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깊은 슬픔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3월
평점 :
이 책을 이 시간에 읽는 게 아니었다.
아주 천천히, 더욱 천천히 읽을걸 그랬다.
그게 아니라면, 잠시 멈추었어야했다.
그게 실수였다.
이 책을 이른 오전에, 혹은 늦은 오전에, 이른 오후에 다 읽었더라면 동네라도 한 바퀴 돌며 은서를 생각했을텐데.
참 모진 새벽이다.
내가 이전의 서평보다 더 잘 쓸 것 같지는 않지만, 용기를 내어 한 번 써본다. 다시.
이건 서평이라는 말보다는 독서의 기록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지.
뭐라도 쓰지 않으면 응어리가 진 것 같은데,
그것을 글로 풀어낼 수 없다는 건 아주 가혹하고 참혹하며 난폭하다.
오은서, 이세, 서완 -
그들의 이야기.
그 여자 이야기를 쓰려 한다.
이름을 은서(恩瑞)라 짓는다. 사랑이 불가능하다면 살아서 무엇 하나, 가끔 우는 여자. 언젠가부턴가 내 속에 내가 먹이를 주어 기른 여자.
기억해야지.
은서.
恩瑞 (은혜 은, 상서로울 서)
그 여자, 사랑의 등만 봤던 여자, 어쩌면 삶 바깥의 여자, 저런, 사로잡힌 여자.
가끔, 그 여자, 내 안에서 바느질을 한다. 그 여자가 바느질하는 옆에서 나, 그 여자의 순해서 슬픈 목덜미를…… 그래, 목덜미 이야기를 하자, 나는 가끔 사람의 목덜미에서 그 사람의 앞날을 느낀다.
뒷모습의 중심을 이루는 목덜미의 선.
혼자 있어도 고개를 자주 숙이는 목선은 그 사람의 운명도 고개 숙이게 하는 건 아닌지. 여럿 속에서 고개를 한껏 쳐드는 목선은 그 주인의 운명을 고개 들게 하는 건 아닌지. 숙임과 듦 사이엔 무엇이 있는지, 나아감과 물러섬 중 무엇이 더 적극적인지. 가질 수 있는데도 놓기란, 나아갈 수 있는데도 물러서기란 힘겨워, 나, 그 여자 목선을 손가락으로 따라가본다.
사랑의 등만 보았던 그녀,
그녀가 가여웠다.
깊은 우물에 빠져있는 그녀.
아니, 아니다.
그보다 세가 가여웠다.
그는 어땠나.
그를 보며 은서를 미워했다.
하지만,
미워하지 말걸 그랬다.
정말 그럴 것을 그랬다.
그럴 것을.
존재를 견딘다는 건 시간을 견딘다는 게 아닌지, 존재는 어느 만큼 운명적이 아닌지.
울지 마, 은서야. 울지 마.
하지만,
116. 이 사람이었던가. 나를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하고, 나에게 물잠자리를 잡아주던 세를 곤두박질치게 하곤 대신 저가 병으로 가득 물잠자리를 잡아주던 사람이, 이슬어지를 떠나던 날 밤 숨차하며 뛰어와 내게 입술을 댔던 그 사람이 이 사람 맞는가. 이슬어지는 다 잊어버리고 너만 기억하고 싶다던 그 사람, 세 사람이 모두 우정을 나누길 바란다고 말했던 내 얼굴을 끌어안아버렸던 그 사람이 이 사람 맞나, 너만이 나를 사나움 속에서 건져내 줄 거라고 하던 그 사람이 저이던가.
말린다고 막아지는 것이 사랑이라는 감정이던가.
울지 말란다고 눈물이 흐르지 않던가.
당신은 그게 사랑 앞에서 가능한 것이었나.
130. “나는 사랑해. 네 예측할 수 없음, 네 조심성, 네 단호함. 내 눈에 이제 너보다 더 아름다운 건 없어. 이렇게 말하면 안 되겠지. 그러면 너는 저만큼 더 물러서겠지. 너의 마음을 내게 붙들어놓으려면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게 아니라 세를 사랑한다고 말해야 될 거야. 그게 너의 마음을 얻어내는 길일 거야.”
