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미숙 창비만화도서관 2
정원 지음 / 창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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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는 아버지와 실질적으로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의 모습인 어머니, 언니 정숙과 주인공 미숙.

오래 전에 자신의 꿈을 좇는 가장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당시에 나도 만화로 보았으니 읽었다고 해야 하나, 보았다고 해야 하나. 암튼, 그랬다. 그런데 그것을 보면서 사람은 누구나 꿈이 있고 꿈을 향해 가는 거지,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책임져야 하는 대상이 있으니까,라는 너무나도 원론적인 것이 그 이유였다. 사람은 누구나 ‘책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데 그 대상이 ‘가족’이라면 꿈만 좇기에는 너무 이기적이지 않나. 또한 곤고한 가정 형편이라면 더더욱 염치없는 행동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도 여전히. 꿈이 없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마음에 품었던 꿈이 없는 사람도 있나. 다만 나의 처지와 현실과의 중간에서 타협하는 것이지.

 

 

 

언니… 내 이름이 미숙이잖아.

근데 학교 애들이 야 미숙아, 라고 불러.

미숙이나 야, 하면… 괜찮은데

야 미숙아, 꼭 이렇게 불러.

야, 미숙아.

역시나 그 사이에서 힘들어하는 것은 배우자와 그 자녀들이다. 심지어 잔혹한 아버지의 폭력성은 물건을 던지는 것을 넘어 급기야 어머니에게까지 손이 뻗치고 만다. 경제적으로 무능한데, 폭력까지 휘두르는 아버지. 집은 점점 도망치고 싶은 공간이 되었고, 가족은 점점 모르고 싶어지는 대상이 되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성숙은커녕 성장(成長)이나 할 수는 있을까.

언니는 내 우상이었고 인내였다.

그런 언니가 변하기 시작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무너지고 있었다.

눈에 띄게.

그렇게 희망이 절망하고 있었다.

미숙이 의지할 수 있었던 대상은 바쁜 어머니를 대신해서 언니 정숙이 되었다. 정숙이 등을 돌리는 순간부터 정숙도 미숙이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게 되었고, 그 빈자리를 전학을 오게 된 김재이가 채워주게 된다.

하지만 모든 것을 스스럼없이 보여준 미숙의 마음을 이용한 재이로 인해, 미숙은 큰 상처를 받게 되고 학교를 자퇴하기에 이른다. 미숙은 그렇게 마음의 문을 닫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송겸재, 그가 곁에 서는 순간 그 틈으로는 빛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겸재에게 마음을 다 주는 것 같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다시 상처를 받게 될까 봐 미리 마음에 벽을 두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게 미숙이뿐만이 아니라, 겸재에게도 느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섹스는 내게 숙제 같았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겸재 씨도 마찬가지처럼 보였다. 라는 부분이 연인 관계에서 으레 있을 수 있는 권태나 허무로 느껴지지 않은 것을 보면.

사실 나는 많이 걱정이 되었다. 미숙이의 마음에서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고여있는 것들 때문에 감정둔마, 그러니까 손원평 작가의 <아몬드>의 윤재처럼 되어버릴까 싶은 오지랖에 뒷목이 서늘해지기까지 했다.

/

미숙의 삶을 내밀하게 들여다보는 동시에 타인의 삶을 관조하게 되는데, 나 같은 경우에는 정숙에게 모든 초점이 맞춰졌다. 아버지께 인정받고 싶지만 인정받지 못하고 허벅지를 꼬집으며 모든 걸 인내하는 모습에서 정숙의 황량하고 피폐한 감정을 조금이라도 전달받을 수 있어 그랬을까. 결국 정숙은 자신의 고름을 짜내기는커녕 점점 고름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상황은 많이 달랐지만, 정숙이 꼭 나의 모습 같아서 더 곤혹스러웠다. 정숙이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은 누구였을까.

그러면 가족이란 결국 무거운 부담과 막대한 담보 및 거미줄 같은 채무로 연결된, 서로가 서로에 대한 인질인가. (…) 가족이 휴식이나 피난처가 아니라 피로와 염증을 유발하는 일거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둘러선 구성원의 표정이 상기시킨다.

위는 몇 년 전에 읽은 책인, 구병모 님의 <한 스푼의 시간>에서 발췌한 문장이다. 나는 당시에 내가 가족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매우 유사한 그 문장을 오래도록, 마음에 담았다. 매번 꺼내어보아서 이미 너덜너덜해진 그 문장을, 다시금 상기했다.

책을 읽으면서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지배했다. 가족이란 뭘까. 도대체 가족이라는 존재는, 어떤 걸까. 왜 가족이라는 관계는 어쩔 수밖에 없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나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했음에도 아버지의 병을 간호했던 것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스스로 바보가 되기를 자처했던 것도, 자신을 때린 언니와 멀어지기는 했지만 미워하지 못했던 것도, 너무 한심하게도 - 가족이기 때문이었다. 가족이 왜? 가족이 어떻다고? 라고 나 대신에 반발해주었으면 했는데, 결국 ‘가족이니까’라는 문장 앞에서 나는 고개를 처박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미숙은 기쁘게 받았다. 아버지가 던진 <무소유>에 맞아 생긴 흉터를 치료하라고 어머니가 그동안 모아둔 돈 봉투를. 이미 그 흉터는 영영 지울 수 없을테지만, 뒤늦게라도 내민 어머니의 손이 있었으니까.

결말에 대해서는 열린 결말인지 닫힌 결말인지 판단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미숙아이기 때문에. 그저 자신의 미숙함을 목격했을 때 부끄러워하거나 밀어내지 않고 담담하게,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미숙이가 아닌 나도, 너도, 우리도. 우린 모두 미숙한 세상에 던져져 미숙한 사람들에게 미숙하게 자라날 수밖에 없으니까. 비단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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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슬픔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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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이 시간에 읽는 게 아니었다.

아주 천천히, 더욱 천천히 읽을걸 그랬다.

그게 아니라면, 잠시 멈추었어야했다.

그게 실수였다.

이 책을 이른 오전에, 혹은 늦은 오전에, 이른 오후에 다 읽었더라면 동네라도 한 바퀴 돌며 은서를 생각했을텐데.

참 모진 새벽이다.

 

 

 

 

내가 이전의 서평보다 더 잘 쓸 것 같지는 않지만, 용기를 내어 한 번 써본다. 다시.

이건 서평이라는 말보다는 독서의 기록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지.

뭐라도 쓰지 않으면 응어리가 진 것 같은데,

그것을 글로 풀어낼 수 없다는 건 아주 가혹하고 참혹하며 난폭하다.

 

 

오은서, 이세, 서완 -

그들의 이야기.

 

 

 

그 여자 이야기를 쓰려 한다.

이름을 은서(恩瑞)라 짓는다. 사랑이 불가능하다면 살아서 무엇 하나, 가끔 우는 여자. 언젠가부턴가 내 속에 내가 먹이를 주어 기른 여자.

 

 

기억해야지.

은서.

恩瑞 (은혜 은, 상서로울 서)

 

 

 

 

 

그 여자, 사랑의 등만 봤던 여자, 어쩌면 삶 바깥의 여자, 저런, 사로잡힌 여자.

