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것만 남기고 버려라 - 쓸데없는 것들을 버리고 1%에 집중하는 기술
후지요시 타쓰조 지음, 이은정 옮김 / 제이플러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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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는 내가 쓰던 물건을 남기고 버리는 일을 일부러라도 찾아서 하는 편이다. 단순하고 간결한 것들로 이루어진 삶을 살고 싶은데, 내 소망과는 다르게 나는 쓸데없는 것들로 꽉꽉 채워진 삶을 살고 있던 건 아닐까. 물건에 국한되었다고만 생각했는데, 비단 물건뿐만이 아니라 나 자신조차도 그렇다는 것을 느낀다. 나에게 좋지 않은 버릇이나 습관들로 나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나 살펴보면, 몇 덩어리는 빼서 버리고 싶을 정도이니. 그렇게 떼어내버리면 나라는 사람이 없어질 것만 같은 착각이 인다. 하루에 하나씩, 내가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좋지 않은 습관을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기 이전에 나는 어떤 것을 버리고 싶은지, 그것을 버리려고 어떤 노력을 했는지 생각해보았다. 그런데 우습게도 내가 가지고 싶은 습관에 대해서는 무던히 노력을 하면서도 갖지 못하는 게 많기도 했지만, 버리고 싶은 습관에 대해서도 노력을 하면서 버리지 못하는 것도 많았다는 점이다. 물론 그것이 노력의 여하와 내가 얼마나 그것에 절실한가에 따라 다른 것이라는 생각도 하기는 했지만, 나 같은 경우는 의식하며 살지 않는 이상 좋지 않은 습관은 이미 몸에 배어있어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행동들이 많기에 평생 나를 따라다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량 부족의 덫’에 걸려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모두 뭔가를 하려고 한다. 시도해보지 못한 것에 시도를 해보려고 하기도 하고, 이미 시도한 것을 더 열심히 하려고 하기도 하며, 어떤 것은 처음부터 시도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기도 한다. 포스팅을 하는 오늘, 내가 시도해보지 못한 것을 시도하려고 했던 것은 꼬막무침이었고, 이미 시도한 것을 더 열심히 하려고 한 것은 걷기였으며, 처음부터 시도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은 택시 타지 않기였다. (그런데 이런저런 이유로 오늘은 택시를 탔다. 난 택시 특유의 향과 더불어 백미러로 하여금 마주쳐지는 기사님과의 눈인사를 결코 좋아하지 않는데) 타인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내가 그들의 입장을 세세하게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적어도 나는, 항상 무언가를 하고, 하려고 하고, 하지 않기도 하려고 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는 나의 하루는, 책에서 말한 것과 같이 ‘용량 부족의 덫’에 걸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책에서 네 가지에 대해 주의 깊게 읽었다. ‘아직 시간이 있다는 마음’과 이별하기, ‘언제라도 행동할 수 있다’와 이별하기, ‘이미 예정된 스케줄’과 이별하기, ‘SNS’와 이별하기였다. 특히 ‘아직 시간이 있다는 마음’과 이별하기에서 단순히 날짜만 계산해서는 안 된다. 그 기간 중에서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을 계산해야 한다.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은 유한하다는 것을 명심하라. 였다. 내가 주의 깊게 읽었던 것 중, 아직 시간이 있다는 마음과 언제라도 행동할 수 있다는 마음은 어쩌면 동일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시간이 많으니까 괜찮아. 시작하려고 하면 언제든지 할 수 있어. 라고 말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 특히 공부에 관해 그런 점을 알 수 있다. (더 잘 하고 싶어서,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니까 따위의 말도 안 되는 핑계들이지만) 어쨌든 현재 미루고 있는 것은 단연 그것뿐이다. 나는 한 가지 일밖에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공부를 하면 자연스레 저 공부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우선순위를 정해놓고 차근차근해야 하는데, 하나를 끝내야 또 하나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인 거다. 물론 내 공부 방식이기 때문에 누구도 내게 그것에 대해 “너 틀렸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리고 SNS를 하는 시간, 수동적으로, 그리고 습관적으로 SNS에 접속하는 습관을 내려놓으라고 하며, ‘NO SNS TIME’을 정해두라고 한다. 내가 SNS에 접속을 하지 않을 때가 언제지? 하고 생각해보면, 내가 순간적으로 집중할 때밖에 없었는데, 이럴 때는 정말 핸드폰 중독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하지만 책을 읽을 때에는 방해를 받고 싶지 않지만 핸드폰이 옆에 있으면 자연스레 핸드폰으로 손이 가게 되니, 일부러 핸드폰을 멀찍이 떨어뜨려놓고 책을 읽을 때가 많다. 편리한 삶은 집중력을 저하시키는데 탁월한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게 아니라면 내 의지력이 문제일지도 모르고.



그 외에는 적당히 가져도 괜찮을 습관들도 있어서 ‘굳이?’라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글을 읽다 보면 버리고 싶은 사람들도 있겠네.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무언가를 이별하라면서 그에 대한 페이지는 두세 페이지밖에 되지 않다 보니, 이런 것들을 버리는 것에 대해 쉽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하며 저자가 조금 무책임하고 무성의한 사람이 아닐까 했다. 하지만 그것들을 버리려고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은 오롯이 ‘나의 몫’이 되는 것이니 가볍게 저자의 말을 조언 삼아 읽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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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질문들 - 당신의 견고한 일상을 송두리째 흔들지 모를
김가원 지음 / 웨일북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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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해가 뜨면 해가 지는 것도,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다는 것도,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에는 단풍이 물든다는 것도 모두 당연하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입장은 언제나 인간에서 시작된다. 이를테면, 해가 뜬다면 둥실둥실 뜨는지 부끄러워하며 뜨는지, 해가 진다면 슬프게 지는지 아름답게 지는지 섹시하게 지는지, 여름에 더우면 얼마나 더우며 겨울에는 얼마나 추운지, 봄에는 어떤 꽃이 어떻게 피고, 가을에 물드는 단풍은 마음에 어떤 동요를 불러일으키는지,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소리다. 하지만 봄에 피어야 하는 개나리가 겨울에 핀다면, ‘왜’ 개나리가 피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고 우리는 그것을 ‘이상한 현상’이라고 속단해버리곤 한다.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한다. 세상을 조금 낯설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책에서는 감각, 믿음, 마음, 욕망, 타자, 진리에 관하여라는 타이틀 아래, 총 서른 개의 질문에 대해 묻고 대답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중에서 마음에 와닿았던 몇 가지를 풀어보고자 한다.



