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남의 집 귀한 딸인데요
악아 지음 / 봄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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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23. 시가에 가면 내 자리가 없다.

 

식사를 하고 나서 다른 식구들은 돌아갈 각자의 방과 정해진 자리가 있었다. 아버님은 소파 한가운데 앉아 리모컨을 돌리고, 어머님은 안방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시누이와 남편도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뭔가에 몰두했다 나만 내 자리를 찾지 못하고 하릴없이 거실과 주방을 오갔다. 어딜 가도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겨우 내 자리인가 싶어 들어간 화장실에서 마주한 것은 나란히 꽂혀 있는 시가 식구들의 칫솔이었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 집에서 챙겨온 칫솔을 칫솔꽂이 대신 세면대 한 귀퉁이에 조심스럽게 올려두었다.

 

밖에서는 떵떵거리며 큰소리를 치다가도 '며느리' 자리에만 서면 이상하게 작아졌다. 남의 집 주방에 들어가 쭈뼛쭈뼛 설거지하고, 시어머니의 차 별 대우에도 반박하지 못했다. 눈치를 보고 희생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이런 나의 처지를 푸념하면 모두가 며느리는 '원래' 그런 거라며 그냥 받아들이라 했다.

 

마치 시가의 비정규직이 된 느낌이었다. 막말과 차별 대우가 만연하고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없는, 이 열악한 근무 환경에서 고군분투 중인 서러운 비정규직.

 

 

 

 

 

출퇴근을 현장으로 했을 때, 어린 여자애라는 이유만으로 면죄부가 되는 걸 느꼈다. 당시에 나는 그것이 기분이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기분을 느꼈다기보다는 다행이라 여겼던 것 같다. 적어도 불합리한 일은 생기지 않겠지,라는 안일한 생각.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내가 그들에게 업무를 지시하는 순간, 그들은 나이 어린 여자애인 나를 만만하게 생각하고 언어를 내뱉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쌍욕을 듣고서도 , ooo.”라고 대꾸를 할 만큼 씩씩했다. 이후에도 처음 낯선 지역에서 터전을 잡고 일을 하게 되었을 때에 그들이 쓰는 언어의 온도와는 다른 것이 이유였는지 싸가지가 없는 말투라는 말도 들은 적 있는데 그 지역 특유의 억양을 스스로 배울 만큼 융통성도 있었(), (생각한다.) 가장 최근에도 회사에서 불합리한 일들을 당하면 그것에 대해 기꺼이 부당함을 당당하게 말하며 나는 타인에게 니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의 존재는 결코 하찮지 않다는 점을 명시하곤 했다.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기꺼이 나는 선을 긋고 더 나아가 그것과의 인연을 끊기도 했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으니까.

 

 

 

 

그런데 나의 말문을 틀어막은 일들이 생겨났다. 정말 이해할 수 없고 존중할 수 없는 문화라고 생각하는, 남성과 여성이 결혼하기로 마음먹은 이후부터 '며느리'라는 역할을 부여받는 그 순간이다. 나는 결혼 전까지 부모님께, 특히 엄마에게서 남동생과의 차별을 꽤 자주 받아왔다. 나는 그때마다 열렬하게 저항했으나 어떻게 된 일인지 지는 쪽은 항상 나였다. 그럼에도 변치 않는 것은 어쨌든 엄마니까. 였다. 언제든지 말을 할 수 있었다. 싫어!!!라는 말도 할 수 있었고, 왜 차별해!!!!!!라고도 소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결혼을 하기로 마음먹으면서는 내게 며느리라는 역할이 부여됐고, 그 때문에 위축되는 것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나의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는지, 결혼한다고 했을 때에도 음식 하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내게, “어차피 결혼하면 다 하게 되는데 뭘 벌써부터 알려달라고 하냐. 닥치면 다 하게 된다.”라고 말씀하셨으면서 상견례 때는 우리 애가 밥도 잘 못한다."라며 잘 봐달라.”라는 뉘앙스로 말씀하셨는데, 별거 아닌 그 일이 나는 기억에 남는다. 내가 밥 못하는 게 죄송할 일은 아니지 않나. 밥을 할 줄 알아야 한다면 부모님과 함께 사는 내가 할 줄 알아야 하는 게 아니라, 혼자 살고 있는 J가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말하곤 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겪는 불평등에 대해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내게 주어진 일들을 쳐내기에도 힘들었으니까. 그것에 대해 항거함으로써 불합리함을 줄일 수 있었다. 항거를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였지만. 실제로 말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내가 겪은 일에 연관된 대다수의 사람들은, 말을 하지 않으면 그게 당연한 줄로만 알고 사람을 대했다.

 

 

 

 

또 다른 이유는 결혼해서 생기는 불평등은 결코 여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결혼을 함으로써 남성들은 '가장'이라는 무게를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숙명이 되는 것. 부끄럽게도 그전까지는 모르고 살다가, 내가 스스로 사회생활에 뛰어든 시점부터 나는 나의 아빠를 가엾이 생각했다. 그리고 그 외에 몇 년 전 회사에서 50대 중반의 소장님과 함께 일을 한 적이 있었는데, 본인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들에게 입에 발린 말을 해야 했고 본인의 책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억울한 상황들도 겪는 것도 가까이에서 보았다. 그게 결혼의 유무와 무슨 상관이냐, 그렇지 않은 남자도 있다, 다 인정하지만 가정을 가지고 있는 남성들에게는 '책임감'이라는 결코 가벼이 생각하지 못할 것이 가중된다는 점은 참 가엾은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을 함으로써 개인과 개인 간에 누가 더 손해다-라는 말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여성이 더 손해다-라는 말은 거리를 두고 생각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주변 페미니스트라는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도 아니고 '내가 받는 것은 부당, 너는 당연한 것',이라는 마인드가 깔려있었다. 그외에 할 말은 많지만 어쨌든 그런 게 페미니스트라면 나는 절대 그 명칭을 갖고 싶지 않다.

