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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반격 - 2017년 제5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0월
평점 :
내가 읽어본 손원평 작가님의 책은 <아몬드>가 유일했다. 꽤 괜찮게 읽었기에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고 싶었는데, 선뜻 손이 가질 않았다. 그 이유라는 것이 조금 시시한데, 단지 제목 때문이었다. <서른의 반격>이라니. 제목에 나이가 들어갈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지,라면서. 같은 맥락으로는 이십, 삼십, 마흔이라는 나이를 언급한 책들에 대해 영 관심이 가질 않는다. 까닭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읽을 운명(거창하게 운명씩이나)이었는지 부여에서 개인이 운영하는 서점에 갔을 때에도 이 책을 손에 들고 고민했고, 이후에 회사일로 외근을 나갔을 때 시간이 남아 교육청에 있는 도서관에 들러 이 책을 잠시 읽기도 했었다. 당시에 읽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흥미는 있었지만 딱히 사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그 이후에 중고서점에 들어갔다 나온 내 손에는 이 책이 들려있었다. 책의 뒤표지에 쓰여있는 문장 때문이었다.
“가서 항의해요. 가만있으면 그게 당연한 줄 알아요. 가만있으면 그렇게 해도 되는 것처럼 대한다구요.”
조금 다른 게 있다면 나는 타인에게 이 말을 듣는 사람이기보다는 내가 타인에게 이 말을 하는 사람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202. “(…) 난 그냥 없는 사람이라구요…….”
없는 사람.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 없는 사람이다. 늘 소리치고 있는데도 없는 사람이다. 수면 위에 올라있지 않으면 없는 사람이다. 반지하방에 살면 없는 사람이고, 문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없는 사람이고, 인생과의 게임에서 지면 없는 사람이다.
여담으로, 작가의 말에서 초고를 쓸 때의 제목은 <보통사람>이었는데 <1988년생>으로 상을 받았고 책의 출간은 <서른의 반격>이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책을 읽으면서 내내 ‘없는 사람’이라는 단어가 뇌에 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없는 사람, 없는 사람, 없는 사람……. 이는 내가 자꾸만 책의 제목에 딴죽을 걸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김추봉이 될 운명이었던 ‘나’는 엄마의 활약으로 김지혜라는 이름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그녀는 1988년생으로, 꼰대들과의 친화력은 물론 텃새를 부리면서 자신의 입지와 공로를 세우는 기술이 교묘한 유 팀장과 트림, 방귀, 머리 긁기, 손톱에 낀 때를 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청소 아주머니에게 반말을 하며, 청소 중에도 소변을 보고, 누구에게나 성희롱을 하는 김 부장이 존재하는 대기업 산하의 디아망 아카데미의 계약직 인턴으로 일하고 있다.
어느 날 스타 강사의 박 교수의 심부름으로 외근을 나간 자리에서 박 교수가 알바생의 원고를 그대로 출판사에 넘겨놓고 알바비를 주지 않았다는 말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박 교수에게 당당하게 말을 하는 청년을 만나게 되고, 그녀는 그런 그를 조금은 신기하게 생각하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기게 된다. 그러다가 회사에서는 개학을 맞이하여 뭔가를 배우려는 수강생들로 바빠지는 때에 인턴을 한 명 더 뽑기로 결정한다. 인턴이 뽑혔고 지혜에게 악수를 청한 또 다른 인턴의 손목 위에 뭐가 있다. 별 모양의 문신? 어? 당신-
인턴에게는 아카데미의 강좌를 공짜로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데, (물론 엄밀히 말하면 공짜는 아니지만) 지혜는 규옥의 권유로 우쿨렐레 강좌를 함께 듣게 된다. 우쿨렐레 수업을 두 번째 들었을 때 어른들끼리 뒤풀이는 어떠냐는 말에 자리를 가지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뜻하지 않은 말들이 오가게 된다.
68. “힘 있는 소수는 언제나 여유만만하고, 힘없는 다수는 자신들이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요.”