 


1. 가까이에 있어서 크게 보이는 것인가. 크게 보여서 가까이 있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우리는 한 번쯤은 원근법을 표현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는 멀고 가까운 물체를 제대로 캐치하여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우리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다. 거리감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의해서 습득되는 것이기 때문에그럼 나는 내 경험을 비추어 묻고 싶다. 어릴 적 나는, 산과 나무, 집과 사람을 한 스케치북에 그릴 때 비율을 무시하고 그림을 그렸다. 왜? 아직 어리기 때문에 사람은 집보다 훨씬 작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해서? 음. 표현력이 부족해 내 생각을 다 풀어내기는 좀 힘이 들지만, 다른 사람의 생각이 궁금한 부분이기는 하다.


2. 읽던 책을 덮고 손도 아래로 내려놓고 눈을 감아라. 책이 있는가?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데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나?

책은 보여서 있는 것이다. 감각되지 않는 한 그 어떠한 것도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있다(존재한다)고 말하고 싶다면 그것이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의 영역에 서야 할 것이다. 외부 세계는 감각되는 순간에만 그렇게 있을 뿐이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단순히 책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사랑’에도 반영을 시켰다. (물론 책에는 사랑에 대해서도 쓰여있기는 하지만, 그것들보다는 이 부분이 더 와닿아서) 사랑도 물론, 보이지 않는다. ‘그가 나를 사랑할 것’이라는 믿음 아래 우리는 그 사랑을 지속하고 유지할 수 있는 것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외부 세계는 감각되는 순간에만 그렇게 있을 뿐이지만, 내부 세계는 감각되는 순간으로는 절대 알 수가 없는 법이니까.

3. 전망대가 있는 타워 근처에 사는 당신, 거실에서 타워가 보인다. 가까이 보고 싶어 타워까지 걸어간다. 가까이서 본 타워는 거대한 덩어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전망대를 올라간다. 내가 사는 곳이 내려다보이고 하나의 도시가 장난감처럼 보인다. 타워 속으로 들어왔으니 타워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서 있는 거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반드시 어딘가에 서 있을 것이고 그 자리에서 보는 세상은 그 자리의 관점일 뿐이다. 어느 누구도 나와 같은 자리에 동시에 서 있을 수는 없다. 그것이 우리 모두가 조금씩 다른 각도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나는 곧잘 그이에게 나와 함께 있었으니까, 나와 함께 보았고, 들었고, 먹었고, 맡았으니까 그이 역시도 나와 같은 감정을 공유할 것이라는 착각을 자주 범하곤 한다. 그것은 그이와 나는 다른, 독립된 인격체라는 사실을 자주 잊곤 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그랬으면 좋겠다는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내가 이렇게 하면 당연히 그이가 이렇게 해주겠지. 이런 것들 말이다. 그래서 나의 감정과 다르거나 때로 내 기분을 이해해주지 않거나 내가 예상하던 것과 다른 것들에 대해 서운함을 넘어 서러움을 느낄 때도 적지 않다. 지금은 그것에 대해 나름대로의 고찰을 통해서 다를 수 없음을 인정하는 시간을 자주 갖는 편이지만, 그래도 이따금 서운한 기색을 내비치곤 한다. 나는 여전히 노력이 더 필요함을 느낀다.


4. 친구가 울고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몇 해 전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네 마음 나도 알아. 힘들지?” 정말 친구의 마음을 아는가? 아는 것은 당신의 슬픔 아닌가?

당신은 친구의 마음에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진짜 공감하고 있는 것인가? 당신은 친구를 바라보며 당신 자신의 경험을 떠올린다. 그리고 슬프다. 그 슬픔은 친구를 거쳐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친구의 슬픔으로. 그러나 나로부터 출발하여 다시 돌아온 감정일 뿐이다. 그 친구가 어떤 마음일지는 알 수 없다. 공감은 영원한 착각일지 모른다.

이 부분을 읽고 나서는 한동안 멍했다. 나는 공감에 대해 굉장히 서투른 편이다. 특히나, 나는 위로를 정말 잘 하지 못하는 편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았을 때 느꼈던 그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전달을 해준 적이 거의 없다. 내가 위로를 많이 받아보지 못한 탓이다. 그 감정일 때 어떤 위로를 해도 위로가 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나는, 위로를 잘 건네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다. 나는 이미 내 마음이 아물었거나 아물고 있는 상황일 때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편이었다. 위로를 받기 위해 그랬다기보다는, 나는 그냥 그때 그랬어. 정도를 말하고 싶었다. 그럴 때면 친구들은 내게 위로의 말을 건넸는데 내게는 그 이야기를 해도 정말 아무렇지 않을 때였기 때문에 그렇게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그저 당시의 나를 위로하려는 친구들의 마음이 고마웠다.

