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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영의 화해 - 상처받은 내면의 ‘나’와 마주하는 용기
오은영 지음 / 코리아닷컴(Korea.com) / 2019년 1월
평점 :
품절
몇 년 전에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를 시청한 적 있었다. 아이들에게서 보이던 문제의 양상들은 결국 부모의 잘못된 행동이나 언어에 있음을 알고는 신선한 충격을 받기도 했다. 그 프로그램을 통해 오은영 박사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어떻게 저렇게 세심한 부분까지 다 알까- 하는 생각에 참 대단하게 느껴졌다. 아이를 훈육하는 부분에 있어서 특히나 그랬는데, 당시 미혼이었던 내 입장에서는 부모와 자식을 벗어나서 정말 사람을 질리게 만드는 행동들에 대해 부모라는 이름으로 다양하게 훈육을 시도하고 바르게 고쳐줘야 한다는 게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세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내가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지금의 생각이 정립된 것 같다. 아이를 낳는 것이 단순하게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이 아니고, 아무것도 모르는 동물을 인간으로 만드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가끔 나는 오은영 박사의 칼럼을 읽는다. 그러면서 나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타인의 이야기를 읽고 오은영 박사의 답변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요즘 내 마음이 정서적으로 괜찮아서인지, 칼럼을 전보다 자주 챙겨 보지는 않게 되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은영의 화해>는 꼭 읽어야지, 했다. 다른 게 아니라, 상처받은 내면의 '나'와 마주하는 용기라는 부제 때문이었다.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단지 화가 나서라는 것도 알지만) '네가 종이라면 찢어내버리고 싶다.'라고 누누이 말했던 엄마를, 나는 더 이상 만나지 않는다. 엄마를 만나지 않게 된 계기는 다른 이유지만, 엄마를 만나지 않는 동안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나는 엄마를 오래전부터 아주 많이 미워하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그전에 내가 겪어야 했던 엄마라는 한 개인이 나에게 영향을 준 것은 지대했다. 지금도 여전히 엄마에게 쌓인 서운함과 서러움은 내가 생을 살면서도 잊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는 건 분명하다.
어릴 적 나는 나름대로 잘 성장을 했다고 생각하며 지냈는데, 내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나의 성격이나 가치관 등의 근원지가 어디인가-를 고민하다 보면, 대부분 어린 시절에 상처를 받았던 것들로부터 이어지게 되었다. 언젠가 한 번은 엄마에게 어릴 적 내가 상처받은 일들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엄마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거나 그것이 왜 잘못되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았고 나는 그런 부분에 대해 다시 한 번 상처를 받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엄마의 입장에서 더 생각해보려고 애를 썼다. 특히 그 나이가 스물다섯이었다. 철이 없던 내 나이 스물다섯과 나를 낳아 기르고 있던 엄마의 스물다섯은 동일한 나이를 통과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엄마도 많이 힘들었겠지.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니까. 하면서 이해를 하다가, 그래도 그렇게 할 것까지는 없었잖아. 라면서 미워하다가 그래도 엄마는 나를 사랑했으니까 하면서 이내 아무것도 얻지 못한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로 <오은영의 화해>는 내게 참 특별한 책이 되었다. 나는 이 책을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집에서, 카페에서 읽었는데 수시로 울컥하는 마음이 생겨서 이 책을 연달아 읽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단지 조금 위로를 받을 요량이었는데, 나는 내 마음을 알고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은 오은영 박사의 글에서 펑펑 울어버리기 일쑤였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울컥했던 부분은 '허구의 독립성(pseudo-independence)'에 관련해서 쓰인 글들이었다.
213. 인간에게는 꼭 채워져야 하는 의존 욕구라는 것이 있습니다. 독립적이냐, 의존적이냐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예요. 중요한 사람에게 조건 없이 가장 소중한 존재로 여겨지는 경험, 사랑이 필요할 때는 사랑을, 위로가 필요할 때는 위로를, 보호가 필요할 때는 보호를 받아야 하는 기본적이고 생존적인 욕구가 바로 의존 욕구입니다. 그런데 이 의존 욕구를 채우지 못하고 어른스러워야 했던 아이들은 '허구의 독립성'을 갖게 됩니다. 실은 의존적인데 겉으로는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 허구의 독립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은, 인생의 모든 것이 일처럼 느껴질 수 있어요. 삶의 모든 것이 다 내가 해내야 하는 책임들인 것만 같죠. 고통이 끝이 없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216. 여러 가지 이유로 어린 시절 아이로 살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다시 자식의 자리로 내려오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부모가 들어 주든 아니든, 부모에게 힘들었다고 말하세요. 그리고 부모의 부모가 되려는 행동은 이제 그만하세요. 허구의 독립성을 가진 분들 중에는 마음 깊은 곳에 언젠가는 나를 인정해 주겠지 하는 마음에, 미움이 크면서도 부모를 가장 가까이에서 챙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좀 멀어지세요. 어린 시절 채우지 못한 의존 욕구는 배우자가 채워 줄 수도 있습니다. 배우자는 너무나 소중하고 중요한 관계예요. 진지하게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정서적 보호와 위로를 받으면 많은 부분이 채워집니다.
216. '허구의 독립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분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정말 최선을 다해서 살았을 거예요. 죽을힘을 다했을겁니다. 당신의 삶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너무 힘들었죠. 지금도 무척 힘들 겁니다. 이제는 내려놔도 괜찮아요. 좀 허점을 보여도 괜찮습니다. 좀 게으를 정도로 내려놔도 돼요. 열심히 안 하고 쉬어도 괜찮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 우주에서 제일 소중한 사람은 '나'입니다. 내가 없으면 세상도 없어요. 그걸 잊지 마세요.
