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책에 대해 짧게라도 잘 쓰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그런 것은 잘 못한다. 한번도 해 본 적 없고. 아니 생각해보니 한권에 대한 것도 잘 못 쓴다. 책 한권을 쓰려면 정말 힘들 텐데 그것도 제대로 읽지 못해서 정말로 작가한테 미안하다. 몇달 전에 예전에 내가 책을 읽고 쓴 글을 조금 읽어봤다. 그리고 바로 며칠 전에도. 그것을 보다가 이 세 권에 대해 짧게 정리해두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 권은 기타무라 가오루가 ‘시간과 사람’을 주제로 쓴 소설로 《스킵 skip》 《턴 turn》 《리셋 reset》이다. 신기하게도 나도 이 순서대로 읽었다. 순서대로 읽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알아보니 나온 순서대로 본 것이 맞았다.

 

 

 

 

 

 

 

 

 

 

 

  스킵   시간을 뛰어넘어 나를 만나다

  skip スキップ (1995)

  기타무라 가오루   오유아 옮김

  황매  2006년 05월 02일

 

 

 

 

《스킵 skip》은 말 그대로 시간을 뛰어 넘는 것이다. 사람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라나고 나이를 먹어간다. 여기 나온 고등학교 2학년인 이치노세 마리코는 비 때문에 학교 축제를 하지 않게 되어 일찍 집으로 돌아와서 잠을 자는데, 잠에서 깨어난 마리코는 마흔두 살이 되어 있었다. 정신(영혼)은 열일곱 살이었는데 몸이나 환경은 마흔두 살이 되어 있는 거였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이를 먹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얼마나 깜짝 놀랄지. 그곳에는 딸과 남편도 있었다. 딸과 남편한테 말을 해서 이해를 받기도 한다. 25년이 지나서 마리코 부모님은 벌써 돌아가셨다. 그 점을 마리코는 슬퍼하기도 했다. 마지막에 다시 마리코가 열일곱 살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리코는 마흔두 살로 살아가기로 한다.

 

 

 

 

 

 

 

 

 

 

 

 

 

  turn  시간의 되풀이 속에서 나를 만나다 (1997)

  기타무라 가오루   이재오 옮김

  황매  2009년 03월 07일

 

 

 

 

 

여기에서 턴은 한번만 도는 것이 아니다. 돌고 도는 것이다. 작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말이다. 모리 마키는 29살이고 판화가로 한 주에 두번 미술교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여름 어느 날 비탈길에서 다른 차를 피하다가 덤프트럭과 부딪치고 마키는 정신을 잃는다. 얼마 뒤 깨어나니 자기 집에 있었다. 그런데 바깥이 아주 조용했다. 엄마한테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마키는 같은 날을 되풀이한다. 무엇을 해도 남지 않았다. 모리 마키가 있었던 곳은 이 세상과 저세상의 틈이었다. 실제 모리 마키는 병원에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바깥 세상, 아니 이 세상에 사는 사람과 전화로 연결된다. 그 사람은 일러스트레이터 이즈미로 마키의 판화를 써서 무엇인가를 해 보고 싶다고 했다. 다른 사람하고는 전화로 말을 할 수 없었는데 이즈미하고는 말할 수 있었다. 신기한 일이다. 얼마 뒤 마키는 불량스러워 보이는 남자를 보게 된다. 그 사람이 마키한테 나쁜 짓을 하려고 했을 때 남자는 사라진다. 그 모습을 보고 마키는 남자가 죽었기 때문에 사라졌다고 느꼈다. 마키는 자신도 그렇게 죽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해도 마키는 지금 하고 싶은 것을 하기로 한다. 마키가 깨어났는지 어땠는지는 나오지 않았다.

 

 

 

“나는 지금 아무리 그림을 그려도 모두 사라져 버려. 밑이 없는 찻잔에 차를 따르는 것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아. 하지만 그 판화가 다시 또 다른 형태로 살아난다면 그것은…… 뭐라하면 좋을까. 부모 대신에 자식이 ‘만드는’ 일에 참가하는 것 같은 느낌일지도 몰라.”  (247쪽)

 

 

아무도 봐 주지 않고 누구도 말을 걸어 주지 않는다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차피 덧없게 사라져 버릴거라면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다고 생각해왔다.  (395쪽)

 

 

