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8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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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지인의 블로그에서 '일곱 번째 아들이 태어나면 늑대인간이 된다'는

영화 나자리노의 포스팅을 보았다. 그래서 우리나라엔 '최진사댁 세째딸'이라는

노래가 있었고, 세째딸은 얼굴도 안보고 데려간다는 얘기로 괜히 목에 힘주고 다니는

그녀들을 보았었노라는 댓글을 달았었다.

유난히 숫자 '3'을 좋아한다는 우리 민족은 가위바위보를 해도 삼 세판,

화투에서도 세 번 흔들면 따블의 혜택을 주고

한 번만 더 그래봐 씩씩거리면서도 세 번까지는 봐준다는 말들이 생각났다.

문화에 따라 선호하는 숫자도 다르겠지만 그 숫자에 지워진 운명이 더 흥미롭다.

 

후안 데 라 가르사 집안에 막내딸 티타가 태어난다.

그것은 그녀가 결혼도 하지 못한 채 엄마가 돌아가실 때까지 보살펴드려야하는

운명을 안고 태어났다는 말이기도하다.

전통이 자식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모정보다 진하던가.

중미의 본가살이와 한국의 시집살이를 비교하며 어떤 게 더 독했던 걸까 눈을 굴려

본다. 혹시 계모여서 그런가 의심해보았으나 출산의 장면이 생생하다.

 

티타는 부엌에서 태어났기때문인지 부엌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요리사 나차로부터 음식을 배워가며 누구보다 훌륭한 손맛을 가지게 된다.

'끓는 기름에 도넛반죽을 넣는 것 같은' 페드로의 눈길에 사랑이 시작되었지만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마마 엘레나는 큰 딸 로사우라와 페드로를 보란듯이 결혼시킨다.

막내딸의 운명을 아는 페드로는 티타의 언니와 결혼함으로써 티타와 연결된 끈이라도

놓지 않고자했다.

차라리 둘이 보따리를 싸들고 도망 갔더라면 그토록 지리한 사랑의 숨바꼭질은

피할 수 있었으려나.

 

티타가 만든 음식에는 신비한 능력이 있었다.

부엌에서 권력이 나온다는 말이 있듯이 티타의 음식은 사람들의 감정을 조절하고

지배했다.

언니와 페드로의 결혼식 날 하객 모두들 구토의 도가니로 몰아넣기도 했고,

장미꽃잎을 넣은 메추라기 요리로 둘째 언니 헤르트루디스를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헤르트루디스의 열기는 샤워장을 불붙게 했고 무선으로 조정당하듯 달려온

혁명군 후안의 말 위에 올라타 격정의 사랑을 나누며 사라지게 했다.

(1910년대 멕시코는 독재자 포르피리오 디아스에 항거하는 멕시코 혁명이 시작된

시기였다. 33년 간 멕시코를 통치하면서 반대세력을 잔인하게 제거하고 언론의

자유를 금지했다.)

후일 창녀에서 혁명군 장교가 된 헤르트루디스가 다시 집을 찾아온 것은

크림튀김, 유월절의 빵과 같은 티타가 만든 음식에 대한 그리움때문이었다.

 

줄거리가 궁금하신가요 ▼

 

 페드로는 로사우라에게서 알베르토를 낳았으나 젖동냥을 해야만했다.

유모마저 사고를 당해 죽자 티타는 안절부절하며 알베르토를 측은히 바라본다. 그 때,

처녀인 티타의 가슴에서 젖이 뿜어져나오고 알베르토는 티타의 젖을 먹고 자란다.

연인을 뺏은 미안함보다는 자신의 남편을 넘본다는 피해의식으로 티타에게 적대감을

가진 로사우라.

자매들의 일이란 옷 뺏어 입기, 설거지 미루기, 내 것이랑 비교해보고 시기 질투하기

등을 벗어나지 못한 채 갈등의 골을 키우는 때가 많았으니.

페드로와 티타는 같은 집에 살면서 서로에게 향하는 욕정의 위기를 여러 번 넘기며

지낸다. 이를 본 마마 엘레나의 명령으로 페드로의 가족은 타지로 떠나고 그곳에서

알베르토는 죽고만다.

알베르토가 죽자 큰 슬픔에 잠겨 엄마가 그 아이를 죽였다며 마마 엘레나에게

도전하던 날, 티타는 주걱으로 얼굴을 심하게 맞고 피를 흘리며 정신줄을 살짝 놓는다.

하지만 첫 눈에 그녀를 사랑하게 된 존 브라운 박사의 헌신적인 보살핌으로 조금씩

회복해 간다.

 

다 읽으셨으면 ▲

 

티타의 사랑에 불을 붙여주고 싶었던 의사 존의 이야기 한 자락을 들어본다.

 

시다시피 우리 몸에도 인을 생산할 수 있는 물질이 있어요.

그보다 더한 것도 있죠.

리 모두 몸 안에 성냥갑 하나씩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혼자서는 그 성냥에

불을 당길 수 없다고 하셨죠.

방금 한 실험에서처럼 산소와 촛불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산소는 사랑하는 사람의 입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촛불은 펑하고 성냥불을 일으켜줄 수 있는 음식이나 음악, 애무, 언어,

소리가 되겠지요. 잠시 동안 우리는 그 강렬한 느낌에 현혹됩니다.