68. “그럼 댁이 말하는 전복이란 건 무슨 뜻인데? 가진 놈들을 상대로 싸움이라도 벌여? 맘 맞는 사람이라도 모아서 시위라도 나서? 아니, 난 내가 누굴 상대로 싸워야 되는지도 모르겠어. 설령 뭔갈 한다고 쳐요. 뭐가 바뀝니까. 당신이 말하는 힘 있는 소수가 가진 게 뭔 줄 알아? 결국 돈이야 돈. 우리나라만의 일도 아니고 전 세계가 자본에 놀아나고 있는데 뭘. 그건 신도 못 바꿔.”
“그렇게 생각하는 한 세상은 점점 나빠질걸요? 억울함에 대해 뒷얘기만 하지 말고 뭐라도 해야죠. 내가 말하는 전복은 그런 겁니다. 내가 세상 전체는 못 바꾸더라도, 작은 부당함 하나에 일침을 놓을 수는 있다고 믿는 것. 그런 가치의 전복이요.”
그들이 사회의 부당함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에 이야기는 두 방향으로 나뉘었다. 내가 어떻게 바꾸겠어, 와 뭐라도 해야 한다,의 방향. 나는 후자의 입장을 선호하지만 생활과 환경, 상황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둘의 극명한 입장 차이 모두 이해가 가는 부분이어서 시시비비를 가릴 수 없다.
“골탕 먹여볼까요.”
“한번 실험해보는 거예요. 부끄러움을 모를 것 같은 사람이 과연 부끄러움을 알게 될지.”
그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확장시켜나가다가, 지혜와 규옥이 함께 일하는 김 부장에서 멈춘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인 걸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뻔뻔하게 모든 생리현상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김 부장. 그를 한 번 골탕 먹여보는 거다.
방귀 좀 뀌지 마.
트림할 때 입 좀 다물어.
머리는 화장실 가서 긁어.
이 가엾은 돼지님아!
그 쪽지를 받은 김 부장의 반응은 책 속에서 직접 확인하는 게 좋겠다.
나의 이야기를 조금 해보자면,
바로 이전 회사‘들’에서 차장이라는 직함을 단 것들은 사무실에서 그렇게 손톱을 깎아댔다. 직장에서 손톱을 깎다니? 나는 그런 것들을 처음 경험했는데 문화적 충격과 함께 굉장히 미개하다는 생각 말고는 다른 감정이 치고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 그 부분에 대해 다른 직원들과 말을 한 결과, 차장의 그런 행동이 잘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가 오갔다. 생각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정말 놀란 부분이었다. 결국 손톱 깎는 소리에 대해 나만 불편하고 불쾌하게 느끼는 소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당사자에게 대놓고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그럴 때면 혼자서 속으로 얼마나 욕을 해댔는지 모르겠다. (거의 열흘에 한 번씩은 그랬으니까) 그래놓고 엉뚱하게 집에 와서는 J에게 당신은 절대 그러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해댔다.
그 부분에 대해 책에서 말한다.
“사실 그런 걸로 누군가를 혐오스러운 인간이라고 판단해버리는 건 좀 그래요. 불쾌하긴 하지만 에티켓 문제일 뿐이잖아요.”
그 말이 맞다 싶으면서도, 과연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동체라는 크고 작은 생활에서 지켜야 하는 예의라는 게 있기 마련인데, 그걸 지켜주면 다행이고 아니어도 상관없는, 그런 예의 정도로만 규정지어도 된다는 것일까?
누가, 감히, 나에게.
그래봤자 너희들이, 어떻게.
근래에 나를 아는 직장 상사들은 내가 사회 혹은 회사에 바라는 게 많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사회에 바라는 바는 크게 많지 않다. 내가 사회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언감생심, 꿈도 꾼 적이 없다. 그런데 그들이 나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나는 한 개인으로서 내가 아닌 개인에게 바라는 바는 많은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바로 ‘인격 존중’이었다. 나의 인격이 침해되었다는 생각이 확실하게 들 때엔 나는 망설이지 않고 반기를 들었다. 그건 네가 틀렸어. 올바르지 못한 행동이야.라고 말을 했다. 그럴 때마다 그 사회에서 나는 점점 더 부적응자가 되어갔다.