이 지구조차 언젠가는 형태를 잃어버린다. 영원하다고 한다면 한순간도 영원하다. 이런 당연한 것을 나는 어째서 잊어온 것일까. 핏기 없는 얼굴로 날마다 아무 성과도 없는 되풀이라고 말했던 나. 성과가 없던 것은 ‘날마다’가 아닌 ‘나’였던 것이다. 그러한 사람이 어찌하여 살아 있는 세계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396쪽)

 

 

 

 

 

 

 

 

 

 

 

 

  리셋   시간을 넘어서 나를 만나다

  reset  リセット (2001)

  기타무라 가오루   고주영 옮김

  황매  2007년 03월 15일

 

 

 

 

 

 

제목을 보고 바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컴퓨터에 있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단추다. 하지만 우리 삶은 잘못되었다고 해서 다시 시작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리셋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환생이다.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 소설 속 사람들은 죽고 다시 태어나고 다시 만난다. 그리고 알아본다. 시간이 조금 엇갈리기는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정말 멋지다. 왜, 실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니까. 만화 <코바토>가 생각나는 이야기이다.

 

 

 

괴로운 일, 슬픈 일을 잊을 수 있어서 사람은 살아갈 수 있다. 물에 흘려보내듯 마음의 가시도 시간에 흘려보낼 수 있다. 지금의 자신을 지우고, 다음 자신이 태어난다. 그런 것이지.

 

하지만 그때는 문득 ‘사라져 버린 초등학교 5학년의 나 자신’이 애달파졌다.  (192쪽)

 

 

평생 동안 우리는 여러 사람과 동물 그리고 사물과 만난다. 그리고 또, 손을 흔들어 주지 못한 채 많은 것들과 헤어지는 것이다.  (269쪽)

 

 

 

 

지금 생각났는데 이 소설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소설에 나오는 ‘나’가 바로 지금을 살아가려 하는 것이다. 어떠한 형편에 놓여 있다 해도 말이다. 시간이 다른 모습으로 나오기는 하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게 가장 좋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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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코의 마법 물감 사계절 중학년문고 21
벨라 발라즈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김지안 그림 / 사계절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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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열두 시 종이 울리면 피어나는 꽃

참하늘빛

1분 뒤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려

이상한 수위 아저씨 도움으로 꽃을 얻은 페르코

꽃즙을 짜서 그림속 하늘을 칠했어

파란 물감보다 더 예쁜 하늘

 

엄마 심부름을 끝낸 페르코

어두운 다락방에서 빛을 보았어

그림속 하늘에 뜬 달과 별이 반짝반짝

 

흐린 날에는 그림속 하늘도 찌푸렸어

주지와 칼리와 비밀 친구가 된 페르코

칼리한테는 잃어버린 파란 물감 대신 참하늘빛을 나누어 주었어

페르코는 남은 참하늘빛으로 연장 궤짝 뚜껑을 칠했어

밤에는 다락방에 올라 궤짝 속에서 작은 하늘을 바라보았어

 

칼리가 선생님 모자속에 참하늘빛을 발라서

화가 난 선생님

모자속에서 천둥소리가 들리고 비가 내렸거든

참하늘빛을 모두 버려버린 칼리

주지가 가진 그림속 하늘에서는

벼락이 떨어져 그림이 타 버렸지

세 친구는 다시 참하늘빛을 찾으려 했지만 찾을 수 없었어

 

다락방 궤짝 속에서 하늘을 바라보던 페르코는

사람들 발소리를 듣지 못했어

사람들은 다락방에 있던 궤짝들을 들고 나가 마차에 싣고 어딘가로 갔어

그리고 불에 태웠어

페르코가 들어가 있던 궤짝은 뚜껑이 뒤집혀서 사람들이 물웅덩이라 여겼어

 

개를 피해 도망치던 페르코는

강물에 뛰어들어 궤짝 뚜껑을 타고 흘러갔어

사람들은 물 위에 떠 있는 페르코를 어린 성자라 하며 대접해주었지

물속에 그대로 두었던 궤짝 속 하늘은 사라져버렸어

그런데

페르코 반바지에서 작게 빛나는 참하늘빛

 

반바지를 소중히 여긴 페르코

몇 해가 지나도 여전히 반바지를 입었어

그런 어느 날 주지가 더는 반바지를 입지 말라고 하자

페르코는 주지 눈속에서 더 예쁜 참하늘빛을 보았어.