우리 몸 안에서는 따뜻한 열기가 피어오르지요.

이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사라지지만 나중에 다시 그 불길을 되살릴 수

있는 또 다른 폭발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각자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불꽃을

일으켜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만 합니다.

불꽃이 일면서 생기는 연소 작용이 영혼을 살찌우지요.

다시 말해 불꽃은 영혼의 양식인 것입니다.

자신의 불씨를 지펴줄 뭔가를 제 때 찾아내지 못하면 성냥갑이 축축해져서

한 개비의 불도 지필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영혼은 육체에서 달아나 자신을 살찌워 줄 양식을 찾아 홀로

칠흑 같이 어두운 곳을 헤매게 됩니다.

남겨두고 온 차갑고 힘없는 육체만이 그 양식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말입니다

 

줄거리가 더 알고 싶으신가요 ▼

 

 

티타는 허리가 부러져 거동이 불편해진 엄마를 보살피러 집으로 다시 돌아온다.

얼마 후 엄마가 돌아가시고 옷장에서 엄마의 비밀편지를 발견한다.

흑인혼혈인인 호세를 사랑했던 엄마는 집안의 반대에 부딪쳤었고

서둘러서 후안 데 라 가르사와 결혼을 했었고

호세와의 만남을 끝내지 못한 엘레나는 헤르트루디스를 낳았고

티타가 태어나던 날 그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남편 가르사는 심장마비로 죽게 되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엄마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고 이해하기 시작했다.

엄마와의 이별에 대한 느낌을 티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함께 자란 옆 상추와 갑자기 헤어진 상추의 느낌>

마마 엘레나가 죽고 페드로와 로사우라는 집으로 돌아와 에스페란사를 낳았다.

눈물겹게도 위대한 전통을 이어갈 막내딸의 탄생이었던 것이다.

죽을 때까지 엄마를 보살펴야하는 에스페란자의 운명을 위해 티타는 기꺼이 전통과

싸워나간다.

티타가 존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결혼식에 참석하실 숙모님을 모시러 떠난 사이,

페드로는 참아왔던 사랑과 질투심으로 티타의 처녀성을 빼앗는다.

오, 평화와 안정을 주는 그래서 존경해 마지않는 존,

다시 돌아온 존에게 티타가 이 결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하자 존이 말한다.

타, 당신이 뭘 했든 나는 상관없어요.

본질적인 게 바뀌지 않았다면 살면서 어떤 행동을 하든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다 읽으셨으면 ▲

 

존이 모르는 게 있었다면

그것은 여자들은 착한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어쨌거나 본질이 바뀐 티타는 페드로를 선택한다.

그러나, 후일 엄마 로사우라를 잃고 운명의 사슬에서 벗어난 에스페란사는

존 박사의 아들 알렉스의 눈길이 닿는 순간 '끓는 기름에 도넛 반죽을 넣었을 때와

같은 기분'을 느끼고 사랑에 빠진 후 결혼식에 고올~이인!

 

티타와 페드로도 이제 마음 놓고 사랑할 수 있게 되어 한껏 들떠있다.

호두소스를 얹은 칠레고추를 먹은 하객들 모두 파도처럼 밀려오는 성욕을 억제하지

못해 산으로 들로 나무로 사라지고

티타와 페드로 또한 피부를 뚫고 나와 체취로 변해버린 욕정을 태우기 위해 방으로

들어간다.

존은 쓸쓸히 집으로 돌아간다.

그는 티타의 성냥에 불을 당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페드로는 해방된 사랑의 절정에서 갑자기 숨을 멈추었고 페드로와 끝까지 함께 하고

싶은 티타는 성냥을 마구 삼켰고 이윽고 펑하고 불이 붙어 그들은 절정에 오른 사랑을

느끼며 함께 영원에 들었다.

 

사실 이 소설은 음식과 성과 페미니즘이 어우러진 소설로 잘 알려져있지만

그 관점에서 그닥 매력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음식에서 인생을 유추해내는 것으로 보면 영화'터치 오브 스파이스'의 감동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고 언니와 동생을 함께 아내로 묶어버리는 화합의 장은 불편했고

적혀진 레시피에서는 그닥 식욕을 느낀 것도 아니니

아마도 이 책을 단숨에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이것 봐라아~ 하며 마술적 리얼리즘의 몽환적 매력에 끌렸기때문인 것 같다.

사랑,

도대체 그 진부하고도 오랜 주제는 언제쯤이면 변주곡을 멈출텐가.

소음에 가까운 불협화음이라도 사랑의 존재는 인류에게 유익인가.

 

읽는 내내 '백 년의 고독' 냄새가 강하게 났고, 그 냄새의 이유는 맨 끝장에 이르러서야

드러났다.

영화감독인 남편과 함께 그녀가 시나리오를 쓴 <백 년의 고독>의 영화화를 앞두고

있었다 하는데 마르케스 사랑이 충만한 작가가 틀림없는 것이다.

누군가 남미문학이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다고 푸념을 했더랬다.

라틴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선 좀 더 넓은 가슴과 큰 눈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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