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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 박범신 논산일기
박범신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4월
평점 :
십중팔구 작가의 일기란 술 마시고 담배 핀 이야기로 질퍽거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일기를 들여다보고 싶은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잠을 잘라내고
깊은 사색으로 새벽을 맞는 그들의 고뇌에서 보석 같은 잠언을 얻어 내려함이 아닐까.
그가 2011년 겨울, 페이스북에 일기를 썼다.
내심 미리 계획을 했었던 건 아니지만 ‘예스민’이라는 예쁜 이름의 쌀 가지고서는
논산의 이미지를 쇄신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으로 애향심에 불타 책을 내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책 제목에서 지명을 만나게 되면 그 지명과 나와의 연관성을 짚어보게 된다.
일단 나의 고향이 충청남도이므로 괜한 연대감을 갖고서는
혹시나 내가 아는 곳이 나오지 않을까 미리 책을 팔랑거려 나의 고향을 더듬어보는 것이다.
그가 줄곧 책에서 일관성 있게 밝히는 소망은
<생물학적 나이만큼 영혼이 깊어지되 불온한 감수성은 유지하여 ‘현역작가’,
혹은 ‘청년작가’로 시종하는 것>이라 한다.
복 많게도 걸핏하면 떠나겠다고 유랑의 노래를 불러대고 1993년 절필 선언을 했을 때도
걱정하지 말라며 보따리를 싸 준 것이 그의 아내였다고 한다.
90년대 이후 아프리카, 히말라야 등 오지로 떠나는 여행 가방을 꾸려 준 것도 아내였고,
2005년 명지대 교수직을 때려 치고 히말라야로 떠날 때도 다 엎어버려도 시원치 않을 판에
아내가 했다는 말은
“오고 싶을 때 와, 난 늘 여기 있으니까.” -.-;
매년 꽃씨를 따서 서랍에 간직하는 붙박이장 같은 아내.
오래 살아서 어머니같이 되어버린 아내.
작가의 아내로 산다는 것은 작가로 사는 것보다 더 곡진한 인생처럼 보인다.
삶에의 갈증과 유랑에 대한 목마름으로 다시 그가 짐을 싸고 내려간 곳은
탑정호가 코 앞인 논산시 가야곡면 조정리.
팔할은 애향심으로 내게 된 책이니 고장 자랑질이 잠깐 나온다.
논산시엔 논산읍, 연무읍, 강경읍이 있는데
논산은 본래 예향으로 논산 딸기와 연산 대추, 강경 젓갈이 유명하고
게다가 예스민이라는 쌀까지 있어 더욱 예스러워지는 곳이란다.
계백장군이 죽은 곳이고 견훤의 꿈이 무너진 자리이니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원혼들로 이야깃거리가 또한 풍성한 곳이란다.
<촐라체>에 등장한 대둔산과 <물의 나라>, <불의 나라>의 주인공의 고향으로
설정한 곳도 이 근처이다.
가슴에서 무엇인가 막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나는 밤,
몰래 일어나 그는 자신의 생가터를 찾는다. 어머니가 생각난다.
네 명의 딸을 낳고 나이 40에 아들 하나 얻어 생의 의미를 찾고자 했던 어머니.
그 어머니가 작가를 출산하는 장면은 비장해서 서늘하기까지 하다.
딸 네 명을 쪼로로 앉혀놓고 아기를 받게 한 후 큰 딸에게 “무엇이냐?”
서슬 퍼렇게 물어본 후 울고 있는 큰 딸에게서 아기를 빼앗아 아들임을 확인한 후
요란하게 밥을 지으라 명령하셨다니.
그래서 작가는 히말라야에 갔을 때,
짐을 잔뜩 지고 가파른 산을 평생 오르내리는 당나귀들을 보고 어머니를 생각했단다.
‘히말라야의 당나귀’인 어머니를.
하늘과 호수가 접붙어 있다. 내가 꿈꾸는 것이 저것.
찰나와 영원, 현실과 초월의 두 세계를 내 나머지 삶에서 접붙여 사는 것,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이룰 수 없는 것들을 꿈꾸는 사랑이다.
사랑의 완성을 보고자 하는 것이나 영원성 또는 신성을 깊이 품고자 하는 것도
나의 나머지 꿈이다.
이룰 수 없다고 해서 버린다면 습관과 소비적 자본주의 노예가 될 확률이 높다.
- 73p
그는 낮이고 밤이고 곧잘 호숫가를 산책했나보다.
어느 날,
산책을 마치고 마당에 들어서서 상수리나무 사이에 뜬 별들을 보고
고흐의 편지를 떠올린다.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하는 것처럼 별까지 가기 위해선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죽으면 기차를 탈 수 없듯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별까지 갈 수 없다.“
그 날 밤 그는 인간 누구나 쉼 없이 고흐의 ‘별’을 향해 걷고 있다고 썼다.
