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책에 대해 짧게라도 잘 쓰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그런 것은 잘 못한다. 한번도 해 본 적 없고. 아니 생각해보니 한권에 대한 것도 잘 못 쓴다. 책 한권을 쓰려면 정말 힘들 텐데 그것도 제대로 읽지 못해서 정말로 작가한테 미안하다. 몇달 전에 예전에 내가 책을 읽고 쓴 글을 조금 읽어봤다. 그리고 바로 며칠 전에도. 그것을 보다가 이 세 권에 대해 짧게 정리해두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 권은 기타무라 가오루가 ‘시간과 사람’을 주제로 쓴 소설로 《스킵 skip》 《턴 turn》 《리셋 reset》이다. 신기하게도 나도 이 순서대로 읽었다. 순서대로 읽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알아보니 나온 순서대로 본 것이 맞았다.
스킵 시간을 뛰어넘어 나를 만나다
skip スキップ (1995)
기타무라 가오루 오유아 옮김
황매 2006년 05월 02일
《스킵 skip》은 말 그대로 시간을 뛰어 넘는 것이다. 사람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라나고 나이를 먹어간다. 여기 나온 고등학교 2학년인 이치노세 마리코는 비 때문에 학교 축제를 하지 않게 되어 일찍 집으로 돌아와서 잠을 자는데, 잠에서 깨어난 마리코는 마흔두 살이 되어 있었다. 정신(영혼)은 열일곱 살이었는데 몸이나 환경은 마흔두 살이 되어 있는 거였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이를 먹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얼마나 깜짝 놀랄지. 그곳에는 딸과 남편도 있었다. 딸과 남편한테 말을 해서 이해를 받기도 한다. 25년이 지나서 마리코 부모님은 벌써 돌아가셨다. 그 점을 마리코는 슬퍼하기도 했다. 마지막에 다시 마리코가 열일곱 살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리코는 마흔두 살로 살아가기로 한다.
턴 turn 시간의 되풀이 속에서 나를 만나다 (1997)
기타무라 가오루 이재오 옮김
황매 2009년 03월 07일
여기에서 턴은 한번만 도는 것이 아니다. 돌고 도는 것이다. 작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말이다. 모리 마키는 29살이고 판화가로 한 주에 두번 미술교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여름 어느 날 비탈길에서 다른 차를 피하다가 덤프트럭과 부딪치고 마키는 정신을 잃는다. 얼마 뒤 깨어나니 자기 집에 있었다. 그런데 바깥이 아주 조용했다. 엄마한테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마키는 같은 날을 되풀이한다. 무엇을 해도 남지 않았다. 모리 마키가 있었던 곳은 이 세상과 저세상의 틈이었다. 실제 모리 마키는 병원에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바깥 세상, 아니 이 세상에 사는 사람과 전화로 연결된다. 그 사람은 일러스트레이터 이즈미로 마키의 판화를 써서 무엇인가를 해 보고 싶다고 했다. 다른 사람하고는 전화로 말을 할 수 없었는데 이즈미하고는 말할 수 있었다. 신기한 일이다. 얼마 뒤 마키는 불량스러워 보이는 남자를 보게 된다. 그 사람이 마키한테 나쁜 짓을 하려고 했을 때 남자는 사라진다. 그 모습을 보고 마키는 남자가 죽었기 때문에 사라졌다고 느꼈다. 마키는 자신도 그렇게 죽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해도 마키는 지금 하고 싶은 것을 하기로 한다. 마키가 깨어났는지 어땠는지는 나오지 않았다.
“나는 지금 아무리 그림을 그려도 모두 사라져 버려. 밑이 없는 찻잔에 차를 따르는 것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아. 하지만 그 판화가 다시 또 다른 형태로 살아난다면 그것은…… 뭐라하면 좋을까. 부모 대신에 자식이 ‘만드는’ 일에 참가하는 것 같은 느낌일지도 몰라.” (247쪽)
아무도 봐 주지 않고 누구도 말을 걸어 주지 않는다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차피 덧없게 사라져 버릴거라면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다고 생각해왔다. (395쪽)
이 지구조차 언젠가는 형태를 잃어버린다. 영원하다고 한다면 한순간도 영원하다. 이런 당연한 것을 나는 어째서 잊어온 것일까. 핏기 없는 얼굴로 날마다 아무 성과도 없는 되풀이라고 말했던 나. 성과가 없던 것은 ‘날마다’가 아닌 ‘나’였던 것이다. 그러한 사람이 어찌하여 살아 있는 세계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396쪽)
리셋 시간을 넘어서 나를 만나다
reset リセット (2001)
기타무라 가오루 고주영 옮김
황매 2007년 03월 15일
제목을 보고 바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컴퓨터에 있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단추다. 하지만 우리 삶은 잘못되었다고 해서 다시 시작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리셋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환생이다.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 소설 속 사람들은 죽고 다시 태어나고 다시 만난다. 그리고 알아본다. 시간이 조금 엇갈리기는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정말 멋지다. 왜, 실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니까. 만화 <코바토>가 생각나는 이야기이다.
괴로운 일, 슬픈 일을 잊을 수 있어서 사람은 살아갈 수 있다. 물에 흘려보내듯 마음의 가시도 시간에 흘려보낼 수 있다. 지금의 자신을 지우고, 다음 자신이 태어난다. 그런 것이지.
하지만 그때는 문득 ‘사라져 버린 초등학교 5학년의 나 자신’이 애달파졌다. (192쪽)
평생 동안 우리는 여러 사람과 동물 그리고 사물과 만난다. 그리고 또, 손을 흔들어 주지 못한 채 많은 것들과 헤어지는 것이다. (269쪽)
지금 생각났는데 이 소설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소설에 나오는 ‘나’가 바로 지금을 살아가려 하는 것이다. 어떠한 형편에 놓여 있다 해도 말이다. 시간이 다른 모습으로 나오기는 하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게 가장 좋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