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 김이설 소설집
김이설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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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파리채를 샀다.

마침 모기를 발견하고 채를 들이댄 순간, 퍽, 퍼퍽 불꽃이 튀었고 나는 그 진동에 한동안 멍해졌다. 공감각적으로 남은 충격에 눈과 귀와 손이 얼얼했다.

무언가의 숨통을 끊은 이 느낌. 손바닥을 부딪쳐서 잡았을 때와는 다른 이 전율.

 

잠자리에 들려는데 왜엥 소리가 나자 남편이 전자채를 퍼뜩 가져오란다.

'전율'에 대해 유심히 들었던 남편은 자기가 한 번 해보겠단다.

"나도 손맛을 느껴보고 싶어."

손도 식탐을 느낀다.

 

계형 매춘, 그럼에도 줄어들지 않는 빚,

벗어날 길 없는 가난과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이 있는 환경에서 비인간적인 삶을 수용해야하는

여인들이 있다. 비루하고 출구없는 현실에서 어떤 여자는 칼을 들고, 어떤 여자는 또 다시 몸을 들고 나간다.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밖에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

수치심이나 모욕감은 개나 줘버리라는 사람들의 이야기.

아무도 말하지 않는 이야기를, 전혀 달콤하지 않은, 하지만 마치 전자채를 쥐고 모기를 기다리는 심정이 되게하는 김이설의 소설집을 꿩의 가슴에 칼을 꽂는 한 여인의 말로부터 시작해본다.

 

살아있는 것의 마지막 몸부림은 감정을 북받치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그 긴장감은 칼을 들이대자마자 급작스럽게 사라졌다.

움직임이 가라앉아 내 몸이 고요해지면 갑작스러운 공허가 달콤하게 스며들었다.

                                                                  - <순애보> 중

 

* 순애보

 

증거를 대봐, 증거를!

늦게 들어온 엄마는 아빠에게 바락바락 대들었고 아빠는 얼마 후 집을 나갔다.

엄마의 배가 난데없이 불러왔고 어느 날, 엄마와 나는 짐을 챙겨 큰 트럭을 몰고 온 아저씨의 차에 올라탔다. 엄마는 그 아저씨에게 연신 몸을 기댔고 나는 고속도로 휴게소에 버려졌다.

 

나는 젖몽오리가 서는 소녀였다.

갓길에 서서 아픈 가슴을 주무르고 있을 때, 한 트럭이 멈췄다.

애야, 거기서 뭐하니.

엄마가 나를 버렸어요.

 

나는 트럭에 올라탔고 아저씨가 건네주는 만두 열 개를 먹었다.

아저씨가 내 허벅지를 지그시 눌렀다. 나는 알고 있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고 이내 만두값을 지불해야하다는 것을.

 

아빠라 부르라고 했다. 나이 차이를 보면 그게 맞았다.

그 후, 나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아저씨가 싣고 다니는 꿩고기를 앞장서서 팔았다.

장사는 잘 됐고 나는 가슴이 커졌고 아빠는 점점 더 많이 나를 좋아했다.

 

꿩농장을 샀다. 아빠의 바람대로 아이를 가졌다.

아빠는 여태 해오던 꿩 죽이는 일을 하지 말라고 했다.

내대신 말더듬이 청년 치우가 일을 도와주러 농장에 왔다.

 

나는 밤이면 고속도로 갓길을 자주 걸었다. 항구에 가고 싶었다.

휴게소에서 갈길이 멀다며 오줌을 누고 오라던 엄마가, 오줌을 누고 나오자 찾을 수 없던 엄마가 향하던 곳이 항구였다. 항구에는 도대체 뭐가 있길래.

트럭이 와서 멈춰섰다. 얼마야? 하고 물었다. 대답은 늘 똑같았다.

항구로 데려다줘요. 그러면 원하는 대로 해줄께요.

 

나름 고속도로에서 유명한 여자가 되어있을 무렵,

갓길에 한 트럭이 섰고 그 안엔 치우가 타고 있었다. 서로 무척 놀랐지만 나는 평상시와 같이 말했다.

항구로 데려다 줘.

 

치우는 같이 도망가자고 했다. 아빠도 치우와의 밀회를 눈치해고 있었다.

딸을 낳고 몸이 회복되자 아빠는 말했다.

성실한 아이야. 치우를 따라가.

빨리 어른이 되어 아빠를 떠나고 싶은 날도 있었지만,

그렇지만 이제 와서 환갑이 다 된 아빠를 떠날 수 없었다.

아니 떠날 이유가 없었다.

 

치우는 보챘다. 좀 야멸차야 할 필요가 있었다.

가,요, 지,금, 나,랑,같,이,가,요, 사,랑, 한, 다, 구,요, 아,이,도, 예, 뻐, 할, 께,요.

너같은 병신아빠를 두느니 차라리 혼자 키우겠어.

나,를,미.치.게.하.지.말.아.요.

 

진짜 아빠도 나를 버렸고 가짜 아빠도 나를 버리려 한다.

또 내쫓기고 내동댕이 쳐지려한다. 버림 받는 건 한 번이면 족하다.

아빠를 죽이겠어. 칼을 들었다.

쪼그리고 앉아있는 아빠의 등을 향해 돌진했다.

아빠의 팔이 스쳤다. 아빠는 울고 있었다.

 

어디선가 단말마의 비명이 들렸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담긴 비명이었다.

이내 자지러지는 울음소리.

아이에게 가보니 아이가 사지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온통 피범벅이었다.

