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향기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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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칠월. 잠 못 이루는 열대야의 시작에서 한 권의 책을 집었었다. 「수박 향기」 - 입 안에서 수박이 아그작, 아그작 으깨어지며 수박 특유의 향이 퍼지는 달콤한 상상을 하며, 자기 전, 한 단 편씩을 꼬박 읽고 잤었다. 그리고 유난히 일찍 첫 눈을 본 십일월에, 다시 열 한 명의, 어쩌면 에쿠니 가오리, 오롯한 그녀 한 명일 수도 있는 어린 그녀들을 찾았다. 입동이 지나 초겨울의 바람이 불고 있는 오늘에도 그녀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서 있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빵을 굽는 냄새 때문인지 공장 부지 안은 바깥세상보다 온도가 조금 높게 느껴졌고, 그 온도 차만큼 현실이 주위와 어긋나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석류나무에 기대어 발치를 내려다보면서 -짙은 하늘색의, 그 당시 제일 싸구려였던 운동화 코와 바람에 흔들리는 방동사니와 초롱꽃- 그저 멍하니 있었다. 벽에 금이 간 희끄무레한 건물과 굴뚝, 시간이 멈춘 듯한, 무언가가 조금 틀어진 듯한 공간. 그곳은 기묘하면서도 아주 편안하고 기분 좋은 장소였다. [p54 ::바닷가 마을]

 

 

 

 

수박에 새까만 개미들이 잔뜩 줄지어 꼬여 있었던 것도, 거북이는 등딱지 속에 사는 게 아니라 몸 자체가 등딱지라는 사실도, 깊은 구덩이를 파고 사라진 후키코씨도, 비가 오는 날이면 장화를 신고 장화 밑바닥에 아작 뭉개지는 가볍고 상쾌한 감촉을 느끼며 달팽이 살육을 즐겼던 것도, 죽은 매미를 손바닥에 놓고 ‘주거주거주거주거’라고 말하던 야마다 타로도, 빵 공장에서 만난 아줌마에게 금붕어 같은 유리구슬을 준 것도, 하늘나라로 가버린 -나방은 친절하다며 좋아했던- 남동생도, 허벅지에 호랑나비 스티커를 붙였던 신칸센에서 만난 여자도, -그의 손바닥을 주욱 그었던- 소각로에 버려진 면도칼도, 바람이 잘 통해서 시원하다며 속옷을 입지 않았던 엄마도, 교문을 둥그렇게 꾸미고 있는 장미 아치를 상상하며 이야기를 지어낸 것도, 돌봐야하는 여동생과 -망가진- 남동생을 가졌던 하루카나, 불쑥 연락을 취해오는 M도.

 

 

 

 

그것들의 기억,과 그들,은 모두 온전하게 에쿠니 가오리 그녀의 것이거나 그녀인 것만 같다. 그것을 가와카미 히로미는 색깔도 예쁘고 모양도 고운 에쿠니 가오리의 비밀,이라 칭하며, 그 무엇보다 소중할 자신의 비밀,은 에쿠니 가오리의 비밀에 비하면 시덥잖다,라고 이야길한다. 사실 그렇게 보인다. 무심한 듯, 툭툭 내던져놓는 에쿠니의 문장들은 섬세하고, 긴밀한 까닭이다. 오랜만에 읽은 에쿠니 가오리의 이야기는 - 몸통을 관통하듯 싸하게 부는 초겨울 바람이 무색하게, 깊은 우물의 물을 퍼올리며 먼 곳에서부터 찬 바람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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