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7월,

7이라는 숫자는 벽에 기대어 고개를 떨군 사람처럼 보인다.

아마도 1년을 절반을 뚝 분질러버리고 난 나의 허탈함을 묻혀놓은 까닭이겠다.

계속되는 고온에 사유와 성찰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관계로  두 권의 여행기와

한 권의 삶 요리서를 추천한다.

 

 

 
  1.

  박후기.이윤학.이문재 외 지음 / 문학세계사

 

 

계간지《시인세계》에 연재되었던 <시인의 오지 기행>을 단행본으로 엮은 책이다. 젊은 시인들이 카메라를 들고 오지로 뛰어들어가 시심 가득한 글을 쏟아냈다. 좋아하는 시인들이 군데군데 끼어있어 설렌다.

 '사람 마음만한 오지가 있겠는가'

그저 스쳐지나간 문장이 벌써 마음을 흔들어댄다.

시인들은 먹고 싸는 것도 시가 되니 그들의 여행을 따라 또 어떤 것이

시가 되고 시의 재료가 되는 지 쫓아가보고 싶다.

 

 

 

 

 

 

 

2.

톰 체셔 지음, 유지현 옮김 / 이덴슬리벨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이 같은 반 친구가 다녀왔다며 모짜르트 흉상을 선물로 줬단다. 책가방을 내려놓으며 하는 말이 "우리도 유럽 가!"

유럽이 어디 코 앞이여야 말이쥐, 젊은 시절 나의 로망이었던 유럽여행이 어느 새 초등학생 아들에게 로망이 되었다.

이게 조기교육의 힘인가??

대도시 여행을 예약하러 싸이트에 들어갔다가 낯선 소도시를 눌러보다가는 저가항공, 유명하지 않은 곳만을 찾아 다닌 여행기이다.

 

 

 

 

 

 

 

3.

김경집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주위의 사람들이 궁금해한다. 마흔이 되었는데 불혹은커녕 더 유혹하는 게 많으니 어떻게 된 일이지?

내가 볼 때 마흔이 불혹이라는 말은 평균수명이 50, 60이던 때의 이야기이다. 옛날 마흔이면 '보따리를 쌀 나이'라 했다는데 보따리는 너무하고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며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헤이는 일은 꼭 필요한 과정처럼 보인다.

가톨릭대학교에서 인간학과 영성 과정을 가르쳤던 교수로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삶의 지혜서이자 안내서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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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2012-07-06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라일락 2012-08-02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월 에세이 주목신간을 8월 5일까지 작성해 주세요.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8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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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지인의 블로그에서 '일곱 번째 아들이 태어나면 늑대인간이 된다'는

영화 나자리노의 포스팅을 보았다. 그래서 우리나라엔 '최진사댁 세째딸'이라는

노래가 있었고, 세째딸은 얼굴도 안보고 데려간다는 얘기로 괜히 목에 힘주고 다니는

그녀들을 보았었노라는 댓글을 달았었다.

유난히 숫자 '3'을 좋아한다는 우리 민족은 가위바위보를 해도 삼 세판,

화투에서도 세 번 흔들면 따블의 혜택을 주고

한 번만 더 그래봐 씩씩거리면서도 세 번까지는 봐준다는 말들이 생각났다.

문화에 따라 선호하는 숫자도 다르겠지만 그 숫자에 지워진 운명이 더 흥미롭다.

 

후안 데 라 가르사 집안에 막내딸 티타가 태어난다.

그것은 그녀가 결혼도 하지 못한 채 엄마가 돌아가실 때까지 보살펴드려야하는

운명을 안고 태어났다는 말이기도하다.

전통이 자식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모정보다 진하던가.

중미의 본가살이와 한국의 시집살이를 비교하며 어떤 게 더 독했던 걸까 눈을 굴려

본다. 혹시 계모여서 그런가 의심해보았으나 출산의 장면이 생생하다.

 

티타는 부엌에서 태어났기때문인지 부엌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요리사 나차로부터 음식을 배워가며 누구보다 훌륭한 손맛을 가지게 된다.

'끓는 기름에 도넛반죽을 넣는 것 같은' 페드로의 눈길에 사랑이 시작되었지만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마마 엘레나는 큰 딸 로사우라와 페드로를 보란듯이 결혼시킨다.

막내딸의 운명을 아는 페드로는 티타의 언니와 결혼함으로써 티타와 연결된 끈이라도

놓지 않고자했다.

차라리 둘이 보따리를 싸들고 도망 갔더라면 그토록 지리한 사랑의 숨바꼭질은

피할 수 있었으려나.

 

티타가 만든 음식에는 신비한 능력이 있었다.

부엌에서 권력이 나온다는 말이 있듯이 티타의 음식은 사람들의 감정을 조절하고

지배했다.