 

 

 

5년의 결혼생활 중에는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다행히 큰일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일들이 자잘자잘하게 있었다. 누구 하나 싫은 소리 하시는 분 없었지만 며느리라는 자리에만 앉게 되면 나는 자주 눈치를 보았다. 그렇다고 내가 명절에 가서 찬밥 신세가 되는 것도 아니었고, 명절 당일에 나의 부모님댁으로 가는 내게 네 덕에 편하게 했다. 고생 많았다."라고 나의 노고를 인정해주시는 어머니였다. 그거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자꾸만 마음이 이상했다. 결혼을 하고 나서 명절을 보내고 내가 J에게 제일 많이 한 말은, “생신에 부모님댁 가는 것과 명절에 부모님댁 가는 것과는 천지차이야.”였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는 명절 때마다 사소한 행동 하나, 말투 하나에도 너무나도 쉽게 마음이 구겨졌다. 구겨진 마음을 J에게 전부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의 부모님이었으니까. 하지만 아예 말을 하지 않고는 견뎌낼 도리가 없었다. 타인에게 말을 하느니, 차라리 J에게 말을 해야지 했다. 나는 나름대로 필터링을 했고, 다행히 그는 잘 들어주었으며 내 입장에서 생각해주는 능력까지 선보였다.

 

 

 

하지만 있었던 것이 어떻게 없던 일이 될까. 자잘자잘한 일들 속에서 여전히 남는 응어리들이 있었다. 어쩔 수가 없기에 깊은 곳에 넣어두고 모른체하며 지내는 것뿐이지. 그렇기에 <저도 남의 집 귀한 딸인데요>라는 문장만 보고서도 나직한 한숨이 나오는 것이었다. 책 속의 이야기에는 모양과 크기가 각기 달라도 우리는 '악아'가 겪은 일들에 대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래에 이 이야기를 두어 번 정도 한 것 같은데, 2014년에 함께 일한 실장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외손주가 아프면 내 딸이 힘들까 봐 걱정인데, 친손주가 아프면 내 새끼(손주) 아파서 어떡하나.” 한다고. 그러면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자신에 대해 정말 놀랐다면서. 실장님은 며느리가 불편해할까, 힘들어할까 전전긍긍하시는 분이었는데 너무나도 솔직한 말을 듣고 나도 정말 놀랐다.

 

J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을 때, 나는 그에게서 남들과 다를 바 없는 말을 들었다. “우리 엄마는 안 그래.” . 어떻게 그렇게 똑같은 말을 하는지.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당신의 부모님이라는 것은 영원하겠지만, 당신과 나는 결혼을 함으로써 부모에게서는 완전한 독립이 된 것이고, 우리는 새로운 가족을 꾸린 것이라고. 그리고 완벽한 가족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도 솔직하게 말했다. 나한테 가족이라는 것은 싫으면 싫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가족인 건데, 나는 부천 부모님께 그럴 수가 없다고. 다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님이니 그것에 대한 예의는 갖추겠다고 말이다. 나는 그런 말을 오랫동안, 자주 말했다. 그리고 그가 본인 입으로 스스로 그 말을 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에게 하던 말들을 멈출 수 있었다.

 

그런데 지내다 보니, 정말 그랬다. 딸 같은 며느리는 존재하지 않았고 아들 같은 사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 모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님' '내가 사랑하는 자식의 배우자'까지인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 더 예의를 갖추고 존중을 해주어야 하는 건 아닐지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139. 혼자가 아니라 둘이 됐는데, 둘이라서 느끼는 외로움의 깊이는 아득하다.

 

 

143. 외로움이라는 낯선 감정을 결혼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어버린 이 미스터리한 상황은 기대 심리 때문이었다. 결혼을 하면 언제나 함께할 것이라는 어리석은 기대감.

 

 

144. 어릴 적 동화를 너무 많이 봤다. 동화 작가들은 '그렇게 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무책임한 해피 엔딩으로 나를 세뇌시켰다. 둘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 무엇인지는 가르쳐주지 않고 말이다.

 

'따로 또 같이'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결혼해도 여전히 내게는 혼자인 시간이 있고, 또 다른 외로움과 쓸쓸함을 마주하기도 한다. 그 시간을 그대로 인정하는 과정이 요즘 내겐 필요하다.

 

 

 

책은 고부갈등 말고도 배우자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작은 지분을 차지했는데, 결혼을 해도 외롭다는 건 나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느꼈던 감정이었다. 정확히는 혼자일 때 느끼는 외로움과 둘일 때 느끼는 외로움은 온도 자체가 확연하게 다른데, 둘일 때 느끼는 외로움은 정말 처연하다. 내 결혼생활이 불행하다거나 한 게 아니었는데도 외롭다고 느끼다니-라면서, 처음에 잘못된 감정인 줄 알고 바르게 고치려고 노력도 많이 했었다. 그러다가 당시에 김재용 님의 <엄마의 주례사>를 읽으며 나의 감정이 유별난 게 아니구나, 하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었다. 그것을 다 풀어서 말하기에는 너무 구구절절하니, 결혼해도 외롭다.고 뭉툭하게 말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외로움에서 도망쳐 결혼을 하다고 해서 외로움이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느닷없이 찾아오는 온도가 다른 외로움이 뼛속을 시리게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나의 잘못도, 배우자의 잘못도 아니에요. 우리에게는 '부부'라는 역할보다 ''라는 역할이 인생에 있어 기본 바탕이기 때문일 거예요. 두 외로움을 적절히 섞어 쓸 수 있는 적당한 융통성이 필요할 거예요. -지금의 내가 5년 전의 나에게.

 

 

 

 

 

+어쩌다 보니 명절에 이 책 서평을 쓰고 있네. 이번 명절 역시 아무 데도 가지 않아서 감정을 바닥까지 내려다보지 않게 되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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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헤어지는 하루
서유미 지음 / 창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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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트르」는 『모두가 헤어지는 하루』에 수록되어 있는 첫 번째 단편이다.