 

 

2

 

어쩌면 우리는 또 다른 참하늘빛을 찾으며

자라나는 것인지도.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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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훔치고 싶은 것 미래의 고전 20
이종선 지음 / 푸른책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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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없는 집

 

 

학교에서 즐겁게 공부하고,

동무와 재미있게 놀아도

마음은 쓸쓸합니다

 

재미있는 만화영화를 보고,

맛있는 밥을 먹어도

마음은 쓸쓸합니다

 

밤하늘에서 반짝이는 별을 보고,

꿈속에서 하늘을 날아도

마음은 쓸쓸합니다

 

엄마 없는 집은 쓸쓸합니다

 

 

 

(예전에 그냥 썼던 것인데 조금 어울릴 듯하여)

 

 

 

 

초등학교 6학년 여자아이들 여진, 여경, 민서, 선주. 책을 보면서 나는 또 생각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을 때를. 떠오르는 일은 없는데 내가 그때는 지금보다 감정이 무디었던 것 같다. 오히려 그때보다 지금 짜증나는 성격이 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과 지금 내가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어른이 되기 어렵겠다고 느꼈다. 그것보다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 어른은 되지 못해도 마음은 자라기를 바란다. 아이들만 아프면서 자라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어느 때나 아프면서 자란다. 아이들이 더 크게 아픔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반대가 되었다. 어렸을 때는 조금 바보였던 것 같다. 지금도 그렇지만. 다 생각나지는 않는데 아마 나도 학교가 끝나고 아무도 없는 집에 돌아온 적이 있을 것이다. 그때 내 마음이 어땠는지 모르겠다. 요새는 정말 나 자신이 지난 날로 돌아가서 나 자신을 보고 싶기도 하다. 여기 나오는 여진이는 학교가 끝나면 아무도 없는 집에 왔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엄마가 일을 했다. 쓸쓸함을 채우기 위해서였을까. 여진이는 학교에서 주인 없는 물건을 주워오고는 했다. 그런데 6학년이 되어서는 친해졌으면 하는 민서 물감을 가지고 와 버렸다.

 

여경이는 5학년 때 민서와 같은 반이었는데 민서 엄마 때문에 안 좋은 일을 겪었다. 여경이는 자기가 받은 상처에 대한 보상이라며 민서 돈을 훔쳤다. 여경이는 그게 나쁜 일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민서는 집도 부자고 공부도 잘했다. 하지만 친구를 어떻게 사귀어야 하는지 잘 몰랐다. 엄마가 나서서 친구한테 선물을 주었다. 민서는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 더 사서 친구한테 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경이는 친구 마음을 돈으로 사려 한다고 생각했다. 여진이는 민서와 여경이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했다. 여진이는 민서와 함께 여경이가 민서 돈을 훔치는 모습을 보고, 여경이는 여진이가 민서 물감을 가져간 일을 말했다. 그런 세 아이를 보며 선주가 말했다. “서로 자기가 더 상처받은 척, 피해자인 척하는데, 친구들끼리 이게 뭐야? 서로 오해가 있으면 풀어야지, 이렇게 탓만 하고 있으면 되니!” (128쪽) 하고. 여경이는 민서 엄마만을 보았지 민서 마음은 몰랐다. 책속에서는 이렇게 싸우기라도 하는데 현실에서도 그렇게 서로 말할 수 있을까. 말을 해서 풀어야 한다고 쓴 적 많은데 그것을 진짜 할 수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아니,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여진이는 여진이대로 집에서 엄마와 언니가 알게 되었다. 여진이가 다른 사람 물건을 가져왔다는 것을. 일은 한꺼번에 터진다더니 정말 그랬다. 여진이는 엄마와 언니가 자기 마음을 알아준 것만으로도 그동안 얼어있던 마음이 녹았다. 민서와 여경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선주가 양궁 경기에서 동메달을 받아서 여진이, 여경이, 민서 세 사람을 집에 불렀는데 갔을까. 여진이는 갔다. 지금 바로는 껄끄럽더라도 앞으로 사이가 좋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솔직히 나는 마음을 터놓고 말을 한 다음에도 친구로 지낸 사람은 없다. 아니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도 뭣도 아닌 사이가 된 것인지도. 어쩌다가 이렇게 썼을까.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이런 날도 있는 것이지.