언니와 페드로의 결혼식 날 하객 모두들 구토의 도가니로 몰아넣기도 했고,

장미꽃잎을 넣은 메추라기 요리로 둘째 언니 헤르트루디스를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헤르트루디스의 열기는 샤워장을 불붙게 했고 무선으로 조정당하듯 달려온

혁명군 후안의 말 위에 올라타 격정의 사랑을 나누며 사라지게 했다.

(1910년대 멕시코는 독재자 포르피리오 디아스에 항거하는 멕시코 혁명이 시작된

시기였다. 33년 간 멕시코를 통치하면서 반대세력을 잔인하게 제거하고 언론의

자유를 금지했다.)

후일 창녀에서 혁명군 장교가 된 헤르트루디스가 다시 집을 찾아온 것은

크림튀김, 유월절의 빵과 같은 티타가 만든 음식에 대한 그리움때문이었다.

 

줄거리가 궁금하신가요 ▼

 

 페드로는 로사우라에게서 알베르토를 낳았으나 젖동냥을 해야만했다.

유모마저 사고를 당해 죽자 티타는 안절부절하며 알베르토를 측은히 바라본다. 그 때,

처녀인 티타의 가슴에서 젖이 뿜어져나오고 알베르토는 티타의 젖을 먹고 자란다.

연인을 뺏은 미안함보다는 자신의 남편을 넘본다는 피해의식으로 티타에게 적대감을

가진 로사우라.

자매들의 일이란 옷 뺏어 입기, 설거지 미루기, 내 것이랑 비교해보고 시기 질투하기

등을 벗어나지 못한 채 갈등의 골을 키우는 때가 많았으니.

페드로와 티타는 같은 집에 살면서 서로에게 향하는 욕정의 위기를 여러 번 넘기며

지낸다. 이를 본 마마 엘레나의 명령으로 페드로의 가족은 타지로 떠나고 그곳에서

알베르토는 죽고만다.

알베르토가 죽자 큰 슬픔에 잠겨 엄마가 그 아이를 죽였다며 마마 엘레나에게

도전하던 날, 티타는 주걱으로 얼굴을 심하게 맞고 피를 흘리며 정신줄을 살짝 놓는다.

하지만 첫 눈에 그녀를 사랑하게 된 존 브라운 박사의 헌신적인 보살핌으로 조금씩

회복해 간다.

 

다 읽으셨으면 ▲

 

티타의 사랑에 불을 붙여주고 싶었던 의사 존의 이야기 한 자락을 들어본다.

 

시다시피 우리 몸에도 인을 생산할 수 있는 물질이 있어요.

그보다 더한 것도 있죠.

리 모두 몸 안에 성냥갑 하나씩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혼자서는 그 성냥에

불을 당길 수 없다고 하셨죠.

방금 한 실험에서처럼 산소와 촛불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산소는 사랑하는 사람의 입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촛불은 펑하고 성냥불을 일으켜줄 수 있는 음식이나 음악, 애무, 언어,

소리가 되겠지요. 잠시 동안 우리는 그 강렬한 느낌에 현혹됩니다.

우리 몸 안에서는 따뜻한 열기가 피어오르지요.

이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사라지지만 나중에 다시 그 불길을 되살릴 수

있는 또 다른 폭발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각자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불꽃을

일으켜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만 합니다.

불꽃이 일면서 생기는 연소 작용이 영혼을 살찌우지요.

다시 말해 불꽃은 영혼의 양식인 것입니다.

자신의 불씨를 지펴줄 뭔가를 제 때 찾아내지 못하면 성냥갑이 축축해져서

한 개비의 불도 지필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영혼은 육체에서 달아나 자신을 살찌워 줄 양식을 찾아 홀로

칠흑 같이 어두운 곳을 헤매게 됩니다.

남겨두고 온 차갑고 힘없는 육체만이 그 양식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말입니다

 

줄거리가 더 알고 싶으신가요 ▼

 

 

티타는 허리가 부러져 거동이 불편해진 엄마를 보살피러 집으로 다시 돌아온다.

얼마 후 엄마가 돌아가시고 옷장에서 엄마의 비밀편지를 발견한다.

흑인혼혈인인 호세를 사랑했던 엄마는 집안의 반대에 부딪쳤었고

서둘러서 후안 데 라 가르사와 결혼을 했었고

호세와의 만남을 끝내지 못한 엘레나는 헤르트루디스를 낳았고

티타가 태어나던 날 그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남편 가르사는 심장마비로 죽게 되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엄마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고 이해하기 시작했다.

엄마와의 이별에 대한 느낌을 티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함께 자란 옆 상추와 갑자기 헤어진 상추의 느낌>

마마 엘레나가 죽고 페드로와 로사우라는 집으로 돌아와 에스페란사를 낳았다.

눈물겹게도 위대한 전통을 이어갈 막내딸의 탄생이었던 것이다.

죽을 때까지 엄마를 보살펴야하는 에스페란자의 운명을 위해 티타는 기꺼이 전통과

싸워나간다.

티타가 존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결혼식에 참석하실 숙모님을 모시러 떠난 사이,

페드로는 참아왔던 사랑과 질투심으로 티타의 처녀성을 빼앗는다.

