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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
정호승.안도현.장석남.하응백 지음 / 공감의기쁨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책표지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르뽀와 판타지의 짬뽕같은 오묘한 느낌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공을 들인 정품이 아니라 오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급하게 만들어진 기획상품이라는 걸 알면서도 사고 싶어 뒤적거리게 하는 힘이 있다고나 할까.

표지하단에는 해질녘 머리에 큰 짐을 머리에 인 어른 둘과 생각없이 곁을 따르는 두 아이.

뿌연 하늘에는 저자들의 이름과 이름이 직선으로 이어져있다. 그것은 깊게 헤아리지 않아도 별자리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큰 여백에 상대적으로 작은 사람들, 지는 해의 빛은 한없이 부드럽고 넓게 펼쳐진 하늘엔 시인들의 별자리가 선명하다. 별을 보고 예수를 찾아갔던 동방박사들처럼 시인들도 독자들에게 삶의 궁극으로 이르는 길을 보여주겠다는 뜻인가?

실제로 이 책은 2006년 <사랑은 다 그렇다>로 나왔다가 제목과 구성을 바꾸어 나온 책이라는 것을 먼저 알려주어야겠다. 다른 책인줄 알고 새로 샀다가 낭패당하는 일 없으시도록!

 

이 책은 세 명의 시인과 한 명의 평론가가 쓴 산문집이다. 자신들의 삶에 길이길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시들을 끌어올려 그들만의 고유한 잔에 담아 우리에게 들이밀고 있다. 할 말 시원하게 할 수 있는 산문을 통하여 자신의 담백함과 화려함을 동시에 뽐내기도 한다.

 

정호승- 기다린다는 것은 오지 않는단 것을..

 

안도현의 <고래를 기다리며>는 정호승 시인에게 젊은 시절 품었던'바다를 바라보며 국어를 가르치는 고래 같은 인간’에의 소망을 떠올리게 한다.

무엇을 기다리는 일이란 오래 지속되면 본질을 망각하고 기다림을 상상으로 채우게 되지 않는가.

오지 않아도 기다리는 일, 그것에서 시인은 자유와 민주를 꿈꾸기도 했다.

우리의 삶이란 결국 무엇을 기다려야하는가에 대한 끈질긴 물음이며 그 질문과 보기를 다음 세대에 왕관처럼 성스럽게 넘겨주는 일이 되겠다. 그러나 세상의 역설적인 일들을 모두 시인에게만 맡겨둔다면 우리 민간인들의 현실은 너무 무미건조하지 않을까.

 또한, 시인은 신경림의 <봄날>을 보고 어렸을 적 경주에 계신 외할머니댁 방문했을 때를 떠올린다. 반가움이 결여된 채 표정 없이 맞아주시던 할머니가 몹시 서운했다한다. 그러나 새벽에 소변을 보러 마당을 질러 화장실에 다녀오던 길, 진눈깨비 속에서도 시인이 잠든 방 아궁이 앞에서 군불을 때는 할머니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곤 생각한다

‘사랑한다는 백 마디 말보다 말없이 새벽에 일어나 손자가 자는 방에 군불을 지피는 것이 바로 사랑의 원형이 아닐까.’

(개인적으로는 이 '사랑의 군불'로 마음이 따뜻해졌다.)

 

 안도현 - 그릴 수 없는 마음의 빛깔까지도

 

“그 고색창연한 사랑법이 때로는 사람과 사람사이에 없던 다리를 놓고, 이미 놓인 다리를 더 튼튼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시 한 줄로 여인을 낚아 본 적 있는 안도현시인의 사랑법이다. 누구에게나 통하는 연애법은 아니겠지만 시 한 줄의 인용으로 마음이 엮일 수 있다면 그 사랑은 그 어느 때보다, 그 누구보다 뜨겁게 타오르리라. 그의 충고에 의하면 연애시절 시 한 편 읽어주지 않는 남자, 서점에서 시집을 읽다가 다리가 저려본 적 없는 여자, 모두 버리란다. 흠.

 그리고 김현승 시인의 <절대고독>을 보고 하도 외우고 따라하다가 지천명에 깨달은 것,

그것은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였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절대고독보다 못한 만남들을 지속하는 현대인들,

자신을 들여다볼 시간을 강탈당하면서도 SNS가 해법인 것처럼 매달려 사는 현대인들.