아이의 머리맡, 고인 핏물 속에 아이의 잘린 혀가 놓여있었다.

치우는 보이지 않았다.

 

* 환상통

 

서른, 칠년 연애 끝에 동갑내기 그 이와 결혼했다.

늦은 나이였기에 양쪽 집안에서는 아이를 보챘다. 하지만 나는 그리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병원에 가보라는 시어머니의 권고를 못이겨 검진을 해본 결과 자궁암이 발견됐다.

 

첫 항암 치료를 앞둔 며칠 전, 남편 생일 선물로 구두를 선물해주었다.

결코 견딜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열 세 번의 항암치료를 조용히 묵묵히 받아들였다.

마지막 치료를 마친 퇴원 전 날, 시어머니가 오셨다.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아무 말 없이 손을 오래 잡았다가 가셨다.

아들 하나 밖에 없는 어머니의 등이 아팠다. 남편과 헤어지기로 결심했다.

 

남편은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치료 받는 동안 나는 내 모습에 자존심이 상했고 남편을 볼 면목이 없어졌다.

나는 단호했다. 그는 계속 찾아왔다.

 

완치 판정을 받은 후 혹시나 싶어 친정엄마를 병원에 모시고 갔다.

자궁암 3기였다.

내 병간호를 하느라 치료시기를 놓쳐버렸다. 후회할 시간이 없었다.

엄마는 빠르게 피폐해져 갔다.

남편은 엄마의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옆에서 지켜줬다.

 

삼우제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찻잔을 두고  앉았을 때 정적을 깨고 남편 전화기가 울렸다.

고개를 돌렸지만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

나는 말했다.

나 괜찮아, 어서 가봐.

 

몇 년 후, 정기검진을 받으러 병원에 간 날, 남편을 보았다.

반가워서 손을 들 뻔 했는데 그 옆에는 만삭의 여인이 있었다.

불룩한 배가 햇빛에 반짝였다. 눈이 부셔서 시큰했다.

남편과 눈이 마주쳤지만 나는 얼른 그 자리를 빠져 나와 암병동으로 들어섰다.

어디선가 들리는 아이 울음소리에 배가 아팠다.

 

 

름처럼 그녀는 좀 다른 이야기(異說)를 하고 싶었을까.

한 편의 이야기들이 끝날 때마다 땀이 조금씩 솟아올랐고, 딸칵, 몸 어디선가 주차브레이크를 올려지는 듯 했고 그래서 멈췄고 선풍기의 도움을 받아서 땀을 식힐 생각은 나지 않았다.

얘기가 충분히 서늘했으므로.

 

닭집 여자. 늙은 조연 뮤지컬 배우, 노숙하는 소녀, 대리모, 삶을 관리 하는 여자, 자발적 백수(유일한 남자주인공) 이야기가 있지만 이쯤 하련다. 전자채를 남편에게 쥐어준 것처럼 김이설의 '손맛'을 제대로 느껴보시라 남겨둔다.

(어쩌다 이 부분만 보신 분에게 한마디. 이거 맛집소개 아닙니다!)

그녀가 자신만의 행복추구에 중독된 사람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도 느껴보기 바란다.

 

행복을 추구하려해도 길이 막혀버린 사람들,

발버둥치면 칠수록 더 불행해지는 사람들,

어렸을 때 어른들은 번듯하지 못한 직업의 사람들을 보면 작고 은밀하게 이렇게 말했다.

공부 안하면 저렇게 된다,

도대체 어떤 공부를 안했기 때문이라는 걸까.

자신들의 노동에 대해 정당한 댓가를 요구하는 공부?

성폭력과 존엄성이 묵살되는 상황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공부?

자본에 복종하며 실패에 젖어있는 삶에 대해 우리도 그 옛날의 어른들처럼 똑같이 말할 수 밖에 없을까.

 

어느 새 매미소리는 그치지 않는 효과음으로 집안을 파고든다.

눈을 들면 잠자리떼들이 여지없이 출몰한다.

잠자리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자 그 움직임이 커진다.

우두커니가 된다. 

당신, 이게 단지 소설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니?

과연 당신은 이런 삶에서 얼마나 멀리 있니?

 

타인의 행복추구가 보장될 때 나의 행복도 추구할 수 있게 된다는 생각을 실천하려면 얼마나 더 성숙해져야 하는 걸까. 다만 이 책을 읽는 당신들은 비루한 삶 위에 군림하며 그 삶을 등쳐먹는 야비한 '손맛'을 부디 모르는 사람이기를 바란다는 작가의 목소리를 듣는다.

나는 그렇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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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나는 없었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1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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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태의연하지만 우선 봄의 성질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봄은 구부러짐과 웅크림과 비어있음을 펴고 채워준다. 꽃이 핀다. 아름답다. 싱그러움으로 세상을 덮는다. 마음이 열리고 가벼워진다. 웃음과 감동의 시간이 많아진다.

그런 봄에 어디로 가있었길래 없었다는 것일까. 저 여자는 왜 타인의 봄에 속하지 못한 채 얼굴 없는 모습으로 표지에 도도하게 앉아있는 것일까.