그런데 나는, 정말 위로가 필요한 상황에서는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은 모르는 척하고 넘어갈 때가 많은데, 여전히 잘 모르겠다. 고등학생 때 친구의 아버지께서 편찮으셔서 친구들끼리 병문안을 간 적이 있지만,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아무도 몰랐다. 친구는 알리지 않았고, 찾아가 보지 못했다. 나는 그게 그렇게 한스럽다. 친구가 그때의 일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할 때가 간혹 있는데, 그때마다 나는 불에 덴 것처럼 마음이 따갑다. 친한 친구가 가장 힘들 때 찾아가지 못한, 곁에 있어주지 못한, 밥 한 끼 같이 먹어주지 못한 슬픔이다. 내가 가서 뭘 할 수는 없었겠지만, 뭔가를 하지 않아도 힘들 때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이 됨을, 이제는 잘 알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더 아프다.

그리고 그이. 그이는 내게 모든 것을 다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정작 내가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힘들어할 것 같은 일들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어쩌다가 내가 알게 된 사실들에 대해 그를 위로를 해주는 것이란 게, 겨우 그를 안아주는 일이고 따뜻한 밥 한 그릇을 차려주어 마음을 덮이는 일이다. 나의 위로 방식은 여전히 소극적이며 미온하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그에게 잠시라도, 아주 잠시라도 세상과 그를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기를 소망한다.


5. 당신은 당신이 만들어낸 생각에 화가 난 것이다. 모든 것은 당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신은 철저하게 당신의 생각에 따라 상황을 판단하고 이해했다. ‘화’란 그런 것이다. 우리에게 화를 유발하는 것은 상대가 아니다. 상대를 나의 마음에 대입할 때 발생한다. 상대에게 나의 마음을 이입해서 그를 이해하는 방향이 아니다. 상대를 나의 자리에 놓을 때 나는 나의 생각에 따라 상대의 행동을 판단하고 재단한다. 그러나 당연히 상대는 나와 같지 않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간극이 발생하고 그 간극은 나의 오해들로 채워진다. 그러므로 나에게 화를 유발하는 대상은 상대가 아닌 바로 ‘나’의 생각이다. 화를 푸는 방법은 간단하다. 바로 마음의 방향을 바꾸기만 하면 된다. 상대의 마음을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상대로 향하게 하는 것. 그의 말을 들어 보고 그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 나의 는 나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나는 가지치기를 잘 하는 사람이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상상하여 그것을 사실로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는, 매우 아둔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내가 마음에 두고두고 간직해야 하는 것이어야 한다.

야경을 보기 위해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떠났던 2015년을 생각했다. 나의 욕심대로라면 매일매일 야경을 보고 싶었지만 하루는 부다 왕궁에서 국회의사당 야경을 보았고, 하루는 다뉴브강에서 페리를 타고 국회의사당과 부다 왕궁의 야경을 보았으며, 하루는 도심 속에서 머물며 마무리했다. 그러면서 내게 주어진 4박 6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원했던 만큼의 야경을 보지는 못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나는 그에게 말을 했었다. “우리는 야경 속에 들어와 있어. 다른 사람들이 국회의사당이랑 세체니 다리를 보고, 사진을 찍을 때 우리가 이곳에 있잖아.”라고. 나는 알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디에 있든 우리는 늘, 야경 속에 있었다고. 그것을 그 당시에 깨달은 것은 정말 천운이었다. 그것을 지나고나서 알았더라면 당시의 아름다움보다 아쉬움이 더 컸을 테니. 모든 것이 그랬다. 나의 시선이나 관점도 조금만 바꾸면 달리 생각할 수 있었다. 매번 주어지는 당연한 일상들 역시 감사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세상에 감사할 일은 없었다. 감사함은 삶의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나는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대개 익숙하고 친숙한 것에 대해서는 “왜?”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이 힘이 든다. 그래서 나는 사고의 전환을 낯섦과 동일시했다. 낯선 것에 대해서는 궁금하고, 궁금하기 때문에 물음표가 따른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것에 대해 탐구를 하고 고찰해야만 한다. 그랬을 때, 우리의 익숙함은 낯섦과 마주 설 수 있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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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한 인생이 행복하다
무무 지음, 강은영 옮김 / 미호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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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 온다고 한다. 나는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가.에 대한 대답은 (결코 자랑은 아니지만) 단연 NO였다. 우선적으로 나는 스스로에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에 속하고, 현재에 대해서도 만족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내가 때때로 느끼는 행복들은 과연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나라는 사람은 행복해지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지는 않지만, 즐거움을 찾기 위해서는 약간의 혹은 상당한 정성을 들인다. 행복이라는 말이 내게는 너무 거창한 것처럼 느껴지는 까닭에, 개인적으로는 행복이라는 표현보다는 즐겁다는 표현을 더 말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잠시 회상하자면 대전역에서 그가 나에게 도망치듯 첫 키스를 하고 도망(?) 갔을 때, 그가 나에게 프로포즈를 했을 때, 그와 결혼식을 할 때, 그와 함께 여행을 갔던 곳곳에서 등등_ 그런 것들은 즐겁다는 표현보다는 행복하다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행복했던 순간들이었다. 대부분 그런 큰 순간들에 대해서만 행복을 말하다 보니, 사소한 것들에 행복을 말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생겨버린 것 같다. 그래서 일상에 잠재되어 있는 행복들을, 행복이라고 명하지 않고 그보다 쉽게 말할 수 있는 즐거움,으로 뭉뚱그려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함께 하는 저녁식사에서 “행복하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엄청난 진수성찬도 아니었고, 뭔가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일상일 뿐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너무나도 깜짝 놀라서 “행복하다고?”하고 되물으며 웃었던 적 있었다. 소소한 것에 행복을 말할 줄 아는 남편 덕분에 행복에 대한 시선이 조금은 달라질 수 있음에 감사하다.