본 서평은 「에트르」에 관한 서평이다.

‘나’는 백화점 지하에 있는 ‘에트르’에서 일하고 있다. ‘언제까지나 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언제까지 일할 수 있는 곳’으로 끝나는 아르바이트다. ‘나’에게는 낮에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무 보조로 일하며 저녁에는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 여동생이 있다. 여동생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나’를 한심하게 생각한다. ‘나’도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어쩌다 아르바이트로 먹고사는 인생이 됐지. 라며 자조하면서도 주 6일씩 일하면서 정신없이 사는데 낭비 같은 말을 들으면 억울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상황에서 두 자매에게 난처한 일이 생겼다.

집주인이 통보를 해온 것이다. 내년부터 보증금이나 월세를 올려달라고. 올려달라는 금액은 보증금 1,000만 원이나 월세 10만 원

12. 시간이 지날수록 집은 낡고 지저분해지는데 보증금이나 월세가 계속 오른다는 게 이상했다. 이사를 가고 싶은 것과 이사를 갈 수 있는 것은 다른 문제라 보증금을 올리려면 대출을 받아야 하고 월세를 더 내려면 수입이 늘어나거나 지출을 줄여야 했다. 현실적으로는 대출이 불가능하고 더 벌 수도 없으니까 쓰는 걸 줄여야 했다. 그동안 잠도 줄이고 게으름 피우는 시간도 줄이고 말도 줄이고 꿈과 기대와 감정까지 줄이며 살았는데 여전히 뭔가를 더 줄여야만 했다.

3포 세대, 5포 세대를 지나 이제는 n포 세대까지 왔다. 지금의 세대는 참 많은 것을 줄이고 버리고 포기해야만 한다. 그렇게 해도 줄일 것이 있고 버릴 것이 있고 포기해야 할 것이 있다는 건 참혹함을 넘어 난폭하고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지금 세대만 그런 게 아니라 전의 세대도, 전전의 세대도 그랬다 - 라고 말을 해버리면 할 말은 없다. 세대마다 각기 다른 고충을 안고 산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지금은 개천에서 용나는 시절이 아니다. 그럴 수도 없다. 세상이 바뀌고 있고, 호락호락하지 않은 시대를 살아가는 세대들을 우리는 안아줘야 한다. 바닥에 떨어트려 뭉개져버린 케이크를 ‘나’가 품에 꼭 안듯이 말이다.

20. 집에 대한 고민은 새해맞이 케이크로 어떤 걸 고를까, 처럼 간단하거나 달콤하지 않았다. 그대로 살겠다는 건 돈을 더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고 이사를 가겠다는 건 서울 밖으로 밀려나거나 큰 방 하나에 거실 겸 부엌이 딸린, 두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을 줄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걸 의미했다. 휴가시간이 줄어들거나 휴식의 공간이 좁아지는 것,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견디기 쉬울지 선택하기 어려웠다.

조금 솔직해지자면, 나는 서른이 넘는 지금까지도 집에 대한 고민을 해본 적이 없다. 나는 집을 몇 채나 가지고 있을 정도로 부유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내 명의의 집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며 지금 당장 집을 매매하려고 마음먹으면 빚부터 져야 하는 신세에 놓여있다. 그럼에도 집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고 이제까지 살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운 때문이었다. 부모님의 집에서 살 때는 부모님의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았고, 결혼한 지금은 배우자의 직업으로 사택이 나오기 때문에 집에 대해 깊이 고민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상황은 익히 들었다. 전세 대란으로 인해 독립 이후에 원룸인데도 불구하고 지역의 격차 때문에 50만 원대의 월세를 살(수밖에 없)던 친구들이나 결혼해서도 반전세를 살던 지인 부부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쓰렸다. 그들은 내게 말했다. “나는 네가 부러워. 너는 집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잖아.” 하지만 나는 알고 그들은 모르는 것이 있었다. 퇴직 이후. 그때까지는 집을 매매할 수 있는 경제력과 집을 잘 선택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게 너무나도 막연하기만 한 것이다. 나도 내가 어떤 지역에 터를 잡아서 오랫동안 살 수 있는 것이었다면, 아마 고민도 않고 빚을 져서라도 집을 매매했을 거라는 것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다.

그렇듯 나는 그런 상황에 놓였던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발췌한 문장들에서 나는 가슴이 아렸다. 지금 나는 궤도에서 조금 벗어난 삶을 살고 있지만, 언젠가 그 궤도에 들어설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17. 평소에는 끼니를 대신할 수 있는 종류의 빵만 샀다. 입가심이나 기분 전환용 혹은 커피의 맛을 더하기 위해 만들어진 디저트용 빵을 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얼마나 맛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든든하냐,가 빵을 고르는 기준이었다. 에트르에서 일하는 동안 일곱시부터 시작되는 마감 행사 때 떨이로 파는 빵을 한봉지씩 사는 것은 일상의 큰 기쁨 중 하나였다. 일곱시 10분 전에 매니저는 남은 빵들을 섞어 한봉지씩 묶었다. 나는 하나를 선택하기 전에 투명한 봉투 안에 들어 있는 빵의 종류를 신중하게 살폈다. 엇비슷한 것 중에서 구성이 제일 괜찮은 것을 골라야 했다. 그 봉지 안에 에트르의 대표 메뉴나 평소 먹어보고 싶던 빵이 들어 있던 적은 없었다.

