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후
기욤 뮈소 지음, 임호경 옮김 / 밝은세상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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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랜만이다. 나만의 애칭, 귀여운 미소씨. 책의 재미를 직·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수단 중 하나인 가속도가 빠르고, 흡입력도 있으며, 이야기의 전개도 빨라 호평을 받고 있지만, 동시에 이야기 소재가 거기서 거기-라는 혹평을 받고 있기도 한 귀여운 미소씨. 사실 그 말이 틀린 이야기는 아니어서 그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굳이 그 혹평에 완강히 부정하거나 하고 싶지는 않다. 난 가끔 그의 작품에 퐁-당 빠지고 싶을 때가 있다. 책을 읽으며 두근두근 설레이게 하는 그런 특유의 마법같은 그의 이야기에. 아, 물론 그러려면 뻔히 보이는 결말에도 ‘에이, 이게 뭐야. 이럴 줄 알았어!’라며 실망하기보다는, ‘이럴 줄 알았지만, 그래도 재미있었어. 역시 당신이야.’라는 포용력[?]같은 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사실 나는 책과는 거리가 먼 학생이었는데, 내가 제대로 책을 읽게 된 것은 - 고등학교 때, 내가 속한 문학동아리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원해서 들기는 했지만, 그 계기가 책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수능과목 중 언어 점수를 좀 더 높이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책은 내게 좋아해서 읽는 것이 아니라, 읽는 도중에 이 문맥에서 어떤 단어가 어색하고, 어떤 연결어미가 와야하며, 이 문장이 여기에 알맞은지, 마지막에 다다라서는 결국 작가의 의도는 이것이었다 따위로 해석을 해야하는 공부였다. 그리고 나에게 책이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느끼게 해주었던 책이 기욤 뮈소의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 그것이 어떤 것이었어도 상관은 없었겠지만, 기욤 뮈소의 책을 처음으로 시작했다는 것이 아마 그를 늘 한결같이 지지할 수 있는 이유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런 그의 새 작품이 나왔다. 또 한 번 두근거릴 수 있는 여유를 선물 받은 것과도 같다,며 기분좋게 싱긋 웃어보인다.

 

 

 

 

 

첫 눈에 반해 결혼까지 골인한 세바스찬과 니키는 슬하에 쌍둥이 남매를 두었지만 성격 차이로 이혼을 하게 되고, 각자 자신을 닮은 아이를 한 명씩 맡아 키우고 있다. 다른 방식으로 키워진 아이들은 어느새, 열다섯 살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세바스찬은 니키에게서 제레미가 사흘 째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연락을 받게 되고, 그렇게 그들은 7년 만에 해후한다. 부부는 제레미의 방을 뒤지다가, 대량의 코카인과 도박에 빠져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은 아들의 행방을 찾기 위해 드레이커 데커의 선술집을 찾아 가고, 그곳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아 정당방위로 그 괴한을 살인하는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살인이 정당방위라는 것을 알리는 것보다 아들의 행방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던 부부는 선술집을 나오고, 아들 제레미가 폭행을 당하는 의문의 동영상을 수신하게 되는데, 폭행을 당하는 장소가 파리의 한 전철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들은 파리로 향하지만, 설상가상으로 지명수배가 되어버려서 그들은 그들을 좇는 경찰의 눈을 피해 움직여야한다. ㅡ 책을 읽으며 퍼즐이 하나씩 맞추어지며, 분명 이것일거야! 했던 것이 정말 그것이었을 땐, 왠지 모르게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이야기 전개에 카미유의 행방불명과 여형사 콩스탕스의 추적, 힌트를 통해 얻게 되는 단서, 그리고 종종 세바스찬과 니키 부부의 로맨스 등이 책의 가속도를 높였다. 누가 뭐래도, 그의 작품은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나는 - 그는 역시 귀여운 미소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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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향기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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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칠월. 잠 못 이루는 열대야의 시작에서 한 권의 책을 집었었다. 「수박 향기」 - 입 안에서 수박이 아그작, 아그작 으깨어지며 수박 특유의 향이 퍼지는 달콤한 상상을 하며, 자기 전, 한 단 편씩을 꼬박 읽고 잤었다. 그리고 유난히 일찍 첫 눈을 본 십일월에, 다시 열 한 명의, 어쩌면 에쿠니 가오리, 오롯한 그녀 한 명일 수도 있는 어린 그녀들을 찾았다. 입동이 지나 초겨울의 바람이 불고 있는 오늘에도 그녀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서 있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빵을 굽는 냄새 때문인지 공장 부지 안은 바깥세상보다 온도가 조금 높게 느껴졌고, 그 온도 차만큼 현실이 주위와 어긋나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석류나무에 기대어 발치를 내려다보면서 -짙은 하늘색의, 그 당시 제일 싸구려였던 운동화 코와 바람에 흔들리는 방동사니와 초롱꽃- 그저 멍하니 있었다. 벽에 금이 간 희끄무레한 건물과 굴뚝, 시간이 멈춘 듯한, 무언가가 조금 틀어진 듯한 공간. 그곳은 기묘하면서도 아주 편안하고 기분 좋은 장소였다. [p54 ::바닷가 마을]