가끔, 그 여자, 내 안에서 바느질을 한다. 그 여자가 바느질하는 옆에서 나, 그 여자의 순해서 슬픈 목덜미를…… 그래, 목덜미 이야기를 하자, 나는 가끔 사람의 목덜미에서 그 사람의 앞날을 느낀다.

뒷모습의 중심을 이루는 목덜미의 선.

혼자 있어도 고개를 자주 숙이는 목선은 그 사람의 운명도 고개 숙이게 하는 건 아닌지. 여럿 속에서 고개를 한껏 쳐드는 목선은 그 주인의 운명을 고개 들게 하는 건 아닌지. 숙임과 듦 사이엔 무엇이 있는지, 나아감과 물러섬 중 무엇이 더 적극적인지. 가질 수 있는데도 놓기란, 나아갈 수 있는데도 물러서기란 힘겨워, 나, 그 여자 목선을 손가락으로 따라가본다.

사랑의 등만 보았던 그녀,

그녀가 가여웠다.

깊은 우물에 빠져있는 그녀.

 

아니, 아니다.

그보다 세가 가여웠다.

그는 어땠나.

그를 보며 은서를 미워했다.

하지만,

미워하지 말걸 그랬다.

정말 그럴 것을 그랬다.

그럴 것을.

 

 

존재를 견딘다는 건 시간을 견딘다는 게 아닌지, 존재는 어느 만큼 운명적이 아닌지.

 

 

울지 마, 은서야. 울지 마.

 

하지만,

 

116. 이 사람이었던가. 나를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하고, 나에게 물잠자리를 잡아주던 세를 곤두박질치게 하곤 대신 저가 병으로 가득 물잠자리를 잡아주던 사람이, 이슬어지를 떠나던 날 밤 숨차하며 뛰어와 내게 입술을 댔던 그 사람이 이 사람 맞는가. 이슬어지는 다 잊어버리고 너만 기억하고 싶다던 그 사람, 세 사람이 모두 우정을 나누길 바란다고 말했던 내 얼굴을 끌어안아버렸던 그 사람이 이 사람 맞나, 너만이 나를 사나움 속에서 건져내 줄 거라고 하던 그 사람이 저이던가.

 

 

말린다고 막아지는 것이 사랑이라는 감정이던가.

울지 말란다고 눈물이 흐르지 않던가.

 

당신은 그게 사랑 앞에서 가능한 것이었나.

 

 

 

130. “나는 사랑해. 네 예측할 수 없음, 네 조심성, 네 단호함. 내 눈에 이제 너보다 더 아름다운 건 없어. 이렇게 말하면 안 되겠지. 그러면 너는 저만큼 더 물러서겠지. 너의 마음을 내게 붙들어놓으려면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게 아니라 세를 사랑한다고 말해야 될 거야. 그게 너의 마음을 얻어내는 길일 거야.”

 

 

어쩌겠어요, 사랑인걸.

 

 

 

137. 네 속눈썹을 세어봤는데 마흔두 개야, 했던 말이 생각나면 그 생각 하나로 세상을 다 얻은 듯이 살아가지. 그걸 세어볼 정도면 너는 틀림없이 나를 사랑한다 여겨지기에.

 

 

너무도 분명하게 사랑이었으니까,

사랑이니까.

 

 

양귀자의 <모순>에서 썼던,

이게 사랑이 아니면 무어가 사랑이야.라는 말을,

여기에 다시 한번 붙여 넣는다.

 

 

 

410. “오래도록 완을 기다리고 서 있는 널 보며 느꼈지. 너를 사랑하는 일이 나를 무너지게 할 거라는걸.”

너는 모르지. 너는 달라졌어. 옛날 같아졌어. 다시 옛날 같아져 버린 네가 나의 무엇을 이해하겠어, 무엇을.

 

 

세가 가여워 눈물이 났다.

그런데 나 왜,

전에 세가 은서를 모질게 대했다고만 기억하고 있나.

내가 당시에

세를 이해하지 못했던 까닭인가.

혹은 은서에 너무 집중해있었나.

 

미안해요.

그러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580. 너는 너 이외의 다른 것에 닿으려고 하지 말아라. 오로제 너에게로 가는 일에 길을 내렴. 큰 길로 못 가면 작은 길로, 그것도 안 되면 그 밑으로라도 가서 너를 믿고 살 거라. 누군가를 사랑한다 해도 그가 떠나기를 원하면 손을 놓아주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 그것을 받아들여. 돌아오지 않으면 그건 처음부터 너의 것이 아니었다고 잊어버리며 살 거라.

 

 

이수의 한번,이라는 말의 습기는 꽉 찼다.

누나, 한번 와.

 

이수야, 이수야 -

제일 걱정되는 이수야.

 

우리 이수, 잘 지내지?

 

 

581. 나, 그들을 만나 불행했다.

그리고 그 불행으로 시절을 견뎠다.

 

 

자꾸만 은서가 아스라해진다.

 

결국은 울어버렸다.

나는 은서가 아니었는데, 나는 은서가 되었다며 출근하려는 그이 앞에서 그렇게 울어버렸다.

그이가 있었다면 나는 아마 그의 품에서 훌쩍이며 잠에 들었을 텐데,

분명 그랬을 텐데,

그렇지 못해서 이 새벽에 나는 책과 책 속에서 방황을 한다.

 

 

이렇게 깊을 줄 알면서도 빠져버린 나는,

며칠이고 우울에 갉혀도 좋다고 생각했던 나는,

이제 없다.

 

 

얼른, 빠져나와야겠다.

너무 깊어져서

두통을 겪을 때의 은서처럼 세면대에 얼굴을 담그기 전에.

그전에.

 

 

 

 

/

도도록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온다.

도도록 : 가운데가 조금 솟아서 볼록하게

 

 

완, 내게 이슬어지란 곧 너거든.

세, 너는 내 고향이야.

 

아무래도 그들은 서로에게 도도록이었다.

보이지 않으려 해도,

깊숙이 숨겨도,

도도록 티가 날 수밖에 없는,

서로가 서로에게,

고향 같은 존재들.

 

 

 

 

오로지 ‘너’에 그토록 집중할 수 있었다니, 아, 그때는 ‘너’만 있으면 되어서, ‘너’만 아름다워서, 어떤 식으로든 ‘너’의 곁에 존재하고 싶었기에.

-작가의 말.

 

 

신경숙 작가의 글은 매번 이렇게나 아프다.

특히나 <깊은 슬픔>은 더욱 그렇다.

 

내가 이 책을 좋아한다고 말을 하는 것은 상관이 없었지만,

선물을 하기 전에는 꼭 물어야 했다.

내가 이 책을, 선물해도 괜찮겠느냐고.

 

이렇게 좋은 책을,

타인에게 좋은 책이라고 선뜻 건네는 것이 무척 어려워지게 만든,

신경숙 작가가 아주 많이, 너무너무, 미워졌다.

 

 

 

다정한 불빛이 그리워지는 오늘 밤,

나는 노오란 불을 켜두고 잠을 자야겠다.