 

조앤 스쿠다모어라는 중년여인이 있다. 그녀는 주(州)의 원예가협회 총무를 맡고 있고 지역 병원의 이사이고 지역단체와 걸스타우트 일도 돕고 있다. 성공한 변호사 로드니 스쿠다모어의 아내로써 또 나름 꿀리지 않는 자식들의 엄마로써 올바른 양육과 성공한 인생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자식들을 키우면서 우여곡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고비를 자신의 지혜로 훌쩍 넘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큰 딸 에이버릴이 아픈 아내를 가진 스무살 연상의 의사와 내연의 관계에 있을 때도 남편과 합작하여 그들을 보기좋게 갈라놓지 않았던가. 이젠 부유하고 멋진 주식중개인과 정상적인 결혼을 했으니 안심이다. 부모로써의 사랑은 잃었지만 존경마저 잃지는 않았으니 그것으로 만족이다. 차갑고 이성적인 성격이야 마음에 들지 않지만 다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들 토니 또한 성에는 안차지만 멀리 떨어진 주에서 큰 오렌지농장을 경영하고 있고 그 곳에서 결혼을 해 잘 살고 있다. 부모에게 얼굴 한 번 보이지 않은 여자와 결혼했고 부모와 교류가 없어도 상관이 없다는듯 살아가는 게 좀 못마땅하지만 잘 살고 있다니 그런데로 만족이다.

 

막내딸 바버라는 학창시절 못된 친구들과 어울리며 남자보는 눈도 지지리도 없어서 속을 썩이더니만 괜찮은 남자가 나타나자마자 그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해서 바그다드에 살고 있다. 그것도 대충 만족이다. 한 때는 남편도 농부가 되고 싶다느니 하는 현실감각 떨어지는 소리를 해댄 적이 있으나 그녀의 단호한 잔소리로 꿋꿋하게 변호사로써의 길을 계속 걷고 있다. 다 만족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삶이다. 무엇보다 남들도 그녀의 삶을 부러워하고 있지 않은가.

 

막내딸이 크게 아픈 바람에 조앤은 바그다드로 달려가 딸을 회복시키고 필요한 모든 일을 해결해주고 육 주만에 런던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 곳에 있는 숙소에서 고교시절에 잘 나가던 동창 한 명을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못알아볼 정도로 늙어보이고 형편없다. 애써 얘기를 나눠보니 이건 삶 자체가 형편없다. 남편은 벌써 몇 번이나 갈아치웠고 사랑을 위한답시고 애들도 팽개쳤다. 이런 저질인생같으니라구. 창피한 줄도 모르고 입을 놀리기는. 쯧쯧쯧

하지만 그 친구는 말한다.

"난 별로 내 삶에 후회가 없어." 그리고는 이상한 말을 던진다.

"어머, 그 귀여운 바버라가 네 막내딸이었구나. 불행한 가정에서 도망치려고 처음 청혼한 남자와 결혼해서 여기 왔다는 소문의 그 여자가. 그리고 이젠 다 지나갔으니 괜찮을꺼야."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거야?"

"네 남편도 시간만 나면 한 눈을 팔려고 노력했었잖니, 왜."

도저히 말을 섞을 인간이 못되는 것 같아 조앤은 불쾌하기 짝이 없다.

"날씨가 좋지 않은데 아마 며칠 묶일 지도 모르겠구나. 좋은 여행 해라.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다면 자신에 대해 뭘 알게 될까?"

 

입방정이었을까. 큰 비가 계속 오는 바람에 육로를 통해 가고 있던 조앤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염려했던 대로 열차가 끊겨 사막에서 며칠 머무르게 된 것이다.

 

사막은 이상하다. 동굴에서 뱀이 기어나오듯 생각들이, 평소엔 눌러두고 닫아두었던 생각들이 튀어나온다. 가져온 책은 다 읽었고 새로 들어오는 사람은 없고 매끼니마다 복숭아통조림과 오믈렛을 먹고 있다. 황량한 풍경을 산책하는 것 밖에는 할 일이 없는 이 곳에서 조앤은 자신의 가면을 벗기 시작한다. 아니 가만히 있고 싶은데 누군가 사정없이 그녀의 얼굴에서 가면을 뜯어내고 있다.

 

사람들은 나를 인정하되 좋아하지는 않았으며 아이들은 피하고 숨으려했고 심지어 막내딸은 나로부터 도망가지 않았는가. 아들도 너무 멀리 떨어져 살고 있고, 큰 딸은 한 번도 진심어린 미소따위 주지 않는다. 그러고보니 사랑하는 남편 로드니도 이상한 말을 많이 했다. 그것은 분명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별반 내세울 것 없는 여자를.

남편이 교도소에 가있는 동안 대신 살림을 꾸리다 병을 얻어 죽게 된 묘한 생김새의 여자.

입양해 번듯하게 키워주겠다는 넉넉한 식구들의 제안을 뿌리치고 아이들을 옆에 끼고 있던 여자.

자식들을 망치려고 작정한 그 여자말이다.

남편 로드니는 그 여자를 사랑했던 것 같다. 그 여자가 용기가 있다고 했지. 맞아, 용기만 가지고 살 수는 없지요, 했더니만 나더러 불쌍한 조앤이라고 했어. 오, 내가 잘못했던 거야.

 

로드니가 얼마나 도시의 삶을 싫어하는지, 그는 얼마나 농부가 되고 싶어했는지.

나는 그의 꿈을 짓밟았던거야. 나는 오로지 성공하는 남편을 갖기 위해, 내로라하는 자식의 부모가 되기 위해 아이들을 이해하기보다는 일방으로 가르치기만 하던 엄마였던 거야. 이제 돌아가면 로드니에게 잘못했다고 해야겠어.

용서해달라고 해야겠어. 시간이 없어. 시간이. 기차는 도대체 언제 오는거지.

