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있어 괜찮은 하루 - 말보다 확실한 그림 한 점의 위로
조안나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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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그림에 대한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다. 그림 에세이라고 하면, 어려운 용어들의 향연으로 그림과 더 멀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어서 외면했었다. 나는 그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 물론 지금도 그렇다. 그 책으로 인해 그동안 어렵게만 생각했던 그림에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이주은 님의 <당신도, 그림처럼>) 그 후에는 조금씩 그림 에세이를 일부러 찾아 읽기도 했다. 그림 에세이가 좋은 이유는, 그림에 대한 설명 보다 그림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나 그림과 관련된 작가의 단편적인 생활 혹은 삶을 엿볼 수 있는 까닭이다.

 

 

 

나는 현재 내 생에 두 번째의 광역시에 살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생각보다 그림을 접할 기회가 많지가 않다. 그나마 좀 큰 미술관은 (거의) 반기마다 전시가 바뀌는데, 1년 6개월 동안 그림 앞에 멈춰 그림을 감상한 적은 많지 않다. 그나마 작은 전시관에서는 그림 앞에 멈추는 일이 잦았는데, (그림을 그린) 작가들이 그곳에서 삼삼오오 모여 시장통을 방불케하여 급히 빠져나온 적이 있다. 그래도 나는 그림을 자주 보러 다니고 싶다. 내 발을 멈칫하게 하는 그림들을 더 많이 만나고 싶고, 마음에 울림을 주는 그림들을 만나고 싶기도 하다.

 

 

 

<그림이 있어 괜찮은 하루>는 말보다 확실한 그림 한 점의 위로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다. 그림의 위로,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림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위로를 받는 것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림에서 위로를 받는다는 것은 어떤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며 책을 펼쳤다.

 

 

처음 만나는 작가의 생활을 단편적으로 엿볼 수 있어 즐거웠다. 타국에서의 생활, 그곳에서의 조용하고 고요한 생활, 더불어 외로운 생활, 한국에 대한 향수병,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 태어날 아기에 대한 기대감, 고양이 두루에 대한 애정, 대인관계, 칙칙했던 옷의 색채가 밝게 변하는 것이나, 불만스러웠던 외모까지. 그림 이야기와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읽기에 불편함이나 어려움이 없었다.

 

 

 

 

137. 삶의 위기는 언제든 어디서든 찾아오기 마련이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질수록 이곳에 없는 것만 보였다.

책은 내 마음의 날씨처럼 읽힌다고 했던가. 눈 오는 날에도 하늘이 예뻐서 견딜 수 있었다던 미국에서의 생활. 해 질 녘에 산책을 하면 노을이 마치 폴 시냐크 <분홍 구름> 속 풍경처럼 황홀하여 발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으며 오랫동안 쳐다보게 된다던 작가의 글은, 이곳에서의 생활이 너무 힘들 때 노을 속에 나를 파묻어버리던 그날들을 상기시켰다. 그때의 나와 조우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와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그리곤 어디선가 많이 봤을 법한 폴 시냐크의 <분홍 구름>에 나도 마음을 빼앗겨 열심히도 쳐다보았다.

 

 

 

이외에 내가 너무너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르누아르의 그림들이나, 클림트의 <아터제 호수의 섬>, 요하네스 베르베르의 <우유를 따르는 여인>, 윌리엄 터너의 <노엄 성의 일출>, 뭉크의 <다리 위의 소녀들>이나 <병든 아이>, 볼 때마다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카미유 피사로의 그림들, 발레 그림하면 생각나는 에드가 드가, 폴 세잔의 <구부러진 숲속 길>, 에곤 실레의 자화상 등- 책에는 책장을 넘어가려는 손을 멈칫거리게 해주는 그림들이 많이 있었다. 그밖에도 처음 보는 그림들은 언제나 호기심을 자극했고, 작가의 생활, 삶과 결부시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책을 읽는 도중에, 그림에 대한 위로를 받게 된 날이 있어 살포시 써보는 글.

