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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 이병률 여행산문집
이병률 지음 / 달 / 2012년 7월
평점 :
와, 벌써 칠 월이구나. 그렇잖아도 장마 기운이 있는 요즘은 아침에도 습하고 더운 날씨인데, 북적거리는 아침 출근 버스에 에어컨도 틀어주지 않는 박한 기사양반,이라며 입 밖에 내지 않을 욕을 하고 빡빡해서 잘 열리지 않는 창문을 있는 힘껏 열어제낀다. 버스가 달리는 속도만큼 바람이 얼굴을,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버스에서 3-40분 동안 바람을 느끼다가 내가 내릴 버스정류장에서 5분이 걸리는 사무실에 도착해 에어컨을 켜고, 선풍기를 켜고, 모닝커피를 한 잔 타고, 내 자리에 앉아 고작 몇 분, 그 사이는 이병률 작가의 글을 음미하기엔 더없이 좋은 시간이다. 간혹, 점심시간에 점심을 먹고 시간이 약간 남아서 책을 펼칠 때도 있긴 했지만, 얼른 업무 준비를 해야한다,는 것때문인지 마음에 여유가 없는 채로 읽는 것이 전부였던 까닭에, 책을 찾았던 것은 오로지 아침 출근 후 여유있는 그 시간 뿐이었다. 그렇게 근 2주, 이병률 작가가 발간한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는, 아침마다 기분좋은 설레임을 안겨주었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넓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사는 곳은 단지 세상의 조각에 불과했어. 나하고 정말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난 겨우 그 사실을 알았고 그건 충격이었지. 다른 기후 속에서 생각을 하고, 다른 음식을 먹고, 다른 꿈을 살고 있었지. 나의 정반대 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적어도 그 시간에 깨어나서 치열하게 뭔가를 붙들고 있었거든. 난 가능한한 세상의 모든 경우들을 만나볼 거야.” [#1. 심장이 시켰다.] ㅡ 나라는 사람, 여행이라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줄곧 생각해왔는데, 올해 들어서 나름대로 여기저기 찾아다니면서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 싶더랬다. 내가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닌 것도 아니고, 아주 멀리까지 다녀온 것도 아니라서 여행이라고 하기엔 너무 거창해서 마실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기도 하다. 난 지금, 마실에 목이 마른 상태다. 다음 달에 있을 일주일 간의 휴가 동안 어디를 갈지 아직 생각하진 않았지만,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휴가를 보내겠다, 생각하며 책의 도입부를 살랑거리며 넘기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위로 받기엔 바람부는 날이 좋다. (…) 세상 그 어떤 시간보다도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시간이 좋다. (…) 사랑하기에는 조금 가난한 것이 낫고 사랑하기에는 오늘이 다 가기 전이 좋다. [#10.] 이번 책에는 여행,만이 담겨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행에세이로 묶여져 있긴 했지만, 작품은 이병률의 사랑타령으로 가득했다. 사실 제목부터가 그랬다.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라니. 진부하기 그지없지만, 이보다 마음이 살랑거리게 만드는 솔직한 말이 또 어디있으랴. 서평을 쓰려니, 어떤 말이 더 필요할까 싶다. 어떤 말을 쓴다 해도, 마음을 서평에 다 담아내진 못할 것을 알고 있는데 말이다. 나는 아마 이병률 작가의 다음 작품을 라면봉지에 콩을 틔우던 불가촉천민처럼 기다리고 있으리. 그리고 여담으로, 이틀 전 그에게 서운함을 토로했던 것이 여전히 마음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는데 서평을 쓰려고 포스트잇 플래그를 붙인 곳을 손으로 어루어만지다가 [#10]을 눈으로 보고 읽고 손으로 타이핑했을 무렵, 점점 빛바래짐을 느꼈다. 사랑하기에는 오늘이 다 가기 전이 좋다던 이병률 작가의 말처럼, 오늘 그에게 냉담한 말 대신 따뜻한 말 한 마디를 건네야겠다, 생각한다.