 

 

 

희선

 

 

 

 

☆―

 

여진이는 둘 사이에서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진작 이렇게 싸워야 했다고 생각했다. 감추지만 말고 처음부터 털어놓았으면 이렇게까지 복잡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1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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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스치는 바람 2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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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위에서

개가

꽃을 그리며

뛰오.

 

 

 

윤동주

 

 

 

 

우리 말로 쓰인 책을 보고 우리 말로 글을 쓸 수 있는 일은 분명히 행복한 일이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우리 말로 쓰인 글을 읽을 수 없었고, 쓰거나 말도 할 수 없었던 때. 내가 그때를 살지 않았기에 아주 먼 옛날 일 같은데 그렇지만도 않다. 말을 잃으면 나를 잃는 것과도 같다. 그 일을 모두 알았기에 목숨을 걸고서 사람들은 우리 말과 글을 지켰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말과 글을 잃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과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 이 책을 보며 새삼 우리 말과 글의 소중함을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 말로 쓴 이야기이지만 실제 그때는 우리 말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을 상상하며 읽었더니.

 

여기에서 가장 눈에 띠는 것은 책과 글이 한 사람을 아주 많이 바뀌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겁하게 살아남은 자신을 벌주기 위해 더 나쁜 사람이 된 스기야마 도잔, 동주가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 써준 엽서를 검열하면서 그 글 속에 있는 책을 찾아서 보았다. 그리고 동주가 자신한테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이야기는 1권에 나온 것인데 이 부분 꽤 재미있게 보았다.(한번 해 보고 싶은 것이기도) 스기야마가 어떤 일을 했는지 더 알고 싶었다. 어쩌면 이것은 와타나베 유이치의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스기야마는 동주가 시를 쓴다고 하자 비밀 도서관을 함께 만들었다. 동주는 한글로 시를 쓰고 다시 일본말로 옮겼다. 스기야마는 동주가 쓴 시를 연에 적어 형무소 바깥으로 날려보냈다. 시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어서. 동주가 베껴쓴 책들을 여러 사람이 나누어서 읽고 외워서 다른 사람한테 이야기해주었다. 이 이야기도 감동스러웠다. 조선 사람 죄수들이 노래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스기야마, 미도리 그리고 윤동주가 함께 꾸민 거였다. 안타깝게도 스기야마는 듣지 못했지만.

 

어느 순간 스기야마 이야기보다 와타나베가 동주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게 더 많이 나왔다. 앞에도 와타나베가 이야기를 들은 것이기는 하지만. 스기야마가 하던 일을 와타나베가 이어받은 듯했지만 모두 그렇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와타나베는 어렸다. 그래서 자기들 일본이라는 나라, 아니 윗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잘 몰랐다. 스기야마는 동주와 조선 사람 죄수들이 의무조치 대상자가 되지 않도록 해주었지만, 와타나베는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생체실험에 대해 알았을 때는 너무 늦어버렸다. 기억을 잃어가는 동주를 보는 일은 그리 편하지 않다. 실제로도 그랬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우리는 와타나베처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어서 더 마음 아픈 것인지도. 일본에는 와타나베처럼 자신한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많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그때 있었던 일을 알리려 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이 일본에서도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렇게 될까. 일본 사람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은 윤동주와 시다. 조금 마음을 숨긴 것인가. 지금 일본 사람들한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난 날을 알고 앞으로 나아가는 일은 중요하다.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뜻과는 다르게 시인은 세상을 떠났지만, 시는 아직도 남아서 빛나고 있다. 그 빛이 꺼지지 않기를 바란다.

 

 

 

희선

 

 

 

 

☆―

 

“독방행을 자처했던 사람들은 단지 자신들을 위해서 책을 읽은 것이 아니었어. 그들은 일주일 동안 최대한 많은 분량의 책 내용을 외웠지. 독방에서 나간 그들은 감방으로 돌아가서 동료들에게 자신이 외운 책 내용을 전달해 주었지. 책 내용을 들은 사람은 그 내용을 기억하고 한 사람이 기억할 수 없을 때에는 두 사람, 세 사람이 나누어 기억했지. 한 사람이 한 파트씩, 아니면 몇 쪽씩 나누어서 기억한 거야. 짧은 시는 몇 편씩 외워서 시집 한 권을 완성하기도 했어.”  (173쪽)

 

 

“그를 죽인 건 이 무도하고 참혹한 시대야. 모두가 미쳐 가고 모두가 죽어 가고 있어.”  (179쪽)

 

 