 

 

가장 최근에 배우자가 수술을 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하루 전에 입원을 했고 다음 날에 바로 수술을 하는 걸 알고 있는 상태였는데, 9시 30분에 회진을 돌던 원장님이 10시 30분에 수술을 하자고 하여 수술 준비가 급작스럽게 이루어졌다. 별거 아닌 수술이라고는 얘기하지만, 적어도 우리에게는 별거 아닌 일은 아니었다. 배우자도 입원과 수술이 처음이었고, 나는 누군가의 보호자로서 대기하는 일이 처음이었다. 배우자는 수술실로 들어갔고 그때부터 나는 아득해졌다. 울어버릴 것 같았지만 울 수는 없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아빠였는데, 일하는 아빠와 내내 전화를 할 수는 없었기에 나의 외할머니께 전화했다. 할머니는 나를 위로해주셨다. 할머니답게 그 수술 별거 아닌데 왜 그러냐 라는 말은 하지 않고, 그래도 초기에 알아서 다행이다, 다 잘 될 거라고 생각해, 등등의 내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말씀을 많이 해주셨지만 전화를 내내 붙잡고 있을 수는 없었다.

 

 

마음이 소란스럽고 어지러워 복도를 왔다 갔다 반복하다가 이 그림을 보게 되었다. 그때부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그림을 내내 바라보는 것뿐이라는 듯이 그림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림을 보며 어떤 위로를 받았는지는 모르겠다. 어디선가 이 그림을 만나면 나는 생각할 거다. "이 그림은 내가 남편 수술할 때 내내 보았던 그림이야." 그것 말고는 다른 감상이 없다. 이 그림을 그린 이가 누군지, 그림의 제목이나 설명, 이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내가 이 그림을 보면서 불안감을 좀 덜 수 있었다는 것. 그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이제 나는 이 그림에 대해 좀 검색해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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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하스 의자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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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니 가오리의 책이 읽고 싶어질 때가 있다. 담담하면서 담백하고, 평온하면서 건조한 그 문체가, 간절해질 때가 있다는 것은 나도 흠칫 놀랄 만큼의 변화임에 틀림이 없다. 나는 에쿠니 가오리의 책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첫 작품으로 <반짝반짝 빛나는>을 읽고 거부반응을 느꼈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 까닭이다. 여전히 나는 그 책은 싫다. 그 책의 서평을 슬쩍 찾아보니 문체는 좋다고 생각했었네. 하지만 어쨌든 그 책의 내용은 이해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남편이 사랑하는 동성의 남자와 결국 함께, 셋이 살게 되는 이야기라니... 내가 닫힌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하여튼 그렇다.

각설하고, 요즘의 나는 에쿠니 가오리의 책을 찾아 손을 뻗을 때가 많다. 그렇게 읽은 책이 <웨하스 의자>와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였다. 개인적으로는 후자 쪽이 더 좋았는데, 나는 왜 이 책의 서평을 먼저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71. 어렸을 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은 웨하스였다.

바삭하고 두툼한 것이 아니라, 하얗고 얇고, 손바닥에 얹어만 놓아도 눅눅해질 듯 허망한 것이다. 잘못 입에 넣으면 입천장에 들러붙어 버리는.

사이에 크림이 살짝 묻어 있지만, 그것은 크림이기보다 설탕을 녹여 만든 풀처럼 엷다. 얇고, 애매한 맛이 났다. 나는 그 하얀 웨하스의 반듯한 모양이 마음에 들었다. 약하고 무르지만 반듯한 네모. 그 길쭉한 네모로 나는 의자를 만들었다. 조그맣고 예쁜, 그러나 아무도 앉을 수 없는 의자를. 웨하스 의자는 내게 행복을 상징했다. 눈앞에 있지만, 그리고 의자는 의자인데, 절대 앉을 수 없다.

사랑은 곧 절망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는 애인이 있는데, 그는 가정이 있는 유부남이다.

그들의 사랑은, 한낱 ‘웨하스 의자’에 불과하다.

사랑은 사랑인데 깊어질수록 절망으로 변모해버리는, 결국 사랑은 곧 절망과 동일어.

깊어질수록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 더 와닿아서 그렇겠지.

삶의 형태는 다양하다고 생각하지만, 기혼인 내게는 용납할 수 없는 사랑이므로 그들의 사랑을 나는 싸늘하게 쳐다보았다.