그것을 인간관계라 느끼는 헛된 망상에 침을 뱉는다. 시여!

 

장석남 - 우리의 희망이 꽃피는 절망일지라도

 

장석남 시인의 <안부>에 서린 곱고 여성스럽고 소극적인 정서를 나는 좋아한다. 그 고움에 대한 기억은 정현종 시인의 <나는 별아저씨>에 안착하게 한다. 별은 시인과 육친적 관계라나.

모든 낯선 것들을 인척지간으로 만들어놓는 정현종 시인의 탁월한 복속력에서 시인 또한 자신을 별 조카, 바람 조카라고 자부한다. 그리고 별, 바람, 침묵의 못된 족보를 시학이라 부르고 싶어한다.

오규원 시인의 <분식집에서>를 읽고는 '낙태를 하고 분식집에 가서 라면을 먹어보라'는 권유형 명령을 한다. 여기에서 낙태란 세상에서 모든 자발성의 상실을 말한다고 하는데 이 ‘꽃 피는 절망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하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건지는 모르나 그것은 신의 일인 것만은 확실하다는 생각을 한다.'

천상병의 <강물>에서 만난 소년의 눈물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리고 그 울음이 순리에 대한 발견의 서글픔인지, 순명에 대한 발견이 설움인지, 혹 사랑의 문제도 그러한지 묻고 또 묻는다.

 

난해한 문제와 그로테스크한 답으로 만나는 시에서 벗어날 때 시는 힘이 있어진다.

시의 해석에 있어서 공식이 없다는데 제발 정답 같은 건 제시하지도 요구하지도 말라.

시는 이해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느끼기 위한 것이므로.

시.

그것은 자신만의 상처로 데려다주는 위대한 안내자,

통증만이 자신의 정체성이다.

 

p.s. 시의 전문을 다 알지 못했던 나는 원 싯귀와 시인의 느낌의 경계가 느슨해서 조금 혼란스웠다.맨끝에 붙어있는 참고시는 좀 불친절했다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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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랑은 다 그렇다'는 고백들
    from PAPERAND by G 2012-10-21 01:28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또 다른 세계로 여행한다. 내가 이전에 알지 못했던 낯선 세계. 그 속에서는 '나'가 아닌 '우리'의 말들이 살아나고, 그 말들은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을 실어 나른다. 다시 돌아오는 무엇을 기다리거나 그러다가 지쳐 쓰러지거나 그 모두 사랑에 빠졌을 때 겪어내야 할 몫이다. 덧없는 사랑의 찌꺼기 같은, 온갖 그리움과 절망과 슬픔은 삶의 보석이 된다. 시인에게는 보통 사람들과 다른 눈과 영혼이 있다. 그래서 시인들의 언어로
 
 
 
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가끔 글쓰기에 있어 두 가지의 괴로움을 맛본다.

하나는 별 감동이 없는 글에 대해 스스로 소감을 강요받을 때 그러하고, 다른 하나는 너무나 극한

의 감동에 치우쳐 말들이 질서를 못 찾아 우왕좌왕 할 때 그러하다.

‘김수영을 위하여’는 당연히 후자의 괴로움에 속한다.

그것을 괴로움이라 불러도 괜찮다면.

 

1968년 6월 15일, 48세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던 날 밤,

누가 보기에도 더러웠던 세상과 유독 불화했던 김수영은 그 날 따라 만취했었고 귀가길에 달려드

는 차를 피하지 못했다.

6.25가 갈라놓은 신혼의 보금자리, 아내의 변심, 그로 인하여 사랑에 대한 염증으로 변변한 사랑시

하나 남기지못했던 한 남자의 생애가 드라마틱하게 흐른다.

 

그러다 그의 시, ‘벽’에서 그의 섬뜩한 시심을 본다.

장판 위를 물걸레질 하다가 아내가 흘린 머리카락을 발견하고는 집어서 버리려 했는데

아, 고것이 자개장에 박힌 자개처럼 떼어내기가 어렵더라는 것이다.

쥐어도 안 잡히고 쥐어도 안 잡히고.