나는 그런 영혼을 가졌던 남자를 알고 있다. 바람 속에서 태어난 아이, 태어나면서부터 조국을 잃어버린 아이, 자두나무 울타리와 우물이 있는 집에서 살았던 소년, 오디를 따먹고 우물 속을 들여다보던 소년, 우물물에 비친 파란 하늘을 사랑한 소년, 까마득한 종탑 끝의 십자가를 바라보던 아이, 잃어버린 조국을 괴로워한 소년, 톨스토이와 괴테와 릴케와 잠을 사랑했던 소년, 헌책방에서 구한 책을 가슴에 품고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뻐하던 책벌레, 차가운 하숙방으로 돌아와 밤새워 그 책을 읽던 학생, 남모르게 어둠을 밝히며 시를 쓰던 시인, 긴 외길을 따라 산책하기를 좋아했던 소년, 벙어리처럼 한 소녀를 사랑했던 소년, 자신이 쓴 시를 한 권의 시집으로 묶어 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시인, 어두운 시대와 차가운 현실의 어둠 속에 사금파리처럼 깨져버린 식민지인, 깨어진 자신의 몸을 비벼 불꽃을 뿜던 청년, 이름을 빼앗겨 버린 식민지 청년, 낯선 항구의 배를 타고 조국을 떠났던 여행자, 남의 나라 육첩방에서 홀로 침전하던 유학생, 시대의 아침을 기다리던 청년, 모국어로 시를 썼다는 죄로 수갑을 찬 죄수, 멀리 북간도의 어머니를 그리던 아들, 차가운 감옥의 새벽 나팔 소리를 기다리는 사내, 바람이 부는 날 바람을 맞으며 연을 날리던 죄수, 웃음이 문신처럼 입가에 새겨진 미남자, 그리고 결국 그 웃음조차 잃어버린 사내…….            (236~237쪽)

 

 

 

 

 

편지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윤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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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스치는 바람 1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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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흰 깃발을 던졌다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모두 풀려났지만,

후쿠오카 형무소 간수부 간수병인 와타나베 유이치는 갇혔다

하급 전범으로

와타나베 유이치는 말한다

자신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가 있다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막지 못했고, 전쟁을 멈추게 하지도 못했으며,

죄가 없거나 아주 작은 죄를 지은 사람들이 어이없이 죽어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고.

 

다시 와타나베는 말한다

자신이 쓰는 글이 누군가를 다치게 하지 않기를 바라고,

우리 영혼을 구해주기를 바란다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만난 한 시인과 한 검열관의 이야기

히라누마 도주와 스기야마 도잔, 아니 윤동주와 스기야마 도잔

 

1944년 스기야마 도잔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누군가한테 죽임 당했다

사람들은 스기야마를 악마라 했다

죄수들을 죽기 바로 전까지 때리고 엄격한 검열관이었기에

그런 스기야마 주머니에는 시가 적힌 종이가 있었다

스기야마 도잔은 겉으로 보이는 대로 악마였을까

 

스기야마에 대해 새롭게 드러나는 사실

음악을 들을 줄 알고, 시인이었다고

스기야마의 마음을 흔든 것은 윤동주의 시였다

거친 스기야마한테는 시를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이 있었다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세계를 만난 스기야마

그러나 모두가 스기야마와 같지는 않았다

 

조선말로 시를 쓴 동주는 15일 동안 독방에 갇힌다

간수장은 동주가 쓴 시들을 스기야마한테 태우게 한다

동주가 쓴 시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 스기야마였지만,

자기 손으로 시들을 불태웠다

그리고 죄책감을 느꼈다

 

시를 쓰지 않게 된 동주한테 시를 쓰라고 하는 스기야마

자신만이 동주가 쓴 시를 되살릴 수 있다며 종이에 적어 주머니 깊숙이 숨겼다

자신의 시가 어딘가에 살아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동주

정말 그렇다면 시를 불태운 죄책감을 덜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스기야마

 

나라와 말을 잃고 더욱 절망에 빠져버린 동주한테

스기야마는 어두운 밤이면 별이 떠오르는 것처럼

삶에는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고 확인하게 해주었다

그 밤 동주가 읊은 <별 헤는 밤>을 스기야마는 받아적었다.

 

 

 

2

 

차갑고 어두운 밤을 밝혀주었던 당신의 시는

지금도 누군가를 위로해 줄 것입니다.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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