은서가 나의 집을 보고,

슬몃 미소 지을 수 있게.

 

 

그리고 은서가 오면 따듯한 밥 한 끼, 먹여주고 싶다.

 

 

 

 

 

/

밑줄을 그었던 부분

(하지만 미처 다 쓰지 못한 다른 밑줄들이 얼마나 많은지.)

 

 

18. 슬픔에는 더 큰 슬픔을 부어넣어야 한다. 그래야 넘쳐흘러 덜어진다. 가득 찬 물잔에 물을 더 부으면 넘쳐흐르듯이, 그러듯이. 이 괴로움은 더 큰 저 괴로움이 치유하고, 열풍은 더 큰 열풍만이 잠재울 수 있고.

 

19.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뭔가를 기다리지. 받아들이기 위해서 죽음까지도 기다리지. 떠날 땐 돌아오기를, 오늘은 내일을, 넘어져서는 일어서기를, 나는 너를.

 

36. “누나.”

“응.”

우울할 때 이수는 하염없이 누나, 하고 불렀다. 하고 싶은 모든 말을 다 뭉뚱그려서 거기에 실어놓은 듯. 은서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 소리에 응, 이라는 대답밖에 달리 뭐랄 수 없는 이 대책없음이라니.

 

39. 은행잎은 예쁘지 않은 적이 없다. 돋아서 질 때까지 내내 눈길을 끌었다. 손톱만하게 순이 돋을 때는 연둣빛의 고움이, 자라 넓어지면 짙푸름의 시림이, 물이 들면 노랑빛의 투명이, 떨어질 때조차 수북이 쌓이는 모양새가.

 

127. 이 남자도 내게 맹세하듯 말했었지. 너 때문에 살고 싶다고. 나 때문에 살고 싶은 사람이 있다니 완의 그 말은 너무나 커서 내 가슴이 옹이져버렸지.

 

186.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는데도 완에게 하고 싶은 가장 간절한 말을 하다 보면 그건 세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었다.

 

191. 불빛은 가라앉아 있는 그리움을 일으켜세우고, 먼지의 더께가 내려앉아 있는 자신의 속을 투명히 들여다보게 하지.

 

192. 세상은 밤이 오는 순간과 새벽이 오는 순간 빛깔이 똑같구나.

 

195. 그래, 투명해.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물 속처럼 다 보이지. 그리운 얼굴이 불의 일렁거림 속에 비치고, 외롭게 한 것들, 자꾸만 밀어내기만 하는 것들이 다 비치지. 불 앞에 오래 있으면 마음이 솔직해져. 밑바닥이 다 보여.

 

233. 이해하고 싶지만 삶은 이해하는 게 아닌지 모른다. 그냥 살아가야 하는 건지도. 그렇기 때문에 아픔이 이렇게 멈추지 않는 건지도.

 

306. 빨랫줄을 보다가 세는 운전하는 은서의 옆모습을 쳐다봤다. 희망이 지나가버린 얼굴. 은서의 얼굴에서 그런 적요를 봐야할 때마다 세는 아득해졌다. 은서에게서 저 표정을 지우고 예전의 표정을 회복시켜줄 수 있다면 그 자신 그림을 다시 그릴 수도 있을 것 같다.

 

313. 단 한 번도 세가 자신에게서 멀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은서는 해본 적이 없다. 언제나 세는 거기 있었고, 거기 있을 것이라고 왜 그렇게 확신을 갖고 있었을까.

 

430. 나는 이제야 알게 됐어요. 내가 얼마나 그이를 믿어왔는지, 얼마나 사랑하는지.

 

492. “나는 그냥 한꺼번에 이해가 돼버리던데. 다시 볼 수 있을까, 생각하면 죽어도 이해 못 하겠는 것도 이해가 돼버리던데.”

 

538. 나, 태어나지 말았기를.

 

573. 불을 끄지 마. 불을 끄면 네 얼굴이 안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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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프리카에 펭귄이 찾아왔습니다
테오 글.사진 / 삼성출판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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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이 책은 품절상태입니다.

 

 

 

 

여행 에세이라면 관심도 없던 내가 여행 에세이를 단박에 좋아하게 만들어준 책인 까닭에, 내게 이 책은 참 특별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게 벌써 몇 년 전이다. 그때 그 책을 읽으며 느꼈던 감정이 지금 읽어도 비슷할까, 싶은데 다시 읽어도 읽어도 여전히 좋은 책이 있는 반면에, 조금 아쉬웠던 책도 분명 있었다. 그렇다면 <당신의 아프리카에 펭귄이 찾아왔습니다>는 어떨지, 돌연 궁금해졌다. 그래서 작년 <당신의 소금사막에 비가 내리면>이라는 책을 읽기에 앞서 이 책을 다시 찾았다. 그런데 책을 든 손이 무겁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다른 여행 에세이도 이렇게 좋은 것이구나, 느꼈었고, 그 이후에는 같은 장르의 다른 작가의 책들도 이미 몇 권이나 읽은 지금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완벽하게 기우였다.

여전히 좋았으니까.

 

 

 

당시에 서평을 썼을 때도 이 문장을 발췌했었는데, 이번 역시 마찬가지다.

 

47. 바람이 하늘을 닮아 베일 듯 파랗습니다.

하늘이 바다를 닮아 시리게 파랗습니다.

 

 

읽으면서 한 번도 가볼 생각을 않던 아프리카를 가고 싶어졌다.

무작정.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의 볼더스비치에 있는 펭귄을 만나러,

시그널 힐에서 먼 곳을 향해 시선을 놓으러,

메뉴가 없는 랑가방 비치 레스토랑에서 4시간 코스 요리를 먹으러,

특히 갈매기의 덩어리가 골고루 섞인 홍합 스튜를 보러,

(감히 맛보러 간다, 라고는 말하지 못하는 수줍은(?) 나)

케이프타운 안에 있는 사막인 아틀란티스 샌듄에 샌드보드를 타러,

진주를 닮은 팔락 마운틴에서 나도 바위처럼 단단해지기 위하여,

봉봉카의 드럼 연주를 구경하러,

브라이(남아공식 숯불구이)를 먹으러,

거구의 펭귄과 대결하여 승리하기 위하여,

(나는 테오 씨를 비웃었지만 나도 분명 도망칠 게 틀림없다.)

테이블 마운틴에서 구름 위의 휴식을 취하러,

그래서 일상의 심장 박동이 아닌, 느릿느릿한 심장을 느꼈으면,

한 봉지에 700원씩이나 하는 하라레 감귤을 기꺼이 사기 위해.

 

 

 

여행은 떠나는 것이 아니라 향하는 것입니다.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여행에게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가 물으면 나는 대답합니다.

여행아, 네게로 갈게.

 

 

 

 

그렇지, 내가 이 여행 에세이를 좋아한 이유가 있지.

그게 무엇이라고 한 가지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들의 냄새가 나는 여행이라는 점.