어쩌겠어요, 사랑인걸.
137. 네 속눈썹을 세어봤는데 마흔두 개야, 했던 말이 생각나면 그 생각 하나로 세상을 다 얻은 듯이 살아가지. 그걸 세어볼 정도면 너는 틀림없이 나를 사랑한다 여겨지기에.
너무도 분명하게 사랑이었으니까,
사랑이니까.
양귀자의 <모순>에서 썼던,
이게 사랑이 아니면 무어가 사랑이야.라는 말을,
여기에 다시 한번 붙여 넣는다.
410. “오래도록 완을 기다리고 서 있는 널 보며 느꼈지. 너를 사랑하는 일이 나를 무너지게 할 거라는걸.”
너는 모르지. 너는 달라졌어. 옛날 같아졌어. 다시 옛날 같아져 버린 네가 나의 무엇을 이해하겠어, 무엇을.
세가 가여워 눈물이 났다.
그런데 나 왜,
전에 세가 은서를 모질게 대했다고만 기억하고 있나.
내가 당시에
세를 이해하지 못했던 까닭인가.
혹은 은서에 너무 집중해있었나.
미안해요.
그러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580. 너는 너 이외의 다른 것에 닿으려고 하지 말아라. 오로제 너에게로 가는 일에 길을 내렴. 큰 길로 못 가면 작은 길로, 그것도 안 되면 그 밑으로라도 가서 너를 믿고 살 거라. 누군가를 사랑한다 해도 그가 떠나기를 원하면 손을 놓아주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 그것을 받아들여. 돌아오지 않으면 그건 처음부터 너의 것이 아니었다고 잊어버리며 살 거라.
이수의 한번,이라는 말의 습기는 꽉 찼다.
“누나, 한번 와.”
이수야, 이수야 -
제일 걱정되는 이수야.
우리 이수, 잘 지내지?
581. 나, 그들을 만나 불행했다.
그리고 그 불행으로 시절을 견뎠다.
자꾸만 은서가 아스라해진다.
결국은 울어버렸다.
나는 은서가 아니었는데, 나는 은서가 되었다며 출근하려는 그이 앞에서 그렇게 울어버렸다.
그이가 있었다면 나는 아마 그의 품에서 훌쩍이며 잠에 들었을 텐데,
분명 그랬을 텐데,
그렇지 못해서 이 새벽에 나는 책과 책 속에서 방황을 한다.
이렇게 깊을 줄 알면서도 빠져버린 나는,
며칠이고 우울에 갉혀도 좋다고 생각했던 나는,
이제 없다.
얼른, 빠져나와야겠다.
너무 깊어져서
두통을 겪을 때의 은서처럼 세면대에 얼굴을 담그기 전에.
그전에.
/
도도록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온다.
도도록 : 가운데가 조금 솟아서 볼록하게
완, 내게 이슬어지란 곧 너거든.
세, 너는 내 고향이야.
아무래도 그들은 서로에게 도도록이었다.
보이지 않으려 해도,
깊숙이 숨겨도,
도도록 티가 날 수밖에 없는,
서로가 서로에게,
고향 같은 존재들.
오로지 ‘너’에 그토록 집중할 수 있었다니, 아, 그때는 ‘너’만 있으면 되어서, ‘너’만 아름다워서, 어떤 식으로든 ‘너’의 곁에 존재하고 싶었기에.
-작가의 말.
신경숙 작가의 글은 매번 이렇게나 아프다.
특히나 <깊은 슬픔>은 더욱 그렇다.
내가 이 책을 좋아한다고 말을 하는 것은 상관이 없었지만,
선물을 하기 전에는 꼭 물어야 했다.
내가 이 책을, 선물해도 괜찮겠느냐고.
이렇게 좋은 책을,
타인에게 좋은 책이라고 선뜻 건네는 것이 무척 어려워지게 만든,
신경숙 작가가 아주 많이, 너무너무, 미워졌다.