 

 

 

 

수박에 새까만 개미들이 잔뜩 줄지어 꼬여 있었던 것도, 거북이는 등딱지 속에 사는 게 아니라 몸 자체가 등딱지라는 사실도, 깊은 구덩이를 파고 사라진 후키코씨도, 비가 오는 날이면 장화를 신고 장화 밑바닥에 아작 뭉개지는 가볍고 상쾌한 감촉을 느끼며 달팽이 살육을 즐겼던 것도, 죽은 매미를 손바닥에 놓고 ‘주거주거주거주거’라고 말하던 야마다 타로도, 빵 공장에서 만난 아줌마에게 금붕어 같은 유리구슬을 준 것도, 하늘나라로 가버린 -나방은 친절하다며 좋아했던- 남동생도, 허벅지에 호랑나비 스티커를 붙였던 신칸센에서 만난 여자도, -그의 손바닥을 주욱 그었던- 소각로에 버려진 면도칼도, 바람이 잘 통해서 시원하다며 속옷을 입지 않았던 엄마도, 교문을 둥그렇게 꾸미고 있는 장미 아치를 상상하며 이야기를 지어낸 것도, 돌봐야하는 여동생과 -망가진- 남동생을 가졌던 하루카나, 불쑥 연락을 취해오는 M도.

 

 

 

 

그것들의 기억,과 그들,은 모두 온전하게 에쿠니 가오리 그녀의 것이거나 그녀인 것만 같다. 그것을 가와카미 히로미는 색깔도 예쁘고 모양도 고운 에쿠니 가오리의 비밀,이라 칭하며, 그 무엇보다 소중할 자신의 비밀,은 에쿠니 가오리의 비밀에 비하면 시덥잖다,라고 이야길한다. 사실 그렇게 보인다. 무심한 듯, 툭툭 내던져놓는 에쿠니의 문장들은 섬세하고, 긴밀한 까닭이다. 오랜만에 읽은 에쿠니 가오리의 이야기는 - 몸통을 관통하듯 싸하게 부는 초겨울 바람이 무색하게, 깊은 우물의 물을 퍼올리며 먼 곳에서부터 찬 바람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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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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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꿈’을 가지고 있고, ‘꿈’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조금 억지스러운 생각을 해 본다. 나는 여전히 내 자신의 삶조차 아이러니하다. 지금 난,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 그저 주어진 대로 살고 있는 건지. 그럼에도 불행하지는 않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지금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까닭이겠지만 - 글쎄? 그것을 바꾸어 말한다면, 어쨌든 난 지금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다, 라는 결론이 나온다. 내가 원하는 삶? 그래, 내가 원하는 삶에 대해 생각을 해본지도 참 오래되었다. 어쩌면, 책에 대한 흥미가 덜했더라면, 책을 읽기도 전에 내 삶에 대해 몇 날 며칠 고민에만 빠져있을 뻔 했다. ㅡ 여기, ‘제가 전에는 그토록 하찮게 생각했던 삶을 제발 되돌려주십시오. 아무런 기쁨 없이 멍했던 통근 길, 한심한 의뢰인들을 바라보며 보낸 지긋지긋한 근무 시간, 집안 문제, 부부 문제, 불면의 밤, 내 아이들을 제발 다 돌려주세요. 더 이상 다른 삶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제가 선택한 변호사라는 직업에 대해 더 이상 불평하지 않겠습니다. 딱 한 번만 기회를 더 주십시오.’ (p159) 자신의 삶이 복구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남자가 있다. 양복을 입은 남자가 목에 카메라를 메고, 빨갛게 물든 손으로 자신일지 혹은 타인일지 모르는 사진을 자신의 얼굴에 대고 있는 이 남자,일까? 그런데 어쩌나, 당신의 인생은 컴퓨터가 아니라 복구가 힘든데 말이야. 복구하려면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지. 당신의 용기. 준비됐어?