어쩔 도리가 없잖아. 애인이 이혼을 하고 ‘나’에게 오지 않는 이상에야.

그런데 애인이 이혼을 할까? 직전에 ‘나’에게서 몸을 떼어내는 애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얌전해 보이는 개. 아니면 맥빠진 모습의. 그때, 나와 그 개는 동족이었다.라고 자신을 내보이는 ‘나’에게,

자기 자신을, 홍찻잔에 곁들여진 각설탕이라고 아무렇게 내뱉는 듯한 ‘나’에게,

애인에게 전화가 오지 않는 날은 세상에서 버려진 듯한 기분이 든다는 ‘나’에게,

애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기다리고 있지 않다고 착각하기 위해서 혼자 외출한다는 ‘나’에게,

매일 조금씩 망가지고 있는 ‘나’에게, 연민이 인다.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다른 것을 깨끗하게 잊을 수 있는 시간.

그림을 그리는 시간, 나비를 잡는 시간, 눈 내리는 날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간.

자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각자 본인이 좋아하는 시간들을.

‘나’도, 그리고 나도.

마음이 차분해지고 얌전해지는 날에 읽었던 <웨하스 의자>

2019.07.07.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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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를 알면 어휘가 보인다 : 사자성어 200 - 한자 쓰기 연습 노트 한자를 알면 어휘가 보인다
큰그림 편집부 지음 / 도서출판 큰그림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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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는 내게 그림 같은 글자였다. 그림을 못 그리는 내게, 따라만 쓰면 그림처럼 보일 수 있는 예쁜 글자이기도 했다. 한자의 매력에 빠져들어 1일 1자를 외겠다며 출근길 지하철에서 한자를 외운 적이 있다. 그 다짐은 한 달도 채 못갔다. 하지만 여전히 한자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은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었다. 옛날처럼 신문에 한자가 많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한자를 자주 접할 기회가 있는 것도 아닌데 느닷없이 한자를 공부하고 싶다는 내 마음은 나조차도 생소하기만 했지만 배우고 싶은 건 배워야지.

 

 

책이 온 첫날부터 나는 하나하나 정성껏 눌러가며 쓰기 시작했다. 이게 뭐라고 마음에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아마 이건 외우려고 하는 거야! 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다면 안정이고 뭐고, 압박감이 먼저 찾아들었겠지만 이 책에서 열 자만 알아도, 아니 한 자만 알아도 괜찮겠다 하는 생각으로 꾹꾹 눌러쓴다. 나는 단순하게 한자 공부를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이라 압박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사실 이 책의 목적은 중/고등학교 한문 교과서에 나오는 사자성어 다량 수록으로 수능 대비 어휘력 향상을 꾀하는 데에 있다. 중/고등학생이 한자만 따라 쓰기에는 좀 딱딱한 부분이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은 들지만, 현재의 나에게는 무척이나 알맞은 책이다.

 

 

책은 13일 동안 200개의 사자성어를 외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면 하루에 12개 내지 16개의 사자성어를 외워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기에는 재미를 떨어뜨리지는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들었다. 뭐, 공부를 재미로 하나~ 라고 말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말이다. 나는 하루에 2개 내지 4개의 사자성어를 외우고 있는데, 나한테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 정도가 딱 적당하다. 다 하고 나면 자랑 겸 이 리뷰 밑에 사진 한 장을 더 첨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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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아이는 괜찮습니다
사카이 준코 지음, 민경욱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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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읽을 책을 몇 권 손에 든 채로 도서관을 배회하다가 제목만 보고 집어왔다. 이 책의 제목은 이전에도 본 적이 있지만 그렇게 끌리지는 않았었는데, 그건 내가 구매해서 읽을 책과 빌려서 봐도 되는 책을 엄격하게 구분 지었던 탓이 큰 것 같다. 아이에 대해, 특히 아이를 낳지 않는 것에 대해 쓴 책들 중에 만족감을 느낀 책이 거의 없어서 그런 것도 크지 않나 싶다.