오, 평화와 안정을 주는 그래서 존경해 마지않는 존,

다시 돌아온 존에게 티타가 이 결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하자 존이 말한다.

타, 당신이 뭘 했든 나는 상관없어요.

본질적인 게 바뀌지 않았다면 살면서 어떤 행동을 하든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다 읽으셨으면 ▲

 

존이 모르는 게 있었다면

그것은 여자들은 착한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어쨌거나 본질이 바뀐 티타는 페드로를 선택한다.

그러나, 후일 엄마 로사우라를 잃고 운명의 사슬에서 벗어난 에스페란사는

존 박사의 아들 알렉스의 눈길이 닿는 순간 '끓는 기름에 도넛 반죽을 넣었을 때와

같은 기분'을 느끼고 사랑에 빠진 후 결혼식에 고올~이인!

 

티타와 페드로도 이제 마음 놓고 사랑할 수 있게 되어 한껏 들떠있다.

호두소스를 얹은 칠레고추를 먹은 하객들 모두 파도처럼 밀려오는 성욕을 억제하지

못해 산으로 들로 나무로 사라지고

티타와 페드로 또한 피부를 뚫고 나와 체취로 변해버린 욕정을 태우기 위해 방으로

들어간다.

존은 쓸쓸히 집으로 돌아간다.

그는 티타의 성냥에 불을 당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페드로는 해방된 사랑의 절정에서 갑자기 숨을 멈추었고 페드로와 끝까지 함께 하고

싶은 티타는 성냥을 마구 삼켰고 이윽고 펑하고 불이 붙어 그들은 절정에 오른 사랑을

느끼며 함께 영원에 들었다.

 

사실 이 소설은 음식과 성과 페미니즘이 어우러진 소설로 잘 알려져있지만

그 관점에서 그닥 매력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음식에서 인생을 유추해내는 것으로 보면 영화'터치 오브 스파이스'의 감동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고 언니와 동생을 함께 아내로 묶어버리는 화합의 장은 불편했고

적혀진 레시피에서는 그닥 식욕을 느낀 것도 아니니

아마도 이 책을 단숨에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이것 봐라아~ 하며 마술적 리얼리즘의 몽환적 매력에 끌렸기때문인 것 같다.

사랑,

도대체 그 진부하고도 오랜 주제는 언제쯤이면 변주곡을 멈출텐가.

소음에 가까운 불협화음이라도 사랑의 존재는 인류에게 유익인가.

 

읽는 내내 '백 년의 고독' 냄새가 강하게 났고, 그 냄새의 이유는 맨 끝장에 이르러서야

드러났다.

영화감독인 남편과 함께 그녀가 시나리오를 쓴 <백 년의 고독>의 영화화를 앞두고

있었다 하는데 마르케스 사랑이 충만한 작가가 틀림없는 것이다.

누군가 남미문학이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다고 푸념을 했더랬다.

라틴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선 좀 더 넓은 가슴과 큰 눈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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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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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은 소송이다'라는 말로 본문에 인용되었던 작가 밀란 쿤데라의 소설 ‘불멸’은

괴테의 연인으로 남아 불멸이 되고자 했던 젊은 베티나의 당돌한 계획을 잘 설명한다.

그 소설에서는 젊은이들이 노인에 대하여 교만함을 가지게 되는 이유가

노인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 '자신들은 세상에 남아있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라 했었는데.

그렇다면 은교도 같은 뿌리를 갖고 있을까.

책을 읽는 내내 뜨거웠다.

쉽게 읽히기도 했지만 한 달 반 만에 써냈다는 작가의 열정이 느껴진다.

이렇게 다 쏟아내고 나면 소설가에게는 무엇이 남겠나 싶기도 했는데 후기에 보니 실상 그도

내장이 다 빠져나가는 듯했다고 소회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늙어감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심어주었으므로 공포소설이라 부르고 싶어진다.

늙어서도 말끔히 제어되지 않는 욕망의 사슬,

그 욕망을 범죄로 보는 젊은이들의 집단적 시선도 두려워지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한창 이적요 시인의 기념사업이 진행되고 있던 2010년 봄,

후배시인이자 변호사인 Q는 '내가 서지우를 죽였고 나의 생애가 모두 위선이었다'는

이적요의 비밀노트를 열게 된다.

 

은교,

그 아이가 내 집의 정원에서 잠들어 있는 걸 발견한 건 어느 초여름 오후.

그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었지만 또 그리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나 이적요는 얼이라는 아들을 두고 있기는 하지만 가정을 꾸려본 일이 없는,

그러니까 사랑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뻣뻣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

그런 나의 인생에 오렌지 같은 열일곱 살 은교가 뚝 떨어졌다.

경이롭도록 싱싱한 육체는 땀방울조차 신성하고 피부 밑 혈관은 흐르는 샘물 같아라.

은교는 등롱처럼 반짝이고 흔들리는 아름다움이었다.

