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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질문들 - 당신의 견고한 일상을 송두리째 흔들지 모를
김가원 지음 / 웨일북 / 2018년 1월
평점 :
절판
‘당연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해가 뜨면 해가 지는 것도,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다는 것도,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에는 단풍이 물든다는 것도 모두 당연하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입장은 언제나 인간에서 시작된다. 이를테면, 해가 뜬다면 둥실둥실 뜨는지 부끄러워하며 뜨는지, 해가 진다면 슬프게 지는지 아름답게 지는지 섹시하게 지는지, 여름에 더우면 얼마나 더우며 겨울에는 얼마나 추운지, 봄에는 어떤 꽃이 어떻게 피고, 가을에 물드는 단풍은 마음에 어떤 동요를 불러일으키는지,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소리다. 하지만 봄에 피어야 하는 개나리가 겨울에 핀다면, ‘왜’ 개나리가 피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고 우리는 그것을 ‘이상한 현상’이라고 속단해버리곤 한다.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한다. 세상을 조금 낯설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책에서는 감각, 믿음, 마음, 욕망, 타자, 진리에 관하여라는 타이틀 아래, 총 서른 개의 질문에 대해 묻고 대답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중에서 마음에 와닿았던 몇 가지를 풀어보고자 한다.
1. 가까이에 있어서 크게 보이는 것인가. 크게 보여서 가까이 있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우리는 한 번쯤은 원근법을 표현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는 멀고 가까운 물체를 제대로 캐치하여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우리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다. 거리감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의해서 습득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럼 나는 내 경험을 비추어 묻고 싶다. 어릴 적 나는, 산과 나무, 집과 사람을 한 스케치북에 그릴 때 비율을 무시하고 그림을 그렸다. 왜? 아직 어리기 때문에 사람은 집보다 훨씬 작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해서? 음. 표현력이 부족해 내 생각을 다 풀어내기는 좀 힘이 들지만, 다른 사람의 생각이 궁금한 부분이기는 하다.
2. 읽던 책을 덮고 손도 아래로 내려놓고 눈을 감아라. 책이 있는가?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데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나?
책은 보여서 있는 것이다. 감각되지 않는 한 그 어떠한 것도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있다(존재한다)고 말하고 싶다면 그것이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의 영역에 서야 할 것이다. 외부 세계는 감각되는 순간에만 그렇게 있을 뿐이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단순히 책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사랑’에도 반영을 시켰다. (물론 책에는 사랑에 대해서도 쓰여있기는 하지만, 그것들보다는 이 부분이 더 와닿아서) 사랑도 물론, 보이지 않는다. ‘그가 나를 사랑할 것’이라는 믿음 아래 우리는 그 사랑을 지속하고 유지할 수 있는 것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외부 세계는 감각되는 순간에만 그렇게 있을 뿐이지만, 내부 세계는 감각되는 순간으로는 절대 알 수가 없는 법이니까.
3. 전망대가 있는 타워 근처에 사는 당신, 거실에서 타워가 보인다. 가까이 보고 싶어 타워까지 걸어간다. 가까이서 본 타워는 거대한 덩어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전망대를 올라간다. 내가 사는 곳이 내려다보이고 하나의 도시가 장난감처럼 보인다. 타워 속으로 들어왔으니 타워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서 있는 거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반드시 어딘가에 서 있을 것이고 그 자리에서 보는 세상은 그 자리의 관점일 뿐이다. 어느 누구도 나와 같은 자리에 동시에 서 있을 수는 없다. 그것이 우리 모두가 조금씩 다른 각도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나는 곧잘 그이에게 나와 함께 있었으니까, 나와 함께 보았고, 들었고, 먹었고, 맡았으니까 그이 역시도 나와 같은 감정을 공유할 것이라는 착각을 자주 범하곤 한다. 그것은 그이와 나는 다른, 독립된 인격체라는 사실을 자주 잊곤 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그랬으면 좋겠다는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내가 이렇게 하면 당연히 그이가 이렇게 해주겠지. 이런 것들 말이다. 그래서 나의 감정과 다르거나 때로 내 기분을 이해해주지 않거나 내가 예상하던 것과 다른 것들에 대해 서운함을 넘어 서러움을 느낄 때도 적지 않다. 지금은 그것에 대해 나름대로의 고찰을 통해서 다를 수 없음을 인정하는 시간을 자주 갖는 편이지만, 그래도 이따금 서운한 기색을 내비치곤 한다. 나는 여전히 노력이 더 필요함을 느낀다.
4. 친구가 울고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몇 해 전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네 마음 나도 알아. 힘들지?” 정말 친구의 마음을 아는가? 아는 것은 당신의 슬픔 아닌가?
당신은 친구의 마음에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진짜 공감하고 있는 것인가? 당신은 친구를 바라보며 당신 자신의 경험을 떠올린다. 그리고 슬프다. 그 슬픔은 친구를 거쳐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친구의 슬픔으로. 그러나 나로부터 출발하여 다시 돌아온 감정일 뿐이다. 그 친구가 어떤 마음일지는 알 수 없다. 공감은 영원한 착각일지 모른다.