 

육 주만에 돌아온 아내를 맞는 로드니의 에필로그를 우리는 새겨야한다.

"휴가는 끝났어."

로드니는 진정 행복한 육 주였다고 생각한다. 왓킨스와 밀스를 만날 수 있었고, 하그레이브 테일러와도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냈다. 많지는 않지만 친구 몇몇이 모였다. 일요일이면 언덕으로 상쾌한 산책을 나갔다. 하인들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줬고, 그는 책에 음료수병을 받치고 원하는 만큼만 천천히 마셨다. 때로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일을 마무리한 다음 파이프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쓸쓸할 경우를 대비해 가상의 레슬리를 친구 삼아 의자에 앉혀두었다.                - 256p

 

소설은 진실을 알면서도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자신을 기만할 수도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통찰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아가사 크리스티가 탐정소설로 그녀의 영역을 굳힌 후,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서정소설이다. 쉽게 읽히는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제목은 딱히 떠오르지 않는 한 일본소설의 장면이 겹친다.

너무나 맞지 않아 별거를 하게 된 한 부부가 왜 별거를 하게 되었는지 이유조차 희미해졌을 즈음, 데이트를 하게 된다. 데이트 끝에 아내는 남편의 취향대로 꾸며진 그의 집에 가게 되고 그 곳에서 새로운 그의 매력을 느끼게 된다. 여자는 결혼하기 전 남편의 취향이 배어있던 그의 하숙방을 기억해낸다. 그의 향기로 가득했던 그 신비롭고 희열에 가득찼던 공간을.

 

내 취향대로 가구를 세팅하고 삶의 방식을 세팅하고 부부의 관계를 세팅하고 아이들의 입맛을 조종하고 교우관계를 조종하고 공부의 방식을 조종해서 얻어지는 보람은 분명히 있다. 그렇다. 그것은 보람이다. 취향의 성취이다. 하지만 분명 타자와 함께 누리는 즐거움은 아니다. 

내 취향으로 채워진다면 만족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삶의 경이로움은 실종된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때 나는 타인에게 어떤 계절이 되는지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일본소설 속의 아내처럼 나도 돌이켜본다.

남편이 되기 전의 낯설디 낯설은 그의 취향은 내게 얼마나 떨림이었던가.

그 떨림에 진동하기 위해 나는 얼마나 촉수를 세웠던가.

봄에 나는 없었다,는 나의 이야기였다. 깨닫되 인정하지 않고 있던 가면이야기였다.

그리고 고백하게 되었다.

타인의 취향이야말로 삶에 흥분을 멈추지 않게 하는 모험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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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자서전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35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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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기르는 소처럼 1년을 살기보다는 하루동안이나마 들소가 되리라.'

<영혼의 자서전>에 나오는 문장을 싹둑 잘라 카톡상태메시지에 올려놓았다.

몇몇 지인이 물어온다.

'언니, 왜 들소가 돼요?' '길들여진 영혼보다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겠다는 결심이겠지. 호호호'

 

책장을 펼치면 고뇌하느라 미간을 좁히다 못해 급기야 붙어버릴 것 같은 눈썹과 움푹 들어간 눈, 그리고 수북한 콧수염의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나타난다. 그 사진은 아이들이 좋아했던 캐릭터, 앵그리버드에 가까웠지만 그것은 그를 조류로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류를 고뇌하는 인간상으로 끌어올리게 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덮고 한동안 조르바와 부불리나 (오르탕스 부인의 별칭) 사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도록 덫을 놓았던 화려한 전적의 그가 아닌가. 조심해야한다. 웃다가는 큰 코에서 콧물이 마구 쏟아지므로.

 

자유, 사전적 의미로 자유란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라 풀이되는 데 그렇다면 무엇에 대하여 자유로워져야 하는가.

그런 류의 질문에는 무엇을 갈망해야하는지, 왜 갈망해야하는지에 대한 고민으로 부단히 옮겨다닌

젊은 시절의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도움이 될 것이다. 서문에서 그가 이 책이 자서전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까닭은 자서전을 넘어선 어떤 영성을 일깨우는 책에 가깝기를 희망해서가 아닐까.

신에 대하여 누구나 품고 있는 의문과 성서에 대한 혼란, 그리고 도전이 포진해있다.

 

그의 영혼을 처음 뒤흔든 것은 자유에 대한 갈망이었다. 그가 자아를 깨닫게 될 때부터 찾은 자유의 시작은 터키에게 빼앗긴 자유에 대한 열망이었지만 이것이 발전하여 나는 무엇으로부터, 누구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낳게 했다. 결국은 크레타와 터키의 싸움뿐 아니라 선과 악, 빛과 어둠, 신과 악마라는 싸움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피에 굶주린 해적인 아버지쪽과 선량한 농민인 어머니쪽 조상 아래 크레타 섬에 태어났다. 

어려서는 물에 담구어 부풀려진 버찌가 쪼그라드는 게 보기 싫어 눈을 감고 물에 잠긴 버찌를

우그적우그적 씹던 소년이었고 훗날에는 세계를 여행하며 행복감에 교만해지지 않기 위하여 일부러 작은 신을 신고 고행을 선언하는 젊은이기도 했다.

 

그가 말하는 인간의 숭고함은 '크레타적 경지'에 오르는 삶의 자세로 설명되곤 했는데

지진과 침략이라는 불안한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두려움과 맞서 싸워가던 조상들의 피가

그에게도 흘렀으리라. 동, 서양에 끼어 강대국의 영향을 받으며 자유를 침탈당하고 빼앗긴 자유를

되찾기 위해 크고 작은 전쟁들을 치르며 그는 자유의 중요성을 뼈에 깊숙히 새겨 터였다.