변심했다가 돌아온 아내와 자신의 관계가 그러했던 것일까.

머리카락이나 먼지들이 닦이지 않고 자리를 옮기면서 피해다니는 그 광경을 그는 ‘벽’이라 표현했

다. 그리고 사태와 자기가 하나로 붙어서 생긴 타성을 벽이라 불렀다.

쥐어도 안 잡히고 쥐어도 안 잡히고.

물기 있는 장판에서 머리카락을 잡아 올리려다 장판에 손톱 자국을 몇 번 아로새기며 문득 아련한

어떤 복수심같은 것이 솟아 오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쥐어도 안 잡히고 쥐어도 안 잡히고'의 정서에 깔린 그 울화를.

젖은 머리카락 같은 인생의 벽들을 치고싶은 그 무능력을.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아이들을 키우면서 교육에 대해 허용된 자유라는 것이 억압의 다른 이름이 되므로 그 체

제를 벗어난 자유정신이 인문학이라 말한다.

(자신의 진로를 스스로 주체의 눈으로 정하고 학교라는 관료적 구조에 염증을 느껴 학교를 그만두

겠다는 학생들에 대하여 '부적응자'라는 낙인대신 나도 모르게 '깬 자식들이지'라고 말하고 말았

다. 이게 이 책의 효과이다. -.-; 내 자식이 그런다면 여전히 "저게 나랑 무신 웬수가 져서 저 난리

야" 하며 이마에 하얀 천을 두르고 침대로 투신했겠지만.)

 

그렇기에 정치권력과 거대한 자본이 결탁한 현대사회에서 인문학의 위기와 소멸은 당연한 결과라

는 것이 느껴진다.체제를 반대하고 무너뜨리려는 불온한 세력에 대한 차단과 유배와 응징,

체제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 혹은 체제가 흔들리면 같이 흔들리게 될 사람들은 결코 일반인들을 부

채질하는 인문학이라는 무기를 방관할 수 없는 것이다.

설령 흔들리는 것이 바람직한 사회로 가는 지름길이라 해도.

 

김수영은 말했다.

시란 온몸으로 밀고 나가야하는 것이어야 한다.

시는 반역의 마음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심화시켜야한다.

7할의 고민과 3할의 시의 총화가 행동으로 나타나야한다.

 

강신주는 말한다.

시는 저항이 있어야한다.

작은 돌이라도 들어야 땀이 나게 마련. 그 땀이 이야기하는 것이다.

시의 모더니티란 외부로부터 부과하는 감각이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지성의 화염이다.

무의미는 시인에게 '당신이 의미를 빼앗아 갔으니 당신이 새로운 의미를 채워야한다'고

강제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의미가 사태에 채워지는 순간, 시가 탄생한다! 기정사실은

시인의 적! p167

 

이 쯤 되면 불평이 쏟아질 것이다. 그렇게 어려워서야 어떻게 시를 쓰겠느냐.

차라리 그냥 안보고 안쓰고 살란다. 하지만 각자 영혼의 속살에 내재한 시심이 그렇게 고분고분하지는 않은 것 같다. 영혼의 속살을 파헤쳐 잔가시도 다 발라낸 단독성을 위하여 몸서리쳐보고 싶은생각을 그냥 숨겨만 둘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김수영과 강신주는 이렇게 불온한 시심에 군불을 때고 있는 것이다. 마치 이렇게 묻고 있는 듯 하다.

"알고 싶지 않은가. 나를 파괴하면 발견되는 것이 침몰된 아름다운 성인지 폐허인지."

 

그러나 밀란 쿤데라가 '광기는 인류와의 결별'이라고 소설에서 말한 것처럼 그 작업은 철저히 무리에서 떨어져나와 외로워져야하는 과정을 거쳐야하는 것이다. 일반인의 시심을 누르는 강력한 탄압의 주체는 다름아닌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인 것이다. 그래서 결단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 나도, 당신도.

온몸, 팽이, 자유정신이라는 단어를 이 책에서 뺀다면 책의 두께가 한 삼분의 일 정도 줄지않을까싶을 정도로 책 속을 뚫고 종횡무진하는 이 단어들의 접착을 나는 부러워하면서도 두려워하고 있다.