 

 

3월 즈음에는 <당신의 소금사막에 비가 내리면>을 읽을 예정인데, 편견이든 오해든 사실이든 아프리카는 위험하다는 것으로 인해 J의 직업적인 이유로 여행을 가기가 퍽 힘이 들겠지만, 나는 또 얼마나 가고 싶어 할까. 심지어 며칠 전에는 볼리비아 우유니 사막을 보며 우와우와 감탄사 열백 번을 외쳤던 나인데. 아마도 그 소금사막이겠지- 세상에나... 어쩐담-월 즈음에는 <당신의 소금사막에 비가 내리면>을 읽을 예정인데,편견이든 오해든 사실이든 아프리카는 위험하다는 것으로 인해 J의 직업적인 이유로 여행을 가기가 퍽 힘이 들겠지만, 나는 또 얼마나 가고 싶어 할까. 심지어 며칠 전에는 볼리비아 우유니 사막을 보며 우와우와 감탄사 열백 번을 외쳤던 나인데. 아마도 그 소금사막이겠지- 세상에나... 어쩐담-

 

 

 

/

밑줄을 그었던 부분

 

 

 

84. 우월이 아니라 다름의 차이.

돈을 많이 버는 것과 한가해지는 것과의 차이.

부자가 되는 것과 자유로워지는 것과의 차이.

과정을 견디고 미래를 즐길 것인가와 과정 자체를 즐길 것인가의 차이.

다름.

그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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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2-20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래 전에 읽은 책인데 품절
아마도 절판인가 보네요.

아프리카의 펭귄이 있다 해서 아주
궁금해서 접하게 된 것 같습니다.
 
서른의 반격 - 2017년 제5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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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어본 손원평 작가님의 책은 <아몬드>가 유일했다. 꽤 괜찮게 읽었기에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고 싶었는데, 선뜻 손이 가질 않았다. 그 이유라는 것이 조금 시시한데, 단지 제목 때문이었다. <서른의 반격>이라니. 제목에 나이가 들어갈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지,라면서. 같은 맥락으로는 이십, 삼십, 마흔이라는 나이를 언급한 책들에 대해 영 관심이 가질 않는다. 까닭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읽을 운명(거창하게 운명씩이나)이었는지 부여에서 개인이 운영하는 서점에 갔을 때에도 이 책을 손에 들고 고민했고, 이후에 회사일로 외근을 나갔을 때 시간이 남아 교육청에 있는 도서관에 들러 이 책을 잠시 읽기도 했었다. 당시에 읽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흥미는 있었지만 딱히 사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그 이후에 중고서점에 들어갔다 나온 내 손에는 이 책이 들려있었다. 책의 뒤표지에 쓰여있는 문장 때문이었다.

가서 항의해요. 가만있으면 그게 당연한 줄 알아요. 가만있으면 그렇게 해도 되는 것처럼 대한다구요.

조금 다른 게 있다면 나는 타인에게 이 말을 듣는 사람이기보다는 내가 타인에게 이 말을 하는 사람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202. “(…) 난 그냥 없는 사람이라구요…….”

없는 사람.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 없는 사람이다. 늘 소리치고 있는데도 없는 사람이다. 수면 위에 올라있지 않으면 없는 사람이다. 반지하방에 살면 없는 사람이고, 문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없는 사람이고, 인생과의 게임에서 지면 없는 사람이다.

여담으로, 작가의 말에서 초고를 쓸 때의 제목은 <보통사람>이었는데 <1988년생>으로 상을 받았고 책의 출간은 <서른의 반격>이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책을 읽으면서 내내 ‘없는 사람’이라는 단어가 뇌에 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없는 사람, 없는 사람, 없는 사람……. 이는 내가 자꾸만 책의 제목에 딴죽을 걸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김추봉이 될 운명이었던 ‘나’는 엄마의 활약으로 김지혜라는 이름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그녀는 1988년생으로, 꼰대들과의 친화력은 물론 텃새를 부리면서 자신의 입지와 공로를 세우는 기술이 교묘한 유 팀장과 트림, 방귀, 머리 긁기, 손톱에 낀 때를 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청소 아주머니에게 반말을 하며, 청소 중에도 소변을 보고, 누구에게나 성희롱을 하는 김 부장이 존재하는 대기업 산하의 디아망 아카데미의 계약직 인턴으로 일하고 있다.

어느 날 스타 강사의 박 교수의 심부름으로 외근을 나간 자리에서 박 교수가 알바생의 원고를 그대로 출판사에 넘겨놓고 알바비를 주지 않았다는 말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박 교수에게 당당하게 말을 하는 청년을 만나게 되고, 그녀는 그런 그를 조금은 신기하게 생각하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기게 된다. 그러다가 회사에서는 개학을 맞이하여 뭔가를 배우려는 수강생들로 바빠지는 때에 인턴을 한 명 더 뽑기로 결정한다. 인턴이 뽑혔고 지혜에게 악수를 청한 또 다른 인턴의 손목 위에 뭐가 있다. 별 모양의 문신? 어? 당신-

인턴에게는 아카데미의 강좌를 공짜로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데, (물론 엄밀히 말하면 공짜는 아니지만) 지혜는 규옥의 권유로 우쿨렐레 강좌를 함께 듣게 된다. 우쿨렐레 수업을 두 번째 들었을 때 어른들끼리 뒤풀이는 어떠냐는 말에 자리를 가지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뜻하지 않은 말들이 오가게 된다.

68. “힘 있는 소수는 언제나 여유만만하고, 힘없는 다수는 자신들이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요.”

68. “그럼 댁이 말하는 전복이란 건 무슨 뜻인데? 가진 놈들을 상대로 싸움이라도 벌여? 맘 맞는 사람이라도 모아서 시위라도 나서? 아니, 난 내가 누굴 상대로 싸워야 되는지도 모르겠어. 설령 뭔갈 한다고 쳐요. 뭐가 바뀝니까. 당신이 말하는 힘 있는 소수가 가진 게 뭔 줄 알아? 결국 돈이야 돈. 우리나라만의 일도 아니고 전 세계가 자본에 놀아나고 있는데 뭘. 그건 신도 못 바꿔.”

“그렇게 생각하는 한 세상은 점점 나빠질걸요? 억울함에 대해 뒷얘기만 하지 말고 뭐라도 해야죠. 내가 말하는 전복은 그런 겁니다. 내가 세상 전체는 못 바꾸더라도, 작은 부당함 하나에 일침을 놓을 수는 있다고 믿는 것. 그런 가치의 전복이요.”

그들이 사회의 부당함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에 이야기는 두 방향으로 나뉘었다. 내가 어떻게 바꾸겠어, 와 뭐라도 해야 한다,의 방향. 나는 후자의 입장을 선호하지만 생활과 환경, 상황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둘의 극명한 입장 차이 모두 이해가 가는 부분이어서 시시비비를 가릴 수 없다.

“골탕 먹여볼까요.”

“한번 실험해보는 거예요. 부끄러움을 모를 것 같은 사람이 과연 부끄러움을 알게 될지.”

그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확장시켜나가다가, 지혜와 규옥이 함께 일하는 김 부장에서 멈춘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인 걸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뻔뻔하게 모든 생리현상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김 부장. 그를 한 번 골탕 먹여보는 거다.

방귀 좀 뀌지 마.

트림할 때 입 좀 다물어.