​가끔은 나라는 사람이 이렇게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나, 새삼 놀랄 정도로 나는 눈물이 참 많다. 책을 읽다가 시선이 고정된다.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고 잊을 건 잊자. 눈물이 많으면 인생이 쓰다. 어찌 되었든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래, ​맞아. 눈물이 많으면 인생이 쓰지. 눈물은 결코 달콤하지 않으니까. 대부분의 내 눈물은 남편에게서 기인하는데, 그건 내가 그에게 너무 많은 것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책은 나를 꼬집는다. 알아, 안다고. 왜 그래 나한테_ 나한테 너무 윽박지르지 말란 말이야. 




 

고독이 찾아왔을 때 기쁜 마음으로 그 시간을 즐겨라. 고독은 자아를 회복하고 살찌울 좋은 기회다. 외롭다고 투정을 부리고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대신 그 안에서 나를 더 충실하게 만들 방법을 찾아보라. 고독은 결코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진짜 두려운 것은 고독 속을 파고드는 외로움이다.

나는 계속해서 책을 읽어나가다가 이 문장으로 다시 돌아와서 이 책을 덮었다. 부산 여행을 할 때에 이 책과 동행하고자 함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다른 책이 아닌 이 책을 가져가기를 참 잘 했다고 생각을 한다. 이 책 덕분에 내 여행이, 내 생각이, 내 머리가 맑아지고 부드러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만들어내는 감정에 쉽게 잠식당하는 나였기에 책을 읽을 때뿐이었다는 건 아쉽지만, 표시해둔 문장들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정화됨을 느끼기에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도 여전히 이 책을 책장에 꽂아두지 못하고 계속해서 페이지를 넘겨보고 있다.



 


 

사람들은 시간이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 사람이 처음부터 변할 사람이었을 뿐이지 시간 때문은 아니다. 믿음을 가지고 서로의 오해와 갈등을 적절히 푼다면 진짜 사랑하는 사람끼리 기다리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기다림은 필연적으로 그리움과 고통, 초조함을 동반한다. 외로움에 몸부림쳐봐도 그를 만날 수 없다. 멀리 떨어져 있기에 소소한 일상을 함께할 수 없다. 그래서 기다림은 실망과 허무함이 남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사랑을 포기하지는 마라. 둘이 함께한 추억을 회상하고 그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상기하다 보면 기다림이 가치 있는 일임을 깨달을 것이다. 두 사람의 미래가 행복할 거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러니 관심을 덜 준다고 투정하거나 원망할 것도 없다. (……)

하지만 이왕 기다리기로 했다면 그를 믿어라. 그렇지 않다면 기다림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될 것이다.

 

이 글을 읽고 나는 카페에 앉아 주책없이 울었다. 눈물이 쉽게 멈추지를 않았다. 2018년 1월, 남편과 나는 강제로 주말부부가 되었다. 주말부부라고 하기엔 교대 근무이기에 주말이라고 무조건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같이 일상을 공유하며 살 수 없는 주말부부로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이미 주말부부는 2014년 11월에 한차례 겪은 바 있기에, 괜찮을 줄 알았고 안일하게 생각했는데, 이번은 그때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점이었다. 주말부부를 시작한 지 이제 2주에 접어들고 있다. 그 시간동안 내 감정이 시시각각 침전하는 것을 나는 목격하게 됐다. 나는 나의 변화를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니까. 함께 있을 때와는 확연하게 다른 남편의 행동들에 대해서 떨어져 있는 거리, 떨어져 있는 시간만큼 나에 대한 그의 사랑을 의심했다. 나는 사람 좋은 척 짐짓 웃어 보이며 농담을 하면서도 매몰차게 대했고, 결국은 폭발하여 날것의 감정을 맹렬하게 드러내 보이며 사랑의 형체를 확인하려 들었다. 그가 비로소 이야기를 했을 때 나는 그에게 한없이 미안해졌다. 그의 생활은 힘들었고, 그 생활에 적응하고 본인의 앞가림을 해나가느라 시야가 좁아지며 전보다 나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내가 덩달아 힘들까 봐, 그리고 본인의 자존심 때문에 나에게 말을 하지 않았고, 그 시간 동안 나의 불안은 증폭되어갔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했고, 나 역시 내 감정을 앞세워 그의 변화되었을 생활들을 미루어 짐작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미안하다고 말했다. 반드시 사과를 하는 쪽이 틀렸고 사과를 받는 쪽이 옳은 것은 아니다. 잘못은 없지만 상대와의 관계가 더 소중하기 때문에 먼저 사과할 때도 있다. 나는 그를 가엾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를 미워하기도 했다. 그의 안정된 쉼터가 내가 아닌 것이, 나는 많이 슬퍼졌다. (물론 그는 이 말에 반박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싸울 때를 제외하고는 나는 니 편이야.”라는 사실이다. 시간이 계속해서 지나는 지금,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문제도 있지만, 그건 그의 생활이 안정된 이후에도 계속된다면 그때 이야기해도 늦지 않다고 판단해서 보류한 상태다. 손을 잡을 수 있을 때 어깨만 나란히 하지 말고, 포옹할 수 있을 때 손만 잡지 마라. 사랑할 수 있을 때 이별을 말하지 말며, 사랑을 가졌을 때 모호한 태도로 대하지 말라. ​우리는 지금 당장이라도 이 문장을 실행해야 한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해도 모자랄 시간들을 괜히 미움으로 얼룩지게 하면서 에너지만 낭비한 시간들이 애석해서라도. 우선은 그의 생활이, 그리고 우리의 생활이 안정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와 나, 우리를 위해서.

(도대체 다들 주말부부는 어떻게 하는 거죠_)








​/ 책 속의 글_


설령 싸움에서 우위를 정한들 마지막에 얻어지는 것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넓은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자유와 평화가 당신의 세계에 깃들 것이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마라. 바꿀 수 없는 과거 때문에 현재와 미래까지 망치지 마라. 시간은 당신을 위해 멈추지 않는다.

오늘은 어제 때문에 아파하고, 내일은 오늘 때문에 아파한다면, 당신은 평생을 아파하면서 보내야 한다.