(어떤 것이든 그렇지 않겠냐마는) A와 B를 고르는 것이 둘 모두 흡족한 것 중에 고르는 것도 아니고, A와 B 중 나은 것에서 고르는 것도 아니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을 골라야 한다는 점이 서러운 삶의 연장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가 골랐던 빵에서도 알 수 있다. 디저트용 빵을 사는 일은 고사하고 내가 평소 먹고 싶던 빵이 들어 있던 적이 없다는 것. ‘나’가 어떤 빵을 골랐을지 짐작은 하지만 그 구성이 제일 괜찮은 것이라는 게 질보다 양일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에 대해 그래도 에뜨르의 빵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에 대해 위안을 삼는 것이었다.

15. 계획과 달리 아르바이트를 계속 하다보니 취업에서 멀어졌다. 여기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 달리 갈 곳을 알지 못해 여기로 떠밀려온 사람의 몸 안에는 낭패감이 두텁게 쌓였다.

19. “공부하고 싶은데…… 사는 게 마음대로 돼야 말이지.”

우리는 오늘의 메뉴 대신 새해의 아르바이트에 대해 얘기했다. 찡이나 나나 졸업 후 계속 놀 수 없어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케이스다. 3개월, 6개월 일하고 2주 정도 쉬는 생활을 하다 보니 서른살이 돼버렸다. 휴대폰 매장과 까페, 옷 가게에서 일했지만 명함 한 장 만들지 못했고 이력서에 적을 경력도 변변치 않다. 찡이나 나나 근면성실했지만 그건 자랑도 자부도 되지 못했다. 기본 중의 기본일 뿐이었다. 주위 사람들도 다 시간을 쪼개고 욕망을 유보하며 살았다.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왔는데도 서른살의 겨울을 생각하면 인생을 대충 산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초라했다.

짧은 단편을 읽는 내내 이야기가 참 쓰다고만 느껴졌다. 회사를 퇴사하고 나서 바로 이직이 결정된 상태인 지금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다행으로 여기지 못했다. 어떤 불행을 읽거나 마주했을 때, 나의 상황과 맞닿아 동질감을 느끼는 것과 나도 함께 힘을 내는 것이 전부였다. 비교를 통해 위안을 받거나 나를 비하하지 않기로 매 순간순간 알아차리는 것이 내가 가진 최선인 것처럼 행동할 때가 있었고 그것을 잊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특히나 타인의 불행을 나의 위안으로 삼았을 때의 치욕은 나만이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몇 년 전의 나는 쉽게 그런 인간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결핍이 없을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교만이자 오만이라는 것을 지금은 안다. 내게는 그와 별개인 결핍이 매우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나 자신이 제일 잘 알기 때문에 나는 쉽게 타인의 결핍들을 통해 나를 채우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내 친구 중에는 생활하는 만큼만 돈을 버는 친구가 있었다. 당시에 현재를 살면서 미래를 바라보는 내게는 이해 못 할 일이어서 그것만 가지고도 그 친구를 남몰래 업신여겼던 적도 많았다. 그것이 누군가에게(가장 가까운 누군가에게라도) 피해를 주지 않는 선이라면(이게 제일 중요),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사는 것도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든 것은 내가 내 삶을 더 주관적으로 바라보면서 오로지 나만 생각하며 명확히 설계할 때, 그때였다. 내가 조금 더 행복한 길을 찾는 것. 그 친구는 어떻게 보면 돈을 적게 버는 대신에 시간을 벌었던 것일지도 모르니까. 그렇다고 그 친구에게 “너 잘못 산 거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삶을 살고 난 이후에 그 삶을 살았던 자신이 판단해야 하는 것이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군가에게 항상 평가를 받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삶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면 성실했던 찡이나 ‘나’는 그토록 초라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 괜찮다는 위로를 감히 할 수가 없다. 주눅들 수밖에 없고 위축될 수밖에 없으며 스스로도 괜찮지 않으니까.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일로 나라가 떠들썩할 때가 있었다. 물론 지금도 시끌시끌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입장으로는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명확한 선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인격을 훼손하는 것에서가 아니라, 업무적인 면에서다. 시험을 합격해서 들어온 이와 그렇지 않은 이는 사뭇 다르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겠지만, 일부는 어떻게든 격차가 날 수밖에 없다. 내가 하는 업무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나뉘는 일을 하는 건 아니지만 업무를 처리할 때에 전공과 비전공이 업무를 흡수하는 시간이 다른 걸 생각해보면, 어떤 것인지 알 수도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비정규직은 너무 불합리하다, 라고 말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뉴스를 볼 때마다 자주 혼란이 온다. 저건 아닌데, 싶으면서도 그렇다고 그것도 아니야. 라는 너무 애매한 사이를 나는 오가고 있으니까.

24. 연말연시 분위기가 백화점 안에 넘실댔다. 사람들은 한해가 저무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옷 안쪽에 숨기고 연휴와 새해에 대한 기대감을 꺼내 머플러처럼 둘렀다.

‘나’는 12월 31일에 살 케이크를 고민한다. 29일에는 티라미수 케이크가 좋겠다고 생각했고, 30일에는 딸기타르트가 어떨까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나’가 31일에 산 케이크는 30%의 할인이 붙어있는 블루베리요거트 케이크였다. 티라미수 케이크와 블루베리요거트 케이크 두 개가 남아있었는데, 직원가 할인인 10% 티라미수 케이크와 30% 할인이 붙은 블루베리요거트 케이크를 고민하는 사이에 티라미수 케이크가 팔렸기 때문이었다. 그 케이크를 들고 한 해의 마지막 날 밤, 집을 보러 간다. 하지만 집주인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케이크를 옮겨 잡으려다가 놓쳐버려 망가진 케이크를 품에 안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이야기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담담하다. 담담할 수밖에 없어 담담한 것인지, 울 수는 없기 때문에 담담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런 ‘나’는 의연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러면서도 노파심에, 설마, 첫째라서, 장녀라서 그런 건 아니겠지- 라는 생각에 마음이 찡해져오는 것이다. 부디 그런 것은 아니기를 바란다. 책 밖의 ‘나’는 책 속의 ‘나’가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케이크를 품에 안았으니까,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탔으니까.