머리는 화장실 가서 긁어.

이 가엾은 돼지님아!

그 쪽지를 받은 김 부장의 반응은 책 속에서 직접 확인하는 게 좋겠다.

나의 이야기를 조금 해보자면,

바로 이전 회사‘들’에서 차장이라는 직함을 단 것들은 사무실에서 그렇게 손톱을 깎아댔다. 직장에서 손톱을 깎다니? 나는 그런 것들을 처음 경험했는데 문화적 충격과 함께 굉장히 미개하다는 생각 말고는 다른 감정이 치고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 그 부분에 대해 다른 직원들과 말을 한 결과, 차장의 그런 행동이 잘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가 오갔다. 생각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정말 놀란 부분이었다. 결국 손톱 깎는 소리에 대해 나만 불편하고 불쾌하게 느끼는 소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당사자에게 대놓고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그럴 때면 혼자서 속으로 얼마나 욕을 해댔는지 모르겠다. (거의 열흘에 한 번씩은 그랬으니까) 그래놓고 엉뚱하게 집에 와서는 J에게 당신은 절대 그러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해댔다.

그 부분에 대해 책에서 말한다.

“사실 그런 걸로 누군가를 혐오스러운 인간이라고 판단해버리는 건 좀 그래요. 불쾌하긴 하지만 에티켓 문제일 뿐이잖아요.”

그 말이 맞다 싶으면서도, 과연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동체라는 크고 작은 생활에서 지켜야 하는 예의라는 게 있기 마련인데, 그걸 지켜주면 다행이고 아니어도 상관없는, 그런 예의 정도로만 규정지어도 된다는 것일까?

누가, 감히, 나에게.

그래봤자 너희들이, 어떻게.

근래에 나를 아는 직장 상사들은 내가 사회 혹은 회사에 바라는 게 많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사회에 바라는 바는 크게 많지 않다. 내가 사회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언감생심, 꿈도 꾼 적이 없다. 그런데 그들이 나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나는 한 개인으로서 내가 아닌 개인에게 바라는 바는 많은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바로 ‘인격 존중’이었다. 나의 인격이 침해되었다는 생각이 확실하게 들 때엔 나는 망설이지 않고 반기를 들었다. 그건 네가 틀렸어. 올바르지 못한 행동이야.라고 말을 했다. 그럴 때마다 그 사회에서 나는 점점 더 부적응자가 되어갔다.

꼰대들이 하는 육하원칙이 SNS에 떠돌고 있는 걸 본 적이 있다. 내가 누군지 알아, 뭘 안다고, 어딜 감히, 왕년에, 어떻게 나한테, 내가 그걸 왜 - 당시에는 그것을 보면서 마냥 웃기만 했는데, 지금은 씁쓸하게 웃는다.

소수의 동료들은 내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을 하면서도 정작 그들은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그들은 그들이 하고 싶은 말들을 이미 집단에서 부적응자로 낙인찍힌 내가 대신해주기를 바랐지만, 나는 내가 침해당한 것 외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문제는 그들이 알아서 처리를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물다섯에 함께 일했던 실장님은 40대의 남성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설거지나 청소는 남녀 구분 없이 같이 혹은 돌아가며 해야 하는 일이고, 자리는 각자의 자리만 정돈하면 된다고 일러주셨다. 이 규칙은 회사마다 정하기 나름이지만, 공용의 일에서부터 남녀 구분을 지어서 일을 해야 하는 회사는 다시 한 번 고민해보라고도 하셨다. 작은 것부터 남녀를 구분하기 시작하면 맡은 일에서도 남녀의 커트라인이 생길 수 있다고. 특히나 우리의 일은 남녀에 대한 시각이 편견이 아주 심하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반발을 해야 한다고도 알려주셨다.

그 덕에 나는 여성이라고 설거지나 청소를 해야 하거나 팀의 막내이기 때문에 숟가락을 놔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존중의 표시라고 배웠다. 그리고 다른 대부분의 회사들은 처음에는 그것이 아니었을지언정 의견을 피력하면 수용했다. 계급과 지위가 나누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 안에서 인격은 존중되었다.

그런데,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당연하고 당당하게 요구하던 것들이, 부딪치고 깨어지고 산산조각이 났다.

83. “(…) 세상은 원래 그래요. 누군가가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죠.”

“행동한다고 바뀌나요?”

“글쎄요. 확실한 건, 무언가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면 그건 누구도 행동하지 않았다는 거죠.”

이 말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했다. 맞는다면 사회 부적응자로서의 대접일 테고, 틀리다면 변한 것은 없다는 것일 테다. 내가 최근에 다닌 회사에서는 항거를 했을 당시에 그들은 모두 나에게 혀를 내두르며 화를 냈다. 나는 정정당당하게 내 권리를 주장한 것뿐인데, 내가 왜 그들의 화를 들어야 하는지가 의문이었다. 그 화는 바로 위와 같았다. 누가, 감히, 나에게. 그래봤자 너희들이, 어떻게. 내가 뭔가 요구를 하면, 너보다 부하직원이니 지위로 눌러라.라는 답변을 받았을 때부터 알아차렸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공생하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누구의 줄을 잘 서야 한다는 말을 듣는 것도 우스웠다.

하지만 내가 그것들에 반발을 하자 우습게도, 나를 대할 때 어려움을 느낀다는 점이었다. 그게 그들이 그것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앞서 말했던 것처럼 나를 사회 부적응자로서 대접을 하기로 결심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 긍정적인 변화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 같은 상황을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난 많이 당황했고 흔들렸으며 급기야 나를 자책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것에 대한 단단한 확신이 생기는 계기가 되었다. 나 참 잘 했다고-

132. 지환과 규옥이 던진 정반대의 명제들은 계속 나를 괴롭혔다. 지환은 현실을 영리하게 따르라고 강조했고 규옥은 현실에 균열을 일으킬 용기를 가져보자고 했다. 정반대에 놓인 두 개념에 공통점이 있다면, 어느 쪽이든 마주하긴 괴롭다는 것이었다.

맞다. 마주하기 괴롭다는 것. 나는 그중에서 나를 지키는 쪽을 선택했다. 결과가 어떻든.

101. “(…) 너 사람이 언제 어떻게 보수화되는지 알아? 명백한 자기 재신이 생길 때야. 절대 빼앗기거나 침해될 수 없는 것, 집이나 돈이나 그럴듯한 밥그릇이 생길 때.”

하지만 종종 생각한다. 내가 잘나서, 혹은 내 성격이 대담해서 말을 할 수 있었던 게 아니었다. 내가 나를 지키는 쪽을 선택할 수 있는 까닭.

내가 인격을 존중받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어도, 일에 대한 자신감이 없으면 할 수 없던 선택이었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돈 앞에 무너지지 않을 장사 없다. 하지만 나는 일을 결코 잘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내가 맡은 일에 대한 최선을 했었기에 가능했고, 이곳이 아니어도 충분히 이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가능했으며, 경제적으로 풍족한 것도 아니지만 내가 몇 달 벌지 않아도 생활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모든 게 맞아떨어졌기에 나의 인격을 먼저 생각할 수 있을 수 있었다. 내가 일을 함으로써 지켜야 하는 것이 있었다면, 내가 내 목소리를 낼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사실 자신 없다.