꼰대들이 하는 육하원칙이 SNS에 떠돌고 있는 걸 본 적이 있다. 내가 누군지 알아, 뭘 안다고, 어딜 감히, 왕년에, 어떻게 나한테, 내가 그걸 왜 - 당시에는 그것을 보면서 마냥 웃기만 했는데, 지금은 씁쓸하게 웃는다.
소수의 동료들은 내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을 하면서도 정작 그들은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그들은 그들이 하고 싶은 말들을 이미 집단에서 부적응자로 낙인찍힌 내가 대신해주기를 바랐지만, 나는 내가 침해당한 것 외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문제는 그들이 알아서 처리를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물다섯에 함께 일했던 실장님은 40대의 남성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설거지나 청소는 남녀 구분 없이 같이 혹은 돌아가며 해야 하는 일이고, 자리는 각자의 자리만 정돈하면 된다고 일러주셨다. 이 규칙은 회사마다 정하기 나름이지만, 공용의 일에서부터 남녀 구분을 지어서 일을 해야 하는 회사는 다시 한 번 고민해보라고도 하셨다. 작은 것부터 남녀를 구분하기 시작하면 맡은 일에서도 남녀의 커트라인이 생길 수 있다고. 특히나 우리의 일은 남녀에 대한 시각이 편견이 아주 심하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반발을 해야 한다고도 알려주셨다.
그 덕에 나는 여성이라고 설거지나 청소를 해야 하거나 팀의 막내이기 때문에 숟가락을 놔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존중의 표시라고 배웠다. 그리고 다른 대부분의 회사들은 처음에는 그것이 아니었을지언정 의견을 피력하면 수용했다. 계급과 지위가 나누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 안에서 인격은 존중되었다.
그런데,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당연하고 당당하게 요구하던 것들이, 부딪치고 깨어지고 산산조각이 났다.
83. “(…) 세상은 원래 그래요. 누군가가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죠.”
“행동한다고 바뀌나요?”
“글쎄요. 확실한 건, 무언가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면 그건 누구도 행동하지 않았다는 거죠.”
이 말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했다. 맞는다면 사회 부적응자로서의 대접일 테고, 틀리다면 변한 것은 없다는 것일 테다. 내가 최근에 다닌 회사에서는 항거를 했을 당시에 그들은 모두 나에게 혀를 내두르며 화를 냈다. 나는 정정당당하게 내 권리를 주장한 것뿐인데, 내가 왜 그들의 화를 들어야 하는지가 의문이었다. 그 화는 바로 위와 같았다. 누가, 감히, 나에게. 그래봤자 너희들이, 어떻게. 내가 뭔가 요구를 하면, 너보다 부하직원이니 지위로 눌러라.라는 답변을 받았을 때부터 알아차렸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공생하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누구의 줄을 잘 서야 한다는 말을 듣는 것도 우스웠다.
하지만 내가 그것들에 반발을 하자 우습게도, 나를 대할 때 어려움을 느낀다는 점이었다. 그게 그들이 그것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앞서 말했던 것처럼 나를 사회 부적응자로서 대접을 하기로 결심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 긍정적인 변화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 같은 상황을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난 많이 당황했고 흔들렸으며 급기야 나를 자책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것에 대한 단단한 확신이 생기는 계기가 되었다. 나 참 잘 했다고-
132. 지환과 규옥이 던진 정반대의 명제들은 계속 나를 괴롭혔다. 지환은 현실을 영리하게 따르라고 강조했고 규옥은 현실에 균열을 일으킬 용기를 가져보자고 했다. 정반대에 놓인 두 개념에 공통점이 있다면, 어느 쪽이든 마주하긴 괴롭다는 것이었다.
맞다. 마주하기 괴롭다는 것. 나는 그중에서 나를 지키는 쪽을 선택했다. 결과가 어떻든.
101. “(…) 너 사람이 언제 어떻게 보수화되는지 알아? 명백한 자기 재신이 생길 때야. 절대 빼앗기거나 침해될 수 없는 것, 집이나 돈이나 그럴듯한 밥그릇이 생길 때.”
