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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 개정판
양귀자 지음 / 쓰다 / 2013년 4월
평점 :
※ 이 서평에는 책에 대한 전체적인 이야기가 서술되어있지 않습니다.
이 책을 꼭 네 번째 읽는다. 이제 서평을 미룰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 서평을 쓰려는데, 아직도 머리가 어지럽다. 어떤 확신도 없는데 내가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써도 되나- 싶은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써야겠지. 그래야만 지금의 내 생각에 지금보다 더 큰 내가 아, 이때는 이런 생각이었구나- 하고 알 수 있게.
가장 최근, 그러니까 세 번째 이 책을 다시 읽었던 때는 2016년 1월이었다. 결혼 후 이 책을 처음 읽었다. ‘결혼 후’라는 사족이 들어가는 이유는, 그 이후에 내 선택이 조금 달라졌음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나는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김장우쪽이 확실한 사랑이라고 믿었다. 사랑이라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라고,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사랑이냐고- 안진진을 앞에 두고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고 싶었다. 너무도 완벽하게 김장우였으니까.
그런데 2016년의 나는 좀 바뀌었다. 나영규쪽으로 노선을 튼 것이었다. 2011년 즈음에 J의 직업은 불분명했다. 있지만 없고 없지만 있는 것과도 같았다.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이라는 문턱을 넘을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는 내게 날벼락 같은 이야기를 했다. “혹시라도 내가 정규직이 되지 않으면 너와 헤어질 거야.”
“그때 왜 그렇게 말을 했어?”라고 묻는 내게, “앞날이 불투명한데 내가 너를 놓지 않으면 네가 고생할 테니까.”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는 사랑하는 사람이 불행하지 않게 놔주어야 한다는 사람이었다. 나는 로망을 꿈꾸었다면, 그는 현실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나는 그의 논리를 비겁한 것이라고 일침을 가했고, 그는 침묵했다. 그렇게 우리는 그 주제에 대한 대화를 멈출 수 있었다. 그 침묵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을지, 당시에도 나는 몰랐는데, 나는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의 입장이 되어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마 그가 그렇게 내게 직접 말을 한 것은 그렇게 되지 않게 되기를 소망하는 발악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다 알지는 못하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진심으로 필사적이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나영규라니-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만약 그가 정규직이 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정말 지켜주는 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논리로 그가 나를 계속해서 잡아주기를 바랐을까? 이제까지의 직업을 정리하고, 새 삶을 시작하는 그에게 응원‘만’ 해줄 수 있었을까? 당시에는 호기롭게 그에게 말했지만, 사실 자신 없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우리가 헤어지는 이유는 분명하지만 구차하게 이런저런 핑계들을 대어가면서, 그렇게 끝을 맺었을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도 쉽게 말할 성격의 것이 아니라 말은 못 했지만, 결혼 후 다른 것도 아닌 ‘돈’ 때문에 싸워본 적이 없다는 것은 두고두고 우리 부부 스스로에게 자랑거리가 되었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모자람 없이 대체로 넉넉한 우리의 가계는 우리에게는 성실한 자본이 되어주고 있다.
나는 안다. 그깟 돈이라는 것이 영원할 것 같은 사랑을 망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돈 때문에 서로 으르렁거리며 다툴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나의 부모님이 그랬다. 특히나 가만히 조신하게 있으면 좋은 남자랑 결혼시켜줬을 엄마는, 사랑을 선택했다. 하지만 적지만 충분히 돈을 모을 수 있는 상황에서 엄마의 씀씀이와 만족하지 못하는 아빠의 급여가 엄마는 늘 불만이었다. “리라야, 나는 돈이 없으면 이렇게 힘든 건지를 몰랐어.”
세 번째 책을 읽었을 때에는 그래서였다. 나영규를 선택한 게. 251. 좋은 밤을 보내려면 확실한 예약 없이는 곤란해요. 나영규라면 가난의 늪으로 안진진을 데려가지는 않겠지. 라는 생각. 그 때문에 나영규를 선택했었다.
그런데 네 번째 읽었을 때에는 생각이 또 바뀌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영규였다.
193. “(…) 꽃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그 이름을 자꾸 불러줘야 해. 이름도 불러주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냐.”
하지만 김장우를 완전하게 배제시킬 수 없는 까닭은, 그럼에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단연 김장우였으니까.
194. 이것이 사랑인가. 서로가 서로에게 한쪽 어깨를 빌려주고 기대는 것, 이것이 사랑일까…….