결혼은 마치 설탕물 같다.

설탕은 조금 들어가고 대부분은 물인 것처럼 결혼은 무색무취의 평범한 일상이 대부분은 차지한다.

하지만 진정한 행복은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그 평범함 속에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즐거운 기분을 회복하고 싶다면 일단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차분하게 하나하나 처리해야 한다. 침착함은 특별히 즐거운 상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쾌한 상태도 아니다. 생각이 너무 많기 때문에 인생이 복잡한 것이다. 몸은 현재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과거를 잊지 못하고 미래에 일어날 일들로 걱정한다. 그렇게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안고 가려니 당연히 발걸음은 무거울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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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간 우선 생활습관 - 즐거운 계획이 나를 행동하게 하는
닐 피오레 지음, 김진희 옮김 / 청림출판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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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보다 시간 관리를 잘 하는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또 그에 맞게 일일 계획을 세우고, 하루의 시간을 오전과 오후 여러 갈래로 쪼개는 작업 역시 빼놓지 않는다. 일일 계획을 세우는 것은, 전날 밤 침대에서 슥슥 써내려가는 날이 많다. 그래서 J는 내게 자주 묻는다. “뭐해?” “응, 내일 계획짜.” 내가 일일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 것이 벌써 몇 년 전에 생긴 습관 같은 것인데, 처음에는 하루의 일을 체크하고 동그라미가 빼곡하게 들어찬 스케줄러를 보면서 작은 희열을 느끼곤 했다. 내게는 그것이 오늘을 잘 살아내었다는 근거가 되는 지표인 셈이었다고 믿는 까닭이다.

 

어떠한 생산적인(월급을 받는) 일을 하지 않고 지낸 지 꼭 두 달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시간 관리를 소홀히 하지는 않지만, 언젠가부터 일을 미루는 습관 같은 게 생겼다. 이를테면 “오늘 못하면 내일 하지 뭐.”의 식이었는데, “오늘 꼭 해야만 해!”까지는 아니었어도, 몇 개의 항목이 꾸준하게 몇 주씩이나 딜레이가 되는 것을 목격하는 순간, 왜 이렇게 되어버렸지? 생각했다. 우리는 저마다 삶에서 일정 부분 일을 미루며 살아간다고는 하지만, 내게는 허용될 수 없는 일이 허용되고 있는 셈이었다.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싶어 찾은 책, 「내 시간 우선 생활습관」

 

 

 

 

우선 내가 요즘 미루고 있는 일을 생각해보기로 했다.

 

1. 책장 정리

2. 작은방 한편에 있는 이면지와 책 그리고 교안 정리

3. 건설안전기사 실기 준비

 

 

였는데, 왜? 왜! 왜! 미루는가?

a. …… 지금 당장 하지 않아도, 닥치면 언젠가는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

b. 이왕 할 거면 ‘제대로!’라는 심리가 발동하기 때문에, 그 일을 시작하는 것 자체가 두려운 마음이 든다.

c. 한 가지 일에 전념하느라 다른 기회를 놓치며 살게 될까 봐.

d. 게을러서

 

 

 

 

 

 

+

 

1. 책장 정리에 관한 건, a와 d가 해당할 것 같고.

플러스로, 집에 팔거나 나눔 하거나 처분할 책들을 다시 한 번 읽어보고 결정해야겠다는 욕심 때문에, 가지고 있는 책들만 수두룩 빽빽하다.

하지만 도서관에 가면 빈손으로 오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그 책들을 읽는 것만 해도 내게는 벅찬 느낌

 

2. 작은방 한편에 있는 이면지와 책 그리고 교안 정리 역시 a와 d가 해당.

그런데 며칠 전 당분간 작은방에서 지내기로 결정하면서 조금씩 정리해두었다. 하지만 여전히 차곡차곡 쌓여있는 이면지는 왜 버리질 못하는가.

 

3. 건설안전기사 실기 준비는, a,b,c,d 모두 해당이 된다.

그리고 공부의 경우에는, 중간에 하다가 손을 놔버리면 다시 시작하는 게 더 두려워진다. 이건 나의 최대 단점이다.

 

 

 

내가 현재 미루고 있는 것들을 생각하고 왜 미루는지에 대해 써 내려가는 시간을 가진 후에 이 책을 읽었는데, 그건 정말 옳은 선택이었다. 일을 미루는 일에 대한 새로운 정의는, =일을 미루는 것은 어떤 일이나 결정을 시작하고 마치는 데 대한 불안을 감당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 기제다.라고 쓰여 있었는데, 이건 정말이지 너무나도 옳은 말이어서 몇 번이고 되뇌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그 일을 영원히 하지 않을 것도 아닌데... (그만 좀 미뤄, 특히 공부_)

 

 

 

일을 미룬다는 여섯 가지 신호 중에서 내가 해당되는 것을 찾아보기로 했다. 직장을 다녔을 때의 내 모습도 생각해서.