하지만 종종 생각한다. 내가 잘나서, 혹은 내 성격이 대담해서 말을 할 수 있었던 게 아니었다. 내가 나를 지키는 쪽을 선택할 수 있는 까닭.
내가 인격을 존중받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어도, 일에 대한 자신감이 없으면 할 수 없던 선택이었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돈 앞에 무너지지 않을 장사 없다. 하지만 나는 일을 결코 잘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내가 맡은 일에 대한 최선을 했었기에 가능했고, 이곳이 아니어도 충분히 이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가능했으며, 경제적으로 풍족한 것도 아니지만 내가 몇 달 벌지 않아도 생활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모든 게 맞아떨어졌기에 나의 인격을 먼저 생각할 수 있을 수 있었다. 내가 일을 함으로써 지켜야 하는 것이 있었다면, 내가 내 목소리를 낼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사실 자신 없다.
책에서 다빈은 절대 빼앗기거나 침해될 수 없는 것,이 ‘아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세상의 모든 가장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닐까. 가족-
나는, 내가 노동력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는 시점부터 나의 아빠가, 그리고 세상의 모든 가장이 가엾게 느껴졌다. 결혼하니, 나의 배우자 J씨 역시. 그들은 현실에 균열을 일으킬 용기를 가지는 것보다 현실을 따르는 혹은 순종하는 쪽을 택한다. 그런 선택을 했다고 해서 그것을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그들의 노고를 알아주고 다독거려주며 조용히 응원해줄 뿐이다.
각자가 삶의 애환이 어디쯤 가있는지 안다면, 책 속의 고무인의 선택 역시, 우리가 비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고무인이 아니니까. 그래서 더 안타까웠던 부분이다.
187. 어쨌든 그 일은 내게 꽤 큰 교훈을 남겼다. 속내를 감추지 않고 겉으로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
싫은 소리 한 마디 못할 것 같은 지혜가, 학창시절의 공윤을 우연하게 만나면서 바뀌어간다. 폭발적이지는 않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힘을 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지혜는 또 다른 힘을 얻었다. 나는 그런 지혜가 내 친구인 듯, 힘차게 응원했다. 책 속의 누군가를 그렇게 응원해본 건 또 오랜만이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내가 그동안 나를 지키기 위해 했던 노력들이 헛되이 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결과지를 받은 느낌이었다. 그 결과지에서 나는 꽤 많은 위로를 받았다. 실은 그동안 나, 너무 예민하게 군 거 아닐까, 나만 이러는 걸까, 나만 못 견뎌 하는 걸까 - 등등에 대해 수없이 회한이 서린 자책을 해댔다. 그러면서 마지막엔 합리화를 할 요량으로 당시엔 그게 최선이었어,라고 읊조리곤 했다. 그게 작년 7월이었는데, 올해 1월에도 한 번 더 발생하면서 나는 정말 사회 부적응자인가,하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그동안의 사회생활이 모조리 엉망인 것이 아니었고, 지금도 사회 생활을 하며 친분을 유지한 이들에게서 연락이 온다는 사실이 그동안의 나를 증명해주고 있었다. 누구나 견디지 못하는 것들이 하나씩 있기 마련인데, 적어도 내게는 그런 것이라고. 나는 자존감이 그렇게 높지 않은 편이기 때문에, 열등감이나 피해 의식을 배제시키려고 스스로 검열을 즐기는 편인데, 그 사건들은 나를 지켜야 하는 의무 중 하나였다고.
202. “가서 항의해요. 가만있으면 그게 당연한 줄 알아요. 가만있으면 그렇게 해도 되는 것처럼 대한다구요.”
203. “설령 지금 당장 뭔가가 바뀌지 않는다고 해도요.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걸 자꾸자꾸 보여줘야 해요.”