 

 

 

부록에 실린 사진에서 그는 목이 늘어난 셔츠에 오른손으로 무성의하게 광대뼈를 받치고 있다.

이게 어디 "자, 이제 사진 찍겠습니다. 포즈 좀 취해주세요."에 대한 자세인가.

이것은 ‘어디, 니 꼴리는 대로 해 봐, 난 상관 안 할테니...’하는 진정한 제낌의 자세이다.

그 어디를 눌러도 즉시 반항의 국물이 뚝뚝 흘러내릴 것 같은 그 얼굴표정은 말 한마디 허투루 붙

였다가는 된통 당할 것만 같다.

어렸을 적 동네에 집 앞에 의자를 들고 나와 앉아 시끄럽게 노는 어린이들을 늘 혼내는 아저씨가

한 명씩 있게 마련이었는데 꼭 그런 아저씨의 이미지이다. 불친절함의 대명사 같은.

 

강신주는 인터넷과 거대자본과 거대언론의 출현으로 우리는 더욱 야만적인 사회에 던져지게 되었

음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1960년대에는 김수영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가 없다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한다.

(아, 오늘 신문에 보니 경찰청에서 키워드 검색어 160개를 정해놓고 6시간마다 자동검색으로 지속

적인 수집과 감시를 해왔다는데, 그 검색어 중에는 '정치 사상' '사회주의' '위대한' '변혁' '공동선

언'등과 같은 흔한 표현도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위대한 탄생'을 '위탄'이라 줄여서 불렀던 것

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흠)

그러나 김수영의 재림을 바라지 말고 그의 반역정신을 계승하여 균형을 잃어가는 이 사회에

작은 김수영이 되자는 제안과 부탁을 동시에 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저자 강신주는 김수영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하여 어느 깊은 밤 혼자 술잔을 기울

이며 김수영을 앞자리에 앉혀놓고 세상 돌아가는 게 뭐 이래 하며 술잔을 주고 받으며 건배를 하다

가 제목을 지었을지도 모르겠다.

"자, 자, 건배나 한 번 하자구요."

"조오치, 그래, 뭐라고 하면 좋을까."

“그냥 '위하여'하면서 마시면 이 술이 맹물됩니다. 이거 어때요?  김수영을 위하여...하하하”

"에잇, 이 사람, 싱겁기는.....하하하하"

꼭 만족해야 크게 웃는 세상이 아니듯이 삶과 죽음을 경험한 죽은 시인과 이제는 그를 보내

드린다는 어느 한 철학가의 술상에서 <죽은 시인의 사회>를 엿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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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은 가수 이용의 <잊혀진 계절>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하는 운명의 달이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고...

좋은 것이면 추억이겠고, 나쁜 것이면 협박이 될 노랫말을 들으며 좀 좋은 기억을 가져보자고 자신에게 격려하고 제안하는 달인 것이다.

 어느 덧 신간평가단의 마지막 페이퍼란다.

6개월동안 나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과 신간평가단의 책을 버무려가면서 섞어 읽는 재미를 누렸다. 아쉽게도 내가 원했던 책은 (징그럽게도) 한 권도 채택이 되지 않아 읽을 수 없는 불행을 겪었으나 남들이 선택한 그 잘난(?) 책들을 넘겨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오늘도 세상 끝에서 외박 중
김진만 지음 / 리더스북

 

피디가 되면 출근도 퇴근도 마음대로라는 말에 일류대학생이었던 저자는 고시공부를 접고 피디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예능국에 있을 때부터 "너 , 다큐 찍냐?"라는 말을 종종 들었다는 그가 교양국으로 자리를 옮겨 가슴이 따뜻한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아마존의 눈물><남극의 눈물>이 그의 작품들이다.

방송가에서 만나게 된 사람들과의 부딪침을 아주 감칠맛나게 쓰고 있다. 미리보기 보다가 나도 모르게 너무 크게 웃었다.

 

 

 

 

저 불빛들을 기억해
나희덕 글.사진 / 하늘바람별 

 

나는 시인들의 에세이가 좋다. 비평가들이 쓴 얘가 어쩌고 쟤가 어쩌고 하는 식이 아닌 그 긍정의 힘이 좋다.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 여류시인의 이름 중에서 나는 나희덕이라는 이름을 좋아한다. 왠지 시적이다.