이 부분을 읽고 나서는 한동안 멍했다. 나는 공감에 대해 굉장히 서투른 편이다. 특히나, 나는 위로를 정말 잘 하지 못하는 편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았을 때 느꼈던 그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전달을 해준 적이 거의 없다. 내가 위로를 많이 받아보지 못한 탓이다. 그 감정일 때 어떤 위로를 해도 위로가 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나는, 위로를 잘 건네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다. 나는 이미 내 마음이 아물었거나 아물고 있는 상황일 때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편이었다. 위로를 받기 위해 그랬다기보다는, 나는 그냥 그때 그랬어. 정도를 말하고 싶었다. 그럴 때면 친구들은 내게 위로의 말을 건넸는데 내게는 그 이야기를 해도 정말 아무렇지 않을 때였기 때문에 그렇게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그저 당시의 나를 위로하려는 친구들의 마음이 고마웠다.
그런데 나는, 정말 위로가 필요한 상황에서는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은 모르는 척하고 넘어갈 때가 많은데, 여전히 잘 모르겠다. 고등학생 때 친구의 아버지께서 편찮으셔서 친구들끼리 병문안을 간 적이 있지만,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아무도 몰랐다. 친구는 알리지 않았고, 찾아가 보지 못했다. 나는 그게 그렇게 한스럽다. 친구가 그때의 일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할 때가 간혹 있는데, 그때마다 나는 불에 덴 것처럼 마음이 따갑다. 친한 친구가 가장 힘들 때 찾아가지 못한, 곁에 있어주지 못한, 밥 한 끼 같이 먹어주지 못한 슬픔이다. 내가 가서 뭘 할 수는 없었겠지만, 뭔가를 하지 않아도 힘들 때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이 됨을, 이제는 잘 알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더 아프다.
그리고 그이. 그이는 내게 모든 것을 다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정작 내가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힘들어할 것 같은 일들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어쩌다가 내가 알게 된 사실들에 대해 그를 위로를 해주는 것이란 게, 겨우 그를 안아주는 일이고 따뜻한 밥 한 그릇을 차려주어 마음을 덮이는 일이다. 나의 위로 방식은 여전히 소극적이며 미온하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그에게 잠시라도, 아주 잠시라도 세상과 그를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기를 소망한다.
5. 당신은 당신이 만들어낸 생각에 화가 난 것이다. 모든 것은 당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신은 철저하게 당신의 생각에 따라 상황을 판단하고 이해했다. ‘화’란 그런 것이다. 우리에게 화를 유발하는 것은 상대가 아니다. 상대를 나의 마음에 대입할 때 발생한다. 상대에게 나의 마음을 이입해서 그를 이해하는 방향이 아니다. 상대를 나의 자리에 놓을 때 나는 나의 생각에 따라 상대의 행동을 판단하고 재단한다. 그러나 당연히 상대는 나와 같지 않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간극이 발생하고 그 간극은 나의 오해들로 채워진다. 그러므로 나에게 화를 유발하는 대상은 상대가 아닌 바로 ‘나’의 생각이다. 화를 푸는 방법은 간단하다. 바로 마음의 방향을 바꾸기만 하면 된다. 상대의 마음을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상대로 향하게 하는 것. 그의 말을 들어 보고 그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 나의 ‘화’는 나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나는 가지치기를 잘 하는 사람이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상상하여 그것을 사실로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는, 매우 아둔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내가 마음에 두고두고 간직해야 하는 것이어야 한다.
야경을 보기 위해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떠났던 2015년을 생각했다. 나의 욕심대로라면 매일매일 야경을 보고 싶었지만 하루는 부다 왕궁에서 국회의사당 야경을 보았고, 하루는 다뉴브강에서 페리를 타고 국회의사당과 부다 왕궁의 야경을 보았으며, 하루는 도심 속에서 머물며 마무리했다. 그러면서 내게 주어진 4박 6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원했던 만큼의 야경을 보지는 못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나는 그에게 말을 했었다. “우리는 야경 속에 들어와 있어. 다른 사람들이 국회의사당이랑 세체니 다리를 보고, 사진을 찍을 때 우리가 이곳에 있잖아.”라고. 나는 알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디에 있든 우리는 늘, 야경 속에 있었다고. 그것을 그 당시에 깨달은 것은 정말 천운이었다. 그것을 지나고나서 알았더라면 당시의 아름다움보다 아쉬움이 더 컸을 테니. 모든 것이 그랬다. 나의 시선이나 관점도 조금만 바꾸면 달리 생각할 수 있었다. 매번 주어지는 당연한 일상들 역시 감사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세상에 감사할 일은 없었다. 감사함은 삶의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나는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대개 익숙하고 친숙한 것에 대해서는 “왜?”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이 힘이 든다. 그래서 나는 사고의 전환을 낯섦과 동일시했다. 낯선 것에 대해서는 궁금하고, 궁금하기 때문에 물음표가 따른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것에 대해 탐구를 하고 고찰해야만 한다. 그랬을 때, 우리의 익숙함은 낯섦과 마주 설 수 있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