책에서 다빈은 절대 빼앗기거나 침해될 수 없는 것,이 ‘아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세상의 모든 가장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닐까. 가족-

나는, 내가 노동력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는 시점부터 나의 아빠가, 그리고 세상의 모든 가장이 가엾게 느껴졌다. 결혼하니, 나의 배우자 J씨 역시. 그들은 현실에 균열을 일으킬 용기를 가지는 것보다 현실을 따르는 혹은 순종하는 쪽을 택한다. 그런 선택을 했다고 해서 그것을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그들의 노고를 알아주고 다독거려주며 조용히 응원해줄 뿐이다.

각자가 삶의 애환이 어디쯤 가있는지 안다면, 책 속의 고무인의 선택 역시, 우리가 비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고무인이 아니니까. 그래서 더 안타까웠던 부분이다.

187. 어쨌든 그 일은 내게 꽤 큰 교훈을 남겼다. 속내를 감추지 않고 겉으로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

싫은 소리 한 마디 못할 것 같은 지혜가, 학창시절의 공윤을 우연하게 만나면서 바뀌어간다. 폭발적이지는 않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힘을 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지혜는 또 다른 힘을 얻었다. 나는 그런 지혜가 내 친구인 듯, 힘차게 응원했다. 책 속의 누군가를 그렇게 응원해본 건 또 오랜만이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내가 그동안 나를 지키기 위해 했던 노력들이 헛되이 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결과지를 받은 느낌이었다. 그 결과지에서 나는 꽤 많은 위로를 받았다. 실은 그동안 나, 너무 예민하게 군 거 아닐까, 나만 이러는 걸까, 나만 못 견뎌 하는 걸까 - 등등에 대해 수없이 회한이 서린 자책을 해댔다. 그러면서 마지막엔 합리화를 할 요량으로 당시엔 그게 최선이었어,라고 읊조리곤 했다. 그게 작년 7월이었는데, 올해 1월에도 한 번 더 발생하면서 나는 정말 사회 부적응자인가,하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그동안의 사회생활이 모조리 엉망인 것이 아니었고, 지금도 사회 생활을 하며 친분을 유지한 이들에게서 연락이 온다는 사실이 그동안의 나를 증명해주고 있었다. 누구나 견디지 못하는 것들이 하나씩 있기 마련인데, 적어도 내게는 그런 것이라고. 나는 자존감이 그렇게 높지 않은 편이기 때문에, 열등감이나 피해 의식을 배제시키려고 스스로 검열을 즐기는 편인데, 그 사건들은 나를 지켜야 하는 의무 중 하나였다고.

202. “가서 항의해요. 가만있으면 그게 당연한 줄 알아요. 가만있으면 그렇게 해도 되는 것처럼 대한다구요.”

203. “설령 지금 당장 뭔가가 바뀌지 않는다고 해도요.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걸 자꾸자꾸 보여줘야 해요.”

우리는 스스로가 반짝반짝 빛나는 존재라는 사실을 자주 잊는다. 그것을 매 순간 상기하며 살아가는 것은 힘들지언정 누구가 나에게 무례하게 군다면 그것에 대한 반기를 들어 나 자신의 뿌리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게 말처럼 쉬운 일도 아니고 상대방에 따라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결코 그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다. 인간으로서의 존중을 받기 위해서 그런 노력까지 해야 한다는 사실이 아주 우습기는 하지만, 맹수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나를 지킬 것은 나 자신밖에 없으니까.라는 너무나도 원초적인 말로 대신해본다.

ps. 정진 씨,는 지혜가 답답한 도시생활에서 하나의 숨통을 마련하기 위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었다. 나도 그랬다. 바로 전의 회사에서.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지만, 혼자 점심을 먹고 싶거나 점심을 먹는 것 대신에 산책을 하고 싶거나 도서관을 가고 싶을 때에는 친구와 약속이 있다고 둘러댔다. 그래야만 길고 긴 회사에서 나를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니까. 오롯하게 혼자만의 내 시간, 나는 그게 그렇게 소중했다. 그래서 정진 씨를 만들어낸 것에 대해 깊이 공감했다. 다만 그녀가 정진 씨를 너무 자주 만나지는 않기를 바랐다. 나의 경우에는 회사에서 지치는 일이 있을 때 자주 있지도 않은 친구를 찾았으니까. (여담으로 내 친구 김지혜는 실제로 정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편이 있어서 너무 놀랐다. 나중에 지혜한테 말해줘야지.)

나는 나와 당신들에게 묻고 싶었다. 어떤 어른이 되고 싶으냐고. 지금의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고 새길 것이냐고. 반격이 먹히지 않아도 마음속에 심지 하나쯤은 가지고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런 질문과 상념이 모여 이 작품이 태어난 것 같다. - 작가의 말 중

 

 

/

밑줄을 그었던 부분들

12. 어쨌든 전국의 지혜들은 역시 전국에 만만찮게 포진해 있는 민지, 은지, 은정, 혜진이 들과, 양념처럼 한 반에 몇 명쯤은 포진한 보람, 아름, 슬기 들과 어울려 무럭무럭 커갔다.

103. “너는 시간 많아서 좋겠다. 너만 생각할 시간.”

좋겠다, 같은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 친구 사이에 공통화제의 간극이 생기고 그게 점점 멀어지면 평행선을 달린다. 언젠가 다빈이와도 그렇게 돌 수 있겠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가볍지는 않았다. 그저 그 시간이 되도록 천천히 와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129. 부당한 권위를 이용해 세상을 뻣뻣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대상이었으며, 그들을 곤란하게 하고 면박을 주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었다.

134. 생각 없이 걷다가 예기치 않은 타박을 들었다. 왜 거꾸로 돌고 그래, 부딪히잖아. 운동복을 빼입은 할머니가 눈을 흘긴 채 파워 워킹을 하며 사라진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만 반대 방향으로 걷고 있다. 이 작은 공원에도 돌아야 하는 방향이 있다. 그 방향을 어긋나면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생각 없는 사람이 되는 거다.

140. “(…) 웃긴 게, 잘하는 거랑 남들 눈에 잘 드는 거랑은 또 별개거든. 그게 바로 센스라는 건데 나는 센스가 없는 인간이었던 거지. (…)”

공윤의 커피를 사오게 된 지혜에게 유 팀장이,

173. “(…) 언제나 납득할 수 있는 일만 하는 직장이나 몇이나 된다고 생각해? 다들 그게 말이 안 되는 걸 몰라서 하나? 그래야 뭔가가 굴러가니까 하는 거거든.”

179. “존재를 어떻게 확인받아요.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는데 뭘 확인받느냐고요.”

“아마 그 고민은 죽을 때까지 하게 될 거예요. 백 살이 될 때까지 같은 생각할걸요. 외롭다고,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내 인생은 어떤 의미가 있었느냐고.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괴롭고 끔찍하죠. 그런데 더 무서운 거는요, 그런 고민을 하지 않고 사는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질문을 외면하죠. 마주하면 괴로운 데다 답도 없고, 의심하고 탐구하는 것만 반복이니까. 산다는 건 결국 존재를 의심하는 끝없는 과정일 뿐이에요. 스스로의 존재를 의심하는 게 얼마나 드물고 고통스러운지 알아가는…….”

