 흥미롭다. 무척이나 개인적인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오래 전에 책에 관심을 처음 두던 계기를 만들어준 [구성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욕을 많이 먹고 있는, 하지만 영원히 나에게는 고마운 작가로 기억될] ‘기욤 뮈소’와 비슷한 문체였다,고 생각했던 까닭이다. [물론, 책을 다 읽은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모든 건 너의 실수로 빚어진 일이었다 하더라도 넌 그 잘못된 판단때문에 벌어진 일들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을 거야. 늘 아픔이 따라 다니겠지. 그런 점에서 인생은 불합리해. 작고 커다란 슬픔들이 차곡차곡 쌓이면 그게 바로 인생이 되는 것이지. 사람들은 그 모든 슬픔을 끌어안고 사는 법을 터득하게 되는 거야. 생에서 슬픔은 필수적이야. 슬픔이 우리에게 생의 중요한 가치를 깨닫게 해주지. 신이 술을 인간에게 부여해준 건 생의 필연적인 비극성 때문일지도 몰라.” (1권 55p)

 

 

 

 

케이트 말론ː은 엄마의 장례를 다 마치고, 세상을 떠난 엄마의 아파트의, 엄마의 침대에서, 엄마의 베개를 꼭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가 전화벨이 울림을 느끼고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ㅡ“미안해요. 잘못 걸었어요.” 그녀는, 부모님과 아는 사이라고 주장하는 새러 스마이스라는 여성에게 조문 편지와 만나자는 전화를 받지만, 그녀는 한동안 세상일에 거리를 두고 아들과 단출한 시간을 갖고 싶다,며 조문 편지에 감사드린다고 답장을 써보낸다. 그러자 그녀 앞으로 또 다시 우편물이 배달된다. 그녀가 살아온 날들의 축소판인 사진들이 있는 사진첩과 편지 한 장. ‘내게 전화해야 될 것 같은데 아닌가요?’ 그렇게 그녀는 새러 스마이스의 집에 가게 되고, 그곳에는 군복 차림의 아버지 사진, 가난아기인 그녀를 안은 아버지 사진, 대학 시절 그녀의 사진, 첫돌이 막 지난 아들 에단을 안고 있는 그녀의 사진, 그리고 젊은 남녀의 흑백사진이 있었다. 젊은 남녀는 새러 스마이스와 그녀의 아버지 잭 말론. 이윽고 새러 스마이스가 말한다. “잭 말론, 즉 케이트의 아버지는 내가 평생 사랑한 남자였어요.

 

 

 

 

코네티컷 주 하트퍼드의 보수적인 중산층 부모님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새러 스마이스ː는 독립적인 삶을 추구하는 까닭에 대학 졸업 후에 뉴욕에 정착해 <라이프> 지에서 일을 하며, 저널리스트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오빠 에릭이 주최한 추수감사절 전야제에서 그를 만났다. 잭 말론. 군가가 내 손에 맥주병을 쥐어주었다. 바로 그때 그를 보았다. 짙은 카키색 군복을 입은 남자. 그는 파티 장을 휘둘러보다가 잠깐 동안 내게서 시선을 멈추었다. 딱 일초쯤, 아니면 이초? 그가 미소를 지었고, 나도 미소를 보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잠시 힐끗 서로를 바라보았을 뿐……. 그렇게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되고 하룻밤을 보내지만, 종군기자인 그는 9개월 뒤에 꼭 다시 오리라,는 약속을 하고 떠나야만 했다. 헌데, 무슨 이유인지, 매일 같이 편지를 쓴다던 그에게서는 편지 한 통이 없다. 이별을 예감한 그녀는 그것을 온 몸으로 겪어내고, 다시 몸을 추스를 때 즈음 ‘미군/미국 주둔지, 베를린’이라고 찍힌 엽서가 날아왔다. <미안해요. 잭>, 그리고 그녀는 조지 그레이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던 이별이 남긴 상처였을까. 그녀의 사랑에는 더이상 열정이 없었다. 그녀가 조지의 청혼을 받아들인 이유는, 그저 그가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는 것. 그래서였다. 결국 처음부터 삐걱댄 그들의 결혼 생활은 오래 지나지 않아 파경을 맞았고, 더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새러. - 추수감사절 이후, 4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그를 만난다. 그의 옆에는 그의 아내 도로시와 그의 아들 찰리가 있다.