 

 

 

 

누구나 인생의 비상을 갈망한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가족이라는 덫에 더 깊이 파묻고 산다. 가볍게 여행하기를 꿈꾸면서도, 무거운 짐을 지고 한 곳에 머무를 수밖에 없을 만큼 많은 걸 축적하고 산다. 다른 사람 탓이 아니다. 순전히 자기 자신 탓이다. 누구나 탈출을 바라지만 의무를 저버리지 못한다. 경력, 집, 가족 빚. 그런 것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발판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안정을, 아침에 일어날 이유를 제공하니까. 선택은 좁아지지만 안정을 준다. 누구나 가정이 지워주는 짐 때문에 막다른 길에 다다르지만, 우리는 기꺼이 그 짐을 떠안는다. (p117) 사진작가를 꿈꾸는 변호사 ‘벤’. 하지만 그의 직업, 직위, 그에 따른 월급이 가져다주는 것으로 생활을 하는 아내 베스와 그들의 아이 애덤, 조시를 내쳐버린 채 사진가의 꿈에 발걸음을 감히 내딛을 수나 있을까? 아니, 그는 절대 그럴 수 없다. 그런 그를 두고 이웃집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는 베스. 그 이웃집 남자를 살해하고 만 벤. [어리석게도 난, 벤이 그를 죽이고 자신이 죽는 줄로만 알았다. 아니! 그러기엔 책 장이 이렇게나 많이 남았는데?라는 생각을 끝까지 져버리지 않은 채로.] 그런 내 예상을 뒤엎기라도 한 듯이, 그는 ‘게리 서머스’가 된다. (개인적으로 덜컥 아이가 생김에 따라 작가가 되고 싶던 베스가 안타깝기만 하다. 그래도 난, 벤이 사진을 찍고 싶었던 욕망만큼이나 베스에게도 글을 쓰고 싶었던 욕망이 내재되어 있음을 알아주는 대목이, 나올 줄로만 알았다. 꿈의 형태는 다르지만 분명, 욕망의 크기만큼은 누가 크다, 작다로 비교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기에.)

 

 

 

 

“한 번 큰 상실감을 겪고 나면 모든 게 쉽게 깨어질 듯, 부서질 듯 보이지. 더 이상 행복을 믿지 않게 돼. 좋은 일이 찾아와도 조만간 사라지게 될 거라 생각하지.” (p431) 아이러니하게도 난 「빅 픽처」를 읽기 바로 직 전,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를 읽었는데 그도 역시, 자신이 아닌 타인의 삶, 을 살아가는 이야기였고, 또 그 전에 읽었던 책은 비프케 로렌츠의 「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는 자신은 자신이지만, 타인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은 자신의 삶, 이었다. 정말 한 순간에 모든 걸 빼앗길 수 있는 게 삶이야. 우리 모두는 그런 순간이 언젠가 다가오겠지 두려워하며 살아가고 있는 거야. (p213) 그리고 이제 말할 수 있다. 무대에서 자신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타이밍은 오롯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 이라고. 아! 물론, 예외적으로 이재익의 「압구정 소년들」이나 이사카 코타로의 「골든슬럼버」처럼 자신이 아니어야만 행복할 수 있을 수 있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못하겠다. 어찌됐든, 그는 또다시 ‘가족’이라 불리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간다. 그는 ‘엔디’로 살며 행복할 수 있을까? 근처 세븐일레븐에 맥주를 사려고 나갔던 것이 고속도로를 내달려 라스베이거스를 찍고 밴나이즈에 돌아온거라면? 그 뒤에는? 그 뒤에는? 나는 계속 나 자신에게 물었다. 그러나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 길의 종착지는 오직 집뿐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p486) 언제는 내 뜻대로 된 적이 있었겠느냐만은 - 세상 참, 내 뜻대로 안 된다. 아무 것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한 번 살아볼 만한 거겠지.

 

 

 

> 인생. 짧잖아. 즐겨요, 우리.