몇 년째 나의 관심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아이’에 대한 문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이를 낳을까 말까’를 더 고민했었다. 아이가 있는 삶과 아이가 없는 삶을 재고 따졌는데, 사실 그건 정말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아이의 유무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결정지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최소한 우리 부부가 더 행복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이 책은 7월 27일에 시작해서 8월 10일에 완독을 했다. 아니, 7월 27일에 1/2를 읽고, 8월 10일에 1/2를 읽어서 끝을 보았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너무 난처했다. 마흔에 가까운 미혼의 여자가 아이는 괜찮다고 말을 하는 게 받아들이기가 힘들기도 하거니와, 그것과 동시에 아이가 없는 삶에 대해 합리화를 하는 것이 굉장히 불편하게 느껴진 까닭이었다.

ps. 숫자를 매기는 건, 내가 할 말이 굉장히 많다는 건데, 나는 내가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쓰면서는 좀 자제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2.

한국과 일본의 문화 차이를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궁금해해본 적도 없고, 궁금해하고 싶지도 않기 때문에.

아이는 부모의 사후 처리를 하는 대상으로 여겨진다. (아이가 없는 친척의 장례에는 조카가 대부분 사후 처리를 한다)

결혼은 하지 않아도 아이는 낳으라는 말이 아무렇지 않거나 결혼은 하지 않아도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 여성이 많다는 점

독신은 자기 집 묘에 들어갈 수 없다는 점 (매우 가부장적이기 때문에) (독신으로 죽은 여성은 집에서 성가신 존재)

그렇기에 우리나라와 다른 문화에 대해서는 그냥 그렇구나- 하면서 읽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가부장적이구나- 라는 걸 느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보다 오지랖이 더 심하겠네, 하는 생각도.

3.

53. 출산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왜 출산을 해야만 하는지 분명하게 대답해줄 수 있는 무언가를 제시하지 않는 한 수치만으로 사람들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점점 더 결혼도, 아이도 선택할 수 있는 삶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그것을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들은 그 선택들에 참견을 한다. 참견을 하는 사람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지 않지만, 참견을 받는 입장에서는 여간 스트레스라는 것을 그들은 모르는 모양이다.

‘너는 왜 아이를 낳지 않니?’ 라는 물음에 훈계하려는 말이 뒤따라온다면, ‘너는 왜 자녀를 하나만 낳았니?’ ‘딸이 둘인 사람에게 너는 왜 아들을 낳지 않니?’ ‘애가 그렇게 좋으면 셋넷 더 낳지, 왜 안 낳니?’ ‘너는 애들이 있는데 왜 SUV를 끌지 않니?’ ‘너는 애들이 그렇게 큰데 좀 더 큰 데로 이사해야 하는 거 아니야?’ 라고 물을 거고 실제로 그러고도 있다. 그런 질문이 상대방에게는 얼마나 무례함을 범하는지 실제로 느끼게 해줄 참인 거다. 물어보는 것까지는 OK, 그 이후 훈계는 NO. 근데 실제로 나는 타인이 보기에는 강단이 있는 사람으로 비치는지, 웃으며 ‘그런 말은 무례하네요. 저희 부부 일은 저희가 알아서 해요.’라고 말하면 대부분은 말을 줄인다.




4.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불편한 마음뿐이었는데, 작가의 열등감이 너무나도 분명하게 보인 까닭이다. 게다가 자꾸만 말이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부분도 없잖아 있어서였다.

위의 책 내용만 보더라도, “아이를 낳고서야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이 정말 많습니다.”라고 하는 부분에 대해, 뭐 물론 상대가 어떤 뉘앙스로 말을 했느냐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만, 저렇게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실제로 나는 저 말을 많이 들었는데, 아 그렇구나- 로 생각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소소하게 밀린 집안 청소를 다 하고 나면 말끔한 기분이 든다. 그런데 세상에 없던 한 생명이 태어났는데 부모로서 느끼는 바가 없다고 한다면 그게 더 이상함을 넘어 무서운 거 아닌가. 굳이 저렇게까지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것이었다.

4-1.

결혼을 못 한 혹은 하지 않은 이들을 패배자라고 부른다.

너무나도 놀랐던 부분.

아이는 선택이라고 하면서, 결혼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을 하다니?

4-2.