 

별은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추한 것도 아니고 그냥 별일 뿐이네.

사랑하는 자에게 별은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배고픈 자에게

별은 쌀로 보일 수도 있지 않겠나

 

서지우,

무기재료학을 전공하던 서지우가 내 강의시간에 불쑥 나타나더니만 후에 제자로 받아 주십사

머리를 조아렸다.

그 뒤 내 집에 수시로 드나들며 나의 수족이 되어왔다.

세계를 단숨에 이해하는 감수성이 없어 늘 ‘멍청’이 취급을 하기는 했지만 나는 시종 그를

‘내 새끼’로 여겼다.

 

(내용을 더 읽고 싶으시다면 펴서 보시기를)

접힌 부분 펼치기 ▼

 

은교와 먼저 알게 된 서지우는 그녀를 이적요의 집 청소도우미로 소개한다.

영악스러우며 젊음의 무기를 적절히 사용할 줄 알았던 은교는 곧 두 세대에 걸친 남자로부터

사랑을 받게된다.

마치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때론 하나도 빠짐없이 다 안다는 듯 두 남자 사이의 감정선을

넘나들었다.

너무나 존경하고 덕망 있는 시인 이적요를 요상한 계집과 욕망으로부터 분리시켜야겠다는

생각으로 서지우는 그들을 떼어놓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그가 노력하면 할수록 이적요는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고

체제를 전복하려는 불온한 테러리스트로 여겼다.

 

이적요는 우연한 기회에 서지우에게 자신이 쓴 소설 ‘함정’을 내어주게 되고

서지우는 문학상을 타게 된다.

부와 명예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서지우는 그 함정의 우쭐함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문단의 냉대와 집요한 출판사의 부추김에 그는 다시 스승의 원고에 손을 대 단편 소설 세 편을

빼낸다.

이미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던 이적요와 서지우.

이적요는 질투심과 열등감에 사로잡힌 서지우가 자신의 작품을 마음대로 훼손하고,

자신이 가진 젊음에의 욕망을 능멸하며

나의 처녀, 은교마저 농락하는 서지우를 보고 ‘집행’하기로 결심한다.

그의 죄는 생로병사라는 자연법을 부정하고 모욕했으며. 늙었다는 이유로 스승의 자존을 능멸하고 타인의 작품과 영혼을 훔치고 고친 중죄였다.

사형, 땅땅땅!

 

은교는 젊음이 쏘아대는 ‘빛’, 이적요는 늙은 ‘그림자’였다.

그의 생일날, 그는 처녀의 향기에 둘러싸인 은교를 그는 가만히 껴안는다.

그러나, 세상은 욕망이 금기된 그의 육체를 감시하고 있다.

은교의 몸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길로 가고 싶었지만

그는 은교의 이마 위에 입맞춤을 하고 방에서 내보낸다.

그렇게 곱게 지켜낸 은교를 서지우는 이층 서재에서....

서재에 사다리를 놓고 이를 숨어보는 늙은 사슴의 눈에는 빗물이 자꾸 들어갔다.

 

서지우는 죽음 앞에서만큼은 멍청하지 않았다.

이적요의 ‘당나귀’를 빌리러 주차장으로 내려갈 때 스승이 보냈던 우주적인 눈빛을 간파하고

정비소에 들른다.

이적요가 사고가 나도록 핸들을 조작했다는 사실을 알고 내내 눈물을 흘리며 차를 몰고

도로로 다시 나갔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넘어온 트럭에 체념하듯 받혀 죽게 된다.

서지우가 죽자 소주로 끼니를 연명하던 이적요는 지병인 당뇨병과 그에 따른 합병증으로

급격하게 늙어갔다.

더구나 간에서 발견된 암세포는 이미 육체를 해체시키고 있었다.

언젠가 티베트에 갔을 때, 성산 카일라스에 은거했던 밀라레파의 이야기를 듣고

귀국하자 마자 팠던 굴로 들어가 은교로부터 받았던 토끼인형을 안고 죽음을 맞이한다.

일년 후,

은교는 변호사로부터 건네받은 이적요의 노트를 다 읽은 후 노트를 불태운다.

 

  

 

 

 

 

 

은교라는 제목은 ‘은밀한 교제’ ,더 나아가서는 ‘은밀한 성교’까지 추론하게 했었다.

본문에서 언급되던 원조교제를 약간 비틀어 놓은 이름이 아니었을까도 싶었는데

송혜교의 혜교가 지혜로워 보이는 이름이듯이 어설픈 한자의 습득은 얼마나 선입견을

갖게하던지.

 

자기를 괴롭혀서 시를 짓는 것보다

나는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싶다. -A. 앙드레

 

젊은 날 은교를 만났다면 이적요는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았을 것이라 했다.

왜?

은교에게 그저 편지를 쓰면 되었으므로.

한 번도 사랑을 해보지 못한 이의 이 애틋한 가정법에 최상급의 동정이 생겨난다.