 

 

 

“이제 와서 가장 참기 힘든 게 뭔지 아나? 언젠가 죽는다는 걸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는 거야. 변화를 모색하거나 새로운 기회를 찾아 나서거나 다른 생을 꿈꿀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오리란 걸 알면서도 나와는 전혀 관련 없는 일인 양 살아왔다는 거야. 이제는 더 이상 환상조차 품을 수 없게 됐어. 인생이라는 도로에서 완전히 비껴난 것이지.” (p49)

 

 

 

“내 말 잘 들어, 친구. 인생은 지금 이대로가 전부야. 자네가 현재의 처지를 싫어하면, 결국 모든 걸 잃게 돼. 내가 장담하는데 자네가 지금 가진 걸 모두 잃게 된다면 아마도 필사적으로 되찾고 싶을 거야. 세상 일이란 게 늘 그러니까.”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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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그리움을 켜다 - 사랑한 날과 사랑한 것에 대한 예의
최반 지음 / 꿈의지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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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인가, 여행과 에세이가 분류되었다. 여행과 더불어 감성이 들어가기 시작했던 것. [타인은 다 알고 있는데,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긴, 그 전부터 있긴 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작가만 해도 이병률, 최갑수가 대표적인 예다.] 그래서인지, 나에게 있어 여행 에세이는 두 분류이다. 여행기,와 여행 에세이. 깔깔한 마음에 촉촉한 비를 내려 줄 수 있는 책을 찾은 것이 아니었다. 시험을 마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여행? 나도! 나도 떠나고 싶어!’라는 마음이 한껏 부풀어 있던 그 때에, 어떤 책이든 상관없었다. 그러고보면 사실 여행 에세이,보다 여행기,가 읽고 싶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오롯하게 책을 써내기 위한 목적으로 쓴 여행기는, 어쩐지 내 입맛에 맞질 않는다. 알지도 못하는 거리들을 읽으며 ‘여긴 어디야, 어떤 거리인데?’라며 물음을 쏟아낼 것이 뻔했기 때문. 그러다가 만난 책. 소중했던 누군가를 잊기 위해 총총한 발걸음을 떼었단다.

 

 

 

 

 

‘사랑한 날과 사랑한 것에 대한 예의’라는 부제에 이끌렸다. 참 많이도 사랑했던 그 사람을 잊기 위해,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지만] 사랑했던 날들을 조금이라도 더 오랫동안 간직하려 떠났던 여행. 내가 현재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불과 삼 년 전까지만 해도 ‘사랑 나부랭이! 다신 믿지 않아!’ 라고 했던 그것을 지금 그와 함께 하며 다시 신뢰하고 있고, 또 그것에 대해 써놓은 글들을 유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안면에 미소를 가득 채우는 그것, 사랑.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 그 사랑 나부랭이에도 언젠간 썩어 문드러지는 유통기한이 있어 아무리 막아도 코를 찌를 듯한 역겨운 냄새가 나고, 결국은 소멸되어 재가 되는 순간을 쓴 글들 또한 품에 안고 놓을 수가 없을 때가 있다. 나도 몇 번의 이별을 겪어봤고, 또 앞으로 [굳이 연애가 아니더라도] 몇 번의 이별을 얼마나 더 겪을지 모르니. 또, 가끔은 - 지금 사랑에 달랑 땅콩 하나에 맥주 3,000cc처럼 약간의 심심함이 들 때엔 이별에 대한 글들을 보면서 마른 안주거리들을 가득 채워놓기도 한다. 하지만, 치명적이게도 지금 내 마음이, 작가에 비해 너무 버젓하다. 괜히, 마음 아리게.

 

 

 

 

 

당신 삶에서는 아직 그 사람이 주연배우인데, 그 사람 삶에서 갑자기 당신이 조연이 되었다면, 조연이면 그나마 다행인데 자꾸 악역이 될 것 같다면, 서둘러 여행을 떠나야 한다. 행인1이나 행인3이 될 때까지는 당신만의 여행을 해야 한다. [여행을 떠나야 할 때Ⅱ]

 

 

그는, 잊기 위해 여행을 택했다. 산티아고를 걸었고, 그 길을 걸으며 불편함을 느낀 등산화를, 언젠가는 자신의 발이 등산화를 온전히 품을지도 모른다며, 딱 맞지는 않아도 끝까지 걸어갈 수 있을거라는 글에서 왠지 모를 짠-함이 느껴졌다. 아, 이런 사람이구나. 사람이든, 사물이든 자기에게 온 물건에게 애정을 담뿍 쏟아내어 버리고, 잊을 대상을 두고도 무조건 ‘fast’보다 부제와 같이 ‘사랑한 날과 사랑한 것에 대한 예의’와 같이 그 사람과, 시간에 예를 갖출줄 아는 ‘slow’를 택하는 꽤나 신사-,적인 사람.