새로운 집에서 살기로 선택했거나 지금 살고 있는 집에 살기로 선택했거나 여전히 에뜨르에 아르바이트로 일을 하거나 새로운 곳에서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거나 새로운 직장에 출근을 하게 되었거나…… 등등 어떤 경우의 것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것이 ‘나’의 선택이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자신의 삶이 어떻든 선택이 되어지는 삶이 아니라 어떤 선택지 안에서 최선을 다해 선택을 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etre : 존재

우리의 존재가 타인에 의해서 훼손되지 않는 삶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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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영의 화해 - 상처받은 내면의 ‘나’와 마주하는 용기
오은영 지음 / 코리아닷컴(Korea.com)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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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를 시청한 적 있었다. 아이들에게서 보이던 문제의 양상들은 결국 부모의 잘못된 행동이나 언어에 있음을 알고는 신선한 충격을 받기도 했다. 그 프로그램을 통해 오은영 박사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어떻게 저렇게 세심한 부분까지 다 알까- 하는 생각에 참 대단하게 느껴졌다. 아이를 훈육하는 부분에 있어서 특히나 그랬는데, 당시 미혼이었던 내 입장에서는 부모와 자식을 벗어나서 정말 사람을 질리게 만드는 행동들에 대해 부모라는 이름으로 다양하게 훈육을 시도하고 바르게 고쳐줘야 한다는 게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세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내가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지금의 생각이 정립된 것 같다. 아이를 낳는 것이 단순하게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이 아니고, 아무것도 모르는 동물을 인간으로 만드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가끔 나는 오은영 박사의 칼럼을 읽는다. 그러면서 나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타인의 이야기를 읽고 오은영 박사의 답변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요즘 내 마음이 정서적으로 괜찮아서인지, 칼럼을 전보다 자주 챙겨 보지는 않게 되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은영의 화해>는 꼭 읽어야지, 했다. 다른 게 아니라, 상처받은 내면의 '나'와 마주하는 용기라는 부제 때문이었다.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단지 화가 나서라는 것도 알지만) '네가 종이라면 찢어내버리고 싶다.'라고 누누이 말했던 엄마를, 나는 더 이상 만나지 않는다. 엄마를 만나지 않게 된 계기는 다른 이유지만, 엄마를 만나지 않는 동안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나는 엄마를 오래전부터 아주 많이 미워하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그전에 내가 겪어야 했던 엄마라는 한 개인이 나에게 영향을 준 것은 지대했다. 지금도 여전히 엄마에게 쌓인 서운함과 서러움은 내가 생을 살면서도 잊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는 건 분명하다.

어릴 적 나는 나름대로 잘 성장을 했다고 생각하며 지냈는데, 내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나의 성격이나 가치관 등의 근원지가 어디인가-를 고민하다 보면, 대부분 어린 시절에 상처를 받았던 것들로부터 이어지게 되었다. 언젠가 한 번은 엄마에게 어릴 적 내가 상처받은 일들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엄마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거나 그것이 왜 잘못되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았고 나는 그런 부분에 대해 다시 한 번 상처를 받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엄마의 입장에서 더 생각해보려고 애를 썼다. 특히 그 나이가 스물다섯이었다. 철이 없던 내 나이 스물다섯과 나를 낳아 기르고 있던 엄마의 스물다섯은 동일한 나이를 통과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엄마도 많이 힘들었겠지.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니까. 하면서 이해를 하다가, 그래도 그렇게 할 것까지는 없었잖아. 라면서 미워하다가 그래도 엄마는 나를 사랑했으니까 하면서 이내 아무것도 얻지 못한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로 <오은영의 화해>는 내게 참 특별한 책이 되었다. 나는 이 책을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집에서, 카페에서 읽었는데 수시로 울컥하는 마음이 생겨서 이 책을 연달아 읽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단지 조금 위로를 받을 요량이었는데, 나는 내 마음을 알고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은 오은영 박사의 글에서 펑펑 울어버리기 일쑤였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울컥했던 부분은 '허구의 독립성(pseudo-independence)'에 관련해서 쓰인 글들이었다.

213. 인간에게는 꼭 채워져야 하는 의존 욕구라는 것이 있습니다. 독립적이냐, 의존적이냐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예요. 중요한 사람에게 조건 없이 가장 소중한 존재로 여겨지는 경험, 사랑이 필요할 때는 사랑을, 위로가 필요할 때는 위로를, 보호가 필요할 때는 보호를 받아야 하는 기본적이고 생존적인 욕구가 바로 의존 욕구입니다. 그런데 이 의존 욕구를 채우지 못하고 어른스러워야 했던 아이들은 '허구의 독립성'을 갖게 됩니다. 실은 의존적인데 겉으로는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 허구의 독립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은, 인생의 모든 것이 일처럼 느껴질 수 있어요. 삶의 모든 것이 다 내가 해내야 하는 책임들인 것만 같죠. 고통이 끝이 없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216. 여러 가지 이유로 어린 시절 아이로 살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다시 자식의 자리로 내려오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부모가 들어 주든 아니든, 부모에게 힘들었다고 말하세요. 그리고 부모의 부모가 되려는 행동은 이제 그만하세요. 허구의 독립성을 가진 분들 중에는 마음 깊은 곳에 언젠가는 나를 인정해 주겠지 하는 마음에, 미움이 크면서도 부모를 가장 가까이에서 챙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좀 멀어지세요. 어린 시절 채우지 못한 의존 욕구는 배우자가 채워 줄 수도 있습니다. 배우자는 너무나 소중하고 중요한 관계예요. 진지하게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정서적 보호와 위로를 받으면 많은 부분이 채워집니다.