 

자신을 아끼는 영혼이라면 이 목표에 다다르자마자 곧 그것을 더 멀리 밀어놓는다.

달성이 아니라 오름을 절대로 쉬지 않아야한다.

오직 그것만이 삶에 숭고함과 단일성을 부여한다.              -102 p

 

법대에 재학하며 최고 점수를 받은 후 아버지로부터 1년 간의 여행이 선물로 주어졌을 때 그는 그리스 본토를 여행하고 이탈리아, 팔레스타인 등지를 떠돌며 영혼을 확장시켜나가는 데 그리스를 여행할 때는 그 아름다운 역사 속에서 전설을 입고 태어나는 그들 족속의 의무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스의 업적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유를 찾으려는 투쟁이었다는 깨달음과 함께.

 

한 노부인이 바구니에서 무화과 두 개를 꺼내준다.

저를 아세요, 할머니?

그렇지 않단다, 얘야. 모르는 사람한테 뭘 주면 안된단 말이냐?

너는 인간이지? 나도 그래. 그만하면 충분하지 않아?             - 195 p

 

그리스 본토여행을 마친 후 몇 달 있다가 또 여행을 떠나려하자 어머니가 울면서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방랑을 할 셈이냐?" '죽을 때까지요, 어머니. 죽을 때까지.'

속으로 그렇게 외쳤다던 카잔차키스. (에이, 불효자같으니라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버지였지 자신의 아버지는 아니었다고 생전에 아버지와의 포옹을 거부했다'던 만델라 넬슨의 딸처럼 그의 어머니도 아들을 방랑에게 내주고 결국은 인류에게 양도한 희생의 어머니였을지도.

 

'난 저 애가 거짓말을 하거나 다른 아이들에게 얻어맞을 때에만 걱정을 합니다.

그 두 가지 경우에만 말예요. 다른 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어야죠!'

 

그의 아버지는 달랐다.

학교에서 선생님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다며 집으로 찾아온 신부에게 그렇게 말했다.

아마도 아버지의 그러한 교육방침이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진정한 남자가 되게 하'는 데에

제일 큰 공헌을 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 아버지의 교육방침은 도대체 어떤 남자를 키워낸 걸까.

 

젊은 시절에 그에게는 약간의 연정을 품었던 에이레 아가씨가 있었다.

그가 본국으로 돌아가지 전 이별여행을 하자며 치밀한 계획을 세워놓았었고 두 남녀 모두 젊은 날의 열정과 설레임으로 온몸이 들떠있었다. 하지만 여행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고 문득 그는 그녀와의 관계에 두려움을 느껴 그와 깊은 관계를 나누기 원하는 그녀의 손짓을 뿌리치기에 이른다.

독실한 기독교집안에서 자란 그였지만  후일 '같이 자고 싶어하는 여인의 청을 뿌리친 남자는 화있을진저'식의 이슬람 속담을 들었을 때는 좌불안석이 된다. 떨치지 못한 죄책감을 <뱀과 백합>이라는 책을 씀으로써 그녀를 글씨 속에 가두고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적이 있었다.

 

그가 이탈리아 여행중 머무르기 위해 방문하게 된 백작부인과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그는 에이레 아가씨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그 아가씨와 즐거운 추억을 만들지 못한 회한이 없느냐는 부인의 질문에 대답한다.

 

행복감에 점점 길이 들어서 강렬함과 영광을 몽땅 상실하느냐, 아니면 그런 감정에 익숙해지지 않아서 전과 마찬가지로 항상 그것을 대단하게 생각하며 완전히 자아를 상실하느랴 하는 것이었죠. 난 언젠가 꿀에 빠져 죽은 벌을 보고는 교훈을 얻었어요.    -250 p

 

이야기를 다 들은 그녀는 꿈을 꾸듯 내뱉는다. "당신은 남자예요.!"

이 이야기에서는 달콤함과 부드러움을 멀리 해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는 바람직한 맹수의 이미지가 느껴지면서도 신 앞에서 범죄하지 않고 세상에서도 떨어져 나오지 않으려는 나약한 면모에 프슥 웃음이 난다. 크레타식 남자됨은 이렇게 성자적 예민함을 가지는 걸까.

뿐만아니라 이 이야기에서는 다르면서도 슬픈 감정의 줄기가 잡힌다. 그 노부인에게서 가당치도 않은 처녀같은 순수함과 떨림을 발견한 것이다. 노년이 되면 마땅히 남김없이 사라졌어야 할.

 

지극히 늙은 나이에 절망적인 찬란함을 보여주며, 수줍음과 처녀성이 어떻게 다시 진실한 여인에게서 죽지 않고 되살아났던가!

 

절망적 찬란함을 노년에도 발견하고 걸맞지 않은 수줍음과 처녀성이 재현된다면,

그것을 눈치채고 삶의 비극을 느끼는 젊은이의 눈을 들여다보게 된다면.

나는 수치에 몸을 떨게 되리라. 그래서

노년에는 여성성보다는 남자와 여자가 통합된 인간성 하나만을 꼭 추구하리라.

글을 쓰다보니 희화화되었지만 그 어떤 글보다 슬픈 대목이었음을 고백한다.)

 

세상의 어떤 힘도 인간의 영혼처럼 제국주의적이지는 못하다.