155. 남성이 아이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여성은 결혼도 하고 싶고 아이도 갖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교제하는 남성이 결혼도 아이도 원치 않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156. 여자 친구가 임신한 것도 아닌데 “당신 아이를 갖고 싶어! 결혼하자” 하는 기특한 남성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수가 적고 그런 선남은 바로 선녀와 이어지죠.

아.. 음... 인정하기 힘들지만 그래, 뭐... 그 나라는 그러려니... 당신 주변은 그런 사람이 많으려니... (절레절레)

4-3.

굉장히 난처하다고 생각했던 부분.

130.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독신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여성의 비세대와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페미니즘 사상 영향으로 독신을 선택한 세대는 또 우리와 다릅니다.

200. 겐코 씨는 “처자를 가진 놈은 바보다!”면서 아이 없이 지내는 생활이 얼마나 눈부신지 보여주었습니다. 그 당당하고 깔끔한 정신만은 지금 봐도 부러운 마음이 드네요. 현재 우리가 아이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거나 가질 수 없는 상태여서 그런 거니까요.

하... 책을 반 정도 읽었고, 뭐라고 결말을 맺으려나 싶어서 끝까지 읽었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결혼 못 한 혹은 하지 않은 사람과 결혼했지만 아이가 없는 사람은 패배자라고 했다가,

어쩔 수 없이 독신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가, 아이가 없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결말을 맺는다.


최초로 역자의 후기가 궁금해지는 책이었다. 역자는 이 책을 번역하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요즘 책 읽기가 좀 버겁다.

내가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건 아닌지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이 많은데,

지금 나의 그릇으로는 이렇게밖에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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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길의 왼쪽 - 황선미 산문집
황선미 지음 / 미디어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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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인 생활을 겨우 유지할 수 있는 ‘자궁 같은 방’에 사는 한 남자를 티비에서 접하고 작가는 ‘내가 나일 수 있는 것’들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위해 이 글을 쓰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모든 생활이 가능한 작은 공간이라... 가만가만 떠올려보다가 ‘자궁 같은 방’이라고 했을 때, 결혼 전의 내 방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어지러운 방은 나름대로의 질서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들을 딱딱 찾아낼 수도 있었다. 나는 그 공간에서 모든 것을 다 했다. 공부도 하고 책을 읽고 서평도 쓰고 일기도 쓰고 연애도 했다. 감탄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미워하고 사랑하고 모든 감정에는 가감이 없었다. 그것은 지금에 와서 느긋하게 생각해보니 철저하게 혼자였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숨기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그때는 지금보다 더 풍부한 감성을 지녔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때와 지금의 감성은 조금 다른 것은 내가 그때보다 나이를 더 먹었거나 더 성숙해졌다거나 하는 불확실함이 아니라, 정확하게는 내 생활 반경이, 또 삶의 모습이 달라졌기 때문임을, 나는 안다. 그때는 나의 감정에 집중을 했다면, 지금은 나의 실체에 집중을 한다. 어떤 쪽이 더 좋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슬픔에 감응하는 부분이 조금씩 깎여가는 것은 아쉽기 그지없다.

작가는 각기 다른 아픔들을 하나씩 마주한다. 새삼 그 용기가 부러웠다. 세상 강한 척을 하면서 정작 내 아픔은 구태여 꺼내고 싶지 않은 나는 외면을 한다. 그 아픔들은 곪은 채로 이미 진물도 말라버렸다. 그래서 툭 치기만 해도 갈라져 새로 상처가 생겨버린다. 이것은 이전과 또 다른 상처다. 같을 수 없다. 그러면 또 외면해버리고 만다. 한껏 초췌한 내 상처를 그러안은 채로 나는 말없이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가만히 내 아픔이 될 수 없는 타인이 간직한 그 아픔들에 대해 듣게 되었다.

37. 살다 보면 때때로 우리는 지옥을 경험하곤 한다. 지독한 이기심에 스스로 무기가 돼버릴 때도 있다. 남이라면 욕 한 사발에 침이나 퉤 뱉고 돌아설 일에도 가족이라서 가슴에 가시를 끌어안고 버텨야 하는. 눈물에 발이 부르터도 그 눈물에서 발을 빼지 못하는 노릇이 허다하다.