나영규에게는 없는 것. 그것이 확실히 김장우에게는 있었다. 나영규와 만나면 현실이 있고, 김장우와 같이 있으면 몽상이 있었다. 사랑이라는 몽상 속에는 현실을 버리고 달아나고 싶은 아련한 유혹이 담겨있다. 끝까지 달려가고 싶은 무엇, 부딪쳐 깨지더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무엇, 그렇게 죽어버려도 좋다고 생각하는 장렬한 무엇.
이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 사랑이란 말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영규였던 것은, 세 번째 이유에 더해져 진진이 누군가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그 까닭이었다. 265. 흑흑 흐느끼면서 그렇게 편안하게 울었다. 어떻게 할지 몰라서 쩔쩔매는 김장우 앞에서는 꼿꼿하기만 했는데, 자꾸 꼿꼿해지고 싶었는데, 정말 기이한 일이었다. 나영규를 시험하는 것일지도 몰랐다고는 하지만, 그에게는 솔직해질 수 있었다. 감추지 않아도 되었고, 자신을 그대로 보여줄 수도 있었다. 더 이상 이모가 엄마라고 말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에 대한 핑계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버지가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가 울 수 있는 대상은 김장우가 아니라 나영규였다. 그뿐이다.
하지만 나영규를 선택하기에는 너무나도 폭력적이지 않니. 사람은 몽상 속에서만 살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현실 속에서만도 살 수가 없는 걸.
몽상을 택하면 우리가 웃고 현실을 택하면 네가 웃는다는 가정이 있다면, 나는 어떤 것을 선택할까.
몽상을 택하면 우리가 울고 현실을 택하면 내가 운다는 가정이 있다면, 나는 어떤 것을 선택할까.
아니, 좀 더 간절하게는 -
활짝 웃음이 옆 사람까지도 웃게 만드는 전염성 강한 나영규와,
여운이 길어 웃음이 끝난 뒤에도 계속 생각나게 만드는 수채화 같은 묘한 웃음의 김장우.
누구에게나 선택은 어렵다.
그렇기에 진진도 3개월의 기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것을 이전까지는 사랑을 찾아내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며 읽었다면, 이번에는 진진, 자신의 삶을 조금 더 들여다보는 시간이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떤 쪽도, 옳고 그름이 없었다. 누구도 그녀의 생을 살지 않으니까. 다만 그녀에게는 좋은 선생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187. 이 쌍둥이 자매들은 똑같이 책에 의지하는 경향이 강한 편이었지만, 선택하는 책은 이토록이나 정반대였던 것이다. 마치 그들의 삶처럼.
잠을 자다 일어날 때면 “왜 그래! 무슨 일이야!”라고 외치는 것이 생에 다채로운 일들이 굉장히 너저분하게 널려있다는 반증이 되는 엄마와, 모든 일에 예외가 없어서 언제라도 예측이 가능한, 몹시 심심한 사람인 이모부와 살고 있는 이모.
이모, 그래. 이모에 대해서 말을 좀 해야겠다.
남루한 일상의 고통에서 홀로 자유로운 이모를 보는 것이 안진진 삶의 큰 위안이었다. 마치 제목만 있고 본문이 없는, 텅텅 빈, 기이한 소설책을 펼치고 망연자실해 하는 소녀의 표정을 지은 이모를 보며 진진은 생각한다. 이모에게도 무슨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주리와 주혁이 유학을 가고 난 뒤에 허전해하는 진진의 이모를 보면서 사촌동생이 군대에 가고 나서 술을 배웠다는 나의 이모가 생각났다. 나의 이모부도 굉장히 심심한 사람이었는데, 나의 이모는 진진의 이모처럼 소녀 같은 사람이어서. 그래서 진진의 이모가, 첫눈을 보고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던 이모가, 행복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진진의 이모가 행복하다는 것은, 나의 이모 행복과도 깊숙이 연관이 되어있을 것만 같았으니까. 그래서 꼭 그러기를 바랐다.
295. 인간에게는 행복만큼 불행도 필수적인 것이다. 에 대해 불행 후 찾아오는 평온함이 어떤 안식이 되는지 너무 잘 아는 나는, 여전히 납득할 수도 없고 인정하기도 싫지만 이모를 보면서 그 순간만큼은 그래, 그렇겠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엄마가 행복한 지옥을 살았다면, 이모는 불행한 천국을 살았던 거겠지. 하지만 결과는 배제하고서라도 여전히 둘 중 어떤 삶이 더 나아 보인다고 쉬이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게 말하는 까닭은 단 한 가지다.
안진진, 그래, 안진진 당신이 행복에 가까운 삶을 살기를.