221. 더 이상 함께할 이유가 없어지고 나서야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를 조금쯤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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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 개정판
양귀자 지음 / 쓰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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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서평에는 책에 대한 전체적인 이야기가 서술되어있지 않습니다.

 

 

 

 

 

 

이 책을 꼭 네 번째 읽는다. 이제 서평을 미룰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 서평을 쓰려는데, 아직도 머리가 어지럽다. 어떤 확신도 없는데 내가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써도 되나- 싶은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써야겠지. 그래야만 지금의 내 생각에 지금보다 더 큰 내가 아, 이때는 이런 생각이었구나- 하고 알 수 있게.

 

 

 

가장 최근, 그러니까 세 번째 이 책을 다시 읽었던 때는 2016년 1월이었다. 결혼 후 이 책을 처음 읽었다. ‘결혼 후’라는 사족이 들어가는 이유는, 그 이후에 내 선택이 조금 달라졌음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나는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김장우쪽이 확실한 사랑이라고 믿었다. 사랑이라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라고,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사랑이냐고- 안진진을 앞에 두고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고 싶었다. 너무도 완벽하게 김장우였으니까.

 

 

 

 

그런데 2016년의 나는 좀 바뀌었다. 나영규쪽으로 노선을 튼 것이었다. 2011년 즈음에 J의 직업은 불분명했다. 있지만 없고 없지만 있는 것과도 같았다.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이라는 문턱을 넘을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는 내게 날벼락 같은 이야기를 했다. “혹시라도 내가 정규직이 되지 않으면 너와 헤어질 거야.”

 

 

“그때 왜 그렇게 말을 했어?”라고 묻는 내게, “앞날이 불투명한데 내가 너를 놓지 않으면 네가 고생할 테니까.”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는 사랑하는 사람이 불행하지 않게 놔주어야 한다는 사람이었다. 나는 로망을 꿈꾸었다면, 그는 현실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나는 그의 논리를 비겁한 것이라고 일침을 가했고, 그는 침묵했다. 그렇게 우리는 그 주제에 대한 대화를 멈출 수 있었다. 그 침묵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을지, 당시에도 나는 몰랐는데, 나는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의 입장이 되어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마 그가 그렇게 내게 직접 말을 한 것은 그렇게 되지 않게 되기를 소망하는 발악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다 알지는 못하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진심으로 필사적이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나영규라니-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만약 그가 정규직이 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정말 지켜주는 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논리로 그가 나를 계속해서 잡아주기를 바랐을까? 이제까지의 직업을 정리하고, 새 삶을 시작하는 그에게 응원‘만’ 해줄 수 있었을까? 당시에는 호기롭게 그에게 말했지만, 사실 자신 없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우리가 헤어지는 이유는 분명하지만 구차하게 이런저런 핑계들을 대어가면서, 그렇게 끝을 맺었을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도 쉽게 말할 성격의 것이 아니라 말은 못 했지만, 결혼 후 다른 것도 아닌 ‘돈’ 때문에 싸워본 적이 없다는 것은 두고두고 우리 부부 스스로에게 자랑거리가 되었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모자람 없이 대체로 넉넉한 우리의 가계는 우리에게는 성실한 자본이 되어주고 있다.

나는 안다. 그깟 돈이라는 것이 영원할 것 같은 사랑을 망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돈 때문에 서로 으르렁거리며 다툴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나의 부모님이 그랬다. 특히나 가만히 조신하게 있으면 좋은 남자랑 결혼시켜줬을 엄마는, 사랑을 선택했다. 하지만 적지만 충분히 돈을 모을 수 있는 상황에서 엄마의 씀씀이와 만족하지 못하는 아빠의 급여가 엄마는 늘 불만이었다. “리라야, 나는 돈이 없으면 이렇게 힘든 건지를 몰랐어.”

세 번째 책을 읽었을 때에는 그래서였다. 나영규를 선택한 게. 251. 좋은 밤을 보내려면 확실한 예약 없이는 곤란해요. 나영규라면 가난의 늪으로 안진진을 데려가지는 않겠지. 라는 생각. 그 때문에 나영규를 선택했었다.

 

 

 

 

그런데 네 번째 읽었을 때에는 생각이 또 바뀌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영규였다.

 

 

 

 

193. “(…) 꽃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그 이름을 자꾸 불러줘야 해. 이름도 불러주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냐.”

하지만 김장우를 완전하게 배제시킬 수 없는 까닭은, 그럼에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단연 김장우였으니까.

 

 

 

 

194. 이것이 사랑인가. 서로가 서로에게 한쪽 어깨를 빌려주고 기대는 것, 이것이 사랑일까…….

나영규에게는 없는 것. 그것이 확실히 김장우에게는 있었다. 나영규와 만나면 현실이 있고, 김장우와 같이 있으면 몽상이 있었다. 사랑이라는 몽상 속에는 현실을 버리고 달아나고 싶은 아련한 유혹이 담겨있다. 끝까지 달려가고 싶은 무엇, 부딪쳐 깨지더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무엇, 그렇게 죽어버려도 좋다고 생각하는 장렬한 무엇.

이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 사랑이란 말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영규였던 것은, 세 번째 이유에 더해져 진진이 누군가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그 까닭이었다. 265. 흑흑 흐느끼면서 그렇게 편안하게 울었다. 어떻게 할지 몰라서 쩔쩔매는 김장우 앞에서는 꼿꼿하기만 했는데, 자꾸 꼿꼿해지고 싶었는데, 정말 기이한 일이었다. 나영규를 시험하는 것일지도 몰랐다고는 하지만, 그에게는 솔직해질 수 있었다. 감추지 않아도 되었고, 자신을 그대로 보여줄 수도 있었다. 더 이상 이모가 엄마라고 말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에 대한 핑계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버지가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가 울 수 있는 대상은 김장우가 아니라 나영규였다. 그뿐이다.

 

 

 

 

하지만 나영규를 선택하기에는 너무나도 폭력적이지 않니. 사람은 몽상 속에서만 살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현실 속에서만도 살 수가 없는 걸.

 

 

 

 

몽상을 택하면 우리가 웃고 현실을 택하면 네가 웃는다는 가정이 있다면, 나는 어떤 것을 선택할까.

몽상을 택하면 우리가 울고 현실을 택하면 내가 운다는 가정이 있다면, 나는 어떤 것을 선택할까.

 

 

 

 

 

 

아니, 좀 더 간절하게는 -

활짝 웃음이 옆 사람까지도 웃게 만드는 전염성 강한 나영규와,

여운이 길어 웃음이 끝난 뒤에도 계속 생각나게 만드는 수채화 같은 묘한 웃음의 김장우.

 

 

 

 

누구에게나 선택은 어렵다.

