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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남의 집 귀한 딸인데요
악아 지음 / 봄름 / 2019년 1월
평점 :
122-123. 시가에 가면 내 자리가 없다.
식사를 하고 나서 다른 식구들은 돌아갈 각자의 방과 정해진 자리가 있었다. 아버님은 소파 한가운데 앉아 리모컨을 돌리고, 어머님은 안방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시누이와 남편도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뭔가에 몰두했다 나만 내 자리를 찾지 못하고 하릴없이 거실과 주방을 오갔다. 어딜 가도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겨우 내 자리인가 싶어 들어간 화장실에서 마주한 것은 나란히 꽂혀 있는 시가 식구들의 칫솔이었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 집에서 챙겨온 칫솔을 칫솔꽂이 대신 세면대 한 귀퉁이에 조심스럽게 올려두었다.
밖에서는 떵떵거리며 큰소리를 치다가도 '며느리' 자리에만 서면 이상하게 작아졌다. 남의 집 주방에 들어가 쭈뼛쭈뼛 설ㄹ거지하고, 시어머니의 차 별 대우에도 반박하지 못했다. 눈치를 보고 희생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이런 나의 처지를 푸념하면 모두가 며느리는 '원래' 그런 거라며 그냥 받아들이라 했다.
마치 시가의 비정규직이 된 느낌이었다. 막말과 차별 대우가 만연하고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없는, 이 열악한 근무 환경에서 고군분투 중인 서러운 비정규직.
출퇴근을 현장으로 했을 때, 어린 여자애라는 이유만으로 면죄부가 되는 걸 느꼈다. 당시에 나는 그것이 기분이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기분을 느꼈다기보다는 다행이라 여겼던 것 같다. 적어도 불합리한 일은 생기지 않겠지,라는 안일한 생각.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내가 그들에게 업무를 지시하는 순간, 그들은 ‘나이 어린 여자애’인 나를 만만하게 생각하고 언어를 내뱉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쌍욕을 듣고서도 “왜, 이 ooo야.”라고 대꾸를 할 만큼 씩씩했다. 이후에도 처음 낯선 지역에서 터전을 잡고 일을 하게 되었을 때에 그들이 쓰는 언어의 온도와는 다른 것이 이유였는지 싸가지가 없는 말투라는 말도 들은 적 있는데 그 지역 특유의 억양을 스스로 배울 만큼 융통성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가장 최근에도 회사에서 불합리한 일들을 당하면 그것에 대해 기꺼이 부당함을 당당하게 말하며 나는 타인에게 니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의 존재는 결코 하찮지 않다는 점을 명시하곤 했다.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기꺼이 나는 선을 긋고 더 나아가 그것과의 인연을 끊기도 했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으니까.
그런데 나의 말문을 틀어막은 일들이 생겨났다. 정말 이해할 수 없고 존중할 수 없는 문화라고 생각하는, 남성과 여성이 결혼하기로 마음먹은 이후부터 '며느리'라는 역할을 부여받는 그 순간이다. 나는 결혼 전까지 부모님께, 특히 엄마에게서 남동생과의 차별을 꽤 자주 받아왔다. 나는 그때마다 열렬하게 저항했으나 어떻게 된 일인지 지는 쪽은 항상 나였다. 그럼에도 변치 않는 것은 어쨌든 엄마니까. 였다. 언제든지 말을 할 수 있었다. 싫어!!!라는 말도 할 수 있었고, 왜 차별해!!!!!!라고도 소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결혼을 하기로 마음먹으면서는 내게 며느리라는 역할이 부여됐고, 그 때문에 위축되는 것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나의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는지, 결혼한다고 했을 때에도 음식 하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내게, “어차피 결혼하면 다 하게 되는데 뭘 벌써부터 알려달라고 하냐. 닥치면 다 하게 된다.”라고 말씀하셨으면서 상견례 때는 “우리 애가 밥도 잘 못한다."라며 “잘 봐달라.”라는 뉘앙스로 말씀하셨는데, 별거 아닌 그 일이 나는 기억에 남는다. 내가 밥 못하는 게 죄송할 일은 아니지 않나. 밥을 할 줄 알아야 한다면 부모님과 함께 사는 내가 할 줄 알아야 하는 게 아니라, 혼자 살고 있는 J가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말하곤 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겪는 불평등에 대해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내게 주어진 일들을 쳐내기에도 힘들었으니까. 그것에 대해 항거함으로써 불합리함을 줄일 수 있었다. 항거를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였지만. 실제로 말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내가 겪은 일에 연관된 대다수의 사람들은, 말을 하지 않으면 그게 당연한 줄로만 알고 사람을 대했다.