엄마의 매를 막다가 되어버린 기형의 새끼손가락, 옴팡눈이 아니라 옴망눈, 생인손, 구내염, 240mm 발, 맏이의 역할, 고장 난 오른쪽...

화해하지 못한 아픔들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을 유년시절에 마음이 쓰렸다. 아마 나도 같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겠지. 그러다가 어린 시절 다래끼를 핥아주던 엄마의 모습에도 나는 엄마가 나를 사랑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관계는 잘못 꿰어진 단추처럼 어색했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내가 엄마의 새끼였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엄마의 나이가 되어갈수록 이토록 가슴이 저미는 모양이다.라는 문장에, 아니 30페이지의 모든 글에 나는 속절없이 무너져버렸다.

나 역시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엄마가 나를 임신했을 때나 신생아인 나를 돌보았던 일들을 말하면 귀가 쫑긋했다. 나에게는 엄마가 내 엄마라는 확신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엄마는 내 엄마가 맞을까? 계모가 아닐까? 그럴 때마다 엄마는 내게 말했다. “너는 내 자식이니 키우지, 안 그랬으면 못 키워. 진즉에 갖다 버렸지.” 그 말에 나는 슬프기보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적어도 버려지는 일은 없겠구나. 하지만 그 말은 “네가 종이라면 찢어내버리고 싶다”라는 말 다음으로 성인이 된 내게는 두고두고 울음을 내는 말이 되었다. 아직까지 처절하다. 처절하다는 단어를 대체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다.

엄마에 대한 반항이고 조용한 분노는 나에겐 무엇이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비뚤게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원하는 방향과 다른 방향. 엄마가 세계의 전부라고 믿다가도 이따금 충돌이 일었고 그 후에는 자글자글한 균열이 도드라져 보였다. 이걸 내 손으로 깨뜨려버릴 수 있는 기회를 잡았는데, 그건 아이러니하게 결혼이었다. 그 목적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내 인생은 그때부터 새로워짐을 느꼈다. 이제껏 보지 못한 새 빛이기도 했다.

148. 그곳에서 어쩌다 마주치는 사람들은 괜한 두려움을 안겼다. 그들도 나를 경계하며 지나쳤고 나 역시 의심을 안고 지나쳤다.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 주는 두려움은 온몸의 감각을 깨울 수밖에 없다. 낯선 길과 타인에 대한 경계심은 내가 어린애처럼 세상을 보고 작은 것도 기쁘게 관찰하도록 해주었다. 늘 다니던 익숙한 길의 왼쪽에 이런 세상이 있었구나. 왜 나는 한 가지 길밖에 몰랐을까. 익숙하고 편리한 게 전부가 아닌 줄 그때 이미 알았으면서 나의 오른쪽이 무너지고 있는 줄은 이렇게 몰랐다니.

나는 늘 인생의 길은 정해져있다고 생각해왔다. 이거 다음엔 이거, 이거 다음엔 저거, 저거 다음엔 그거, 다시 이거... 그럴수록 마음은 치열해졌고 더욱 옹졸해져만 갔다. 그럴 때마다 내가 했던 것은 나는 탐험가 기질이 전혀 없는데, 아니 오히려 두려워하는데도 불구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일이었다. 출퇴근길에 조금 더 새로운 길을 찾는 건 언제나 기쁨이고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도 마음에 여유가 생겨야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여유가 없을 때에는 한쪽만 보는 것도 벅차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앞, 뒤, 양옆 모두 볼 수 있도록 마음에 작은 여유를 준비해둬야지.

151.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렇지도 않았다. 우리가 매스컴을 맹신하는 건 아닐까 싶을 만큼.

이건, 좀... 불편했던 부분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렇지 않았다고 말하는 부분에 대해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다행이라는 생각도. 우리는 명확하지 않고 확신할 수 없는 세계 속에 살고 있지 않나.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에서는 보호를 받을 수 있지만, 타국에서는 보호를 받지 못하니 더욱 그렇다. 개인의 뜻이 그러하다면 다녀올 수는 있겠지만, 매스컴을 맹신하지 않을까 하고 의심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한국에는 없던 일이니 우리는 체감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나라에서 여행 제한 및 금지 국가로 명명하고 있는 나라를 방문하거나 여행을 하는 것에 대해 나라에서는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오래전 샘물교회도 그렇고 김 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있고.