이 부분을 읽으며, 카페에서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르겠다. 다행한 것은 나의 배우자 J는 내가 결핍되어 있는 것들을 채워주고 있었다. 내가 무리하게 요구하는 것일 수도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본인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면 나의 편에 서서 생각해준다. 2019년 1월 1일이 되자 그는 내게 말했다. "편하게 살아, 편하게." 그것으로 모든 말을 일축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지지를 아끼지 않고, 지원 역시 마다하지 않는다. "내가 뭐 하면서 살아야 하지? 나 앞으로 어떻게 살면 될까?" 하는 말에도 "하긴 뭘 하면서 살아, 그냥 앞으로도 '벨라'해."라고 말해주는 고마운 그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내가 겪었던 모든 일들을 다 말할 수도 없고 말하기 싫은 것들도 존재했다. 그런데 오은영 박사의 글을 읽으면서 내가 어릴 적 느꼈던 복잡 미묘했던 감정들이 그대로 되살아나며 지금의 나를 어린 시절의 나에게로 데려다주었다. 내게는 아파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과거도 있었는데, 오은영 박사는 용서가 되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고 그대로 살아가도 된다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내려놔도 괜찮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부모에게서 상처를 받은 자식들은 부모에게 당시의 상처를 내보이고 달래주었으면 하지만 사과가 인색한 부모들에게 또다시 상처받을 수 있는 자식들을 걱정한다.
257. 화해는 '내'가 '나'와 하는 겁니다. 부모는 죽을 때까지 '나'에게 사과하지 않을 수 있어요. 우리는 죽을 때까지 부모를 용서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 마음, 그냥 그대로 두세요. 누구도 나 아닌 남을 어쩌지 못해요. 부모도 내가 아닌 이상 납입니다. 결국 '내'가 화해해야 하는 것은 '나'예요.
속절없이 당했던 '나'와 화해하고, 이 사람들이 나를 망치면 어떻게 하지 했던 '나'와도 화해해야 합니다. 자신을 형편없이 생각했던 '나'와 화해하고, 자신을 비난했던 '나'와 화해하고, 자신의 나쁜 면에 진저리를 쳤던 '나'와 화해해야 합니다. '나' 자신을 세상의 가장 초라하고 작은 존재라고 여겼던, 그래서 '나'는 어떤 것도 가질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꼈던 '나'와 화해해야 합니다.
결국 내가 화해를 해야 하는 대상은 부모가 아닌 '나'였구나. 본질은 '나'를 들여다보는 것에 있구나. '나'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나'의 내면과 좀 더 깊숙이 소통하는 것. '나'에 대한 관찰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
38. 가슴 아프지만 부모님이 이제 와서 진심 어린 사과를 할 거라고 기대하지 마세요. 대부분 사과하지 않습니다. 사과를 받아야만 나의 상처가 치유되고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과받는 데 매달리면 부모가 끝내 그 기대를 저버리고 떠날 경우에 더 큰 상처를 받을 겁니다. 부모에게 사과를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당신에게는 자신의 마음을, 자신의 오랜 아픔을 부모에게 털어놓는 그 시도 자체가 중요해요.
41. 많은 부모가 자식의 고백에 "그랬다면 미안하다"가 아니라 "그랬다면 이해해라"라고 합니다. 이들이 정말 자식 걱정을 한 번도 안 했을까요? 저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걱정했을 것입니다. "미안했다. 나는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사느라 바빠서 못 챙겼어. 네가 그렇게 받아들였다면 마음이 생했겠구나. 미안하다." 이렇게 말해 주면 그 엉킨 실타래가 조금은 풀릴 텐데, 우리 부모들은 끝끝내 그렇게 말하는 것에 인색합니다.
47. 부모가 준 상처들은 영영 아물지 못할지도 몰라요. 이해가 안 되면 안 되는 채로, 용서가 안 되면 안 되는 채로 있어도 괜찮아요. 그렇게 살아도 괜찮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감정에 대한 존중입니다.
207. 자식도 탯줄이 끊기는 순간 '남'이에요. 생판 모르는 '남'이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닌 '남'이라는 의미입니다.
211. 아이가 내 말을 잘 들을 거라는 전제 자체가 육아를 힘들게 합니다. 매일매일 말 안 듣는 아이 앞에서 그럼 어떻게 할까요? 답은 하나입니다. 그냥 새날이 밝았다고 생각하세요. 우리는 어제 세수하고 오늘 도 세수해요. 새날이 밝았으니까요. 우리는 어제 양치하고 오늘 또 양치합니다. 새날이 밝았기 때문입니다. 30분 전에 해 줬던 말, 아이가 못 지켰습니다. 새날이 밝은 겁니다. 또 세수하듯이 또 양치하듯이 새날이 밝은 겁니다. 아이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그냥 또 말해주세요. 육아는 상황 상황마다 새날이 밝은 거라고 생각해야 마음이 좀 낫습니다 아이가 또 말을 안 들으면 '아, 또 새날이 밝았구나' 생각하세요. 새날이 너무너무 자주 오더라도 눈 한번 질끈 감고, 심호흡 한번 크게 하고 '새날이 밝았구나' 생각하세요. 저도요, 그렇게 키웠습니다.
<오은영의 화해>는 부모에게 받은 상처를 깊이 간직하고 있는 사람 외에도,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부모가 읽기에도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면 나는 이 책에서 아이의 발달상황에 조금 더 여유로워질 수 있었을 것이고, 새날이 밝았구나-를 되뇌고 있을 것 같으니까. 그리고 여러 상황에서 아이의 입장을 조금 더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사연들이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