 

 

 

 

처음에는 사랑이 나를 온전한 존재로 만들어줄 거라 기대했다. 사랑이 내 불완전한 면을 보완해주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찾아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나에게 사랑은 아픔을 들춰내고 들쑤시는 경험일 뿐이었다. 사랑은 온갖 감정의 모순들로 가득 찬 허구의 세계일 뿐이었다. (1권 p324) 4년 만에 재회한 그들은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불같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결국 도로시에게 새러와의 관계를 알린 잭에게 도로시는, 일주일에 이틀은 당신이 출장에 가는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집에 돌아오면 이전처럼 나와 찰리를 대해줘라,라는 조건을 달게 된다. 그들은 그렇게 일주일에 한번씩 그들만의 외식을 즐긴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새러의 오빠 에릭이 어느 날 찾아와서 덜덜 떨며, 그들이 나에게 이름을 대라고 하고 있어. 라고 얘기한다. 학창 시절에 사회주의운동에 잠시 가입했었는데, 그때에 함께 가입했던 당원의 이름을 밀고하라는 것. 그에게 선택을 하라는 것이다. 밀고자가 되든지, 아니든지. 에릭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이며, 에릭의 문제로 몇 백, 몇 십 장의 책 장 끝에 서 있는 잭과 새러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지는, 직접 보고 확인해보시길 바란다.

 

 

 

 

작품을 읽으며 미국의 시대상 배경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금 미국은 굉장히 개방적인 나라 중 하나인데, 동성애자를 도덕적인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자신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아들이기 때문에 더 그랬을런지도 모르겠다.]과 미혼모는 윤리적인 문제에 휩싸여 직장에서도 채용될 수 없다는 것과, 혼자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을 도덕에 반하는 일이라 여겨 집주인은 세입자를 임의로 내보낼 수 있다는 것, 또한 결혼한 여자는 일하지 않는 게 나라의 오래된 관습이라고 말하는 것, 그리고 공산당을 색출하는 것. 지금 미국의 모습으로서는 전혀 상상 불가능한 이야기들이 책 속에 들어앉아 혼란을 주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도중에 1950년대 미국 사회를 검색해보니, ‘여성은 남성의 보호 아래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전통적인 사상이 아주 깊이 침투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조지 그레이와 새러 스마이스의 결혼 생활 중, 조지가 하는 행동이 딱 그짝이다. 생각하니 또 한바탕 열이 오르려고 한다.

 

 

 

 

난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새삼 깨달았어. 삶이란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재앙이라는 사실을……. 인생이라는 이야기에는 사실 해피엔딩도 비극적인 결말도 없어.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간직한 사연이 있지만 해결을 보지 못하고 그냥 끝나 버리게 돼. 대개는 혼란의 와중에 갑자기 끝나 버리지. 우리의 생이 종착점이 있는 아수라장이라는 사실만 안다면……” (2권 p362) 1권을 다 읽었을 때에는, 사랑, 그 지독한 독사과, 라고 생각했고, 2권을 다 읽고 나서는 행복, 그 가엾은 왕비,라고 생각했으며, 지금은 인생, 그 독살맞은 백설공주,라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이, 달건 쓰건 시건 맵건 짭쪼롬하건간에, 어찌됐건 나,만의 인생인 것이다. 내 행복을 누군가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인생에서 행복해지려는 욕구를 빼면 뭐가 남죠? 결국 나를 책임질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다는 거죠.” (1권 p146) 사실 나, 새러의 인생을 이해하거나 가엾게 여기거나 두둔하거나 혹은 부정하거나 세차게 비판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도 그녀의 인생인 까닭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속의 새러나, 케이트나, 메그나 그 어떤 누구도 행복해보이는 사람은 없다. 행복해지려고 하는 사람들뿐. 그들이 행복해졌으면 한다. 그래서 그 행복이 그들의 인생을 위로하길, 진심으로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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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추구 1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공경희 옮김 / 밝은세상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오래전 선물을 받아 ‘곧 읽어야지!’ 생각하고 있던 더글라스 케네디의 「빅 픽처」가 2년 동안 책장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을, 이번에 출간된 그의 작품인 「행복의 추구」를 펼치려고 할 때, 우연찮게 보게 되었다. 아마 먼지가 한가득 쌓였겠지, 라며 괜히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어서 아주 잠깐, 「빅 픽처」를 먼저 만나볼까, 생각했지만, 그것도 잠시 「행복의 추구」의 고전틱한 표지에 넋을 잃은 것마냥 쳐다보며, 이번 책이 좋으면 너도 곧 꺼내서 읽으마, 했다. 그런데 상당히 흥미롭다. 무척이나 개인적인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오래 전에 책에 관심을 처음 두던 계기를 만들어준 [구성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욕을 많이 먹고 있는, 하지만 영원히 나에게는 고마운 작가로 기억될] ‘기욤 뮈소’와 비슷한 문체였다,고 생각했던 까닭이다. [물론, 책을 다 읽은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모든 건 너의 실수로 빚어진 일이었다 하더라도 넌 그 잘못된 판단때문에 벌어진 일들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을 거야. 늘 아픔이 따라 다니겠지. 그런 점에서 인생은 불합리해. 작고 커다란 슬픔들이 차곡차곡 쌓이면 그게 바로 인생이 되는 것이지. 사람들은 그 모든 슬픔을 끌어안고 사는 법을 터득하게 되는 거야. 생에서 슬픔은 필수적이야. 슬픔이 우리에게 생의 중요한 가치를 깨닫게 해주지. 신이 술을 인간에게 부여해준 건 생의 필연적인 비극성 때문일지도 몰라.” (1권 55p)

