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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가끔 글쓰기에 있어 두 가지의 괴로움을 맛본다.
하나는 별 감동이 없는 글에 대해 스스로 소감을 강요받을 때 그러하고, 다른 하나는 너무나 극한
의 감동에 치우쳐 말들이 질서를 못 찾아 우왕좌왕 할 때 그러하다.
‘김수영을 위하여’는 당연히 후자의 괴로움에 속한다.
그것을 괴로움이라 불러도 괜찮다면.
1968년 6월 15일, 48세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던 날 밤,
누가 보기에도 더러웠던 세상과 유독 불화했던 김수영은 그 날 따라 만취했었고 귀가길에 달려드
는 차를 피하지 못했다.
6.25가 갈라놓은 신혼의 보금자리, 아내의 변심, 그로 인하여 사랑에 대한 염증으로 변변한 사랑시
하나 남기지못했던 한 남자의 생애가 드라마틱하게 흐른다.
그러다 그의 시, ‘벽’에서 그의 섬뜩한 시심을 본다.
장판 위를 물걸레질 하다가 아내가 흘린 머리카락을 발견하고는 집어서 버리려 했는데
아, 고것이 자개장에 박힌 자개처럼 떼어내기가 어렵더라는 것이다.
쥐어도 안 잡히고 쥐어도 안 잡히고.
변심했다가 돌아온 아내와 자신의 관계가 그러했던 것일까.
머리카락이나 먼지들이 닦이지 않고 자리를 옮기면서 피해다니는 그 광경을 그는 ‘벽’이라 표현했
다. 그리고 사태와 자기가 하나로 붙어서 생긴 타성을 벽이라 불렀다.
쥐어도 안 잡히고 쥐어도 안 잡히고.
물기 있는 장판에서 머리카락을 잡아 올리려다 장판에 손톱 자국을 몇 번 아로새기며 문득 아련한
어떤 복수심같은 것이 솟아 오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쥐어도 안 잡히고 쥐어도 안 잡히고'의 정서에 깔린 그 울화를.
젖은 머리카락 같은 인생의 벽들을 치고싶은 그 무능력을.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아이들을 키우면서 교육에 대해 허용된 자유라는 것이 억압의 다른 이름이 되므로 그 체
제를 벗어난 자유정신이 인문학이라 말한다.
(자신의 진로를 스스로 주체의 눈으로 정하고 학교라는 관료적 구조에 염증을 느껴 학교를 그만두
겠다는 학생들에 대하여 '부적응자'라는 낙인대신 나도 모르게 '깬 자식들이지'라고 말하고 말았
다. 이게 이 책의 효과이다. -.-; 내 자식이 그런다면 여전히 "저게 나랑 무신 웬수가 져서 저 난리
야" 하며 이마에 하얀 천을 두르고 침대로 투신했겠지만.)
그렇기에 정치권력과 거대한 자본이 결탁한 현대사회에서 인문학의 위기와 소멸은 당연한 결과라
는 것이 느껴진다.체제를 반대하고 무너뜨리려는 불온한 세력에 대한 차단과 유배와 응징,
체제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 혹은 체제가 흔들리면 같이 흔들리게 될 사람들은 결코 일반인들을 부
채질하는 인문학이라는 무기를 방관할 수 없는 것이다.
설령 흔들리는 것이 바람직한 사회로 가는 지름길이라 해도.
김수영은 말했다.
시란 온몸으로 밀고 나가야하는 것이어야 한다.
시는 반역의 마음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심화시켜야한다.
7할의 고민과 3할의 시의 총화가 행동으로 나타나야한다.
강신주는 말한다.
시는 저항이 있어야한다.
작은 돌이라도 들어야 땀이 나게 마련. 그 땀이 이야기하는 것이다.
시의 모더니티란 외부로부터 부과하는 감각이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지성의 화염이다.
무의미는 시인에게 '당신이 의미를 빼앗아 갔으니 당신이 새로운 의미를 채워야한다'고
강제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의미가 사태에 채워지는 순간, 시가 탄생한다! 기정사실은
시인의 적! p167
이 쯤 되면 불평이 쏟아질 것이다. 그렇게 어려워서야 어떻게 시를 쓰겠느냐.