충남 논산에서 출생해 에덴과도 같았던 시골을 버리고 상경하여 성장한 이야기들과 삶의 단상들을 13년만에 내놓았다.

 

 

 

 

 

 

한 줄로 사랑했다
윤수정 지음 / 달  

그녀를 전기현의 씨네뮤직에서 보았다. 영화를 소개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아, 저 여자 정말 말 예쁘게 한다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그래서 그녀의 책 크리에이티브 테라피를 읽으면 말을 예쁘게 하게 될까해서 조용히 책장을 넘겼던 기억이 난다.

그녀가 그간 보여준 한 줄의 카피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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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도끼로 내 삶을 깨워라 - 문정희 산문집
문정희 지음 / 다산책방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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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6학년짜리 작은 아이가 일어나 깎아놓은 사과를 보더니 "오, 금사과" 하고 외친다.

예이츠의 <방랑하는 잉거스의 노래>에 나오는 금빛사과를 이 아이가 혹시 아는가 싶어 '이 넘,

다시 봐야겠네? 홀딱 놀란 마음에 "너 그거 어떻게 알아?" 하고 은근 기대를 담뿍 담고 물으니

"아침에 먹는 사과는 금사과, 저녁에 먹는 사과는 똥사과라면서?"

흠, 그래. 내가 너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랐구나 하며 혼자 탈의미의 웃음을 웃고 말았다.

 

이제 막 책장을 덮은 문정희님의 에세이 <문학의 도끼로 내 삶을 깨워라>에서 조나단 스위프트, 사무엘 베케트,셰이머스 히니, 오스카 와일드, 버나드 쇼, 그리고 예이츠를 품고 있는 아일랜드라는 나라를 만나려고 나는 아침부터 국경없는 착각으로 금사과를 그리도 밝혔나보다.

 

<방랑하는 잉거스의 노래>는 꿈속에 나타나 하프를 켜며 노래를 부르는 크르의 아름다운 모습에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을 찾아 온 나라를 헤매고 다니던 잉거스가 결국엔 사랑도 얻고 사랑과 젊음, 꿈의 신이 된다는 켈트신화 'The dream of Aengus'의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이 시는 영화 <메디슨카운티의 다리>에서 극적인 장치로 쓰여 더욱 유명하다.

시보다 더 시적인 암시로 쓰여진 예이츠의 이 시를 나는 몇 번을 보고서야 이해했었다.

고급스럽게 말할 수 있는 로버트의 입과 그걸 알아먹을 수 있는 프란체스카의 귀가 있었기에 그런 전설적인 사랑도 존재할 수 있었겠다.

아하, 불꽃같은 사랑의 시작에는 그런 고도의 정신머리는 있어줘야겠구나 하는.

둔한 입술과 먹먹한 귀를 가지고서 그런 사랑은 아예 꿈도 꾸지말라는 교훈(?)을 얻는다.

 

아일랜드의 회색빛 공기와 비. 그 비바람을 견디기 위해 생겨났을 럼주 섞인 아이리쉬 커피와

한약냄새가 난다는 진한 기네스맥주,,,,

눈을 감고 쿰쿰대며 아일랜드로 가는 길을 내기 위해 연신 삽질을 해보았다.

그 부질없고 닿을 길 없는 삽질을.

 

문정희 시인은 진명여고 재학 중 백일장을 석권하고 여고생으로서는 한국 최초로 시집 <꽃숨>을

발간하여 당시 세간에서는 프랑스의 천재소설가 프랑스와즈 사강에 견주어졌었다고 한다.

생의 거의 전부를 시 속에서 눈 뜨고 시 속에서 밥 먹고 시 속에서 잠든 여자,

그녀의 전 재산은 외로움과 고통과 위험이 전부였다는데,

이상에서나 필요함직한 큰 날개를 달고 현실에 착지하여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로 조롱받고 사는

시인의 삶을 산다는데,

그녀에게 있어 문학이란 망루였고 오아시스였고 동시에 폐허였다는데,

자신이 낳은 아름다운 생명이 죽은 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는데,

그녀가 자신에게 수도 없이 하는 말이, 그저 그냥 쓰고 또 쓰라는 것이라는데.

