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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하스 의자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에쿠니 가오리의 책이 읽고 싶어질 때가 있다. 담담하면서 담백하고, 평온하면서 건조한 그 문체가, 간절해질 때가 있다는 것은 나도 흠칫 놀랄 만큼의 변화임에 틀림이 없다. 나는 에쿠니 가오리의 책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첫 작품으로 <반짝반짝 빛나는>을 읽고 거부반응을 느꼈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 까닭이다. 여전히 나는 그 책은 싫다. 그 책의 서평을 슬쩍 찾아보니 문체는 좋다고 생각했었네. 하지만 어쨌든 그 책의 내용은 이해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남편이 사랑하는 동성의 남자와 결국 함께, 셋이 살게 되는 이야기라니... 내가 닫힌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하여튼 그렇다.
각설하고, 요즘의 나는 에쿠니 가오리의 책을 찾아 손을 뻗을 때가 많다. 그렇게 읽은 책이 <웨하스 의자>와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였다. 개인적으로는 후자 쪽이 더 좋았는데, 나는 왜 이 책의 서평을 먼저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71. 어렸을 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은 웨하스였다.
바삭하고 두툼한 것이 아니라, 하얗고 얇고, 손바닥에 얹어만 놓아도 눅눅해질 듯 허망한 것이다. 잘못 입에 넣으면 입천장에 들러붙어 버리는.
사이에 크림이 살짝 묻어 있지만, 그것은 크림이기보다 설탕을 녹여 만든 풀처럼 엷다. 얇고, 애매한 맛이 났다. 나는 그 하얀 웨하스의 반듯한 모양이 마음에 들었다. 약하고 무르지만 반듯한 네모. 그 길쭉한 네모로 나는 의자를 만들었다. 조그맣고 예쁜, 그러나 아무도 앉을 수 없는 의자를. 웨하스 의자는 내게 행복을 상징했다. 눈앞에 있지만, 그리고 의자는 의자인데, 절대 앉을 수 없다.
사랑은 곧 절망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는 애인이 있는데, 그는 가정이 있는 유부남이다.
그들의 사랑은, 한낱 ‘웨하스 의자’에 불과하다.
사랑은 사랑인데 깊어질수록 절망으로 변모해버리는, 결국 사랑은 곧 절망과 동일어.
깊어질수록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 더 와닿아서 그렇겠지.
삶의 형태는 다양하다고 생각하지만, 기혼인 내게는 용납할 수 없는 사랑이므로 그들의 사랑을 나는 싸늘하게 쳐다보았다.
어쩔 도리가 없잖아. 애인이 이혼을 하고 ‘나’에게 오지 않는 이상에야.
그런데 애인이 이혼을 할까? 직전에 ‘나’에게서 몸을 떼어내는 애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얌전해 보이는 개. 아니면 맥빠진 모습의. 그때, 나와 그 개는 동족이었다.라고 자신을 내보이는 ‘나’에게,
자기 자신을, 홍찻잔에 곁들여진 각설탕이라고 아무렇게 내뱉는 듯한 ‘나’에게,
애인에게 전화가 오지 않는 날은 세상에서 버려진 듯한 기분이 든다는 ‘나’에게,
애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기다리고 있지 않다고 착각하기 위해서 혼자 외출한다는 ‘나’에게,
매일 조금씩 망가지고 있는 ‘나’에게, 연민이 인다.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다른 것을 깨끗하게 잊을 수 있는 시간.
그림을 그리는 시간, 나비를 잡는 시간, 눈 내리는 날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간.
자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각자 본인이 좋아하는 시간들을.
‘나’도, 그리고 나도.
마음이 차분해지고 얌전해지는 날에 읽었던 <웨하스 의자>
2019.07.07.S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