차라리 그냥 안보고 안쓰고 살란다. 하지만 각자 영혼의 속살에 내재한 시심이 그렇게 고분고분하지는 않은 것 같다. 영혼의 속살을 파헤쳐 잔가시도 다 발라낸 단독성을 위하여 몸서리쳐보고 싶은생각을 그냥 숨겨만 둘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김수영과 강신주는 이렇게 불온한 시심에 군불을 때고 있는 것이다. 마치 이렇게 묻고 있는 듯 하다.
"알고 싶지 않은가. 나를 파괴하면 발견되는 것이 침몰된 아름다운 성인지 폐허인지."
그러나 밀란 쿤데라가 '광기는 인류와의 결별'이라고 소설에서 말한 것처럼 그 작업은 철저히 무리에서 떨어져나와 외로워져야하는 과정을 거쳐야하는 것이다. 일반인의 시심을 누르는 강력한 탄압의 주체는 다름아닌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인 것이다. 그래서 결단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 나도, 당신도.
온몸, 팽이, 자유정신이라는 단어를 이 책에서 뺀다면 책의 두께가 한 삼분의 일 정도 줄지않을까싶을 정도로 책 속을 뚫고 종횡무진하는 이 단어들의 접착을 나는 부러워하면서도 두려워하고 있다.
부록에 실린 사진에서 그는 목이 늘어난 셔츠에 오른손으로 무성의하게 광대뼈를 받치고 있다.
이게 어디 "자, 이제 사진 찍겠습니다. 포즈 좀 취해주세요."에 대한 자세인가.
이것은 ‘어디, 니 꼴리는 대로 해 봐, 난 상관 안 할테니...’하는 진정한 제낌의 자세이다.
그 어디를 눌러도 즉시 반항의 국물이 뚝뚝 흘러내릴 것 같은 그 얼굴표정은 말 한마디 허투루 붙
였다가는 된통 당할 것만 같다.
어렸을 적 동네에 집 앞에 의자를 들고 나와 앉아 시끄럽게 노는 어린이들을 늘 혼내는 아저씨가
한 명씩 있게 마련이었는데 꼭 그런 아저씨의 이미지이다. 불친절함의 대명사 같은.
강신주는 인터넷과 거대자본과 거대언론의 출현으로 우리는 더욱 야만적인 사회에 던져지게 되었
음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1960년대에는 김수영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가 없다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한다.
(아, 오늘 신문에 보니 경찰청에서 키워드 검색어 160개를 정해놓고 6시간마다 자동검색으로 지속
적인 수집과 감시를 해왔다는데, 그 검색어 중에는 '정치 사상' '사회주의' '위대한' '변혁' '공동선
언'등과 같은 흔한 표현도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위대한 탄생'을 '위탄'이라 줄여서 불렀던 것
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흠)
그러나 김수영의 재림을 바라지 말고 그의 반역정신을 계승하여 균형을 잃어가는 이 사회에
작은 김수영이 되자는 제안과 부탁을 동시에 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저자 강신주는 김수영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하여 어느 깊은 밤 혼자 술잔을 기울
이며 김수영을 앞자리에 앉혀놓고 세상 돌아가는 게 뭐 이래 하며 술잔을 주고 받으며 건배를 하다
가 제목을 지었을지도 모르겠다.
"자, 자, 건배나 한 번 하자구요."
"조오치, 그래, 뭐라고 하면 좋을까."
“그냥 '위하여'하면서 마시면 이 술이 맹물됩니다. 이거 어때요? 김수영을 위하여...하하하”
"에잇, 이 사람, 싱겁기는.....하하하하"
꼭 만족해야 크게 웃는 세상이 아니듯이 삶과 죽음을 경험한 죽은 시인과 이제는 그를 보내
드린다는 어느 한 철학가의 술상에서 <죽은 시인의 사회>를 엿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