주황은 배고픔의 색깔이다. 사랑을 하고 싶은 사람, 사랑에 굶주린 사람, 사랑에 병든 사람이나 병적인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은 그래서 주황이다. 주황은 마지막 소원의 색이기도 하다. 소원을 불에 태운다면 그 색이 주황이다. 사실 한번 옮겨붙으면 끄기 어려운 불과도 같다. 한 대상에게, 한 인간에게 물입하면 몰입할수록 주황은 더 짙어지고 뿌리를 내린다. [#28.네가 골라놓은 당근을 먹었다.]
당신이 좋다,라는 말은 당신의 색깔이 좋다는 말이며, 당신의 색깔로 옮아가겠다는 말이다. 하지만 당신 색깔이 맘에 들지 않는다,라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했을 경우, 당신과 나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지켜야 하는 사이라는 사실과 내 전부를 보이지 않겠다는 결정을 동시에 통보하는 것이다. [#29. 조금만 더 내 옆에 있어 달라고.]
살면서 모든 것을 털어놓아도 좋을 한 사람쯤 있어야 한다. 그 한 사람을 정하고 살아야 한다. 그 사람은 살면서 만나지기도 한다. 믿을 수 없지만 그렇게 된다. 삶은 일방통행이어선 안 된다. 루벤 곤잘레스처럼 우리는 세상을 떠날 때만 일방통행이어야 한다. 살아온 분량이 어느 정도 차오르면 그걸 탈탈 털어서 누군가에게 보여야 한다. 듣건 듣지 못하건 무슨 말인지 알아듣건 알아듣지 못하건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 무조건 다 털어놓을 한 사람. [#36. 무조건]
당신한테 내가 어떤 사람이었으면 하는가요? 사람을 좋아하는 일은 그러네요. 내가 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의 ‘상태’를 자꾸자꾸 신경쓰게 되는 것. 문득 갑자기 찾아오는 거드라구요. 가슴에 쿵 하고 돌 하나를 얹은 기분. 절대로 나는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한 적 없는데 그렇게 되는 거에요.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와 있다는 건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날씨처럼, 문득 기분이 달라지는 것. 갑자기 눈가가 뿌예지는 것. 아무것도 아닌 일에 지진 난 것처럼 흔들리는 것. [#39. 당신한테 나는.]
사는 데 있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것이지만 그것을 알기에 사랑은 얼마나 보이지 않으며 얼마나 만질 수 없으며 또 얼마나 지나치는가.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하고 지나치는 한 사랑은 없다. 당장 오지 않는 것은 영원히 오지 않는 이치다. 당장 없는 것은 영원히 없을 수도 있으므로. 그렇ㄷ라도 사랑이 없다고 말하지는 말라. 사랑은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불안해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믿으려는 것이다. 사랑은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해지는 걸 못 견뎌하는 것이다. 사랑이 변했다,고 믿는건 익숙함조차 오래 유지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뿐이다. 사랑으 있다. 사랑이 없다면 세상도 없는 것이며 나도 이 세상에 오지 않은 것이며 결국 살고 있는 것도 아니질 않은가. 그렇다고 사랑만이 제일이라고 생각하지도 말라. 사랑은 한다고 해서 다가 아니라 사랑할 때의 행복을 밖으로 제대로 드러낼 수 있는 상태가 사람을 키운다. 애써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넘치는 상태만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47. 사랑도 여행이다.]
누구를 강렬하게 좋아하는 마음이 빨강이라면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도 빨강입니다. 문득 치받쳐오르는 것도, 그게 그렇게 오래 달라붙어 있는 것도 빨강입니다. 적어도 사랑은 붉게 오리란 걸 알고 있습니다. 예감은 그런 것 아닌가요. 난데 없는 것. 금방이라도 붉게 물들어버릴 것 같은 것. 사로잡히는 것. 문득 어느 날 첫눈이 내려도 흰색의 눈발이 아니라 붉은 눈발이 흩뿌릴 것 같은 것. 그렇게 심장의 통증이 시작되는 것. [#55. 당신이 행복할 것이니 난 미안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