 

<머리감는 여자>

 

시인이 멕시코 중부 치첸시아라는 곳을 여행할 때 밀림 끝의 작은 마을에 들어서게 된다.

그 곳에서 본 것은 평화롭게 돌아다니는 돼지와 거위들, 해먹에 누워 구름을 세는 아이들.

그보다 더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마당 한켠에서 말구유에 상체를 구부리고 받아놓은 빗물로 머리를 감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풍성한 허리, 출렁이는 젖가슴, 그을린 피부의 그녀를 보고 여태껏 그보다 더 당당하고 아름다운 여성을 본 일이 없다 고백한다. 그리고 문명에 대한 반성이 이어진다.

 

'물질문명의 산물인 유명상표가 달린 블루진 바지를 세련된 듯 입고 있었고 그럴 듯한 선그라스와

최신 휴대폰을 들고 있었지만 이 너덜거리는 문명의 옷가지를 걸치기 위해 싱싱한 생명력과

자유를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 자본주의 상인이 만든 저울과 줄자에 맞는 몸매를 만들기 위해

온갖 방식으로 육체를 억압하는 화장 짙은 도시 여자들의 생기없고 마른 모습도 떠올랐다.

어느 곳이 진정한 문명도시요, 어느 곳이 야만의 정글일까.'

 

        

<화석 옆에 놓인 국화꽃 한 다발>

 

“한국의 어느 동굴에서 2만년 전의 소년 화석이 발굴되었는데 단층 촬영을 해보니 그 주검 옆에 국화 꽃다발을 놓은 흔적이 있었다.”는 어느 시인의 말에 ‘세계평화 만해 시축전’에 참가한 나이지리아의 시인 윌레 소잉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부패가 진행되는 곳에서 찾는 아름다움이란 점에서 시적이다.”

세상의 부패 옆에 놓일 국화꽃 한 다발을 찾아가는 것이 바로 시가 아니겠는가라는 저자의 해석 또한 가슴에 남는다. 누구나 자기 자신에게 줄 국화꽃 한 다발을 위해 이렇게 눈물나게 하루하루를 견디며 사는 것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날마다 오래되어 낡아지며 어찌보면 산 채로 부패되어 가고 있는 자신을 꽃으로 향기를 돋우워

새롭게 만들어 나가라는 뜻이 아닐까. 그녀 말대로 모든 시간은 다 새 것이니까.

진짜 향기로운 국화꽃들로 피어날 가을을 그녀와 함께 나도 진심으로 바라게 되는 것이다.

 

등학교 때 쓴 위문편지를 담임선생님께서 아이들 앞에서 읽어주시며 “문정희는 앞으로 훌륭한 문학가가 될 거다”는 칭찬을 마음에 품어 시인으로써의 꿈의 기틀을 잡았고 고등학교때는 전국 백일장의 기수로 만들어주셨다는 선생님의 도움으로 뼈대를 세웠으며 유학을 떠날 때 자신의 집 난초에 그녀의 이름을 새겨놓고 매일 물을 주셨다는 국문학자와 논문지도를 해주시던 선생님의 아낌없는 사랑의 지도로 오늘의 그녀가 만들어졌다 한다.

선생님은 제자의 작은 재능을 발견하고, 학생은 선생님을 향한 존경과 신뢰로 따르던 그녀의 배움의 과정은 오늘날 얼마나 부러운 일인가.

 

시는 벼락을 맞는 것과 같아서 하지만 비를 기다리기만은 할 수 없어서 스스로 큰 비를 만들어서 살아왔던 그녀의 삶이 어찌 비단 같은 문장만으로 가득하겠는가.

하지만 글을 쓸 때만이 살아있는 목숨이고, 그녀의 최대의 영광은 글을 쓸 때뿐, 그 다음은 없는 것이라는, 온통 문학뿐인 그녀의 삶이 하나의 문학박물관처럼 느껴진다.