그렇기에 진진도 3개월의 기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것을 이전까지는 사랑을 찾아내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며 읽었다면, 이번에는 진진, 자신의 삶을 조금 더 들여다보는 시간이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떤 쪽도, 옳고 그름이 없었다. 누구도 그녀의 생을 살지 않으니까. 다만 그녀에게는 좋은 선생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187. 이 쌍둥이 자매들은 똑같이 책에 의지하는 경향이 강한 편이었지만, 선택하는 책은 이토록이나 정반대였던 것이다. 마치 그들의 삶처럼.

잠을 자다 일어날 때면 “왜 그래! 무슨 일이야!”라고 외치는 것이 생에 다채로운 일들이 굉장히 너저분하게 널려있다는 반증이 되는 엄마와, 모든 일에 예외가 없어서 언제라도 예측이 가능한, 몹시 심심한 사람인 이모부와 살고 있는 이모.

 

 

 

 

 

 

이모, 그래. 이모에 대해서 말을 좀 해야겠다.

남루한 일상의 고통에서 홀로 자유로운 이모를 보는 것이 안진진 삶의 큰 위안이었다. 마치 제목만 있고 본문이 없는, 텅텅 빈, 기이한 소설책을 펼치고 망연자실해 하는 소녀의 표정을 지은 이모를 보며 진진은 생각한다. 이모에게도 무슨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주리와 주혁이 유학을 가고 난 뒤에 허전해하는 진진의 이모를 보면서 사촌동생이 군대에 가고 나서 술을 배웠다는 나의 이모가 생각났다. 나의 이모부도 굉장히 심심한 사람이었는데, 나의 이모는 진진의 이모처럼 소녀 같은 사람이어서. 그래서 진진의 이모가, 첫눈을 보고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던 이모가, 행복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진진의 이모가 행복하다는 것은, 나의 이모 행복과도 깊숙이 연관이 되어있을 것만 같았으니까. 그래서 꼭 그러기를 바랐다.

 

 

 

 

 

 

295. 인간에게는 행복만큼 불행도 필수적인 것이다. 에 대해 불행 후 찾아오는 평온함이 어떤 안식이 되는지 너무 잘 아는 나는, 여전히 납득할 수도 없고 인정하기도 싫지만 이모를 보면서 그 순간만큼은 그래, 그렇겠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엄마가 행복한 지옥을 살았다면, 이모는 불행한 천국을 살았던 거겠지. 하지만 결과는 배제하고서라도 여전히 둘 중 어떤 삶이 더 나아 보인다고 쉬이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게 말하는 까닭은 단 한 가지다.

안진진, 그래, 안진진 당신이 행복에 가까운 삶을 살기를.

 

 

 

 

 

 

 

 

 

 

 

 

덧. 김장우와 나영규를 사이에 두고 고민하는 안진진을 보면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로제와 시몽의 사이에서 고민하는 폴이 생각났고, <깊은 슬픔>에서 완과 세의 사이에서 어쩔 수 없었던 은서도 생각났다. (<깊은 슬픔>은 몇 달 전부터 눈에 밟혔는데, 이 책을 미룰 이유가 없어졌네.) 또 영화 <우리 사랑하는 동안>도 생각났는데, 그 중에서 영화의 결말이 제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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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 밑줄

 

 

11. 삶에서 발생하는 에피소드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씹을 줄만 알았지 즐기는 법은 전혀 배우지 못한 것이었다. 에피소드란 맹랑한 것이 아니라 명랑한 것임에도.

 

17. 이십 대란 나이는 무언가에게 사로잡히기 위해서 존재하는 시간대다. 그것이 사랑이든, 일이든 하나씩은 필이 사로잡힐 수 있어야 인생의 부피가 급격히 늘어나는 것이다.

 

30. “진진이 너, 그런 일은 그냥 잊어버려. 아니면 나처럼 재미있었던 모험담 정도로만 생각하거나. 안 그래도 지루한 세상, 그땐 무지무지 아슬아슬했었는데. 하면서 말야.”

 

94. “해질 녘에는 절대 낯선 길에서 헤매면 안 돼. 그러다 하늘이 저켠부터 푸른 색으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프거든. 가슴만 아픈 게 아냐.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지 몰라. 안진진, 환한 낮이 가고 어둔 밤이 오는 그 중간 시간에 하늘을 떠도는 쌉싸름한 냄새를 혹시 맡아본 적 있니?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그 시간, 주위는 푸른 어둠에 물들고, 쌉싸름한 집 냄새는 어디선가 풍겨 오고. 그러면 그만 견딜 수 없을 만큼 돌아오고 싶어지거든. 거기가 어디든 달리고 달려서 마구 돌아오고 싶어지거든. 나는 끝내 지고 마는 거야…….”

 

106. ‘언제나 최고의 셔터 찬스는 한 번뿐. 두 번 다시는 오지 않는다. 좋다고 느껴지면 망설이지 말고 무조건 셔터를 누르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훌륭한 순간 포착. 그곳에 사진의 진가가 존재한다.’

 

114. 착하고 착한 우리 안진진…….

 

117. “너 때문에 나는 도시로 돌아와. 너를 생각하면 빨리 돌아오고 싶어.”

 

119. 착하고 착한 김장우.

 

120. 나는 왜 갑자기, 어딘가에서 그 남자의 냄새나는 양말을 깨끗이 빨아놓고 잠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까…….

 

173. 삶은 그렇게 간단히 말해지는 것이 아님을 정녕 주리는 모르고 있는 것일까.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리는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178. 그건 옳지 못한 거야,라는 주리의 관용구. 주리는 바로 그 관용구 밑에 숨어서 ㄷ더 이상은 세상 속으로 나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180. “진진아…….”

“응? 왜요?”

“진진아, 미안해. 너보다 우리 자식들을 더 사랑해서… 너한테 정말 미안해…….”

 

188.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229. 단조로운 삶은 역시 단조로운 행복만을 약속한다. 지난 늦여름 내가 만난 주리가 바로 이 진리의 표본이었다.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내게 가르쳐준 주리였다. 인간을 보고 배운다는 것은 언제라도 흥미가 있는 일이었다. 인간만큼 다양한 변주를 허락하는 주제가 또 어디 있으랴.

 

210. 사랑이란,

발견할 수 있는 모든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지 않고 무심히 지나칠 수 없게 만드는 무엇이다. 자신의 얼굴에 대해 생애 처음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나. 자신의 눈과 코와 입을 그윽하게 들여다보는 나. 한없이 들여다보는 나. 그리고 결론을 내린다. 이렇게 생긴 사람을 사랑해준 그가 고맙다고. 사랑하지 않고 스쳐갈 수도 있었는데,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걸음을 멈춰준 그 사람이 정녕 고맙다고.

 

261. 야윈 살가죽을 뚫고 돌출한 광대뼈, 늘어진 주름살 사이사이로 번지고 있는 거뭇거뭇한 반점, 수세미처럼 헝클어진 반백의 머리칼

 

278. 착하고 착한 우리 안진진. 정말 착하고 착한 내 안진진.

 

293. 어머니는 더욱 바빠졌고 나날이 생기를 더해갔다.

아, 어머니의 불행하고도 행복한 삶…….

 

296. 마지막으로 한 마디.

일 년쯤 전, 내가 한 말을 수정한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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