그의 노트를 다 읽은 은교가 울며 외친다.

“할아부지가 나를 이렇게 원하는 줄 몰랐어요. 이까짓 게 뭐라구요.”

 

 

나는 이적요가 은교에게 매료되었던 것이 은교가 가진 관능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관능은 그것을 도구화하고 이용할 줄 아는 나이에 더 어울리는 법.

17세 소녀가 가진 것은 관능이 아니라

학습한 이성으로 누르고 구겨넣었어야할 감정들을 두서없이 꺼내고 흐트려놓아도

죄가 되지 않는, 자유로우면서도 보호받는 영혼의 버릇없음이 아니었을까싶다.

민주화운동으로 10년동안 옥살이를 하고 자신을 속이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었던 그가

자신의 세대가 제공한 희생의 토대위에서 도발하는 젊음을 동경했던 건 아닌가한다.

 

이적요는 자신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판타지를 맛보았다.

그가 그토록 욕망했던 시간을 거슬러 가볼 수 있었다.

호텔 캘리포니아, 그 곳에서

그는 강물위를 흐르며 젊어지는 자신, 늙은 은교, 다시 젊어지는 은교를 마음껏 만진다.

만약 천재지변이라는 것이 지진이나 화산폭발이 아닌 시간의 방향을 되돌리는 것이라면

어떠할까.

우리가 여태껏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고통과 쾌락의 탄생을 목격하게 되지 않을까.

노년에는 고요함만이 어울리는 것은 아니겠지만

노년의 품위가 욕망보다 값져 보이는 것은 나 또한 편견을 갖고 있다는 뜻인가 보다.

 

저자가 청년작가로 불리기를 원하는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어찌됐건 그것은 젊음에 베이스캠프를 치고 젊음이라는 고지를 수시로 넘나들고자하는

욕망 때문 아닌가.

오욕칠정을 드러내는 것이 진정한 웰빙의 길이라고 그가 말했다는데

그래, 그는 예술가이므로 봐주자.

인간이 만들어놓은 규범은 욕망의 다른 이름이라고 치자.

창작과 예술의 아궁이라고 치자.

그러나 며칠 전 예능프로에서처럼 작가를 데려다놓고 '내 마음 속 은교'라는 이미지를

농담처럼 끌어쓰는 것은 섣부르지 않았나 생각된다.

부디 이 소설을 덮으며 바라게 되는 것은 다른 은교들이 양산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

 

마지막으로, 나는 자신의 추악한 내면을 폭로하고 우상화를 거부한 이적요의 고백이

자신의 시를 계승시키고 완성시켰다고 본다.

대학생이 된 은교가 변호사에게 자신의 근황을 조용히 이야기하지 않는가.

“저 요즘 시 쓰고 있어요.”

시가 세상을 구하지는 못하지만 상처받은 젊음 하나는 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시가 사랑이라는 피로 유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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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6-29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멋진 서평 잘 읽고 갑니다 ^_______^

ksvioletta 2012-10-26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찾아주시고 읽어주시고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해요. ^^
좋은 가을 맞이하시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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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 박범신 논산일기
박범신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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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중팔구 작가의 일기란 술 마시고 담배 핀 이야기로 질퍽거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일기를 들여다보고 싶은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잠을 잘라내고

깊은 사색으로 새벽을 맞는 그들의 고뇌에서 보석 같은 잠언을 얻어 내려함이 아닐까.

그가 2011년 겨울, 페이스북에 일기를 썼다.

내심 미리 계획을 했었던 건 아니지만 ‘예스민’이라는 예쁜 이름의 쌀 가지고서는

논산의 이미지를 쇄신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으로 애향심에 불타 책을 내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책 제목에서 지명을 만나게 되면 그 지명과 나와의 연관성을 짚어보게 된다.

일단 나의 고향이 충청남도이므로 괜한 연대감을 갖고서는

혹시나 내가 아는 곳이 나오지 않을까 미리 책을 팔랑거려 나의 고향을 더듬어보는 것이다.

 

그가 줄곧 책에서 일관성 있게 밝히는 소망은

<생물학적 나이만큼 영혼이 깊어지되 불온한 감수성은 유지하여 ‘현역작가’,

혹은 ‘청년작가’로 시종하는 것>이라 한다.

복 많게도 걸핏하면 떠나겠다고 유랑의 노래를 불러대고 1993년 절필 선언을 했을 때도

걱정하지 말라며 보따리를 싸 준 것이 그의 아내였다고 한다.

90년대 이후 아프리카, 히말라야 등 오지로 떠나는 여행 가방을 꾸려 준 것도 아내였고,

2005년 명지대 교수직을 때려 치고 히말라야로 떠날 때도 다 엎어버려도 시원치 않을 판에

아내가 했다는 말은

“오고 싶을 때 와, 난 늘 여기 있으니까.” -.-;

매년 꽃씨를 따서 서랍에 간직하는 붙박이장 같은 아내.

오래 살아서 어머니같이 되어버린 아내.