영혼은 점유하기도 하고 점유를 당하기도 하지만, 항상 제국이 너무 좁다고 느낀다.

답답해진 영혼은 자유롭게 숨쉬기 위해 전 세계를 정복한다.

                                                                          -  253 p

다음 부분은 이 책에서 가장 강한 메시지를 준 부분이 아닐까한다.

그가 산길을 오르며 만난 아베신부와 이슬람교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신부가 호기심에 가득 차 한 승려에게 물었다.

"승려님, 당신은 신을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신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신은 이름으로 얽어매기에는 너무 커요.

이름이 감옥이고, 신은 자유입니다."

"하지만 신을 부르고 싶으면, 뭐라고 부르죠?"

"<아!> 나는 신을 그렇게 불러요. 알라가 아니라 <아!>예요."

 

신을 부를 때 <아!>라고 부른다고 했던 그 승려의 고백은 얼마나 정직한가.

나는 모르겠다고 하는, 나는 그럴 수 밖에 없다는 신 앞에서의 탄식.

이름을 가지는 순간 만물은 안정이 되고 평화로워지는 반면, 의미는 이름에 갇혀 본질이 희미해지는 위험을 감수해야한다. 통일된 이름으로 신을 부른다는 것은 개인의 신을 잃어버린다는 이야기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고대하는 것, 기다리는 것.

그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신앙의 가장 큰 위기가 아닐까한다.

 

영혼에 관하여 서문에 밝혔던 그의 기도 세 가지를 옮기며 포스팅을 맺는다.

첫째, 나는 당신이 손에 쥔 활이올시다. 주님이여. 내가 썩지 않도록 나를 당기소서

둘째, 나를 너무 세게 당기지 마소서. 주님이여. 나는 부러질지도 모릅니다.

셋째, 나를 힘껏 당겨 주소서. 주님이여. 내가 부러진들 무슨 상관이겠나이까?

 

이제 그는 시나이로 간다.

나는 내일 하권을 빌리러 도서관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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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5-10-23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책을 읽은 감동이 되살아나는 좋은 글이네요.

2015-10-23 14: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eBook] 강신주의 다상담. 1: 사랑, 몸, 고독 편 - 사랑, 몸, 고독 편 강신주의 다상담 1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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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철학박사답지않게 이 책, 쉽다.
거침이 없어서 불편하기도 하고 생소해서 어리둥절하기도 하다.

제 1권의 소제목은 '사랑, 몸, 고독 편'
물론 사랑을 못하는 청춘들이 고민을 적어보냈고, 몸을 성으로만 인식하는 덜 성숙한 이들이 참여했고 고독의 수위를 조절하지 못해 고독의 방류를 막아달라는 나름 찌질한 분들이 상담을 요청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사랑을 잘하는 사람들은 요따위 상담도 필요없을 것이고, 당신을 차버리고도 행복하며 그 어디에서 오늘도 훌륭한 사랑을 하고 있을 것이라 약올리기도 한다. 


그의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이 책은 빨간 표지가 참 잘 어울린다.

70년대 만화주인공 주먹대장의 주먹같은 글씨, 일명 주먹체라 불러도 되려는지.

읽다보면그 주먹에 얻어맞는 것처럼 멍할 때가 있다.

강신주, 
이 남자 너무 진지하게 의식의 혁명을 부추긴다. 말 잘 들어서 좋아할 사람은 선생님하고 부모님 뿐이라며 왜 이타적으로 사느냐? 누구 좋으라고? 이기적으로 사는 거다.
넌 왜 이렇게 이기적이니? 라고 하는 부모님의 말씀을 칭찬으로 알아들어라.
그리고 사랑?
그거 한 사람하고 하는 거 절대 아니고 한 서른 명하고는 해봐야 제대로 된 거 하나 건지는 거다.
빼지 말고 만지고 싶으면 열렬히 만지고 음, 채이면 어떡하냐고?
걱정하지말고 다른 사람 만나면 되잖아!!
사람이 어떻게 한 사람만 사랑하고 사나?
안되는 걸 뻔히 알면서도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가두니 당연히 결혼은 미친 짓이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져라. 

솔직히 여자친구하고 있는 게 좋으냐? 엄마하고 있는 게 좋으냐?
그럼 엄마말 듣지 마라.
 
장남이 내 등 뒤로 와 조용히 책을 들여다본다.
엄훠, 너 왔니? ^^;
다상담이 뭐야, 엄마?
어, 상담해주는 내용이야.
나도 모르게 이게 무슨 금서인 양 내 아들 읽지 말았으면 하는 심정으로 다른 책 밑에 끼워넣고 말았다.
 

*사랑


그가 말하는 사랑이란 자신을 조연에서 주연급으로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물론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자신도 상대방을 멋진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어야한다.
순전히 둘만 보이는,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그 상태를 무한대로 즐겨라.
만지고 싶으면 만지고 같이 살고 싶으면 살아라.

하지만 사랑이 영원하다는 환상은 금물이다. 서로 손을 잡은 것과 같아서 내가 그를 잡고 있고, 그가 나를 잡고 있는 상태이지만 언제고 내가 그리고 상대방이 손을 뺄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라. 그것은 그 때를 두려워하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긍정하라는 이야기이다.
 