그에게 고흐의 편지를 떠올리게 했던 아름다운 마당의 풍경을 읽고
내게 떠오른 생각을 말하지 못하도록 재갈을 물리지 않는다면
나는 Don Mclean이 부르는 ‘starry night'이 생각났다고 하겠고
어린왕자가 별에 돌아가기 위해 뱀에 물리던 밤이 생각났다고 말하고 싶고
죽는 것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했지만 그가 별로 돌아가는 장면은 죽음의 장면이었고
그렇다면 죽음은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별은 멀어서 마음에 품고, 빛나서 동경하게 되는군 혼잣말을 하게 되었다.
육체의 집에 머무르지 못하는 영혼들이 실존의 숙박비를 지불하며 머무르고 있는
수많은 자신만의 별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아,
정신 차리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송경동의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이라는 시를 읽으며
한 번도 옥살이를 치러보지 않고 치열하게 살지 못한 차선의 삶에 대한
그의 회한이 가득하다.
어느 날 펼친 신문에서 ‘꿈꾸는 자 잡혀간다’는 그의 책제목을 보고 가슴이 무너져
고향에서 호수나 보고 금붕어나 걱정하고 있는 자신의 삶이 과연 온당한가 반문한다.
시골에서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냈을까 내심 궁금했었는데 서울로 올라온
그의 크리스마스는 아내의 고혈압걱정과 혈압에 좋다는 비트를 제 손으로 사다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으로 가득하다.
서로 갚을 것 없이 공평한 관계가 좋은 관계라는데 아내에, 세상에 대해 빚진 마음으로
고개를 쉽게 들지 못한다.
설을 앞두곤 밤을 뚫고 자전거 짐칸에 온갖 물건을 채워 돌아오시던 아버지를 회상한다.
가부장으로써의 권력을 모두 반납하고 흰 머리, 굽은 등을 가졌던 아버지를 그린다.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번영이 모두 그에게서 나왔음을 알라고 하는 말은 아마도 자신을
더 울렸던 것 같다.
경외심 없이 집어 들었던 책이 생각꺼리로 갈수록 속도가 떨어지고 있다.
책에 짱 박혀있던 눈을 들어 바깥을 바라보는 횟수가 많아진다.
밑줄을 긋다가 급기야는 빳빳하기 그지없는 책을 겁도 없이 접고 말았다.
(그리 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으니 그제서야 내 책이라는 현실감이 팍팍)
장편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출판기념회를 위해 쓴 글이 맨 뒤에 실려 있다.
작가는 뱀처럼, 들끓는 세상의 밑바닥에 배를 대고 가야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던 그는
정작 데뷔 당선소감에서 ‘문학 목매달아 죽어도 좋은 나무’라 했었다.
물론 현재는 그것이 너무 비장한 구호였다는 치기를 반성하고 있다.
<그 무엇이 됐든, 이것은 나의 유일한 권위, 감미, 유혹이라고 말하는
‘그 무엇’을 찾아 갖기 바랍니다.>
그가 제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독자들, 나아가 육체의 집을 안고
나이들어가는 인간 모두에게 하고 싶은 말이리라.
그렇게 해서 우리는 삶과 사람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않을 수 있는 것이고 이렇게
외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삶의 유한성에 도전을 받고 강력하고도 잔인한 실존의 문제에 먼저 부닥쳐 피를 흘리며
이정표가 되어주고 있는 그의 일기가 고마워진다.
우리는 누구나 시인이어서 그 시인을 횡격막 아래 숨게 하지 말고 해방시켜 춤추게 하여
삶을 빛나는 음악으로 만들라는 그의 생각이 고마워진다.
삶의 유한성이 주는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서 창조적인 작업에 열중하는 게 좋다는 충고가
억수로 고마워진다.
더불어 창조와 억제의 조화로 생생한 삶을 살기를 부탁받았다.
리모델링이 끝난 조정리집으로 돌아가서 ‘지신밟기’인 집들이를 하고나서야
논산의 전통과 충절과 합치되고 비로소 고향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매일 생살이 찢어지는 작가로, 더 깊고 넓은 사랑으로 큰 권력자가 되기를 바라는
그의 소원에 힘을 실어주고 싶어진다.
설거지를 할 때 물을 잠가야 음악소리가 들리듯
나를 끄고 비우면 사물이 드러나고 세계가 보인다는 명제를
다시 표면으로 끌어올려준 그가 고맙다.
박범신!
(그는 분명 청년으로 살고 싶다했으므로 중년인 내가 이리 부르는 것을 달가워할 것이다.)
쌩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