우리는 스스로가 반짝반짝 빛나는 존재라는 사실을 자주 잊는다. 그것을 매 순간 상기하며 살아가는 것은 힘들지언정 누구가 나에게 무례하게 군다면 그것에 대한 반기를 들어 나 자신의 뿌리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게 말처럼 쉬운 일도 아니고 상대방에 따라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결코 그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다. 인간으로서의 존중을 받기 위해서 그런 노력까지 해야 한다는 사실이 아주 우습기는 하지만, 맹수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나를 지킬 것은 나 자신밖에 없으니까.라는 너무나도 원초적인 말로 대신해본다.
ps. 정진 씨,는 지혜가 답답한 도시생활에서 하나의 숨통을 마련하기 위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었다. 나도 그랬다. 바로 전의 회사에서.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지만, 혼자 점심을 먹고 싶거나 점심을 먹는 것 대신에 산책을 하고 싶거나 도서관을 가고 싶을 때에는 친구와 약속이 있다고 둘러댔다. 그래야만 길고 긴 회사에서 나를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니까. 오롯하게 혼자만의 내 시간, 나는 그게 그렇게 소중했다. 그래서 정진 씨를 만들어낸 것에 대해 깊이 공감했다. 다만 그녀가 정진 씨를 너무 자주 만나지는 않기를 바랐다. 나의 경우에는 회사에서 지치는 일이 있을 때 자주 있지도 않은 친구를 찾았으니까. (여담으로 내 친구 김지혜는 실제로 정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편이 있어서 너무 놀랐다. 나중에 지혜한테 말해줘야지.)
나는 나와 당신들에게 묻고 싶었다. 어떤 어른이 되고 싶으냐고. 지금의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고 새길 것이냐고. 반격이 먹히지 않아도 마음속에 심지 하나쯤은 가지고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런 질문과 상념이 모여 이 작품이 태어난 것 같다. - 작가의 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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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을 그었던 부분들
12. 어쨌든 전국의 지혜들은 역시 전국에 만만찮게 포진해 있는 민지, 은지, 은정, 혜진이 들과, 양념처럼 한 반에 몇 명쯤은 포진한 보람, 아름, 슬기 들과 어울려 무럭무럭 커갔다.
103. “너는 시간 많아서 좋겠다. 너만 생각할 시간.”
좋겠다, 같은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 친구 사이에 공통화제의 간극이 생기고 그게 점점 멀어지면 평행선을 달린다. 언젠가 다빈이와도 그렇게 돌 수 있겠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가볍지는 않았다. 그저 그 시간이 되도록 천천히 와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129. 부당한 권위를 이용해 세상을 뻣뻣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대상이었으며, 그들을 곤란하게 하고 면박을 주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었다.
134. 생각 없이 걷다가 예기치 않은 타박을 들었다. 왜 거꾸로 돌고 그래, 부딪히잖아. 운동복을 빼입은 할머니가 눈을 흘긴 채 파워 워킹을 하며 사라진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만 반대 방향으로 걷고 있다. 이 작은 공원에도 돌아야 하는 방향이 있다. 그 방향을 어긋나면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생각 없는 사람이 되는 거다.
140. “(…) 웃긴 게, 잘하는 거랑 남들 눈에 잘 드는 거랑은 또 별개거든. 그게 바로 센스라는 건데 나는 센스가 없는 인간이었던 거지. (…)”
공윤의 커피를 사오게 된 지혜에게 유 팀장이,
173. “(…) 언제나 납득할 수 있는 일만 하는 직장이나 몇이나 된다고 생각해? 다들 그게 말이 안 되는 걸 몰라서 하나? 그래야 뭔가가 굴러가니까 하는 거거든.”
179. “존재를 어떻게 확인받아요.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는데 뭘 확인받느냐고요.”
“아마 그 고민은 죽을 때까지 하게 될 거예요. 백 살이 될 때까지 같은 생각할걸요. 외롭다고,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내 인생은 어떤 의미가 있었느냐고.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괴롭고 끔찍하죠. 그런데 더 무서운 거는요, 그런 고민을 하지 않고 사는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질문을 외면하죠. 마주하면 괴로운 데다 답도 없고, 의심하고 탐구하는 것만 반복이니까. 산다는 건 결국 존재를 의심하는 끝없는 과정일 뿐이에요. 스스로의 존재를 의심하는 게 얼마나 드물고 고통스러운지 알아가는…….”
221. 더 이상 함께할 이유가 없어지고 나서야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를 조금쯤 이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