사랑이 영원하다는 건, 꽃이 피었다는 거예요. 그것은 질적인 비약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시간적인 지속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에요. 영원한 사랑이란 정확히 말해 너무나 강렬해서 영원히 온몸에 각인된 사랑을 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꽃, 그러니까 조화를 원하세요? 우리는 조화를 원하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의 사랑이 꽃폈다는 것이 중요하지, 지는 게 중요한 건 아니에요.   - 71p

 

*몸

 

인간은 금지된 것을 욕망한다는 조르주 바타유의 말이 빠질 수 없다.
몸이라고 하면 섹스가 떠오르는 그대여, 판타지에서 벗어나 성숙해질지어다.

몸은 악기와 같아서 연주되기 위함인데 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과 부딪쳐 쾌감을 얻을 때

제대로 연주된다고 볼 수 있다.

나를 제대로 연주해 줄 수 있는 사람과 만나는 것! 그런 영역을 만나는 것! 그것이 행복이다.

 

몸은 사랑이 일어나기도 하고 세계와 관계하는 장소로 긍정해야한다. 몸과 정신이 함께 작동할 때 무아는 오며 몸과 무관한 정신은 단지 추억이나 회상이 될 뿐이다.

스피노자의 말했다.

행복이란 게 그렇게 편하다면 누군들 얻었을 거라고.

 

(........)

011,257,9509 입력된 숫자를 차례로 누르면

한때, 유월의 아카시아 밑에서 들려주던

그대의 노래가 반질반질한 몸으로 손에 잡힌다

반질반질하고 매끈한 위패같은 검은 기계,

숫자로 조립된 그대의 얼굴 없는 말들을

지갑처럼 안호주머니 속 깊이 넣고

오늘도 정신없이,

정신없는 말 속으로 끌려다니고 있다.

                                            - 구석본, <휴대폰> 중

 

그도 핸드폰이 삶과 연애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시각, 청각을 넘어 촉각의 세상을 넘본다고 말이다.

하지만, 자연에서 반짝이는 햇빛과 흔들리는 물결, 신선한 공기를 맞대고 느꼈던 지금 그리고 여기의 느낌은 흉내낼 수 없다고 단언한다.

저장해 둔 애인의 목소리를 반복재생하는 것으로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지금 그리고 여기>를 <언제 어디서나>로 변질시켜 신경계에 가져온 교란이라니. 사라진 아우라를 회복하려 발버둥치지 말고 과감히 삭제하라.


 *고독

 

그에 의하면 고독이란 충족감과 편안함이 사라지는 상태이다. 고독한 상태에서 꿈꾸는 것은 고독이 없는 상태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 타자야말로 희망이 됨과 동시에 절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관념론은 주장한다.

'타자가 매개되지 않는 자기의식은 없다!'

 

세계와 불화할 때 특히 두드러지는 고독을 몰아내는 데는 몰입이 유용하다. 하지만 잊지마시라.

몰입할 수 있는 것의 가치를 먼저 따지면 삶은 제스처가 된다. 일단 몰입하면 가치가 부여된다.

몰입하라.

단 자신에게 몰입해서 집중하게 되면 세상을 풍경으로 보게 되고 이 때 반갑지 않은 손님인 분열증이 찾아오게 되니 유의하라.

 

'왜 사나?' 대신 '지금 이 시간이 좋은가?'

'이 모임이 좋은가?'  대신 '내가 이 사람과 같이 있는 게 좋은가?'

'이 책을 다 읽은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대신 '이 책이 좋은가?'

지금 순간에 집중하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그는 그럼 잘 살기만 할까?

그래서 제가 사실 여러분에게 희망이란 말이에요.

'잘 살지 못해도 저렇게 옳은 얘기를 해도 되는구나'라는 희망이요.
 
 

을 읽고 내용과 생각을 정리하면 협소한 정신의벽을 바깥으로 조금씩 이동시키는 행복이 있다.

물게는 별 것 아닌데도 이것이 미래에 자원과 행복이 될 것을 직감으로 알 때가 있다.

돌아보면 나는 선언하고버려야 할 것들 앞에서 참 비겁했다.

나쁜 습관과도, 불편한 관계 혹은 회복해야할 관계와도 말이다.

단절된 아우라는 과감하게 삭제하라!

그리고 리셋을 하라! 는 그의 어조를 받아들여볼까 한다.

그래야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찌질한 나로부터.

 

혼자 행복해지는 방법으로써는 정말 더할 나위없이 훌륭한 책이다.
하지만 한 사람을 둘러싼 가족과 친구와 연인, 모두 동시에 행복해지기는 힘들 것 같다.

자유선언은 늘 주위에 고통을 가져오기 마련이니까.
다른 사람들이 내 인생 대신 살아줍니까?

강신주의 거침없는 입 앞에서 우리 가족은요, 이 사회는요? 하다가는 온 몸에 눈총으로 빵꾸 가날 것 같다.
그러기에 2권을 읽으시면 된다구요. 너무 성급하시다니까.

제2권은 일, 정치, 쫄지 마 편이다.

청춘도 아닌 것이 청춘인 척하고 읽어버린 후유증이 크다.
주책이다.
주책도 책인 줄 알고 읽으려했나보다. 큭큭.

내 아들에게 이 책을 들이밀만한 용기,

과연 준비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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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서재 - 나만의 도서관을 향한 인문학 프로젝트
정여울 지음 / 천년의상상 / 201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내게 <마음의 서재>는 인간의 존엄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이 책으로 '제3회 전숙희문학상'을 탔다는 소식에 누구보다 큰 박수를 보내주고 싶었다. 아니, 당신은 어떻게 이런 온도로 말을 뽑아낼 수 있는 거지요?

호호호, 저는 따뜻한 시선 가지는 게 제일로 쉬웠어요.

