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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에게 ㅣ 아침달 시집 9
김소연 지음 / 아침달 / 2018년 9월
평점 :
그 언젠가, 김소연 님의 <시옷의 세계>를 읽으려고 시도했던 적이 있다. 당시에 내 마음의 상태가 어땠는지는 기억하지 못해도 글을 읽는 게 아니라 글자 자체로만 읽고 발음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어서 도서관에서 빌렸던 그 책을 얼마 읽지 못하고 반납을 했었다. 아마 네 장 남짓 읽었겠지, 싶다. 시집을 읽고 싶은 건지, 시집을 읽는 척을 하고 싶었던 건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제 정말 시를 읽어봐야지 - 생각했던 시기가 2018년 하반기였다. 시기적절하게 어느 날 블로그 이웃님의 글에서 김소연 님의 <i에게>라는 시집을 알게 되었다.
시집 <i에게> 속에 들어있는 대부분의 시를, 나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내가 시를 이렇게 오래도록 마주했던 순간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나는 1월의 며칠 동안 시를 반복해서 읽으며 나를 잃었고, 나를 잊었다. 그리고 다시 나를 꺼내고, 너를 꺼내고, 우리를 꺼내고, 그러다가 다시 넣고... 그럴 리 없겠지만 닳아서 없어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유별나게 나는 많은 것들을 꺼내어 돌보고 닦았고 다시 넣는 행위들을 반복했다. 그동안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괴이한 감정이었다.
<다른 이야기>
처음 만났던 날에 대해 너는 매일매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가 어떤 용기를 내어 서로 손을 잡았는지 손을 꼭 잡고 혹한의 공원의 앉아 밤을 지샜는지. 나는 다소곳이 그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가 우리가 우리를 우리를 되뇌고 되뇌며 그때의 표정이 되어서. 나는 언제고 듣고 또 들었다. 곰을 무서워하면서도 곰인형을 안고 좋아했듯이. 그 얘기가 좋았다. 그 얘기를 하는 그 표정이 좋았다. 그 얘기가 조금씩 달라지는 게 좋았다. 그날의 이야기에 그날이 감금되는 게 좋았다. 그날을 여기에 데려다 놓느라 오늘이 한없이 보류되고 내일이 한없이 도래하지 않는 게 너무나도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이 그리하여 우리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게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이 처음 만났던 날로부터 그렇게나 멀리 떠나가는 게 좋았다. 귀여운 병아리들이 무서운 닭이 되어 제멋대로 마당을 뛰어다니다 도살되는 것처럼. 그날의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마다 우리가 없어져 버리는 게 좋았다. 먹다 남은 케이크처럼 바글대는 불개미처럼. 그날의 이야기가 처음 만났던 날을 깨끗하게 먹어치우는 게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이 아직도 혹한의 공원에 앉아 떨고 있을 것이 좋았다. 우리가 그곳에서 손을 꼭 잡은 채로 영원히 삭아갈 것이 좋았다.
<경배>
나쁜 짓을 이제는 하지 않아
나쁜 생각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이지
(...)
병이 멈추었니
비명이 사라졌니
나의 병으로 너의 병을 만들던 짓을 더 해주길 바라니
예의를 다해 평범해지는 일을 너는 경배하게 된 거니
(...)
모든 게 끔찍한데
가장 끔찍한 게 너라는 사실 때문에
너는 누워 잠을 자버리지
다음 생에 깨어날 수 있도록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모든 것에 익숙해져버렸지
익숙해져버린 나를 적응하지 못한 채 절절매지
젓가락을 들어 올려
전을 다 먹을 뿐
만약 이 세상이 대답이었던 것이라면
그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더 강하고 더 짙은 이 부추였을까
병이 멈추어버린 병은 어떻게 아픈 척을 해야 할까
<우리 바깥의 우리>
-이제 전부 죄인이 되었는데 앞으로 벌은 누구에게 받나
추위 때문에 소름이 돋는 건지
소름이 돋기 때문에 춥다고 느끼는 건지
(내가 알던 나에 대한 (내가 알던 나에 대한 (내가 알던 너에 대한) 내가 알던 나에 대한) 내가 알던 나에 대한)
우리 바깥에는 우리가
우리로부터 바깥으로 우리에게로
우리 바깥의 우리를
<방법들>
방법들을 읽으며 픽 - 웃었다. 너무 그럴싸해서.
<바깥>
얼굴은 어째서 사람의 바깥이 되어버렸을까
창문에 낀 성에 같은 표정을 짓고
당신은 당신의 얼굴에게 안부를 물었다
안에 있어도
바깥에 있는 것 같아 바깥으로 나와버릴 때마다
안쪽은 먼 곳에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
당신은 다시 잠이 들었다
얼굴을 벗어
창문 바깥에 어른대던 저 나뭇가지에다
걸어둔 채로
당신의 바깥은 이제 당신의 얼굴을 쓰고 있다
안으로 들어오겠다고 당신의 방을 밤새
부수고 있다
<i에게>
밥만 먹어도 내가 참 모질다고 느껴진다 너는 어떠니.
<편향나무>
한 번도 원한 적 없는 이 세계에서
백년은 살아야겠지
미치지 않고서 그럴 자신이 있겠니
용기라는 말을 자주 쓰는 자는 모두 비겁한 사람이 되었다
내 생각을 나보다 더 잘 읽는 자는 모두 적이 되어 있었다
아침마다 나는 고쳐 말하고만 싶었고
작년의 감이 새까맣게 매달려 있는 사월의 감나무를
빨랫줄을 꽉 물고 있는 빨래집게들을
등에 난 흉터를
아까 본 그 사람을
거북이처럼 걷던 그 사람을
거북이는 등이 있어서 다행이고
같은 맥락에서
거북이 등 뒤에는 아무것도 없어서 다행이고
배낭을 메고 내가 나를 거듭 떠났다
나를 배웅하기 위하여 나는 또다시 어딘가로 떠났다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곳으로 가서
얼굴을 버리고 돌아와 얌전하게
생활을 거머쥐는 나에게로 벚꽃잎들이 달라붙을 때
얇이라는 말을 깊이 생각했다
자기자신이 자기자신에게 가장 거대한 흉터라는 걸 알아챈다면
진짜로 미칠 수 있겠니
고작 책 한 권을 읽었을 뿐이라 조금 속단하는 게 아닌가 싶지만, 김소연 시인은,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었다. 시를 읽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내가, 참 오래도 시인의 시들을 하나하나 고이 끌어안고 있었다. 난 아마 앞으로 시인의 시에 조금 더 깊숙이 관심을 가지게 될 것만 같다. 다 읽어두고도 아직 반납을 못했는데, 다시 한 번 스-윽 훑어보고 반납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