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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노을 ㅣ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82
이희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2월
평점 :
서른네 살의 지혜 씨와 열여덟 살 노을의 관계는 엄마와 아들이다. 그들은, 특히 엄마인 지혜 씨는 사람들이 멋대로 규정한 ‘보편적인 가족의 형태’에서 벗어났다는 것에 대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세상의 차별에 목소리를 드높인다. 50만 7000원짜리의 패딩을 사러 간 매장에서도 누나가 동생 옷도 사 주고 좋겠다는 말에 꿋꿋하게 아들이라고 밝힌다. (실제로 매장 직원이 책에서처럼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나... 저건 선을 넘었는데... 하는 생각은 들었다.)
59. 나는 가급적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려 했다. 크게 모나지 않도록 딱히 문제 될 리 없도록 하루하루 성실하게만 지내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사회가 바뀌어도 사람들은 여전히 차별적인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여전히 많은 이가 미혼모와 한 부모 가정에 뭐가 문제가 있지 않을까 싶은 곱지 않은 눈초리를 보낸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다름과 틀림을 똑같이 여기곤 한다.
내가 보편적인 삶이라는 것은 뭘까. 하고 종종 생각해 보게 된 건 결혼 이후였다. 결혼을 하고 아이의 유무를 말하는 사람에게, 나의 의견을 말하면 ‘그것은 틀렸다’라고 말하며 자주 비난하고 힐난하며 충고와 조언을 남발하는 사람들을 보며 화가 난 적도 많았고 내가 왜 그런 소리를 듣고 있어야 하나 싶어 목소리를 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나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변명하고 해명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가늘어진 눈동자 속에서, 침이 뒤섞인 혓바닥 속에서 무참해졌고, 깨지고, 밟히면서 완전히 질려버렸다. 나는 금세 헐거워졌고 새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기대치를 점점 낮추게 되며 더 이상 나를 소개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나의 의견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인정해 주고 존중해 주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거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보편적인 삶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무섭다. 꼭 자신은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조물주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그 친구. 많이 힘들었겠지.
63. 승리로 맛본 과자는 세상 그 어떤 음식보다 달고 맛있었다. 엄마는 한 번도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어린 아들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주었고, 그것이 나에게도 최고가 될 수 있게끔 만들었다. 덕분에 나에게 유년 시절의 결핍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엄마는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과연 엄마에게 어떤 최상의 것을 줄 수 있을까?
정말 이런 아들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최지혜 씨는 아들을 참 잘 키웠구나. 아니, 서로가 서로를 참 잘 키웠구나. 서로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을 고민하고 내어주려는 것, 사랑.
75. “아들, 우리 잘하고 있는 거야. 맞지?”
164. “우리 잘하고 있는 거지, 아들?”
열일곱의 지혜 씨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했겠지. 열일곱의 지혜 씨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그 외로운 질문들이 주는 대답의 끝에 지금의 노을이 있을 테고, 서로 그 말을 주고받으며 살아갈 힘을 얻고 있는 그들.
며칠 전 ‘광주 영아 일시 보호소’와 ‘전남 나주 이화영아원’에 대한 다큐를 차례로 보게 되었다.
거두절미하고, 영아원에 들어가는 새로운 아기들의 숫자가 점점 줄었으면 한다.
누구에게 책임을 돌리고자 하는 말은 아니지만, 그게 누가 됐든 아이를 잉태하고 아이를 세상에 내어놓는 일에 책임에 비중을 더했으면 한다.
125. “괜찮다고 해 줘. 누구보다 당사자가 제일 힘들 테니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사랑이 아니라면 세상에 나쁜 사랑은 없어.”
“아픈 사랑은 있겠지만.”
이 부분을 읽으며 한 친구가 생각났다. 유부녀를 사랑했던 대학 친구,라고 한 문장으로 점철해둔 친구이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 친구는 유부녀를 좋아한 게 아니라, 이혼을 앞둔 어린 딸을 둔 여성을 사랑한 것이었다. 스무 살, 스물한 살의 어린 나이에 그 친구의 사랑은 너무나도 무모했고, 위험했으며, 어리석다고까지 생각했기에 나는 그 사랑을 지지해 주지 못했다. 교수님도 그 친구의 재능을 높이 사서 본인의 사업장으로 데려가고 싶어 할 정도로 우수했던 친구였기에 “네가 왜?”라는 얘기가 오갔다. 하지만 이미 그 친구는 그 여성을 사랑했기에, 그 여성의 딸마저 자신의 딸로 너무나도 사랑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연락이 끊겼고, 1년 후 (아니, 어쩌면 더 시간이 지난 후에) 연락이 닿았을 때엔 가족과 절연하고 그 여성을 선택했으며 그 여성의 어린 딸 밑으로 또 다른 딸을 두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런 친구에게 나는 말했다. ‘그래, 잘했어. 네가 원하는 삶이 그거라면. 어쨌든 잘 살아야지.’ 하지만 그 친구는 알았을 거다. 내가 정말 진심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이해하는 척을 했다는 것을. 얼마간의 소통 이후에 소식이 끊겼다. 누가 먼저 끊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보편적이지 않은 삶을 선택한 그 친구를 부담스러워했던 나였는지, 그런 나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그 친구였는지는.
내가 보편적인 가족의 형태를 선택하지 않은 삶을 살기로 결심하면서는 세상에는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야 그 친구에게 진솔한 진심을 내보일 수도 있을 텐데, 이미 늦었다.
그 친구는 잘 살고 있겠지, 현명한 녀석이니까. 어디선가 우연히 만나게 된다면, 너 이 새끼, 엄~청 행복해 보이네? 말하며 한바탕 웃고 싶다.
131. “그래, 친구잖아.”
가장 친한 친구이자 속마음을 다 터놓을 수 있는 대나무숲이었던 성하, 아마 노을에게는 큰 힘이 될 거다.
세상에 그런 친구 하나만 있어도,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을 테니까.
중간에 동우의 이야기는 다름을 이야기하기 위해 등장한 것으로 약간 머쓱할 정도로 개연성을 잃어버린 것 같지만,
그들도 ‘친구’라는 프레임 안에서 자유롭게 안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성빈이 나왔을 때 노을이 성빈이를 사랑하는 줄 알았거든. 그게 아니더라도 언젠가 그 주제로 튀어나올 줄도 알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