상황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녀의 직접적인 대답은 들을 수 없지만 이렇게 대답하지 않았을까.

인.문.학.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 인문학이라는 그녀의 설명대로

인문학 안에서는 상대방의 슬픔과 상처에 쉽게 닿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그렇게 첫사랑을 통해 세상을 한 번 다 살아낸 듯한 ‘인생의 시뮬레이션’을 경험한다. 누군가를 처음 사랑하는 것은 곧 지구를 한 바퀴 다 돌아야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우리 안의 수많은 타인을 만나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단 한 사람의 영혼 속에서 우주 전체의 비밀을 발견한 듯한 환상, 그것이야말로 첫사랑의 돌이킬 수 없는 매혹이 아닐까.

 

이 세상에서 오로지 그녀 한 사람만 이런 어마어마한 첫사랑을 경험했을까.

미처 정리하지 못한 채 마음 한켠에 방치된 첫사랑의 의미는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시간이나 날씨에 의해 발길질을 하며 모든 사랑의 기준이 되어 현재의 사랑을 재단하거나 비교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녀의 표현대로라면 첫사랑의 장례식을 잘 치른 사람만이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수 있다는데. 그녀가 첫사랑의 메커니즘에 대하여 명쾌하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은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이 있었기때문.

 

매력은 미모처럼 자신을 ‘볼거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함께 하고 싶은 존재’로 만드는 기술이다.

 

이러한 명제를 뽑아낼 수 있는 저력도 에드몽 고르탕의 희곡 <시라노>가 있었기때문.

그래서 복스럽기만 한 앞집 복순이도, 평범한 마스크의 소유자 옆집 영희도 미인에는 못 미칠지언정 노력하면 매력녀의 반열에 넉근히 들 수 있다는 결론을 흐뭇하게 내려본다.

냉대에 익숙해진 내면의 우월성이 모처럼 날개를 펴는 광경속에서.

 

사랑에 있어서 사랑의 완전성과 상대방의 완전성을 배제하지 못하면 그것은 한낱 서바이벌게임에

불과한 것이라는 그녀.

사랑에 빠진 채 허우적대는 것이 누구도 사랑하지 않은 채 꼿꼿한 자아를 고수하는 것보다 백만 배 낫다는 그녀.

그래서 사랑은 자신을 낯선 타자로 만드는 영혼의 마술이라는 그녀.

세대교체보다는 세대교감이라는 말을 미는 그녀.

콤플렉스가 우리의 감춰진 무의식과 만나는 중요한 통로라 오히려 지식이 된다는 역설을 펴는 그녀.

자신의 단점을 드러내는 일이라 ‘~였다면’이라는 가정법을 무척 싫어하는 그녀.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을 넘어서는 타인의 욕망에는 반응하지 말 것을 주문하는 그녀.

 

그녀에 의하면 자아의 유일한 진리는 오직 자아가 변신한다는 사실뿐이라는데,

기실 지금의 ‘나’란 물론 어제와 동일하지도 않으며

내일의 ‘나’와 동일하지 않아 자신에 대한 설명이란 언제나 무효할 뿐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사유의 물꼬를 터주는 미셀 푸코가 있어 그녀의 사유가 먼 바다까지 헤엄쳐 나간다.

 

자신의 정체성을 타인의 요구에 끼워 맞추는 심리를 공의존 (codependency)이라 하는데

그녀는 이것은 일종의 관계중독으로 규정하고 있다. 

사랑의 이름으로 상대방의 영광과 업적을 가로채는 일의 심각성을 말하고 있다.

그 예로 카프카의 <변신>을 들고 있는데 실제로 카프카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아버지 앞에서는 늘 작은 존재였다 한다.

그런 그의 콤플렉스가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아죽는 주인공에 대한 설정을 불러왔으며 

그것은 과도한 욕망에 부응하다 허물어진 그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모든 관계에 여백이 필요하다는 그녀의 주장을 좀 깊게 들여다보면

사랑한다고 다 알려고 하지 말고, 또 사랑한다고 다 알려주려고 하지 말 것!

관계도 숨을 쉴 공간을 요구한다는 것!

너무 많은 사랑이 사랑하는 대상을 질식시키지 않도록

너무 많은 관심이 사랑하는 사람의 사생활조차 빼앗지 않도록.

그래서 마음의 DMZ를 설치하자한다.

 

 

처를 가지는 일이 무에 자랑스럽고 훈장이 될까마는 상처가 빛을 발하는 때가 가끔 있다.

비슷한 상처로 아파하는 사람을 바라볼 때이다.

상대방의 상처에 '초록은 동색'일 법한 상처를 입장권처럼 가지고 조용히 옆자리에 앉는 일.

상대방이 위로받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게 하는 세련된 테크닉을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내가 해봐서 아는데, 식이 아닌 그저 '물 위에 떡을 던지는' 심정으로 당장의 큰 성취를 바라지 않고 흘려보내는 말의 힘을 나는 믿고싶다.

얘는 그게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흠.

탄수화물 위주의 식사는 이제 좀 벗어나야할 것 같다.

 

정여울, 나는 그녀가 위로자이면서 상대방이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게 만들어서 좋다.

텍스트 밖에서 그녀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써놓은 글에 합당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일 것을 믿는다.

그저 꾸준히 읽고 느끼고 쓰고 했더니 쓰여진 텍스트에 위로라는 옵션을 가지게 된 그녀.

읽고 느끼고 쓰는 과정이 요구하는 따뜻한 가슴을 나도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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