216. '허구의 독립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분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정말 최선을 다해서 살았을 거예요. 죽을힘을 다했을겁니다. 당신의 삶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너무 힘들었죠. 지금도 무척 힘들 겁니다. 이제는 내려놔도 괜찮아요. 좀 허점을 보여도 괜찮습니다. 좀 게으를 정도로 내려놔도 돼요. 열심히 안 하고 쉬어도 괜찮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 우주에서 제일 소중한 사람은 '나'입니다. 내가 없으면 세상도 없어요. 그걸 잊지 마세요.

이 부분을 읽으며, 카페에서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르겠다. 다행한 것은 나의 배우자 J는 내가 결핍되어 있는 것들을 채워주고 있었다. 내가 무리하게 요구하는 것일 수도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본인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면 나의 편에 서서 생각해준다. 2019년 1월 1일이 되자 그는 내게 말했다. "편하게 살아, 편하게." 그것으로 모든 말을 일축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지지를 아끼지 않고, 지원 역시 마다하지 않는다. "내가 뭐 하면서 살아야 하지? 나 앞으로 어떻게 살면 될까?" 하는 말에도 "하긴 뭘 하면서 살아, 그냥 앞으로도 '벨라'해."라고 말해주는 고마운 그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내가 겪었던 모든 일들을 다 말할 수도 없고 말하기 싫은 것들도 존재했다. 그런데 오은영 박사의 글을 읽으면서 내가 어릴 적 느꼈던 복잡 미묘했던 감정들이 그대로 되살아나며 지금의 나를 어린 시절의 나에게로 데려다주었다. 내게는 아파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과거도 있었는데, 오은영 박사는 용서가 되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고 그대로 살아가도 된다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내려놔도 괜찮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부모에게서 상처를 받은 자식들은 부모에게 당시의 상처를 내보이고 달래주었으면 하지만 사과가 인색한 부모들에게 또다시 상처받을 수 있는 자식들을 걱정한다.

257. 화해는 '내'가 '나'와 하는 겁니다. 부모는 죽을 때까지 '나'에게 사과하지 않을 수 있어요. 우리는 죽을 때까지 부모를 용서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 마음, 그냥 그대로 두세요. 누구도 나 아닌 남을 어쩌지 못해요. 부모도 내가 아닌 이상 납입니다. 결국 '내'가 화해해야 하는 것은 '나'예요.

속절없이 당했던 '나'와 화해하고, 이 사람들이 나를 망치면 어떻게 하지 했던 '나'와도 화해해야 합니다. 자신을 형편없이 생각했던 '나'와 화해하고, 자신을 비난했던 '나'와 화해하고, 자신의 나쁜 면에 진저리를 쳤던 '나'와 화해해야 합니다. '나' 자신을 세상의 가장 초라하고 작은 존재라고 여겼던, 그래서 '나'는 어떤 것도 가질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꼈던 '나'와 화해해야 합니다.

결국 내가 화해를 해야 하는 대상은 부모가 아닌 '나'였구나. 본질은 '나'를 들여다보는 것에 있구나. '나'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나'의 내면과 좀 더 깊숙이 소통하는 것. '나'에 대한 관찰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



38. 가슴 아프지만 부모님이 이제 와서 진심 어린 사과를 할 거라고 기대하지 마세요. 대부분 사과하지 않습니다. 사과를 받아야만 나의 상처가 치유되고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과받는 데 매달리면 부모가 끝내 그 기대를 저버리고 떠날 경우에 더 큰 상처를 받을 겁니다. 부모에게 사과를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당신에게는 자신의 마음을, 자신의 오랜 아픔을 부모에게 털어놓는 그 시도 자체가 중요해요.

41. 많은 부모가 자식의 고백에 "그랬다면 미안하다"가 아니라 "그랬다면 이해해라"라고 합니다. 이들이 정말 자식 걱정을 한 번도 안 했을까요? 저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걱정했을 것입니다. "미안했다. 나는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사느라 바빠서 못 챙겼어. 네가 그렇게 받아들였다면 마음이 생했겠구나. 미안하다." 이렇게 말해 주면 그 엉킨 실타래가 조금은 풀릴 텐데, 우리 부모들은 끝끝내 그렇게 말하는 것에 인색합니다.

47. 부모가 준 상처들은 영영 아물지 못할지도 몰라요. 이해가 안 되면 안 되는 채로, 용서가 안 되면 안 되는 채로 있어도 괜찮아요. 그렇게 살아도 괜찮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감정에 대한 존중입니다.

207. 자식도 탯줄이 끊기는 순간 '남'이에요. 생판 모르는 '남'이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닌 '남'이라는 의미입니다.

211. 아이가 내 말을 잘 들을 거라는 전제 자체가 육아를 힘들게 합니다. 매일매일 말 안 듣는 아이 앞에서 그럼 어떻게 할까요? 답은 하나입니다. 그냥 새날이 밝았다고 생각하세요. 우리는 어제 세수하고 오늘 도 세수해요. 새날이 밝았으니까요. 우리는 어제 양치하고 오늘 또 양치합니다. 새날이 밝았기 때문입니다. 30분 전에 해 줬던 말, 아이가 못 지켰습니다. 새날이 밝은 겁니다. 또 세수하듯이 또 양치하듯이 새날이 밝은 겁니다. 아이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그냥 또 말해주세요. 육아는 상황 상황마다 새날이 밝은 거라고 생각해야 마음이 좀 낫습니다 아이가 또 말을 안 들으면 '아, 또 새날이 밝았구나' 생각하세요. 새날이 너무너무 자주 오더라도 눈 한번 질끈 감고, 심호흡 한번 크게 하고 '새날이 밝았구나' 생각하세요. 저도요, 그렇게 키웠습니다.