작가의 아내로 산다는 것은 작가로 사는 것보다 더 곡진한 인생처럼 보인다.

 

 

 

 

삶에의 갈증과 유랑에 대한 목마름으로 다시 그가 짐을 싸고 내려간 곳은

탑정호가 코 앞인 논산시 가야곡면 조정리.

팔할은 애향심으로 내게 된 책이니 고장 자랑질이 잠깐 나온다.

논산시엔 논산읍, 연무읍, 강경읍이 있는데

논산은 본래 예향으로 논산 딸기와 연산 대추, 강경 젓갈이 유명하고

게다가 예스민이라는 쌀까지 있어 더욱 예스러워지는 곳이란다.

계백장군이 죽은 곳이고 견훤의 꿈이 무너진 자리이니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원혼들로 이야깃거리가 또한 풍성한 곳이란다.

<촐라체>에 등장한 대둔산과 <물의 나라>, <불의 나라>의 주인공의 고향으로

설정한 곳도 이 근처이다.

 

가슴에서 무엇인가 막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나는 밤,

몰래 일어나 그는 자신의 생가터를 찾는다. 어머니가 생각난다.

네 명의 딸을 낳고 나이 40에 아들 하나 얻어 생의 의미를 찾고자 했던 어머니.

그 어머니가 작가를 출산하는 장면은 비장해서 서늘하기까지 하다.

딸 네 명을 쪼로로 앉혀놓고 아기를 받게 한 후 큰 딸에게 “무엇이냐?”

서슬 퍼렇게 물어본 후 울고 있는 큰 딸에게서 아기를 빼앗아 아들임을 확인한 후

요란하게 밥을 지으라 명령하셨다니.

그래서 작가는 히말라야에 갔을 때,

짐을 잔뜩 지고 가파른 산을 평생 오르내리는 당나귀들을 보고 어머니를 생각했단다.

‘히말라야의 당나귀’인 어머니를.

 

 

 

 

하늘과 호수가 접붙어 있다. 내가 꿈꾸는 것이 저것.

찰나와 영원, 현실과 초월의 두 세계를 내 나머지 삶에서 접붙여 사는 것,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이룰 수 없는 것들을 꿈꾸는 사랑이다.

사랑의 완성을 보고자 하는 것이나 영원성 또는 신성을 깊이 품고자 하는 것도

나의 나머지 꿈이다.

이룰 수 없다고 해서 버린다면 습관과 소비적 자본주의 노예가 될 확률이 높다.           

                                                                                 - 73p

 

그는 낮이고 밤이고 곧잘 호숫가를 산책했나보다.

어느 날,

산책을 마치고 마당에 들어서서 상수리나무 사이에 뜬 별들을 보고

고흐의 편지를 떠올린다.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하는 것처럼 별까지 가기 위해선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죽으면 기차를 탈 수 없듯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별까지 갈 수 없다.“

그 날 밤 그는 인간 누구나 쉼 없이 고흐의 ‘별’을 향해 걷고 있다고 썼다.

그에게 고흐의 편지를 떠올리게 했던 아름다운 마당의 풍경을 읽고

내게 떠오른 생각을 말하지 못하도록 재갈을 물리지 않는다면

나는 Don Mclean이 부르는 ‘starry night'이 생각났다고 하겠고

어린왕자가 별에 돌아가기 위해 뱀에 물리던 밤이 생각났다고 말하고 싶고

죽는 것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했지만 그가 별로 돌아가는 장면은 죽음의 장면이었고

그렇다면 죽음은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별은 멀어서 마음에 품고, 빛나서 동경하게 되는군 혼잣말을 하게 되었다.

육체의 집에 머무르지 못하는 영혼들이 실존의 숙박비를 지불하며 머무르고 있는

수많은 자신만의 별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아,

정신 차리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송경동의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이라는 시를 읽으며

한 번도 옥살이를 치러보지 않고 치열하게 살지 못한 차선의 삶에 대한

그의 회한이 가득하다.

어느 날 펼친 신문에서 ‘꿈꾸는 자 잡혀간다’는 그의 책제목을 보고 가슴이 무너져

고향에서 호수나 보고 금붕어나 걱정하고 있는 자신의 삶이 과연 온당한가 반문한다.

 

시골에서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냈을까 내심 궁금했었는데 서울로 올라온

그의 크리스마스는 아내의 고혈압걱정과 혈압에 좋다는 비트를 제 손으로 사다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으로 가득하다.

서로 갚을 것 없이 공평한 관계가 좋은 관계라는데 아내에, 세상에 대해 빚진 마음으로

고개를 쉽게 들지 못한다.

 

설을 앞두곤 밤을 뚫고 자전거 짐칸에 온갖 물건을 채워 돌아오시던 아버지를 회상한다.

가부장으로써의 권력을 모두 반납하고 흰 머리, 굽은 등을 가졌던 아버지를 그린다.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번영이 모두 그에게서 나왔음을 알라고 하는 말은 아마도 자신을

더 울렸던 것 같다.