 

할 일이 끝도 없이 많다. (집, 회사)

‘해야 해’와 ‘원래 이해야 해’라는 말을 늘 떠올린다. (집)

일을 미루게 될까 봐 불안하고, 압박을 느끼며 늘 두렵다. (회사)

항상 일을 하고 있거나, 일하지 않으면 죄책감이 들어 제대로 쉬지도 못한다. (집)

일을 미룰까 봐 늘 노심초사한다. (회사)

완벽하게 하려다가 일을 마치지 않고 미룬다. (집)

우선순위가 낮은 일을 할 때도 완벽을 기한다. (집, 회사)

 

 

내가 게을러지겠다고 작정하면 한없이 게으른 나무늘보가 되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특히 직장에서) 일을 미루는 행위 자체를 경계해왔고, 일을 다 끝내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하고 답답해져서 차라리 일을 다 하고 쉬겠어!라는 사람이었다. (나는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라서 일이 끝난 것을 상사에게 항상 들키곤 했다. 최대단점) 그 때문에 직장생활을 할 때에는 일을 미뤄둔 적이 없어서 나는 해당이 되는 게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해당되는 게 많아서 조금 놀랐다. 나는 단순하게 일을 미룬다는 행위 자체에 대해 회사에서는 경계를 하기 때문에 일을 미루는 행위를 하지 않지만, 집에서는 그게 느슨하게 다 풀려버리는 꼴이었다. 그나마 집안일을 미루는 게 아니라 나의 개인적인 생활을 미뤄두는 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우리는 살면서 어디에서든 우리의 능력이나 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들과 맞닥뜨릴 수 있다. 심지어 그들은 우리의 일이나 능력에 대해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피해자가 되거나 일을 미루게 되는 것은 그들 때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 때문이다. (P.50)

 

 

 

1.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 확인하기

→ 자신이 어떻게 시간을 활용하는지 기록하기로 했다. 이렇게 기록을 하면 각 행동에 자신이 할애하려고 했던 시간과 실제로 쓴 시간 사이에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 일에 A, B, C 등급을 매겨 우선순위가 높은 일에 집중해서 일한 점에 주목한다.

 

2. 언제 어떻게 미루었나. (일 미루기 일지 쓰기)

→ 날짜와 시간, 일과 우선순위, 미룬 일에 대한 생각과 느낌, 일을 미룬 변명, 일을 미룬 대신 취한 행동, 일을 미룬 대신 취한 행동 뒤 드는 생각

 

3. 심리적 안전망 마련하기

 

 

 

 

책에서는 일을 미루는 행위를 문제라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왜 그 일을 미루는지에 대해 면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그 일에 대한 이유를 생각해보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인데, 대부분은 그 문제 자체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내일은 꼭 해야지. 하고 다짐을 하게 된다.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찾는 게 우선순위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남탓을 하며 ‘- 때문에 이 일을 미루게 되었어.’라고 생각하는 점은 가장 경계해야할 1순위임에 틀림이 없다. 일을 함에 있어서 누구 탓이 어디 있겠는가. 그냥 내가 그 일을 하지 않는 것뿐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내가 지금 해야 할 혹은 할 일을 미루는 것이 그렇게 급하지 않은 편이고 언제 시작해도 상관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잠정적으로 이건 언젠가 해야겠어. 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미루고 있으며, 누군가 내게 독촉을 하는 일이 아니다 보니 상관없지만, 책은 회사에서 일을 미루는 일의 사례를 더 많이 보여주고 있었다.

 

 

대부분 직장에서 일을 미루는 경우는 내가 생각하기엔,

1. 내가 익숙한 일이라서 언젠가 할 수 있으니까

2. 일을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혹은 일이 어려워서

3. 요구되는 양이 방대해서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4. 다른 일들이 바빠서 계속해서 미뤄두는 경우

 

등등등의 이유가 있겠지만 적어도 일이 어려운 경우에는 미뤄두지 말고 처음부터 상사에게 시간을 달라든지 아니면 도움을 요청하면 어떤 피드백이라도 받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몇 년 전에 처음으로 다른 것도 아닌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있었다. 내 비루한 실력이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한계에 부딪힌 일이었고, 유리멘탈을 가진 나는 퇴근을 하면서도 그 일을 내일 어떻게 하지. 라는 생각에 휩싸여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다음 날 출근을 했다. 결국 나는 그날 오전, 실장님께 아무래도 내가 이 일을 끝내기에는 시간이 많이 부족할 것 같고 내가 이 일을 끝낸다고 하여도 실장님께 만족감을 드리지 못할 것 같다. 실장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요청하여 함께 일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했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실장님께 욕도 많이 먹었지만 차라리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해줘서 일을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고 말씀해주셨다. 만약 내가 당시의 실장님이었다면, (당시에 일이 급한 사안이 아니었기 때문에) 시간을 주고 그때까지 해보다가 안 되면 가져오라고 할 것 같은데, 그때 나에게 그 일은 며칠이나 시간을 두고 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기초부터 다시 해야 하는 일인데, 그 기초가 제대로 다져지지 않았다는 것을 어쩌면 섬세하신 실장님은 너무 잘 알고 계셨던 게 아닐까. (회사 다닐 때는 엄청 싫어했던 상사였는데, 그 시절을 통과하고 나니 참 감사한 분이셨다.)

 

 

 

1. 이것을 선택하겠어.

해야만 한다 → 선택한다

EX) 도서관에 가야 해. 치과에 가야 해 → 도서관에 가야지, 치과에 가야지.

 

2. 반드시 끝내야 해 → 언제 시작할까?

망설이는 상태에서 다시 일을 시작하는 상태로 집중하게 해준다.

 

3. 작은 일부터 하나하나 차근차근하면 돼.

 

4. 인간이니 실수할 수도 있어.

 

5. 놀 시간을 꼭 내야지.