다정한 불빛이 그리워지는 오늘 밤,
나는 노오란 불을 켜두고 잠을 자야겠다.
은서가 나의 집을 보고,
슬몃 미소 지을 수 있게.
그리고 은서가 오면 따듯한 밥 한 끼, 먹여주고 싶다.
/
밑줄을 그었던 부분
(하지만 미처 다 쓰지 못한 다른 밑줄들이 얼마나 많은지.)
18. 슬픔에는 더 큰 슬픔을 부어넣어야 한다. 그래야 넘쳐흘러 덜어진다. 가득 찬 물잔에 물을 더 부으면 넘쳐흐르듯이, 그러듯이. 이 괴로움은 더 큰 저 괴로움이 치유하고, 열풍은 더 큰 열풍만이 잠재울 수 있고.
19.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뭔가를 기다리지. 받아들이기 위해서 죽음까지도 기다리지. 떠날 땐 돌아오기를, 오늘은 내일을, 넘어져서는 일어서기를, 나는 너를.
36. “누나.”
“응.”
우울할 때 이수는 하염없이 누나, 하고 불렀다. 하고 싶은 모든 말을 다 뭉뚱그려서 거기에 실어놓은 듯. 은서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 소리에 응, 이라는 대답밖에 달리 뭐랄 수 없는 이 대책없음이라니.
39. 은행잎은 예쁘지 않은 적이 없다. 돋아서 질 때까지 내내 눈길을 끌었다. 손톱만하게 순이 돋을 때는 연둣빛의 고움이, 자라 넓어지면 짙푸름의 시림이, 물이 들면 노랑빛의 투명이, 떨어질 때조차 수북이 쌓이는 모양새가.
127. 이 남자도 내게 맹세하듯 말했었지. 너 때문에 살고 싶다고. 나 때문에 살고 싶은 사람이 있다니 완의 그 말은 너무나 커서 내 가슴이 옹이져버렸지.
186.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는데도 완에게 하고 싶은 가장 간절한 말을 하다 보면 그건 세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었다.
191. 불빛은 가라앉아 있는 그리움을 일으켜세우고, 먼지의 더께가 내려앉아 있는 자신의 속을 투명히 들여다보게 하지.
192. 세상은 밤이 오는 순간과 새벽이 오는 순간 빛깔이 똑같구나.
195. 그래, 투명해.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물 속처럼 다 보이지. 그리운 얼굴이 불의 일렁거림 속에 비치고, 외롭게 한 것들, 자꾸만 밀어내기만 하는 것들이 다 비치지. 불 앞에 오래 있으면 마음이 솔직해져. 밑바닥이 다 보여.
233. 이해하고 싶지만 삶은 이해하는 게 아닌지 모른다. 그냥 살아가야 하는 건지도. 그렇기 때문에 아픔이 이렇게 멈추지 않는 건지도.
306. 빨랫줄을 보다가 세는 운전하는 은서의 옆모습을 쳐다봤다. 희망이 지나가버린 얼굴. 은서의 얼굴에서 그런 적요를 봐야할 때마다 세는 아득해졌다. 은서에게서 저 표정을 지우고 예전의 표정을 회복시켜줄 수 있다면 그 자신 그림을 다시 그릴 수도 있을 것 같다.
313. 단 한 번도 세가 자신에게서 멀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은서는 해본 적이 없다. 언제나 세는 거기 있었고, 거기 있을 것이라고 왜 그렇게 확신을 갖고 있었을까.
430. 나는 이제야 알게 됐어요. 내가 얼마나 그이를 믿어왔는지, 얼마나 사랑하는지.
492. “나는 그냥 한꺼번에 이해가 돼버리던데. 다시 볼 수 있을까, 생각하면 죽어도 이해 못 하겠는 것도 이해가 돼버리던데.”
538. 나, 태어나지 말았기를.
573. 불을 끄지 마. 불을 끄면 네 얼굴이 안 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