또 다른 이유는 결혼해서 생기는 불평등은 결코 여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결혼을 함으로써 남성들은 '가장'이라는 무게를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숙명이 되는 것. 부끄럽게도 그전까지는 모르고 살다가, 내가 스스로 사회생활에 뛰어든 시점부터 나는 나의 아빠를 가엾이 생각했다. 그리고 그 외에 몇 년 전 회사에서 50대 중반의 소장님과 함께 일을 한 적이 있었는데, 본인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들에게 입에 발린 말을 해야 했고 본인의 책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억울한 상황들도 겪는 것도 가까이에서 보았다. 그게 결혼의 유무와 무슨 상관이냐, 그렇지 않은 남자도 있다, 다 인정하지만 가정을 가지고 있는 남성들에게는 '책임감'이라는 결코 가벼이 생각하지 못할 것이 가중된다는 점은 참 가엾은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을 함으로써 개인과 개인 간에 누가 더 손해다-라는 말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여성이 더 손해다-라는 말은 거리를 두고 생각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주변 페미니스트라는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도 아니고 '내가 받는 것은 부당, 너는 당연한 것',이라는 마인드가 깔려있었다. 그외에 할 말은 많지만 어쨌든 그런 게 페미니스트라면 나는 절대 그 명칭을 갖고 싶지 않다.
5년의 결혼생활 중에는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다행히 큰일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일들이 자잘자잘하게 있었다. 누구 하나 싫은 소리 하시는 분 없었지만 며느리라는 자리에만 앉게 되면 나는 자주 눈치를 보았다. 그렇다고 내가 명절에 가서 찬밥 신세가 되는 것도 아니었고, 명절 당일에 나의 부모님댁으로 가는 내게 “네 덕에 편하게 했다. 고생 많았다."라고 나의 노고를 인정해주시는 어머니였다. 그거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자꾸만 마음이 이상했다. 결혼을 하고 나서 명절을 보내고 내가 J에게 제일 많이 한 말은, “생신에 부모님댁 가는 것과 명절에 부모님댁 가는 것과는 천지차이야.”였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는 명절 때마다 사소한 행동 하나, 말투 하나에도 너무나도 쉽게 마음이 구겨졌다. 구겨진 마음을 J에게 전부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의 부모님이었으니까. 하지만 아예 말을 하지 않고는 견뎌낼 도리가 없었다. 타인에게 말을 하느니, 차라리 J에게 말을 해야지 했다. 나는 나름대로 필터링을 했고, 다행히 그는 잘 들어주었으며 내 입장에서 생각해주는 능력까지 선보였다.
하지만 있었던 것이 어떻게 없던 일이 될까. 자잘자잘한 일들 속에서 여전히 남는 응어리들이 있었다. 어쩔 수가 없기에 깊은 곳에 넣어두고 모른체하며 지내는 것뿐이지. 그렇기에 <저도 남의 집 귀한 딸인데요>라는 문장만 보고서도 나직한 한숨이 나오는 것이었다. 책 속의 이야기에는 모양과 크기가 각기 달라도 우리는 '악아'가 겪은 일들에 대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래에 이 이야기를 두어 번 정도 한 것 같은데, 2014년에 함께 일한 실장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외손주가 아프면 내 딸이 힘들까 봐 걱정인데, 친손주가 아프면 내 새끼(손주) 아파서 어떡하나.” 한다고. 그러면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자신에 대해 정말 놀랐다면서. 실장님은 며느리가 불편해할까, 힘들어할까 전전긍긍하시는 분이었는데 너무나도 솔직한 말을 듣고 나도 정말 놀랐다.