 

지막 장을 넘기고 책표지를 덮을 때면 나는 주먹을 쥐고 책의 가운데부분을 쾅쾅 두 번 내리치는 버릇이 있다. 물론 두꺼운 책을 덮을 때 나의 주먹질은 뿌듯함에 더욱 거세어진다. 255쪽의 <문학의 도끼로 내 삶을 깨워라>를 덮으면서는 비교적 우아한 쾅쾅이 퍼졌다. 그러나 순간 책의 중앙을 내리치는 나의 주먹이 도끼로 보였고 그러다보니 이 의식은 좀 더 의미가 있어졌으며 이 책이 오래도록 가슴에 살아남으리라는 예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책이 주는 즐거움과 신념들의 탄생이 부디 오래도록 도끼자국으로 남아 상처인 듯, 문신인 듯 육안으로도 들여다보고 거울로도 비춰보아 매무새를 가다듬는데 쓰였으면 좋겠다.

 

문학의 장총으로 삶을 뚫어라,

문학의 탱크로 삶을 밀어라,

문학의 핵무기로 삶을 박살내라.

뭐 이런 자극적인 제목이 필요하지 않도록 이쯤에서 삶을 깨워줘야겠다.

일어나라, 수고로운 무지의 아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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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의 시간 - 도시락으로 만나는 가슴 따뜻한 인생 이야기
아베 나오미.아베 사토루 지음, 이은정 옮김 / 인디고(글담)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공부가 힘들다며 몸을 배배 꼬는 아이에게 한 마디 했다.

“해주는 밥 먹으면서 공부할 때가 제일 행복한 줄 알아~

엄마는 소원이 해주는 먹으면서 공부 하는 거다, 이 눔아~“

뭐 이런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가 다 있나 눈을 크게 뜨고 아이가 묻는다.

“정말 그게 소원이야?”

 

책봉투를 받아들고서는 도시락 메뉴 좀 늘려서 애들 수련회 갈 때 써먹어야지 했더랬다.매일 먹어 서 질리는 밑반찬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도 좀 얻을 수 있겠구나 했다. 그러나 이게 웬걸? 일본인의 도시락 이야기였다. 도시락으로 만나는 가슴 따뜻한 인생이야기가 목표라면 더할 나위없는 달성이다.

‘폭풍처럼 다가오는 감동의 도시락 이야기’라는 박찬일 셰프의 추천사는 좀 뻥이군 싶었지만 도시락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목이 메는 그런 시절을 누구나 떠올리며 지난 시절을 들여다보게 하는 힘이 있다.

도시락을 싸줄만한 부지런한 엄마도, 착실한 살림꾼도 아닌 나는 그들이 펼쳐놓은 도시락 앞에서 경외심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분명 아침잠을 설쳤을 그 누군가의 손길이, 누군가의 희생이 느껴져서 말이다. 그것도 아주 먼 훗날에 이해될 희생이.

 

책을 엮으며 사진을 찍으며 저자가 원했던 것은 이 책을 통하여 각자의 추억 속에서 잠자던 학창시절의 도시락통을 떠올려보고 그것을 준비해주던 젊은 엄마, 어렸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려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 행동과 생각하나만으로도 가슴은 이렇게 따뜻해지니까.

무말랭이, 계란말이, 소시지 부침, 김치볶음, 김, 멸치볶음, 연근조림, 장조림, 생선구이.

책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메뉴이기도 하지만 떠올려보면 나의 학창생활을 내내 지배해서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메뉴들이다.

각종 교과서들로 뚱뚱해진 책가방에 도시락을 쑤셔 넣고는 버스를 타고 이리저리 밀리며 학교로 향하던 길, 강력한 밀폐력을 자랑하는 락앤락 탄생이전의 일이라 반찬통의 미세한 틈사이로 흘러나온 국물이 책의 한 귀퉁이를 부풀려놓기도 했고 점심시간이 아닌데도 반찬냄새가 진동했었던 교실의 오묘한 공기.

 

도시락은 누가 싸주는가,

물론 대부분 엄마와 아내가 싸주기는 하지만 나이 든 남자임에도 직접 싼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중 ‘안 잡히는 낚시터’를 운영하고 있는 아키모토 쇼지씨의 이야기가 아프게 남는다. 글의 제목은 <손맛보기 힘든 낚시터에서 본 아내의 손맛>이었다. 저자가 두 번째 작업을 위해 전화를 걸었을 때 흔쾌히 수락은 했으나 두 해 전부터 아내가 중병을 앓아 지금은 손수 도시락을 싸온다고 했다. 희망형의 제목인 것이다. 사진에 올라온 도시락은 접시였다.