<오은영의 화해>는 부모에게 받은 상처를 깊이 간직하고 있는 사람 외에도,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부모가 읽기에도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면 나는 이 책에서 아이의 발달상황에 조금 더 여유로워질 수 있었을 것이고, 새날이 밝았구나-를 되뇌고 있을 것 같으니까. 그리고 여러 상황에서 아이의 입장을 조금 더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사연들이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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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에게 아침달 시집 9
김소연 지음 / 아침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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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언젠가, 김소연 님의 <시옷의 세계>를 읽으려고 시도했던 적이 있다. 당시에 내 마음의 상태가 어땠는지는 기억하지 못해도 글을 읽는 게 아니라 글자 자체로만 읽고 발음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어서 도서관에서 빌렸던 그 책을 얼마 읽지 못하고 반납을 했었다. 아마 네 장 남짓 읽었겠지, 싶다. 시집을 읽고 싶은 건지, 시집을 읽는 척을 하고 싶었던 건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제 정말 시를 읽어봐야지 - 생각했던 시기가 2018년 하반기였다. 시기적절하게 어느 날 블로그 이웃님의 글에서 김소연 님의 <i에게>라는 시집을 알게 되었다.

 

 

 

 

 

 

 

시집 <i에게> 속에 들어있는 대부분의 시를, 나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내가 시를 이렇게 오래도록 마주했던 순간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나는 1월의 며칠 동안 시를 반복해서 읽으며 나를 잃었고, 나를 잊었다. 그리고 다시 나를 꺼내고, 너를 꺼내고, 우리를 꺼내고, 그러다가 다시 넣고... 그럴 리 없겠지만 닳아서 없어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유별나게 나는 많은 것들을 꺼내어 돌보고 닦았고 다시 넣는 행위들을 반복했다. 그동안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괴이한 감정이었다.

 

 

 

 

 

 

 

<다른 이야기>

 

 

 

 

 

처음 만났던 날에 대해 너는 매일매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가 어떤 용기를 내어 서로 손을 잡았는지 손을 꼭 잡고 혹한의 공원의 앉아 밤을 지샜는지. 나는 다소곳이 그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가 우리가 우리를 우리를 되뇌고 되뇌며 그때의 표정이 되어서. 나는 언제고 듣고 또 들었다. 곰을 무서워하면서도 곰인형을 안고 좋아했듯이. 그 얘기가 좋았다. 그 얘기를 하는 그 표정이 좋았다. 그 얘기가 조금씩 달라지는 게 좋았다. 그날의 이야기에 그날이 감금되는 게 좋았다. 그날을 여기에 데려다 놓느라 오늘이 한없이 보류되고 내일이 한없이 도래하지 않는 게 너무나도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이 그리하여 우리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게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이 처음 만났던 날로부터 그렇게나 멀리 떠나가는 게 좋았다. 귀여운 병아리들이 무서운 닭이 되어 제멋대로 마당을 뛰어다니다 도살되는 것처럼. 그날의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마다 우리가 없어져 버리는 게 좋았다. 먹다 남은 케이크처럼 바글대는 불개미처럼. 그날의 이야기가 처음 만났던 날을 깨끗하게 먹어치우는 게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이 아직도 혹한의 공원에 앉아 떨고 있을 것이 좋았다. 우리가 그곳에서 손을 꼭 잡은 채로 영원히 삭아갈 것이 좋았다.

 

 

 

 

 

 

 

 

 

 

<경배>

 

 

 

 

 

나쁜 짓을 이제는 하지 않아

 

나쁜 생각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이지

 

 

 

(...)

 

 

 

병이 멈추었니

비명이 사라졌니

 

 

 

나의 병으로 너의 병을 만들던 짓을 더 해주길 바라니

예의를 다해 평범해지는 일을 너는 경배하게 된 거니

 

 

 

(...)

 

 

 

모든 게 끔찍한데

가장 끔찍한 게 너라는 사실 때문에

너는 누워 잠을 자버리지

다음 생에 깨어날 수 있도록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모든 것에 익숙해져버렸지

익숙해져버린 나를 적응하지 못한 채 절절매지

젓가락을 들어 올려

전을 다 먹을 뿐

 

 

만약 이 세상이 대답이었던 것이라면

그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더 강하고 더 짙은 이 부추였을까

병이 멈추어버린 병은 어떻게 아픈 척을 해야 할까

 

 

 

 

 

 

 

 

<우리 바깥의 우리>

 

 

 

-이제 전부 죄인이 되었는데 앞으로 벌은 누구에게 받나

 

추위 때문에 소름이 돋는 건지

소름이 돋기 때문에 춥다고 느끼는 건지

 

(내가 알던 나에 대한 (내가 알던 나에 대한 (내가 알던 너에 대한) 내가 알던 나에 대한) 내가 알던 나에 대한)

 

우리 바깥에는 우리가

우리로부터 바깥으로 우리에게로

우리 바깥의 우리를

 

 

 

 

 

 

 

 

<방법들>

 

 

 

방법들을 읽으며 픽 - 웃었다. 너무 그럴싸해서.

 

 

 

 

 

 

 

 

 

 

 

 

 

<바깥>

 

 

 

얼굴은 어째서 사람의 바깥이 되어버렸을까

 

창문에 낀 성에 같은 표정을 짓고

당신은 당신의 얼굴에게 안부를 물었다

 

안에 있어도

바깥에 있는 것 같아 바깥으로 나와버릴 때마다

안쪽은 먼 곳에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

 

당신은 다시 잠이 들었다

얼굴을 벗어

창문 바깥에 어른대던 저 나뭇가지에다

걸어둔 채로

 

당신의 바깥은 이제 당신의 얼굴을 쓰고 있다

안으로 들어오겠다고 당신의 방을 밤새

 

부수고 있다

 

 

 

 

 

<i에게>

 

 

밥만 먹어도 내가 참 모질다고 느껴진다 너는 어떠니.