J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을 때, 나는 그에게서 남들과 다를 바 없는 말을 들었다. “우리 엄마는 안 그래.” 풋. 어떻게 그렇게 똑같은 말을 하는지.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당신의 부모님이라는 것은 영원하겠지만, 당신과 나는 결혼을 함으로써 부모에게서는 완전한 독립이 된 것이고, 우리는 새로운 가족을 꾸린 것이라고. 그리고 완벽한 가족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도 솔직하게 말했다. 나한테 가족이라는 것은 싫으면 싫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가족인 건데, 나는 부천 부모님께 그럴 수가 없다고. 다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님이니 그것에 대한 예의는 갖추겠다고 말이다. 나는 그런 말을 오랫동안, 자주 말했다. 그리고 그가 본인 입으로 스스로 그 말을 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에게 하던 말들을 멈출 수 있었다.
그런데 지내다 보니, 정말 그랬다. 딸 같은 며느리는 존재하지 않았고 아들 같은 사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 모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님' '내가 사랑하는 자식의 배우자'까지인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 더 예의를 갖추고 존중을 해주어야 하는 건 아닐지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139. 혼자가 아니라 둘이 됐는데, 둘이라서 느끼는 외로움의 깊이는 아득하다.
143. 외로움이라는 낯선 감정을 결혼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어버린 이 미스터리한 상황은 기대 심리 때문이었다. 결혼을 하면 언제나 함께할 것이라는 어리석은 기대감.
144. 어릴 적 동화를 너무 많이 봤다. 동화 작가들은 '그렇게 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무책임한 해피 엔딩으로 나를 세뇌시켰다. 둘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 무엇인지는 가르쳐주지 않고 말이다.
'따로 또 같이'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결혼해도 여전히 내게는 혼자인 시간이 있고, 또 다른 외로움과 쓸쓸함을 마주하기도 한다. 그 시간을 그대로 인정하는 과정이 요즘 내겐 필요하다.
책은 고부갈등 말고도 배우자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작은 지분을 차지했는데, 결혼을 해도 외롭다는 건 나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느꼈던 감정이었다. 정확히는 혼자일 때 느끼는 외로움과 둘일 때 느끼는 외로움은 온도 자체가 확연하게 다른데, 둘일 때 느끼는 외로움은 정말 처연하다. 내 결혼생활이 불행하다거나 한 게 아니었는데도 외롭다고 느끼다니-라면서, 처음에 잘못된 감정인 줄 알고 바르게 고치려고 노력도 많이 했었다. 그러다가 당시에 김재용 님의 <엄마의 주례사>를 읽으며 나의 감정이 유별난 게 아니구나, 하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었다. 그것을 다 풀어서 말하기에는 너무 구구절절하니, 결혼해도 외롭다.고 뭉툭하게 말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외로움에서 도망쳐 결혼을 하다고 해서 외로움이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느닷없이 찾아오는 온도가 다른 외로움이 뼛속을 시리게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나의 잘못도, 배우자의 잘못도 아니에요. 우리에게는 '부부'라는 역할보다 '나'라는 역할이 인생에 있어 기본 바탕이기 때문일 거예요. 두 외로움을 적절히 섞어 쓸 수 있는 적당한 융통성이 필요할 거예요. -지금의 내가 5년 전의 나에게.
+어쩌다 보니 명절에 이 책 서평을 쓰고 있네. 이번 명절 역시 아무 데도 가지 않아서 감정을 바닥까지 내려다보지 않게 되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