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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스치는 바람 2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개
눈 위에서
개가
꽃을 그리며
뛰오.
윤동주
우리 말로 쓰인 책을 보고 우리 말로 글을 쓸 수 있는 일은 분명히 행복한 일이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우리 말로 쓰인 글을 읽을 수 없었고, 쓰거나 말도 할 수 없었던 때. 내가 그때를 살지 않았기에 아주 먼 옛날 일 같은데 그렇지만도 않다. 말을 잃으면 나를 잃는 것과도 같다. 그 일을 모두 알았기에 목숨을 걸고서 사람들은 우리 말과 글을 지켰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말과 글을 잃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과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 이 책을 보며 새삼 우리 말과 글의 소중함을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 말로 쓴 이야기이지만 실제 그때는 우리 말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을 상상하며 읽었더니.
여기에서 가장 눈에 띠는 것은 책과 글이 한 사람을 아주 많이 바뀌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겁하게 살아남은 자신을 벌주기 위해 더 나쁜 사람이 된 스기야마 도잔, 동주가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 써준 엽서를 검열하면서 그 글 속에 있는 책을 찾아서 보았다. 그리고 동주가 자신한테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이야기는 1권에 나온 것인데 이 부분 꽤 재미있게 보았다.(한번 해 보고 싶은 것이기도) 스기야마가 어떤 일을 했는지 더 알고 싶었다. 어쩌면 이것은 와타나베 유이치의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스기야마는 동주가 시를 쓴다고 하자 비밀 도서관을 함께 만들었다. 동주는 한글로 시를 쓰고 다시 일본말로 옮겼다. 스기야마는 동주가 쓴 시를 연에 적어 형무소 바깥으로 날려보냈다. 시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어서. 동주가 베껴쓴 책들을 여러 사람이 나누어서 읽고 외워서 다른 사람한테 이야기해주었다. 이 이야기도 감동스러웠다. 조선 사람 죄수들이 노래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스기야마, 미도리 그리고 윤동주가 함께 꾸민 거였다. 안타깝게도 스기야마는 듣지 못했지만.
어느 순간 스기야마 이야기보다 와타나베가 동주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게 더 많이 나왔다. 앞에도 와타나베가 이야기를 들은 것이기는 하지만. 스기야마가 하던 일을 와타나베가 이어받은 듯했지만 모두 그렇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와타나베는 어렸다. 그래서 자기들 일본이라는 나라, 아니 윗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잘 몰랐다. 스기야마는 동주와 조선 사람 죄수들이 의무조치 대상자가 되지 않도록 해주었지만, 와타나베는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생체실험에 대해 알았을 때는 너무 늦어버렸다. 기억을 잃어가는 동주를 보는 일은 그리 편하지 않다. 실제로도 그랬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우리는 와타나베처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어서 더 마음 아픈 것인지도. 일본에는 와타나베처럼 자신한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많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그때 있었던 일을 알리려 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이 일본에서도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렇게 될까. 일본 사람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은 윤동주와 시다. 조금 마음을 숨긴 것인가. 지금 일본 사람들한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난 날을 알고 앞으로 나아가는 일은 중요하다.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뜻과는 다르게 시인은 세상을 떠났지만, 시는 아직도 남아서 빛나고 있다. 그 빛이 꺼지지 않기를 바란다.
희선
☆―
“독방행을 자처했던 사람들은 단지 자신들을 위해서 책을 읽은 것이 아니었어. 그들은 일주일 동안 최대한 많은 분량의 책 내용을 외웠지. 독방에서 나간 그들은 감방으로 돌아가서 동료들에게 자신이 외운 책 내용을 전달해 주었지. 책 내용을 들은 사람은 그 내용을 기억하고 한 사람이 기억할 수 없을 때에는 두 사람, 세 사람이 나누어 기억했지. 한 사람이 한 파트씩, 아니면 몇 쪽씩 나누어서 기억한 거야. 짧은 시는 몇 편씩 외워서 시집 한 권을 완성하기도 했어.” (173쪽)
“그를 죽인 건 이 무도하고 참혹한 시대야. 모두가 미쳐 가고 모두가 죽어 가고 있어.” (179쪽)
나는 그런 영혼을 가졌던 남자를 알고 있다. 바람 속에서 태어난 아이, 태어나면서부터 조국을 잃어버린 아이, 자두나무 울타리와 우물이 있는 집에서 살았던 소년, 오디를 따먹고 우물 속을 들여다보던 소년, 우물물에 비친 파란 하늘을 사랑한 소년, 까마득한 종탑 끝의 십자가를 바라보던 아이, 잃어버린 조국을 괴로워한 소년, 톨스토이와 괴테와 릴케와 잠을 사랑했던 소년, 헌책방에서 구한 책을 가슴에 품고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뻐하던 책벌레, 차가운 하숙방으로 돌아와 밤새워 그 책을 읽던 학생, 남모르게 어둠을 밝히며 시를 쓰던 시인, 긴 외길을 따라 산책하기를 좋아했던 소년, 벙어리처럼 한 소녀를 사랑했던 소년, 자신이 쓴 시를 한 권의 시집으로 묶어 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시인, 어두운 시대와 차가운 현실의 어둠 속에 사금파리처럼 깨져버린 식민지인, 깨어진 자신의 몸을 비벼 불꽃을 뿜던 청년, 이름을 빼앗겨 버린 식민지 청년, 낯선 항구의 배를 타고 조국을 떠났던 여행자, 남의 나라 육첩방에서 홀로 침전하던 유학생, 시대의 아침을 기다리던 청년, 모국어로 시를 썼다는 죄로 수갑을 찬 죄수, 멀리 북간도의 어머니를 그리던 아들, 차가운 감옥의 새벽 나팔 소리를 기다리는 사내, 바람이 부는 날 바람을 맞으며 연을 날리던 죄수, 웃음이 문신처럼 입가에 새겨진 미남자, 그리고 결국 그 웃음조차 잃어버린 사내……. (236~237쪽)
편지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윤동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