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길의 왼쪽 - 황선미 산문집
황선미 지음 / 미디어창비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본적인 생활을 겨우 유지할 수 있는 ‘자궁 같은 방’에 사는 한 남자를 티비에서 접하고 작가는 ‘내가 나일 수 있는 것’들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위해 이 글을 쓰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모든 생활이 가능한 작은 공간이라... 가만가만 떠올려보다가 ‘자궁 같은 방’이라고 했을 때, 결혼 전의 내 방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어지러운 방은 나름대로의 질서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들을 딱딱 찾아낼 수도 있었다. 나는 그 공간에서 모든 것을 다 했다. 공부도 하고 책을 읽고 서평도 쓰고 일기도 쓰고 연애도 했다. 감탄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미워하고 사랑하고 모든 감정에는 가감이 없었다. 그것은 지금에 와서 느긋하게 생각해보니 철저하게 혼자였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숨기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그때는 지금보다 더 풍부한 감성을 지녔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때와 지금의 감성은 조금 다른 것은 내가 그때보다 나이를 더 먹었거나 더 성숙해졌다거나 하는 불확실함이 아니라, 정확하게는 내 생활 반경이, 또 삶의 모습이 달라졌기 때문임을, 나는 안다. 그때는 나의 감정에 집중을 했다면, 지금은 나의 실체에 집중을 한다. 어떤 쪽이 더 좋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슬픔에 감응하는 부분이 조금씩 깎여가는 것은 아쉽기 그지없다.

작가는 각기 다른 아픔들을 하나씩 마주한다. 새삼 그 용기가 부러웠다. 세상 강한 척을 하면서 정작 내 아픔은 구태여 꺼내고 싶지 않은 나는 외면을 한다. 그 아픔들은 곪은 채로 이미 진물도 말라버렸다. 그래서 툭 치기만 해도 갈라져 새로 상처가 생겨버린다. 이것은 이전과 또 다른 상처다. 같을 수 없다. 그러면 또 외면해버리고 만다. 한껏 초췌한 내 상처를 그러안은 채로 나는 말없이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가만히 내 아픔이 될 수 없는 타인이 간직한 그 아픔들에 대해 듣게 되었다.

37. 살다 보면 때때로 우리는 지옥을 경험하곤 한다. 지독한 이기심에 스스로 무기가 돼버릴 때도 있다. 남이라면 욕 한 사발에 침이나 퉤 뱉고 돌아설 일에도 가족이라서 가슴에 가시를 끌어안고 버텨야 하는. 눈물에 발이 부르터도 그 눈물에서 발을 빼지 못하는 노릇이 허다하다.

엄마의 매를 막다가 되어버린 기형의 새끼손가락, 옴팡눈이 아니라 옴망눈, 생인손, 구내염, 240mm 발, 맏이의 역할, 고장 난 오른쪽...

화해하지 못한 아픔들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을 유년시절에 마음이 쓰렸다. 아마 나도 같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겠지. 그러다가 어린 시절 다래끼를 핥아주던 엄마의 모습에도 나는 엄마가 나를 사랑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관계는 잘못 꿰어진 단추처럼 어색했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내가 엄마의 새끼였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엄마의 나이가 되어갈수록 이토록 가슴이 저미는 모양이다.라는 문장에, 아니 30페이지의 모든 글에 나는 속절없이 무너져버렸다.

나 역시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엄마가 나를 임신했을 때나 신생아인 나를 돌보았던 일들을 말하면 귀가 쫑긋했다. 나에게는 엄마가 내 엄마라는 확신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엄마는 내 엄마가 맞을까? 계모가 아닐까? 그럴 때마다 엄마는 내게 말했다. “너는 내 자식이니 키우지, 안 그랬으면 못 키워. 진즉에 갖다 버렸지.” 그 말에 나는 슬프기보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적어도 버려지는 일은 없겠구나. 하지만 그 말은 “네가 종이라면 찢어내버리고 싶다”라는 말 다음으로 성인이 된 내게는 두고두고 울음을 내는 말이 되었다. 아직까지 처절하다. 처절하다는 단어를 대체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다.

엄마에 대한 반항이고 조용한 분노는 나에겐 무엇이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비뚤게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원하는 방향과 다른 방향. 엄마가 세계의 전부라고 믿다가도 이따금 충돌이 일었고 그 후에는 자글자글한 균열이 도드라져 보였다. 이걸 내 손으로 깨뜨려버릴 수 있는 기회를 잡았는데, 그건 아이러니하게 결혼이었다. 그 목적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내 인생은 그때부터 새로워짐을 느꼈다. 이제껏 보지 못한 새 빛이기도 했다.

148. 그곳에서 어쩌다 마주치는 사람들은 괜한 두려움을 안겼다. 그들도 나를 경계하며 지나쳤고 나 역시 의심을 안고 지나쳤다.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 주는 두려움은 온몸의 감각을 깨울 수밖에 없다. 낯선 길과 타인에 대한 경계심은 내가 어린애처럼 세상을 보고 작은 것도 기쁘게 관찰하도록 해주었다. 늘 다니던 익숙한 길의 왼쪽에 이런 세상이 있었구나. 왜 나는 한 가지 길밖에 몰랐을까. 익숙하고 편리한 게 전부가 아닌 줄 그때 이미 알았으면서 나의 오른쪽이 무너지고 있는 줄은 이렇게 몰랐다니.