 

 

 

 

 

 

 

<편향나무>

 

 

 

한 번도 원한 적 없는 이 세계에서

백년은 살아야겠지

미치지 않고서 그럴 자신이 있겠니

 

용기라는 말을 자주 쓰는 자는 모두 비겁한 사람이 되었다

내 생각을 나보다 더 잘 읽는 자는 모두 적이 되어 있었다

아침마다 나는 고쳐 말하고만 싶었고

 

작년의 감이 새까맣게 매달려 있는 사월의 감나무를

빨랫줄을 꽉 물고 있는 빨래집게들을

 

등에 난 흉터를

아까 본 그 사람을

거북이처럼 걷던 그 사람을

거북이는 등이 있어서 다행이고

 

같은 맥락에서

거북이 등 뒤에는 아무것도 없어서 다행이고

 

배낭을 메고 내가 나를 거듭 떠났다

나를 배웅하기 위하여 나는 또다시 어딘가로 떠났다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곳으로 가서

 

얼굴을 버리고 돌아와 얌전하게

생활을 거머쥐는 나에게로 벚꽃잎들이 달라붙을 때

얇이라는 말을 깊이 생각했다

 

자기자신이 자기자신에게 가장 거대한 흉터라는 걸 알아챈다면

진짜로 미칠 수 있겠니

 

 

 

 

 

 

 

고작 책 한 권을 읽었을 뿐이라 조금 속단하는 게 아닌가 싶지만, 김소연 시인은,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었다. 시를 읽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내가, 참 오래도 시인의 시들을 하나하나 고이 끌어안고 있었다. 난 아마 앞으로 시인의 시에 조금 더 깊숙이 관심을 가지게 될 것만 같다. 다 읽어두고도 아직 반납을 못했는데, 다시 한 번 스-윽 훑어보고 반납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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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작은 순간들 - 카타나 코믹스
카타나 쳇윈드 지음, 그레고리 이브스 외 옮김 / 북레시피 / 2019년 1월
평점 :
절판


 

 

 

 

사랑을 말하기도 하고 사랑을 내뱉기도 하고 사랑을 읊조리기도 하고 사랑을 속삭이기도 하고 사랑을 갈구하기도 하며 사랑을 기다리고 사랑을 훔치고 사랑을 (...) 개개인이 가진 수많은 사랑은, 사랑을 ~한다. 사랑에는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어쨌든 그대로 사랑,이다. 그 유치한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는 그렇게나 좋다. 결혼의 이유에는 당연히 사랑이 전제가 되고 뒤에 수많은 조건들이 붙어있다지만, 나의 경우에는 사랑이 첫 번째부터 열 번째를 아우를 정도로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내가 이 사람을 몇 십 년 동안 /사랑할 수 있는 노력/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도 기꺼이 가졌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결국 내가 결혼을 결심하게 만들었던 말은, 여자는 나이가 어떻든 사랑을 줘야 하는 동물이야. 라는 말 한마디였다. 그걸 아는 사람이라니! 라면서.

 

 

 

 

내가 되고 싶은 나의 모습은 수만 가지 정도인데, 좋은 사람, 다정한 사람, 현명한 사람이 되고 싶은 내면에는, 사랑이 늘 존재했다. 사랑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들. 그러니까, 사랑이 많고 사랑을 주고 사랑을 하는 사람. 나는 사랑에 결핍된 인간이어서 더욱 동경했던 모습이기도 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이상향에 절대로 도달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는데, 조금씩 마음이 열릴 때를 목격하는 순간이 있다.

 

 

 

 

나의 삶에 사랑이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과 같은 만족스러운 생활은 할 수 없었을 거야- 라고 생각하면서도, 특별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말하는 게 우스운 거 아닌가- 하고 흠칫 놀라게 된다. 하지만 사랑 역시 행복과 마찬가지로 느끼는 순간이 짧기 때문에 사랑이 과할 때와 사랑이 결핍될 때, 사랑을 할 때와 사랑을 받을 때를 인지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늘 순간순간이 사랑이다. 그 순간을 충분히 향유해야 한다.

 

 

 

 

 

이 책이 그 순간들을 모아두었다. 기록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사랑의 작은 순간들

 

 

 

 

 

 

 

 

 

 

 

꼭 나와 J씨 같아서 이 부분들은 따로 찍어두었다. 사진에는 없지만 J씨의 관심을 받기 위해 몸부림치는 내 모습과 흡사한 것도 있었는데, J씨에게 그 부분을 보여주니 “아... 벨라... 하......”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뭐... 도대체 왜... 무엇 때문이야?...) 첫 번째 사진도 마찬가지. (여보 내가 싫으니?... 사랑해서 그래...... 내 사랑 표현의 방법이야... 존중해줘-)

 

 

J는 출근 전에 급하게 나가는 게 아니라면 꼭 자고 있는 내게 와서 안아주고 뽀뽀를 해주고 출근하는데, 나는 그걸 모르고 잘 때가 조금씩 많아지고 있다. (잠이 많아져서가 아니라 단지 겨울이라고 핑계 대고 싶다...) 그래도 열에 여덟 번 정도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잘 다녀오라며 그를 배웅한다. (예전에는 현관문까지 배웅 나갔는데 이 역시도 겨울이니까 추워서 이불 밖은 북극이라며...) 그리고 또 잠에 빠져든다. (겨울이니까... 지겨운 겨울 타령)

 

 

그리고 세 번째 사진은, 너무나도 J씨 같아서 찍어두었는데, 아 - 정말로 엄살이 왜 이렇게 심한지! 나는 내 남자만 그런 줄 알았는데, 존의 코드를 뽑으라는 말에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내 남자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J씨는 “내가 죽으면 연금도 타먹고 재혼도 하고 어쩌고 블라블라-” ...

 

 

짤막한 그림들과 글들을 보면서, 일상에서 사소하게 일어날 수 있는 사랑의 순간들을 그려두었는데 공감이 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많았다. 사랑의 모양이 꼭 같지만은 않으니까 당연한 일이겠다. 나도 우리의 사랑의 순간들을 더욱 기록해야지. 싸운 것도 아주 자.세.하.게 일기에(무지막지한 욕을 써놓으며) 기록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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