 

 

 

 

 

뜨거웠던 커피처럼 사랑도 열정도 식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하여, 내 안에서 기척 없이 식어가고 있는 것은 없는지 자주 살펴보기를… 혹시 식더라도 첫 마음만은 항상 다시 기억해 내기를… [식어가는 것은 없는지]

 

 

남자가 건넨 열차 안에서의 750mm 위스키 한 병, 담배 한 개비가, 마음만은 누구보다 더 부유한 인도 친구 씨아람이, 손가락을 찧어 울고 있는 아이의 아픔을 온전히 느끼는 아버지의 촘촘한 눈물이, 몇 년간 써온 글이 있는 노트를 묻은 남자가, 좋은 장면을 기다려 찍어야 할 것을 알면서도 그 순간을 놓쳐버릴 것만 같아 엄청난 분량의 사진을 찍어대는 덕환씨가, 얼굴에 묻은 물감을 닦아주던 아이의 손가락 감촉이, 헛된 꿈이라도 꾸라던 형이, 객차 안에서 깁스를 한 부인의 손톱을 깎아주던 노인, 그들 부부가 서로를 깎으며 만들어온 둥근 세월이, 파코라를 내어주던 여자의 목걸이에 매달려 있는 그녀의 남편이, 그들의 속닥거리는 대화가, 또 그로 인해 부풀어 오르는 자신이 - 마음에 온전하게 내려 앉아 위로가 되고, 잠깐동안이나마 웃음을 줄 수 있는 휴식이 되며, 언젠가는 새살이 될 게다.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리하여 최 반, 그는 가슴에 피지 않은, 피지 못한, 피었을, 피었다가 져버린 - 꽃 하나를 심어두고, 이따금 생각날 때마다 들여다보겠지. 당신의 가슴 속에 심어둔 꽃은, 안녕한가요?

 

 

 

 

 

어떤 책도 더 이상 위로가 되지 못할 때, 어떤 풍경도 가슴을 문지르지 못할 때, 어떤 만남도 깔깔한 웃음을 주지 못할 때, 어떤 아침도 한 번에 허리를 들어올리지 못할 때, 어떤 고백도 발바닥을 공중으로 띄우지 못할 때, 어떤 원망도 그리움을 목 졸라 눕히지 못할 때, 그때 떠나면 좋다. 눈 딱 감고 배낭을 꾸리면 좋다. 서너 문장의 내일은 무시해도 좋다. [여행을 떠나야 할 때Ⅰ]

 


뻔한 얘기지만 달리는 기차 안에서 창 밖을 보면 가까이에 있는 풍경은 찰나처럼 빨리 지나가버리고 멀리 있는 풍경은 그보다 더 오랫동안 창 밖에 남아서 따라옵니다. 뻔한 얘기지만 그리움의 대상도 그럴 겁니다. 이제는 멀리 있어서, 이리도 오래 사라지지 않고 길게 따라오는 것일 겁니다. 더 멀리 있어서, 더 오래 남아 있는 것일 겁니다. [뻔한 얘기 Ⅱ]

 

 

다른 사람의 마음이 내 마음에 닿아서 내 것이 되던 순간, 그 마법같은 순간이 또 언제든 찾아오겠죠? [닿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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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4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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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유월, 생일선물로 받은 이 책을 시월에 읽게 되다니 - 「스텝 파더 스텝」을 읽은 뒤로, 미야베 미유키라는 작가에 대해 마음대로 흥미를 잃어버린 나였다. 그래서 그랬는지, 재미나다고 칭찬이 자자하다던 「화차」에도 선뜻 손이 내어지지 않더라, 하는 것. 그런데 이것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마음 먹은 것은, 팔랑거리는 내 귀에 살포시 스친 영화화되었다는 무성한 소문, 그 까닭이었다. 하지만 책이 손에 들어왔을 땐, 이미 영화도 훨씬 전에 막이 내린 상태여서 이왕 늦어진거, 좀 더 늦게 볼까? 하는 마음에 책장에 꽂아두었던 것. 그러다가 그동안 시험 공부를 한답시고 책을 좀 멀리 했더니, 읽히는 단어보다 놓치는 단어가 더 많더란 것. 다나베 세이코의 「딸기를 으깨며」와 은희경의 「태연한 인생」 모두 중단하고, 「화차」에 손을 뻗어 무작정 읽기 시작했다. 역시 집중이 안 될 때는 추리 소설이 제격이지! 하는 생각과 함께. 그리고 책을 읽던 중간, 그에게 SOS를 쳤다. “난 「화차」를 읽고 있어요. 이 책을 다 읽고 영화가 무-척이나 보고 싶을 것 같아요. 영화를 다운받아주세요오.”라고.