 

 

 

 

책에서는 일을 해내는 사람에 대해서도 말을 하고 있는데, 말이라는 것은 참 오묘하다. 말을 내뱉으면 나의 마인드도 그 상황에 맞게 달라지기 마련이니까. 이 책은 작거나 사소한 일을 미루는 ​사람들보다는, 회사에서 일을 미루는 사람들에게 더욱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었다. 책에서 일을 미루지 않기 위해 가장 강조하는 말은, 놀 시간을 꼭 내라! 는 것이었다. 그 말은 어떻게 보면, 쉼 없이 일하는 직장인이 여름휴가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람에게는 일할 시간도 중요하지만 놀 시간 역시 꼭 필요하다는 것, 그것은 휴식이 아니고 회피도 아니고 비타민 같은 것. 30분만 일을 하라는 것도 있었지만,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선 그렇게 수긍은 가지 않았다. 나의 경우에는 일을 하다가 쉬는 시간이 되면 몸에 기운이 쏙 빠져버려서 그 일을 더 미루게 되는 역효과를 낳게 되기 때문에, 한 번 하면 그 일이 끝날 때까지 해야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데 몇 날 며칠 동안 해야 하는, 호흡이 긴 장기 레이스 일의 경우에는 이 방법을 써보아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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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붉은 사랑 - 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그대가 있었다
림태주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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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시리게 찬 날이다. 나는 황망한 표정을 자주 지어 보였다. 어리둥절할 것도 없다. 으레 겨울만 되면 느껴왔던 헛헛함이었다. 헛헛함의 대상은 어떤 것도 아니었다. ‘누구’도 아니었고, ‘무엇’도 아니었으며, 하물며 ‘왜’라는 부사로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이 폭발처럼 치솟아 오르는 그런 겨울이다. 낡고 허물어질 것처럼 아스라이 놓인 내 표면의 거친 감촉을 어루만져 줄 것을 원했다. 나는 겨울에 먹이를 찾아 나선 눈 속에 폭폭 빠지는 사슴처럼 허기를 채우기 위하여 도서관을 더 열심히 들락거렸다. 내게 주어진 공부를 해야 하지만, 잠시 미루어두어도 좋을 것 같다는 어쩌면 시간이 지났을 때 지금의 시간에 대해 어리석다 말할지도 모를, 스치는 지금의 시간들을, 나는 귀중하게 여기기로 했다. 도서관에 가면 책을 네댓 권 빌려온다. 어쩌면-이 아니라, 역시나 다 읽지 못할 책들이다. 또 욕심을 부렸다며 자괴를 느낀다. 하지만 이 책들 중에서 나와 인연인 책이 있다면 끝까지 읽어내리라, 생각하며 책을 읽는다. 언제나 그랬듯이.




시는 눈에 넣는 그림이 아니라 심장에 넣어 입으로 토하는 음악’이라고, 그는 써두었다. 오래도록 그 문장을 오묘하게 바라보다가, 내가 詩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에 직면하고 만다. 시를 써본 것도, 초등학생 때, “백일장에 나가고 싶은 사람?” 이라는 선생님의 말에 어떤 용기가 솟았는지 손을 번쩍 들었을 때. 시를 써본 것은 단연 그때가 처음이었으니까. 고등학생 때는 딱히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시를 쓸 일이 없었지만, 시를 외워야 하는 일은 참 많았다. 내가 외운 것이 그뿐이랴. 강제로 외운 것들은 마음속에 잉태되지 못하고 금세 휘발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렇게 강제로 읽었고 읽혔으며 외웠던 그 시들은 내 가슴속에 아직도 자리 잡아 나에게 온기를 불어넣는다는 점은 참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따금 윤동주 시인의 시를 필사하고, 박준 시인의 시를 필사하지만, 나는 그래도 시를 모른다. 내가 그 시를 알 리가 없다.

처음에는 조금 두꺼운 시집인 줄로만 알았다. 천천히 읽어봐야지,라며 도서관에서 집었던 게 화근이었다. 서문을 읽고, 곧바로 <어머니의 편지>를 읽으며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나는 이 페이지만 몇 번이나 도돌이표처럼 읽었는지 모른다. 나는 자식을 두지 않았기에 자식으로서의 입장으로 이 글을 읽었는데, 이 글을 읽으면 누구든, 엄마로서의 입장보다 자식으로서의 입장에서 이 글을 읽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너를 사랑으로 낳아서 사랑으로 키웠다. 내 자식으로 와주어서 고맙고 염치없었다. 너는 정성껏 살아라.

내가 가장 오랫동안 시선을 둔 부분은 이 부분이었다. 글을 읽으며 뭔가를 생각한다기보다, 그 글들을 하나씩 정성껏 눈으로 짚으며 자간 속으로 들어가려 애썼다. 이 책은 그런 책이었다. 오래, 자주 들여다보고 싶은 책. ‘어머니의 편지’는 유튜브에서 <그토록 붉은 사랑>을 검색하면 낭독한 것을 들을 수 있는데, 글을 읽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마음이 한동안 무거웠고, 지금 역시 그러하다.

봄에 피는 꽃들에 대해 나열해놓은 부분을 읽으며, 나는 가장 처음, 목련을 떠올렸다. 내가 삼 년 동안 살고 있는 동네에서 목련을 통해 봄을 알 수가 있는데, 빨리 피지만 목련이 질 때의 모습은 너무나도 애처로운 것이었다. 목련의 잎이 한 잎 두 잎 떨어지고 색이 갈색으로 변색되버리면, 아름다웠던 목련의 모습보다는 우리는 거추장스러운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그는 목련의 진면목을 알고 있었다. 목련, 화사했으므로 추한 최후도 마다하지 않는다.

가을로 넘어가는 볕을 햇솜으로 지은 신혼 이불이라고, 말하는 엄마의 어휘력이라든지, 배추와 무가 햇살의 젖꼭지를 빨아 대며 통통하게 살찌고 있습니다.라든지, 달걀노른자 같은 낮별,같은 표현은, 나도 모르게 절로 고개가 끄덕여져서 배워보고 싶은 필력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이 책이 좋았던 것은, 허투루 가벼운 글이 없다는 것이었다. 가볍게 쓴 글일지라 하더라도, 묵직한 울림이 있어 좋았다.