 

경외심 없이 집어 들었던 책이 생각꺼리로 갈수록 속도가 떨어지고 있다.

책에 짱 박혀있던 눈을 들어 바깥을 바라보는 횟수가 많아진다.

밑줄을 긋다가 급기야는 빳빳하기 그지없는 책을 겁도 없이 접고 말았다.

(그리 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으니 그제서야 내 책이라는 현실감이 팍팍)

 

장편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출판기념회를 위해 쓴 글이 맨 뒤에 실려 있다.

작가는 뱀처럼, 들끓는 세상의 밑바닥에 배를 대고 가야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던 그는

정작 데뷔 당선소감에서 ‘문학 목매달아 죽어도 좋은 나무’라 했었다.

물론 현재는 그것이 너무 비장한 구호였다는 치기를 반성하고 있다.

<그 무엇이 됐든, 이것은 나의 유일한 권위, 감미, 유혹이라고 말하는

‘그 무엇’을 찾아 갖기 바랍니다.>

그가 제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독자들, 나아가 육체의 집을 안고

나이들어가는 인간 모두에게 하고 싶은 말이리라.

그렇게 해서 우리는 삶과 사람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않을 수 있는 것이고 이렇게

외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삶의 유한성에 도전을 받고 강력하고도 잔인한 실존의 문제에 먼저 부닥쳐 피를 흘리며

이정표가 되어주고 있는 그의 일기가 고마워진다.

우리는 누구나 시인이어서 그 시인을 횡격막 아래 숨게 하지 말고 해방시켜 춤추게 하여

삶을 빛나는 음악으로 만들라는 그의 생각이 고마워진다.

삶의 유한성이 주는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서 창조적인 작업에 열중하는 게 좋다는 충고가

억수로 고마워진다.

더불어 창조와 억제의 조화로 생생한 삶을 살기를 부탁받았다.

 

리모델링이 끝난 조정리집으로 돌아가서 ‘지신밟기’인 집들이를 하고나서야

논산의 전통과 충절과 합치되고 비로소 고향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매일 생살이 찢어지는 작가로, 더 깊고 넓은 사랑으로 큰 권력자가 되기를 바라는

그의 소원에 힘을 실어주고 싶어진다.

 

설거지를 할 때 물을 잠가야 음악소리가 들리듯 

나를 끄고 비우면 사물이 드러나고 세계가 보인다는 명제를

다시 표면으로 끌어올려준 그가 고맙다.

박범신!

(그는 분명 청년으로 살고 싶다했으므로 중년인 내가 이리 부르는 것을 달가워할 것이다.)

쌩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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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동이 어깨동무합니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김제동이 어깨동무 합니다 -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며
김제동 지음 / 위즈덤경향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어깨동무 내 동무, 미나리 밭에 앉았다!>

왜 우리는 어린 시절, 조그만 어깨를 붙잡고 똑같은 음정을 냅다 지르며

앉았다 일어나는 동작만으로도 그렇게 웃어댔을까.

지금 보면 뭐 이런 미개한 놀이가 있나 싶을 정도로  단순무식하지만

큰 웃음과 연대를 이루어냈던 것은 틀림없다.

요즘 아이들은 훨씬 놀 거리가 풍성해지고, 생활도 윤택해졌지만

웃음의 질은 오히려 떨어졌다는 생각은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니겠다.

웃음과 연대가 세상을 바꾼다는 김제동과 그의 동무들을 만났다.

 

 

 

 

한겨레신문 직설코너에서 '노무현관장사'라는 단어로 물의를 빚었던

한홍구, 서해성이 첫 손님이다.

웃음이란 상대방을 웃기고 싶다는 호감의 표현인데 그것이 어긋날 경우 , 혹은

웃을 생각이 없는데 억지로 웃게 만드는 경우 웃기고 자빠졌네라는 말을 쓰게 된다.

(예) 보온병, 지하벙커 가죽잠바, 쥐포스터

요즘 그런 일이 심심챦게 일어나고 있음에 세 남자는 동의한다.

제발 진실을 확장하는 '쇼'라도 일어나기를 원하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요즘 대권 주자로 떠오르며 일거수일투족이 신문에 오르내리는

안철수, 그리고 청년멘토 박경철.

이미 사업으로 큰 성공을 경험해 본 안철수는 성공을 이렇게 말한다.

일부는 본인의 공헌이었고 나머지는 사회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했다고.

나혼자 잘 먹고 잘 살려는 것은 천민자본주의라고.

그처럼 나누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자본가들이 많아지기를 희망한다.

 

 

 

<뜨거운 구슬을 쥐기 위해 손을 데지 않고 잡을 방법은 없어요.>

법륜스님은 사람들 대부분의 고민이 구슬도 갖고,

손도 안 데이는 방법이 없겠는지 하는 욕심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믿으면 두 가지가 다 된다고 말하는 데서 종교의 역할 역시 흔들리고 있다 말한다.