작가는 한국과 터키의 수교 60주년으로 터키를 방문했다고 했다. 이때는 나도 아는 시기였다. 우리의 계획대로라면 2017년의 여행은 포르투갈이 아니라 터키였으니까. 터키에 대한 오랜 동경을 가지고 있다. 특히 벌룬에 대해. 그런데 2016년에 여러 차례 테러가 있었고, 배우자는 직업상의 이유로 허가해줄 수 없다는 말을 통보도 받기 전에 내게 난색을 내비쳤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해에 터키를 가지 못하게 되었고, 여전히 위험하다는 이유로 배우자의 완강한 반대로 인해 지금까지도 엄두는 내지 못하고 있다. 참고로 터키 중에서도 시리아와 이라크의 경계에 있는 부분은 여전히 여행금지 국가로 설정되어있다.

본래 에세이를 읽을 때 약간의 긴장을 하면서 읽는 편인데 (가장 최근에 너무 별로였던 산문집을 읽어서 더 그랬다) 바로 윗부분에 대한 약간의 불편함을 제외한다면, 마음을 놓을 정도로 편안하게 읽었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 작가님처럼 받아들이게 되려나, 하고 조금 기대를 가져보기도 했다. "웃을 때 눈이 엄마랑 똑같이 생겼어." "하는 행동이 엄마랑 똑같아."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여전히 불편하고 거북하다. 그냥 싫다. 화해할 수 있는 일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런 마음도 아직까지는 전혀 들지 않는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수용하거나 포기하는 일은 먼 나라의 일처럼 아득하기만 하다.

아차차, 그리고 작가님이 좀 더 건강하시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도 생겼다. 그래서 “마법의 힘이 있는 것 같은 동화”도 열심히 써주셨으면 좋겠다.

<책 속의 밑줄>

26. 작가의 시간을 새겨가는 나의 부분. 혼자일 때마다 조용히 느껴보는 손톱의 기억. 따뜻하고 살굿빛이 도는 나의 상징. 참으로 고맙다.

30. 정말 왜 그랬을까.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고 느낀 적이 없다.

징글징글하게 말 안 듣는 년. 고집 센 년. 지 애비 닮은 년. 심지어 ‘넌 친구도 없지?’까지.

엄마에게 나는 이런 애였다.

“넌 친구도 없지?”

이건 결혼식 전날 들은 소리였다. 단 한번이었지만 평생 가슴이 아팠다. 가슴에 총을 맞으면 소용돌이치며 관통한 총알이 등을 휑하니 다 뚫어버린다던데 이 말이 꼭 그랬다. 보이지 않아도 한겨울 들판에 벌거숭이로 서 있는 것처럼 평생 가슴이 시리고 아픈 상처였다.

나의 가장 아픈 부분을 건드렸고 덜 자란 내면의 자아를 웅크리게 만들었다.

다래끼 때문에 여러날 고생하던 중이었다.

엄마의 뜨겁고 거친 혓바닥이 내 눈을 핥았던 것이다. 개가 새끼를 핥아주듯 곪고 짓무른 상처를 구석구석.

“밤새 입속에는 독이 고여서 곪은 걸 잡을 수 있어.”

엄마의 지독한 이 냄새. 뜨거운 체온. 꼭 짐승의 혓바닥처럼 거칠던 감촉. 물도 못 마셔 바삭하게 들리던 숨소리. 어둡고 긴 동굴처럼 느껴지던 목구멍의 공명. 그 모든 게 동시에 나를 뒤덮었다. 나는 두려웠고 동시에 온전하게 무방비의 새끼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엄마가 나를 사랑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관계는 잘못 꿰어진 단추처럼 어색했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내가 엄마의 새끼였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엄마의 나이가 되어갈수록 이토록 가슴이 저미는 모양이다.

90.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읽는 일.

그렇게 다시 나에게

어린 시절의 순수한 즐거움을

선물하고 싶다.

102. 공들여 장만하는 그런 것들은 정성이고 애정이고 안정적인 가정의 증명이고 자존감이며 아이의 근간이었다. 텅 빈 우리 집에는 그런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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