사랑은 생각해 보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와락 덤비는 것이다. 그냥 손잡고 입 맞추고 꼭 껴안고 거침없이 뒹구는 것이다. 세포 하나하나가 오돌토돌 돋아 오르는 것이 감각되는 것이다. 그래, 사랑은 이렇게 하는 거였지.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나와 당신이 가진 마음의 무게를 가늠하고, 재어보기도 하면서, 그것이 알맞게 채워지지 않았거나 채워질 수 없었을 때 삐지고 고개 홱 돌려 토라지며 내 마음 알아달라고 떼쓰는 게, 결코 사랑의 일부분이 아니었지. 내가 잠시 잊었었나 보다. 사랑을 하는 법을, 이렇게 다시 배워야지. 그리고 한 평생을, 그와 그렇게 살아야지.



그늘은 늘 오롯한 위안입니다. 그늘진 자리에 들면 비로소 잠시 내가 살을 비우고 나온 이루 말할 수 없는 무량한 것들과 숨이 멎을 것 같은 환한 고요가 젖은 눈을 열고 들어옵니다. 실상사 뒤란, 부도 밭의 여린 제비꽃들이 햇살로 짠 날개옷을 입고 팔랑거리고, 생리통을 앓는 배롱나무들이 지그시 하혈을 누르고 있습니다. 나는 양지에 펼쳐진 햇살이 페이지보다 그늘이 집필한 더 짙은 그늘의 산문을 읽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 가려면 체제에 무조건 순응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나와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삶이 어디서 왔는지 찬찬히 들여다볼 줄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나의 삶, 나의 행동도 존중받을 수 있다.



구월의 햇볕은 정숙한 여자처럼 다소곳하다. 나는 문득 햇살에게 경건하게 거수경례를 하고 싶어진다. 수국 화분을 밖으로 꺼내 주근깨마냥 박힌 여름의 그늘을 잎에서 닦아 낸다. 서늘한 시간의 더듬이가 내 손등을 살짝 건드리고 지나간다. 나는 얼마나 많은 여름의 무기력과 권태를 위태롭게 지나왔던가. 이 가벼운 구월의 스침이 나를 깨어나게 한다.



바다 한가운데에 머물 때, 나는 사과 상자를 과적한 구름 트럭이 무게에 못 이겨 바다 속으로 침몰하는 광경을 자주 목격하곤 했다. 수면 위로 떠오른 붉은 사과 궤짝들로 바다는 어지러웠고, 쏟아진 사과알에 맞은 물고기들의 등에는 푸른 멍이 번졌다.



사는 것은 왜 이리 간절해야만 하는 것이냐. 하필이면, 감상적인 날씨에게 물어보려 할 때 아랫 입술에 박힌 송곳니가 너무 깊어 핏물이 차오른다. 불량하고 음습한 어둠이 저만치 뒷걸음질 친다. 양아치 같은 십일월, 석류처럼 터지고 바스러진 마음의 붉은 졸개들.

열차가 섰다. 비가 내렸고, 비가 내렸고, 이른 단풍일 몇 장이 내렸고, 가을이 뒤따라 내렸다. 가을은 부서질 듯 야위어 있었다. 나는 시리고 아파서 눈을 감았다. 커다란 갈색 트렁크 밑바닥이 땅에 끌려 신음하는 소리가 났다. 어떤 가녀리고 가벼운 몸이 내게 육박해 왔다. 나는 바스라지게 가을의 허리를 껴안았다.

어떤 통증은 감염된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낯익은 대중가요 한 소절에 버텨온 일상이 무너지는 방심의 날이 있다.





/

하지만 나는 이 책에 대한 평가를 하지 않는다. 나는 분명 이 책을 참 좋게 읽었고, 내 책이었다면 밑줄을 좍좍 그어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도 있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중도에 덮어야 하나, 라고 생각하기도 했던 부분이었다. 나는 정말 궁금했다. 유씨와 류씨는 서로 다른 성씨인데, 두음법칙으로 인해 류씨가 유씨와 같은 뿌리라고 하니, 류씨가 소송을 해서 대법원 판결이 났었다. 나씨와 라씨는 어떠한 연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도 예외로 두었다는 점도 확인했다. 그런데 다른 성씨에 대해서는 아직 나와있지 않았다.

그가 인스타를 하기에, 그에게 디엠을 보냈다. (1월 4일에 보냈는데 아직 답이 없는 상태이다.)


안녕하세요. 현재 림태주 님의 책, <그토록 붉은 사랑>을 읽고 있습니다. 고독과 사색을 일삼게 되는 겨울에 읽으니 찬 공기도 달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 갖, 궁금한 점이 있어 이렇게 여쭙게 되었습니다. 현재 한국의 두음법칙상 성씨 /림/이 /임/으로 변경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유/씨와 /류/씨는 소송으로 위헌 판결이 나 분리된 것으로 어렴풋 알고 있고요. 그런데 성씨 /림/으로 지내시는 건 어떠한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궁금합니다.


이 책에 대해서는 마음에 평온을 가져다줄 정도로 좋게 읽었지만, 나는 찝찝한 이 부분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이 책에 대한 어떠한 평도 내릴 수 없고, 내리기도 싫다. (뒷부분에 인쇄되어 있는 것을 보니, 림태주, 임태주가 같이 쓰여 있었는데, 그것도 어떠한 연유인지 궁금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쓰고 싶은 말이 많지만, 이 이상 쓰는 것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결례라고 생각하기에 그만 쓴다.





<오탈자>

P.272

식탁에 꽃병이 놓이자 식구가 는 것처럼 천정의 불빛이 따뜻해졌다. ▶ 천장

<그토록 붉은 사랑>을 12개를 낭독한 걸 나는 다 읽어보았는데, 천정이라고 쓰여있는 것도 천정이라고 읽더라.

천정은 북한어고, 천정은 천장의 잘못된 말입니다. 잘못된 건 고쳐서 읽어야지, 천정이 뭡니까...



천정2 (天井) [명사] <건설>
1. ‘천장2(2. 반자의 겉면)’(天障)의 잘못.

2. [북한어]‘천장2(2. 반자의 겉면)’의 북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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