다른 사람을 고쳐서 행복해지려하지 말고 고쳐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 하니

행복의 주체는 분명히 나이로고!

 

뒤이어 대학에 들어가서 부모님께 죄송해진 평범한 대학생 두 명의 이야기가 나온다.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복수의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아르바이트 스케줄을 먼저 짜고

그 후에 강의 스케줄을 짜넣는다는 얘기는 단지 그들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졸업과 동시에 채무자로 사회에 나가야하는 그들의 현실앞에 여전히 높기만 한

우골탑!

등록금을 내려달라는 그들의 모임에 '반정부 시위'라는 더깨는 어디 가당키나 한가.

 

 

 

 

수입보다는 한우고기가 좋을 거라 생각해서 한 때 한우 홍보대사를 했었고,

현재 유기견 보호 활동을 하면서 채식주의자가 된 이효리.

대중의 관심을 요리하는 연예인으로써의 책임을 깨닫게 된 그녀는 요즘 성찰중이다.

<패밀리가 떴다>에서 닭을 잡으며 생명을 경시했던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제대로 된 육식을 하기 위해서는 육식을 줄여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신념은 계속 변할 수 있다.

나는 그녀가 자신에게 집중된 대중의 관심과 에너지를 좋은 방향으로 사용하기 바란다.

'텐미닛츠'같은 자아도취적 노래말과 율동이 아닌.

 

대한민국 언론인, 김어준

그는 남의 덕 볼 생각 없는 것이 자신의 가장 큰 무기라고 생각하고 있는만큼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 지도 안중에 없어보인다.

거침없는 발언때문에 혹 겁은 안나냐는 질문에

무엇을 하는 데 있어 그 대가를 지불할 의사가 있다면 그저 감수하는 것이라

대답하는 그에게서 투사의 비장함마저 보이는 것은 왜일까.

특정 주장을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주장을 해도 된다는 태도를 선동하는 것에

목표를 둔 그의 행보는 퍽 민주주의스러워 보인다.

김제동이 팬들로부터 부여받은 상징성으로 발언하는 것을 염치라 부르던데

어쨌거나 염치가 세상의 균형을 만든다는 것에는 동감이다.

 

짐승남 하정우?

그는 떳떳하고 바르고 진정한 것, 그래서 당당할 때 남자다움이 나올 수 있다 한다.

그의 수컷다움은 바로 당당함이라는 것,

그는 김제동에게 비욘세같은 스타일을 추천해주고 여자에게 말을 할 때는

열리고 유연한 표현을 해야한다고 충고한다.

그러나,

"우리 실수로 한 대 피워볼까요?"

금연카페 내부에서 자신의 장난기를 발동시켜 김제동과 대작을 했다하는데.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다는 것과 타인의 시선을 무시한다는 것과

같은 말은 아니리라.

이 에피소드는 편집의 묘미로 아름답게 잘라냈어야하는 것 아닌가 생각이다.

 

모든 학생을 서울대에 보낼 순 없어도 모든 학생을 민주시민으로 기르는 것은

가능하다는 곽노현교육감,

한 눈은 내 삶을, 또 다른 눈은 권력을 가진 자들을 보아야한다는 작가 공지영,

아름다운 음악인으로 살려면 세상을 보고 만지고 느껴야한다는 성악가 조수미.

가치로운 것과 연대한 이들을 바라보는 것은 참 흐뭇한 일이다.

 

이어 김제동에 대한 심층인터뷰가 덧붙여진다.

 

 

 

 

널리 인간을 웃기게 하자는 홍희인간(洪喜人間)의 이념으로 살고 있는 김제동,

연애에 있어서 '고미스타일(고맙고 미안한 스타일)'인 김제동.

그에게 엔터네이터, 소셜테이너, 휴먼테이너, 여러 수식어들이 붙지만 그는 정작

그런 별명들에 동의한 적 없고 (별명이 마음에 드는 사람은 거의 없을테지만)

사회자 김제동이 제일 마음에 든다고 한다.

그래서 웃음에는 좌도, 우도, 중도도 없다고 믿는 그는

동부이촌동에 30평대 집, 서래마을 80평짜리 전세집, 3000cc 제네시스, 그리고

무척이나 풍성한 현금을 갖고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그런 그가 이 모든 것을 누리며 사회적 약자와 함께 사회의 부당함에 침을 뱉는 것은

<함께 행복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라는 그의 철학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기특하다.

솔직히 나는 이 책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김제동이 만나러갑니다'를 통해서 이미 같은 형식의 책이 나왔기도 했거니와

본문 내용에서 안철수가 말했듯 어떤 사람의 말과 생각이 그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행동과 선택이 그 사람이기에 인터뷰라는 도구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상대방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도록 질문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인터뷰 당하고

싶어할 만큼 인터뷰어로써의 위상을 다진 그가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과 웃음으로,

연대로 세상의 잘못된 부분들을 고치려 노력했으면 좋겠다.

빚진 마음으로 응원 한 판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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