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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개의 말·프라하, 사라져 가는 시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25년 6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89개의 말 프라하, 사라져 가는 시』는 밀란 쿤데라의 유고작이자, 그가 생의 끝자락에서 남긴 마지막 노트 같다. 단정하면서도 섬세한 문장, 일상의 이면을 찌르는 사유들, 그리고 ‘사라진다’는 것에 대한 깊은 성찰이 촘촘히 엮여 있다. 이 책은, 단지 미발표된 단상들의 모음이 아니라, 하나의 완결된 유언처럼 다가온다.
책을 펼치면, 단어 하나하나가 낡은 흑백 사진처럼 느껴진다. ‘프라하’라는 도시는 쿤데라의 문학과 함께 여러 번 되살아났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이 책 속의 프라하는 과거의 흔적으로만 존재한다. ‘사라져 가는 시’라는 부제처럼, 쿤데라는 사라진 것들, 곧 사라질 것들에 대해 조용히 노래한다. 그건 단지 도시나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 무심히 흘려보내는 감정과 기억, 생각의 문제다.
‘89개의 말’은 그가 선택한 단어들이지만, 단순한 낱말은 아니다. 각각의 말은 삶의 풍경을 조각처럼 붙들어 놓는다. 그 안에는 인간의 고독, 망각, 시간의 흐름 같은 철학적 사유가 녹아 있다. 그 말들을 통해 쿤데라는 우리가 놓치고 사는 것들을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밀란 쿤데라의 글은 언제나 생각의 방향을 살짝 틀게 만든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그랬다. 하지만 이번 『89개의 말 프라하, 사라져 가는 시』는 이전과는 다른 느낌이다. 더 단단하고, 더 고요하다. 마치 생의 끝에서 자신의 사유를 최소한의 말로 정제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는 여전히 문학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언어를 통해 어떤 진실에 닿을 수 있는가를 묻는다. 그리고 그 대답은 예전보다 훨씬 느리게, 하지만 깊게 다가온다. 이 책은 빠르게 소비되는 문장이 아니라, 천천히 음미해야 하는 말들의 연속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자주 멈춰 서게 되었다. 단지 내용 때문이 아니라, 문장 하나가 던지는 여운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글을 읽고 지나치지만, 이 책은 '읽는다는 행위' 자체를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밀란 쿤데라가 평생 탐구한 ‘기억’과 ‘망각’의 주제가, 이번엔 ‘말’이라는 형식을 통해 다시 태어났다.
책장을 덮고 나서도 여운이 길게 남는다. 이건 ‘감동’이라기보다는 깊은 침묵 속 사유에 가깝다. 누군가는 이 책을 '지루하다'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어떤 독자에게는 이 느린 리듬이야말로 가장 진실한 문학의 형태로 느껴질 것이다.
『89개의 말 프라하, 사라져 가는 시』는 두께는 얇지만 분명 대중적인 책은 아니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들의 의미를 생각해 본 적 있는 사람, 언어를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묻고 싶은 사람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책이다.
쿤데라의 팬이라면 반드시 읽어볼만할 책 같다. 밀란 쿤데라 유고작이라는 점에서도, 문학사적인 의미에서 중요한 이 책은, 지금-여기에서 우리가 무엇을 잃고 살아가는지를 다시금 되묻게도 하는 책이라 전하며 리뷰를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