나는 늘 인생의 길은 정해져있다고 생각해왔다. 이거 다음엔 이거, 이거 다음엔 저거, 저거 다음엔 그거, 다시 이거... 그럴수록 마음은 치열해졌고 더욱 옹졸해져만 갔다. 그럴 때마다 내가 했던 것은 나는 탐험가 기질이 전혀 없는데, 아니 오히려 두려워하는데도 불구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일이었다. 출퇴근길에 조금 더 새로운 길을 찾는 건 언제나 기쁨이고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도 마음에 여유가 생겨야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여유가 없을 때에는 한쪽만 보는 것도 벅차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앞, 뒤, 양옆 모두 볼 수 있도록 마음에 작은 여유를 준비해둬야지.

151.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렇지도 않았다. 우리가 매스컴을 맹신하는 건 아닐까 싶을 만큼.

이건, 좀... 불편했던 부분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렇지 않았다고 말하는 부분에 대해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다행이라는 생각도. 우리는 명확하지 않고 확신할 수 없는 세계 속에 살고 있지 않나.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에서는 보호를 받을 수 있지만, 타국에서는 보호를 받지 못하니 더욱 그렇다. 개인의 뜻이 그러하다면 다녀올 수는 있겠지만, 매스컴을 맹신하지 않을까 하고 의심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한국에는 없던 일이니 우리는 체감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나라에서 여행 제한 및 금지 국가로 명명하고 있는 나라를 방문하거나 여행을 하는 것에 대해 나라에서는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오래전 샘물교회도 그렇고 김 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있고.

작가는 한국과 터키의 수교 60주년으로 터키를 방문했다고 했다. 이때는 나도 아는 시기였다. 우리의 계획대로라면 2017년의 여행은 포르투갈이 아니라 터키였으니까. 터키에 대한 오랜 동경을 가지고 있다. 특히 벌룬에 대해. 그런데 2016년에 여러 차례 테러가 있었고, 배우자는 직업상의 이유로 허가해줄 수 없다는 말을 통보도 받기 전에 내게 난색을 내비쳤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해에 터키를 가지 못하게 되었고, 여전히 위험하다는 이유로 배우자의 완강한 반대로 인해 지금까지도 엄두는 내지 못하고 있다. 참고로 터키 중에서도 시리아와 이라크의 경계에 있는 부분은 여전히 여행금지 국가로 설정되어있다.

본래 에세이를 읽을 때 약간의 긴장을 하면서 읽는 편인데 (가장 최근에 너무 별로였던 산문집을 읽어서 더 그랬다) 바로 윗부분에 대한 약간의 불편함을 제외한다면, 마음을 놓을 정도로 편안하게 읽었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 작가님처럼 받아들이게 되려나, 하고 조금 기대를 가져보기도 했다. "웃을 때 눈이 엄마랑 똑같이 생겼어." "하는 행동이 엄마랑 똑같아."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여전히 불편하고 거북하다. 그냥 싫다. 화해할 수 있는 일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런 마음도 아직까지는 전혀 들지 않는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수용하거나 포기하는 일은 먼 나라의 일처럼 아득하기만 하다.

아차차, 그리고 작가님이 좀 더 건강하시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도 생겼다. 그래서 “마법의 힘이 있는 것 같은 동화”도 열심히 써주셨으면 좋겠다.

<책 속의 밑줄>

26. 작가의 시간을 새겨가는 나의 부분. 혼자일 때마다 조용히 느껴보는 손톱의 기억. 따뜻하고 살굿빛이 도는 나의 상징. 참으로 고맙다.

30. 정말 왜 그랬을까.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고 느낀 적이 없다.

징글징글하게 말 안 듣는 년. 고집 센 년. 지 애비 닮은 년. 심지어 ‘넌 친구도 없지?’까지.

엄마에게 나는 이런 애였다.

“넌 친구도 없지?”

이건 결혼식 전날 들은 소리였다. 단 한번이었지만 평생 가슴이 아팠다. 가슴에 총을 맞으면 소용돌이치며 관통한 총알이 등을 휑하니 다 뚫어버린다던데 이 말이 꼭 그랬다. 보이지 않아도 한겨울 들판에 벌거숭이로 서 있는 것처럼 평생 가슴이 시리고 아픈 상처였다.

나의 가장 아픈 부분을 건드렸고 덜 자란 내면의 자아를 웅크리게 만들었다.

다래끼 때문에 여러날 고생하던 중이었다.

엄마의 뜨겁고 거친 혓바닥이 내 눈을 핥았던 것이다. 개가 새끼를 핥아주듯 곪고 짓무른 상처를 구석구석.

“밤새 입속에는 독이 고여서 곪은 걸 잡을 수 있어.”

엄마의 지독한 이 냄새. 뜨거운 체온. 꼭 짐승의 혓바닥처럼 거칠던 감촉. 물도 못 마셔 바삭하게 들리던 숨소리. 어둡고 긴 동굴처럼 느껴지던 목구멍의 공명. 그 모든 게 동시에 나를 뒤덮었다. 나는 두려웠고 동시에 온전하게 무방비의 새끼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엄마가 나를 사랑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관계는 잘못 꿰어진 단추처럼 어색했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내가 엄마의 새끼였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엄마의 나이가 되어갈수록 이토록 가슴이 저미는 모양이다.

90.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읽는 일.

그렇게 다시 나에게

어린 시절의 순수한 즐거움을

선물하고 싶다.

102. 공들여 장만하는 그런 것들은 정성이고 애정이고 안정적인 가정의 증명이고 자존감이며 아이의 근간이었다. 텅 빈 우리 집에는 그런 게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