덧. 김장우와 나영규를 사이에 두고 고민하는 안진진을 보면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로제와 시몽의 사이에서 고민하는 폴이 생각났고, <깊은 슬픔>에서 완과 세의 사이에서 어쩔 수 없었던 은서도 생각났다. (<깊은 슬픔>은 몇 달 전부터 눈에 밟혔는데, 이 책을 미룰 이유가 없어졌네.) 또 영화 <우리 사랑하는 동안>도 생각났는데, 그 중에서 영화의 결말이 제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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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 밑줄
11. 삶에서 발생하는 에피소드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씹을 줄만 알았지 즐기는 법은 전혀 배우지 못한 것이었다. 에피소드란 맹랑한 것이 아니라 명랑한 것임에도.
17. 이십 대란 나이는 무언가에게 사로잡히기 위해서 존재하는 시간대다. 그것이 사랑이든, 일이든 하나씩은 필이 사로잡힐 수 있어야 인생의 부피가 급격히 늘어나는 것이다.
30. “진진이 너, 그런 일은 그냥 잊어버려. 아니면 나처럼 재미있었던 모험담 정도로만 생각하거나. 안 그래도 지루한 세상, 그땐 무지무지 아슬아슬했었는데. 하면서 말야.”
94. “해질 녘에는 절대 낯선 길에서 헤매면 안 돼. 그러다 하늘이 저켠부터 푸른 색으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프거든. 가슴만 아픈 게 아냐.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지 몰라. 안진진, 환한 낮이 가고 어둔 밤이 오는 그 중간 시간에 하늘을 떠도는 쌉싸름한 냄새를 혹시 맡아본 적 있니?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그 시간, 주위는 푸른 어둠에 물들고, 쌉싸름한 집 냄새는 어디선가 풍겨 오고. 그러면 그만 견딜 수 없을 만큼 돌아오고 싶어지거든. 거기가 어디든 달리고 달려서 마구 돌아오고 싶어지거든. 나는 끝내 지고 마는 거야…….”
106. ‘언제나 최고의 셔터 찬스는 한 번뿐. 두 번 다시는 오지 않는다. 좋다고 느껴지면 망설이지 말고 무조건 셔터를 누르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훌륭한 순간 포착. 그곳에 사진의 진가가 존재한다.’
114. 착하고 착한 우리 안진진…….
117. “너 때문에 나는 도시로 돌아와. 너를 생각하면 빨리 돌아오고 싶어.”
119. 착하고 착한 김장우.
120. 나는 왜 갑자기, 어딘가에서 그 남자의 냄새나는 양말을 깨끗이 빨아놓고 잠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까…….
173. 삶은 그렇게 간단히 말해지는 것이 아님을 정녕 주리는 모르고 있는 것일까.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리는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178. 그건 옳지 못한 거야,라는 주리의 관용구. 주리는 바로 그 관용구 밑에 숨어서 ㄷ더 이상은 세상 속으로 나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180. “진진아…….”
“응? 왜요?”
“진진아, 미안해. 너보다 우리 자식들을 더 사랑해서… 너한테 정말 미안해…….”
188.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229. 단조로운 삶은 역시 단조로운 행복만을 약속한다. 지난 늦여름 내가 만난 주리가 바로 이 진리의 표본이었다.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내게 가르쳐준 주리였다. 인간을 보고 배운다는 것은 언제라도 흥미가 있는 일이었다. 인간만큼 다양한 변주를 허락하는 주제가 또 어디 있으랴.
210. 사랑이란,
발견할 수 있는 모든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지 않고 무심히 지나칠 수 없게 만드는 무엇이다. 자신의 얼굴에 대해 생애 처음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나. 자신의 눈과 코와 입을 그윽하게 들여다보는 나. 한없이 들여다보는 나. 그리고 결론을 내린다. 이렇게 생긴 사람을 사랑해준 그가 고맙다고. 사랑하지 않고 스쳐갈 수도 있었는데,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걸음을 멈춰준 그 사람이 정녕 고맙다고.
261. 야윈 살가죽을 뚫고 돌출한 광대뼈, 늘어진 주름살 사이사이로 번지고 있는 거뭇거뭇한 반점, 수세미처럼 헝클어진 반백의 머리칼
278. 착하고 착한 우리 안진진. 정말 착하고 착한 내 안진진.
293. 어머니는 더욱 바빠졌고 나날이 생기를 더해갔다.
아, 어머니의 불행하고도 행복한 삶…….
296. 마지막으로 한 마디.
일 년쯤 전, 내가 한 말을 수정한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