 

 

 

 

케이트 말론ː은 엄마의 장례를 다 마치고, 세상을 떠난 엄마의 아파트의, 엄마의 침대에서, 엄마의 베개를 꼭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가 전화벨이 울림을 느끼고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ㅡ“미안해요. 잘못 걸었어요.” 그녀는, 부모님과 아는 사이라고 주장하는 새러 스마이스라는 여성에게 조문 편지와 만나자는 전화를 받지만, 그녀는 한동안 세상일에 거리를 두고 아들과 단출한 시간을 갖고 싶다,며 조문 편지에 감사드린다고 답장을 써보낸다. 그러자 그녀 앞으로 또 다시 우편물이 배달된다. 그녀가 살아온 날들의 축소판인 사진들이 있는 사진첩과 편지 한 장. ‘내게 전화해야 될 것 같은데 아닌가요?’ 그렇게 그녀는 새러 스마이스의 집에 가게 되고, 그곳에는 군복 차림의 아버지 사진, 가난아기인 그녀를 안은 아버지 사진, 대학 시절 그녀의 사진, 첫돌이 막 지난 아들 에단을 안고 있는 그녀의 사진, 그리고 젊은 남녀의 흑백사진이 있었다. 젊은 남녀는 새러 스마이스와 그녀의 아버지 잭 말론. 이윽고 새러 스마이스가 말한다. “잭 말론, 즉 케이트의 아버지는 내가 평생 사랑한 남자였어요.

 

 

 

 

코네티컷 주 하트퍼드의 보수적인 중산층 부모님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새러 스마이스ː는 독립적인 삶을 추구하는 까닭에 대학 졸업 후에 뉴욕에 정착해 <라이프> 지에서 일을 하며, 저널리스트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오빠 에릭이 주최한 추수감사절 전야제에서 그를 만났다. 잭 말론. 군가가 내 손에 맥주병을 쥐어주었다. 바로 그때 그를 보았다. 짙은 카키색 군복을 입은 남자. 그는 파티 장을 휘둘러보다가 잠깐 동안 내게서 시선을 멈추었다. 딱 일초쯤, 아니면 이초? 그가 미소를 지었고, 나도 미소를 보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잠시 힐끗 서로를 바라보았을 뿐……. 그렇게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되고 하룻밤을 보내지만, 종군기자인 그는 9개월 뒤에 꼭 다시 오리라,는 약속을 하고 떠나야만 했다. 헌데, 무슨 이유인지, 매일 같이 편지를 쓴다던 그에게서는 편지 한 통이 없다. 이별을 예감한 그녀는 그것을 온 몸으로 겪어내고, 다시 몸을 추스를 때 즈음 ‘미군/미국 주둔지, 베를린’이라고 찍힌 엽서가 날아왔다. <미안해요. 잭>, 그리고 그녀는 조지 그레이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던 이별이 남긴 상처였을까. 그녀의 사랑에는 더이상 열정이 없었다. 그녀가 조지의 청혼을 받아들인 이유는, 그저 그가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는 것. 그래서였다. 결국 처음부터 삐걱댄 그들의 결혼 생활은 오래 지나지 않아 파경을 맞았고, 더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새러. - 추수감사절 이후, 4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그를 만난다. 그의 옆에는 그의 아내 도로시와 그의 아들 찰리가 있다.