 

 

 

 

 

혼마 슈스케의 죽은 아내 지즈코가 예뻐하던 육촌 가즈야. 지즈코의 장례식때도 보이지 않았고, 전화로 조의를 표하지도 않은 채로, 삼 년 동안 연락 한 번 하지 않은 (정말이지 이기적이고 괘씸한 녀석) 가즈야가 폭설을 뚫고 난데없이 그를 찾아온다. 사정인 즉, 결혼 준비를 위해 신용카드 발급 심사를 거치던 중, 개인파산 이력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이후 갑자기 사라졌다는 그의 약혼자, 세키네 쇼코 . “(…) 부탁드립니다. 그녀를 찾아주십시오.” - 어차피 근무 중 강도가 소지하고 있던 총에 맞아 잠시 휴직 중인 혼마였기에, 순수한 호기심으로 그러마, 대답했고, 그녀의 자취를 역으로 밟아가던 중, 미조구치 변호사를 만나 뜻밖의 소리를 듣는다. “이 여자는 내가 아는 세키네 쇼코 씨가 아닙니다. 만난 적도 없어요.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이 여자는 세키네 쇼코 씨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입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 얘기를 했어요.” :: 1990년 1월 25일에서 4월 20일 사이에 180도 방향 전환. 단기간에,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개인적으로 나는, 신용카드를 신뢰하지 못한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 나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일런지도 모르겠다. 내가 신용카드를 처음 발급받은 것은 ‘후불 교통카드’라는 신세계였다. 바쁜 시간에 버스 카드를 충전하는 것이 귀찮기도 하고, 이따금 “잔액이 부족합니다.”라는 소리가 나와 얼굴이 붉어지는 것도 싫어 만들었던 첫 신용 카드. 내가 쓰는 카드의 한도는 5단위가 안 된다 하여, 10만원-으로 정해두고, 매번 그렇게 써왔는데, 신용카드의 혜택으로, 어차피 쓰는 돈, 신용카드로 긁고 혜택을 받자,하여 한도를 서서히 상향시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왠일? 내가 원래 이렇게 많은 돈을 썼던가? 싶을 정도로 많이 나왔던 카드값. 쓰는 만큼 줄어들지 않으니 날이 갈수록 더 많이 쓰는 것이 당연했다. 물론, 지금도 신용카드를 쓰며 혜택을 받고 있지만, 신용카드의 굴레[즉, 화차]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 매주 월, 수, 금은 선결제를 시행하는 날로 땅땅땅, 혼자 정해놓고 몇 달 째 잘 지키고 있는 중이다. 적어도, 월급받아 카드값 막는 그런 생활을 하지 않기 위해. [하지만 이따금 찾아오는 ‘할부’라는 손짓은, 아직까지도 참아내기가 힘들 때가 있다.] :: 살아 있는 유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富의 강물에 떠내려가는 버려진 이들의 무리.

 

 

 

 

 

남들 같은 삶을 살고 싶다. 쫓겨다니는 불안에서 해방되고 싶다. 평범하고 행복한 결혼을 하고 싶다. 원하는 것은 단지 그것뿐이다. - 그녀의 정체가 밝혀진 이후, 그녀는 어디에서 무얼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 속을 장악했다. 십자매 삐삐의 무덤을 듣고 친구 대신 왔다,는 말과 졸업사진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미야베 미유키는 그녀를 단지 행복해지고 싶은 여자,로 국한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또 다른 음모는, 등골을 싸-하게 했음이 분명했다. 행복해지고 싶다, 했지만 타인의 인생을 살 수밖에 없어썬 그녀는 정말 행복했을까? (정말로?) :: 혼마는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들었다. 신조 교코는 고독했기 때문에, 외톨이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신분을 사칭하고 가로챌 수 있지 않았을까. 쫓기고 도망치는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고 구원의 손길을 뻗어주려는 남자가 단 한 사람이라도 곁에 있었다면 그녀는 ‘신조 교코’라는 자기 이름을 버리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협력자의 힘을 빌려 온전히 신조 교코인 채로 도망치는 길을 고민했을 것이다. 이름이란 타인에게 불리고 인정받음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다. 신조 교코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그녀와 떨어질 수 없는 인간이 주위에 존재했다면, 그녀는 결코 펑크 난 타이어를 버리듯 간단하게 ‘신조 교코’라는 이름을 내동댕이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이름에는 사랑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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