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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있어 괜찮은 하루 - 말보다 확실한 그림 한 점의 위로
조안나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9년 7월
평점 :
오래전에, 그림에 대한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다. 그림 에세이라고 하면, 어려운 용어들의 향연으로 그림과 더 멀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어서 외면했었다. 나는 그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 물론 지금도 그렇다. 그 책으로 인해 그동안 어렵게만 생각했던 그림에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이주은 님의 <당신도, 그림처럼>) 그 후에는 조금씩 그림 에세이를 일부러 찾아 읽기도 했다. 그림 에세이가 좋은 이유는, 그림에 대한 설명 보다 그림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나 그림과 관련된 작가의 단편적인 생활 혹은 삶을 엿볼 수 있는 까닭이다.
나는 현재 내 생에 두 번째의 광역시에 살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생각보다 그림을 접할 기회가 많지가 않다. 그나마 좀 큰 미술관은 (거의) 반기마다 전시가 바뀌는데, 1년 6개월 동안 그림 앞에 멈춰 그림을 감상한 적은 많지 않다. 그나마 작은 전시관에서는 그림 앞에 멈추는 일이 잦았는데, (그림을 그린) 작가들이 그곳에서 삼삼오오 모여 시장통을 방불케하여 급히 빠져나온 적이 있다. 그래도 나는 그림을 자주 보러 다니고 싶다. 내 발을 멈칫하게 하는 그림들을 더 많이 만나고 싶고, 마음에 울림을 주는 그림들을 만나고 싶기도 하다.
<그림이 있어 괜찮은 하루>는 말보다 확실한 그림 한 점의 위로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다. 그림의 위로,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림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위로를 받는 것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림에서 위로를 받는다는 것은 어떤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며 책을 펼쳤다.
처음 만나는 작가의 생활을 단편적으로 엿볼 수 있어 즐거웠다. 타국에서의 생활, 그곳에서의 조용하고 고요한 생활, 더불어 외로운 생활, 한국에 대한 향수병,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 태어날 아기에 대한 기대감, 고양이 두루에 대한 애정, 대인관계, 칙칙했던 옷의 색채가 밝게 변하는 것이나, 불만스러웠던 외모까지. 그림 이야기와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읽기에 불편함이나 어려움이 없었다.
137. 삶의 위기는 언제든 어디서든 찾아오기 마련이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질수록 이곳에 없는 것만 보였다.
책은 내 마음의 날씨처럼 읽힌다고 했던가. 눈 오는 날에도 하늘이 예뻐서 견딜 수 있었다던 미국에서의 생활. 해 질 녘에 산책을 하면 노을이 마치 폴 시냐크 <분홍 구름> 속 풍경처럼 황홀하여 발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으며 오랫동안 쳐다보게 된다던 작가의 글은, 이곳에서의 생활이 너무 힘들 때 노을 속에 나를 파묻어버리던 그날들을 상기시켰다. 그때의 나와 조우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와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그리곤 어디선가 많이 봤을 법한 폴 시냐크의 <분홍 구름>에 나도 마음을 빼앗겨 열심히도 쳐다보았다.
이외에 내가 너무너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르누아르의 그림들이나, 클림트의 <아터제 호수의 섬>, 요하네스 베르베르의 <우유를 따르는 여인>, 윌리엄 터너의 <노엄 성의 일출>, 뭉크의 <다리 위의 소녀들>이나 <병든 아이>, 볼 때마다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카미유 피사로의 그림들, 발레 그림하면 생각나는 에드가 드가, 폴 세잔의 <구부러진 숲속 길>, 에곤 실레의 자화상 등- 책에는 책장을 넘어가려는 손을 멈칫거리게 해주는 그림들이 많이 있었다. 그밖에도 처음 보는 그림들은 언제나 호기심을 자극했고, 작가의 생활, 삶과 결부시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책을 읽는 도중에, 그림에 대한 위로를 받게 된 날이 있어 살포시 써보는 글.
가장 최근에 배우자가 수술을 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하루 전에 입원을 했고 다음 날에 바로 수술을 하는 걸 알고 있는 상태였는데, 9시 30분에 회진을 돌던 원장님이 10시 30분에 수술을 하자고 하여 수술 준비가 급작스럽게 이루어졌다. 별거 아닌 수술이라고는 얘기하지만, 적어도 우리에게는 별거 아닌 일은 아니었다. 배우자도 입원과 수술이 처음이었고, 나는 누군가의 보호자로서 대기하는 일이 처음이었다. 배우자는 수술실로 들어갔고 그때부터 나는 아득해졌다. 울어버릴 것 같았지만 울 수는 없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아빠였는데, 일하는 아빠와 내내 전화를 할 수는 없었기에 나의 외할머니께 전화했다. 할머니는 나를 위로해주셨다. 할머니답게 그 수술 별거 아닌데 왜 그러냐 라는 말은 하지 않고, 그래도 초기에 알아서 다행이다, 다 잘 될 거라고 생각해, 등등의 내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말씀을 많이 해주셨지만 전화를 내내 붙잡고 있을 수는 없었다.
마음이 소란스럽고 어지러워 복도를 왔다 갔다 반복하다가 이 그림을 보게 되었다. 그때부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그림을 내내 바라보는 것뿐이라는 듯이 그림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림을 보며 어떤 위로를 받았는지는 모르겠다. 어디선가 이 그림을 만나면 나는 생각할 거다. "이 그림은 내가 남편 수술할 때 내내 보았던 그림이야." 그것 말고는 다른 감상이 없다. 이 그림을 그린 이가 누군지, 그림의 제목이나 설명, 이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내가 이 그림을 보면서 불안감을 좀 덜 수 있었다는 것. 그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이제 나는 이 그림에 대해 좀 검색해볼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