 

 

 

 

처음에는 사랑이 나를 온전한 존재로 만들어줄 거라 기대했다. 사랑이 내 불완전한 면을 보완해주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찾아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나에게 사랑은 아픔을 들춰내고 들쑤시는 경험일 뿐이었다. 사랑은 온갖 감정의 모순들로 가득 찬 허구의 세계일 뿐이었다. (1권 p324) 4년 만에 재회한 그들은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불같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결국 도로시에게 새러와의 관계를 알린 잭에게 도로시는, 일주일에 이틀은 당신이 출장에 가는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집에 돌아오면 이전처럼 나와 찰리를 대해줘라,라는 조건을 달게 된다. 그들은 그렇게 일주일에 한번씩 그들만의 외식을 즐긴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새러의 오빠 에릭이 어느 날 찾아와서 덜덜 떨며, 그들이 나에게 이름을 대라고 하고 있어. 라고 얘기한다. 학창 시절에 사회주의운동에 잠시 가입했었는데, 그때에 함께 가입했던 당원의 이름을 밀고하라는 것. 그에게 선택을 하라는 것이다. 밀고자가 되든지, 아니든지. 에릭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이며, 에릭의 문제로 몇 백, 몇 십 장의 책 장 끝에 서 있는 잭과 새러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지는, 직접 보고 확인해보시길 바란다.

 

 

 

 

작품을 읽으며 미국의 시대상 배경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금 미국은 굉장히 개방적인 나라 중 하나인데, 동성애자를 도덕적인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자신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아들이기 때문에 더 그랬을런지도 모르겠다.]과 미혼모는 윤리적인 문제에 휩싸여 직장에서도 채용될 수 없다는 것과, 혼자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을 도덕에 반하는 일이라 여겨 집주인은 세입자를 임의로 내보낼 수 있다는 것, 또한 결혼한 여자는 일하지 않는 게 나라의 오래된 관습이라고 말하는 것, 그리고 공산당을 색출하는 것. 지금 미국의 모습으로서는 전혀 상상 불가능한 이야기들이 책 속에 들어앉아 혼란을 주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도중에 1950년대 미국 사회를 검색해보니, ‘여성은 남성의 보호 아래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전통적인 사상이 아주 깊이 침투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조지 그레이와 새러 스마이스의 결혼 생활 중, 조지가 하는 행동이 딱 그짝이다. 생각하니 또 한바탕 열이 오르려고 한다.

 

 

 

 

난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새삼 깨달았어. 삶이란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재앙이라는 사실을……. 인생이라는 이야기에는 사실 해피엔딩도 비극적인 결말도 없어.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간직한 사연이 있지만 해결을 보지 못하고 그냥 끝나 버리게 돼. 대개는 혼란의 와중에 갑자기 끝나 버리지. 우리의 생이 종착점이 있는 아수라장이라는 사실만 안다면……” (2권 p362) 1권을 다 읽었을 때에는, 사랑, 그 지독한 독사과, 라고 생각했고, 2권을 다 읽고 나서는 행복, 그 가엾은 왕비,라고 생각했으며, 지금은 인생, 그 독살맞은 백설공주,라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이, 달건 쓰건 시건 맵건 짭쪼롬하건간에, 어찌됐건 나,만의 인생인 것이다. 내 행복을 누군가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인생에서 행복해지려는 욕구를 빼면 뭐가 남죠? 결국 나를 책임질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다는 거죠.” (1권 p146) 사실 나, 새러의 인생을 이해하거나 가엾게 여기거나 두둔하거나 혹은 부정하거나 세차게 비판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도 그녀의 인생인 까닭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속의 새러나, 케이트나, 메그나 그 어떤 누구도 행복해보이는 사람은 없다. 행복해지려고 하는 사람들뿐. 그들이 행복해졌으면 한다. 그래서 그 행복이 그들의 인생을 위로하길, 진심으로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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