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이어령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은 전자책으로 사놓고 아직 읽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책의 저자가 이번에는 나태주 시인과 만나 쓴 행복수업이 눈에 들었다. '지금 나는 행복할까?'라는 자문에는 그런 것 같기도 하면서 아닌 것 같기도 하다는 모호함이랄까? 책을 통해 좋아하는 시인의 행복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고 싶었다.
수업은 <비참을 알고도 명랑하게>, <나는 왜 이다지도 작은가>, <어른의 사랑은 어떤 얼굴로 오는가>, <결핍의 얼굴들>, <또 와, 자주 와, 틈만 나면 와!>, <그냥, 살면 돼요>, <삶에 작은 역경을 초대하고>, <내가 세상에 나와 꼭 해야 할 일은 '억지로라도 행복하기'> 총 여덟 번으로 되어 있다.
첫 수업을 들으며 경직되어 있고 번아웃이 느껴지는 듯한 저자가 어떻게 비참을 알고도 명랑하게로 다가가기 시작하는지를 볼 수 있었다. 사실 구매 해놓고 보지 않았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제대로 안 보고 그동안 읽었던 인터뷰집에 대한 편견으로 접했다. 하지만 산문집이나 에세이 스타일로 잘 풀어져 있어 가독성도 좋아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다.
두 번째 시간을 읽으며 '작지만 작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을 인정하기에 더 클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랄까? 간혹 본질을 잊는 이들이 있다. 배워서 즐겨야 하는데 저렴하게 즐길 곳이라는 생각으로 교육을 해주는 이들의 말이 '잔소리'로, 자신들이 함께해야 할 역할은 쓸모없는 짓으로 여기는... 그건 아마도 그들의 잘못된 태도도 있을 것이며 잘못된 홍보로 본질을 흐린 이의 문제였다는 최근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세 번째 시간을 읽으며 건조해져 가는 내 시를 떠올린다. 촉촉한 시로 다가갔으나 점차 날카롭고 건조한 시 합평회 속에서 건조해져 갔던 시를... 또 습윤했던 웃음 많고 순둥했던 20대는 사회생활을 하며 이용을 당하며 겉모습과 달리 독기가 차고 있었다. 마음을 편히 내주려 하면 틈을 노려 선을 넘는 이들에 대해 더 선을 견고하게 다듬어 가는 듯하다. 나이가 많다고 어른이 아니라는 것은 체득하게 되는 시기... 미워하지 않을 수 없기에 외면하거나 마음을 열지 않는 방법으로 거리 두기를 하며 지내는 방법을 활용하게 되는 게 아닌가도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다.
네 번째 시간을 읽으며 '손님의 언어'에 대한 내용이 들어온다. 지금은 병원에 누워계신 우리 아버지가 쓰러지시기 전에는 나도 손님의 언어를 썼던 것은 아니었나 생각하게 된다. 다섯 째 시간에 상대에게 잘 맞추려면 두 가지면 기억하면 된다고 한다. '시한부와 거리' 너무 가까이 있으면 집착하거나 함부로 하게 된다는 나태주 시인의 말은 구십 년의 반의 시간을 살아오며 요즘 들어 더 공감하게 되는 내용이라 기억에 남는다. 여섯 번째 시간의 제목이 크게 와닿는 것은 어린 시절에는 크게 의식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울림이 크게 다가온다.
일곱 번째 시간의 꽃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관심이 시선을 다르게 만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과거에는 그냥 '이름 모를 꽃'들에 대한 관심이 내가 지금은 꽃들을 찾아보게 하고 알아보게 하고 있으니... 마지막 교시에 올해 초 책 체험 프로그램에서 담아둔 나태주 시인의 시 「행복」을 다시 만난다. 어쩌면 내가 크게 바라지 않으며 적당히 만족하라는 마음이 그 시를 끌어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시를 인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