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미숙 창비만화도서관 2
정원 지음 / 창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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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는 아버지와 실질적으로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의 모습인 어머니, 언니 정숙과 주인공 미숙.

오래 전에 자신의 꿈을 좇는 가장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당시에 나도 만화로 보았으니 읽었다고 해야 하나, 보았다고 해야 하나. 암튼, 그랬다. 그런데 그것을 보면서 사람은 누구나 꿈이 있고 꿈을 향해 가는 거지,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책임져야 하는 대상이 있으니까,라는 너무나도 원론적인 것이 그 이유였다. 사람은 누구나 ‘책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데 그 대상이 ‘가족’이라면 꿈만 좇기에는 너무 이기적이지 않나. 또한 곤고한 가정 형편이라면 더더욱 염치없는 행동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도 여전히. 꿈이 없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마음에 품었던 꿈이 없는 사람도 있나. 다만 나의 처지와 현실과의 중간에서 타협하는 것이지.

 

 

 

언니… 내 이름이 미숙이잖아.

근데 학교 애들이 야 미숙아, 라고 불러.

미숙이나 야, 하면… 괜찮은데

야 미숙아, 꼭 이렇게 불러.

야, 미숙아.

역시나 그 사이에서 힘들어하는 것은 배우자와 그 자녀들이다. 심지어 잔혹한 아버지의 폭력성은 물건을 던지는 것을 넘어 급기야 어머니에게까지 손이 뻗치고 만다. 경제적으로 무능한데, 폭력까지 휘두르는 아버지. 집은 점점 도망치고 싶은 공간이 되었고, 가족은 점점 모르고 싶어지는 대상이 되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성숙은커녕 성장(成長)이나 할 수는 있을까.

언니는 내 우상이었고 인내였다.

그런 언니가 변하기 시작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무너지고 있었다.

눈에 띄게.

그렇게 희망이 절망하고 있었다.

미숙이 의지할 수 있었던 대상은 바쁜 어머니를 대신해서 언니 정숙이 되었다. 정숙이 등을 돌리는 순간부터 정숙도 미숙이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게 되었고, 그 빈자리를 전학을 오게 된 김재이가 채워주게 된다.

하지만 모든 것을 스스럼없이 보여준 미숙의 마음을 이용한 재이로 인해, 미숙은 큰 상처를 받게 되고 학교를 자퇴하기에 이른다. 미숙은 그렇게 마음의 문을 닫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송겸재, 그가 곁에 서는 순간 그 틈으로는 빛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겸재에게 마음을 다 주는 것 같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다시 상처를 받게 될까 봐 미리 마음에 벽을 두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게 미숙이뿐만이 아니라, 겸재에게도 느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섹스는 내게 숙제 같았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겸재 씨도 마찬가지처럼 보였다. 라는 부분이 연인 관계에서 으레 있을 수 있는 권태나 허무로 느껴지지 않은 것을 보면.

사실 나는 많이 걱정이 되었다. 미숙이의 마음에서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고여있는 것들 때문에 감정둔마, 그러니까 손원평 작가의 <아몬드>의 윤재처럼 되어버릴까 싶은 오지랖에 뒷목이 서늘해지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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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숙의 삶을 내밀하게 들여다보는 동시에 타인의 삶을 관조하게 되는데, 나 같은 경우에는 정숙에게 모든 초점이 맞춰졌다. 아버지께 인정받고 싶지만 인정받지 못하고 허벅지를 꼬집으며 모든 걸 인내하는 모습에서 정숙의 황량하고 피폐한 감정을 조금이라도 전달받을 수 있어 그랬을까. 결국 정숙은 자신의 고름을 짜내기는커녕 점점 고름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상황은 많이 달랐지만, 정숙이 꼭 나의 모습 같아서 더 곤혹스러웠다. 정숙이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은 누구였을까.

그러면 가족이란 결국 무거운 부담과 막대한 담보 및 거미줄 같은 채무로 연결된, 서로가 서로에 대한 인질인가. (…) 가족이 휴식이나 피난처가 아니라 피로와 염증을 유발하는 일거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둘러선 구성원의 표정이 상기시킨다.

위는 몇 년 전에 읽은 책인, 구병모 님의 <한 스푼의 시간>에서 발췌한 문장이다. 나는 당시에 내가 가족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매우 유사한 그 문장을 오래도록, 마음에 담았다. 매번 꺼내어보아서 이미 너덜너덜해진 그 문장을, 다시금 상기했다.

책을 읽으면서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지배했다. 가족이란 뭘까. 도대체 가족이라는 존재는, 어떤 걸까. 왜 가족이라는 관계는 어쩔 수밖에 없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나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했음에도 아버지의 병을 간호했던 것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스스로 바보가 되기를 자처했던 것도, 자신을 때린 언니와 멀어지기는 했지만 미워하지 못했던 것도, 너무 한심하게도 - 가족이기 때문이었다. 가족이 왜? 가족이 어떻다고? 라고 나 대신에 반발해주었으면 했는데, 결국 ‘가족이니까’라는 문장 앞에서 나는 고개를 처박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미숙은 기쁘게 받았다. 아버지가 던진 <무소유>에 맞아 생긴 흉터를 치료하라고 어머니가 그동안 모아둔 돈 봉투를. 이미 그 흉터는 영영 지울 수 없을테지만, 뒤늦게라도 내민 어머니의 손이 있었으니까.

결말에 대해서는 열린 결말인지 닫힌 결말인지 판단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미숙아이기 때문에. 그저 자신의 미숙함을 목격했을 때 부끄러워하거나 밀어내지 않고 담담하게,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미숙이가 아닌 나도, 너도, 우리도. 우린 모두 미숙한 세상에 던져져 미숙한 사람들에게 미숙하게 자라날 수밖에 없으니까. 비단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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