관리하기가 쉬워서 접시에 싸가지고 다닌다고 했다.

"요리란 직접 하게 되면 편한 걸 찾게 되는가 봐."

 

 

 

후일 저자가 완성된 책을 그에게 보내주었을 때 부인은 세상을 떠난 뒤였고,

더 세월이 흐른 후, 도착한 연하장에는 태어난 손자를 안고 웃는 그의 모습이 들어있었다 한다.

그렇게 작가와 도시락의 주인공들은 마음으로 맺어지고 있다.

 

 

직업이 적혀있는 란에 단순히<할머니>라 적혀있는 코모다 요시코.

할머니의 집 벽에는 1993년 달력이 걸려있다. 남편이 죽은 해의 달력이란다.

바꾸려 해도 달력에 손이 닿지도 않고 다른 달력들도 마음에 들지 않아 그냥 둔다고 한다.

시간이 멈춰버린 공간에서 특별히 먹고 싶은 것도 가지고 싶은 것도 없다는 할머니의 말씀은 짠하다.

늘 그렇듯 백발의 노인에 배어있는 외로움은 슬프다.

고기가 반이나 차지하던 할머니의 도시락이 그나마 작은 위로가 된다.

'나 아직 많이 많이 살고 시포오~'하는 밥의 항변.

 

 이 책은 남편 아베 사토루가 찍고 아내 아베 나오미가 글을 썼다.

다른 사람의 도시락 뚜껑을 열게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어딘가에서 그래도 흔쾌히 맞아주는 사람들때문에 이 책이 가능했다한다. 아마도 직장에서 도시락을 먹는 사람들이란 일단 푼돈이라도 아껴서 절약해보자는 심산의 서민이었을 것이다.

사진 속에는 사람들이 홀로 다소곳이, 혹은 당당하게, 혹은 세상을 모르는 듯한, 때로는 다 살아서 욕심 없다는 눈빛으로 서 있다.

조심스럽게 말해보건대 침략자로써의 이미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얼굴과 큰 돈 벌 것 같지 않은 직업들.

그래서 오히려 그들에게 나는 연민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과연 그런 얼굴로 어떻게 다른 민족의 역사를 유린했던 것일까.

전쟁은 더 많이 가지고자 하는 자들의 더러운 셈법이고 이 사람들은 그런 정치와는 무관한 사람들이 아닐까. 도시락과 별 상관없는 생각들이 줄줄이 꿰어진다.

 

 

혼자 싸온 주먹밥을 먹는 집유원이 보인다.

(집유원이란 우사를 돌며 짠 우유를 모으는 사람, 주먹밥 모양이 꼭 젖소같다.)

점심시간이 일정치 않아 조금 먹고 놔뒀다가 나중에 다시 먹는 유람선 뱃사공도 보인다.

산 속 쓰러진 나무 옆에서 도시락을 까는 산림조합 기술작업원도 보인다.

산 속에서 언 주먹밥을 먹는 스키 투어 가이드도 보인다.

 

서 있는 사람 옆에 거대한 도시락 사진은 마치 도시락이 인간보다 위대하지 않은가 묻고 있는 것 같다.

먹는다는 행위, 불현듯 먹먹해지는 그 행위.

그들의 음식 씹는 소리가,

그들의 귓속에 시끄럽게 들릴 장아찌들의 오속오속한(?) 식감도 느껴지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나는 세상의 점심이 조금 평균적이고 차별이 없어지기를 바란다.

너무 잘 먹어서 빼는 데 더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야하는 현실이 도래하지 않기 않도록.

천연덕스럽게 버려지는 음식물쓰레기가 만연하는 부페가 더 이상 늘어나지 않도록.

 

큰 가르침만 주겠다고 소리지르는 책더미 사이에 이렇게 쉬어가는 책 하나쯤 끼어있는 것도

아름다운 여백이 될 듯 싶다. 글보다 사진이 더 따뜻할 수 있다는 것도 작지 않은 수확이다.

책을 읽고 더욱 확고해진 사실 하나,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계란말이는 영원한 도시락 속의 황제이다.

닭들아, 니들이 고생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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