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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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은 소송이다'라는 말로 본문에 인용되었던 작가 밀란 쿤데라의 소설 ‘불멸’은

괴테의 연인으로 남아 불멸이 되고자 했던 젊은 베티나의 당돌한 계획을 잘 설명한다.

그 소설에서는 젊은이들이 노인에 대하여 교만함을 가지게 되는 이유가

노인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 '자신들은 세상에 남아있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라 했었는데.

그렇다면 은교도 같은 뿌리를 갖고 있을까.

책을 읽는 내내 뜨거웠다.

쉽게 읽히기도 했지만 한 달 반 만에 써냈다는 작가의 열정이 느껴진다.

이렇게 다 쏟아내고 나면 소설가에게는 무엇이 남겠나 싶기도 했는데 후기에 보니 실상 그도

내장이 다 빠져나가는 듯했다고 소회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늙어감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심어주었으므로 공포소설이라 부르고 싶어진다.

늙어서도 말끔히 제어되지 않는 욕망의 사슬,

그 욕망을 범죄로 보는 젊은이들의 집단적 시선도 두려워지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한창 이적요 시인의 기념사업이 진행되고 있던 2010년 봄,

후배시인이자 변호사인 Q는 '내가 서지우를 죽였고 나의 생애가 모두 위선이었다'는

이적요의 비밀노트를 열게 된다.

 

은교,

그 아이가 내 집의 정원에서 잠들어 있는 걸 발견한 건 어느 초여름 오후.

그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었지만 또 그리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나 이적요는 얼이라는 아들을 두고 있기는 하지만 가정을 꾸려본 일이 없는,

그러니까 사랑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뻣뻣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

그런 나의 인생에 오렌지 같은 열일곱 살 은교가 뚝 떨어졌다.

경이롭도록 싱싱한 육체는 땀방울조차 신성하고 피부 밑 혈관은 흐르는 샘물 같아라.

은교는 등롱처럼 반짝이고 흔들리는 아름다움이었다.

 

별은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추한 것도 아니고 그냥 별일 뿐이네.

사랑하는 자에게 별은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배고픈 자에게

별은 쌀로 보일 수도 있지 않겠나

 

서지우,

무기재료학을 전공하던 서지우가 내 강의시간에 불쑥 나타나더니만 후에 제자로 받아 주십사

머리를 조아렸다.

그 뒤 내 집에 수시로 드나들며 나의 수족이 되어왔다.

세계를 단숨에 이해하는 감수성이 없어 늘 ‘멍청’이 취급을 하기는 했지만 나는 시종 그를

‘내 새끼’로 여겼다.

 

(내용을 더 읽고 싶으시다면 펴서 보시기를)

접힌 부분 펼치기 ▼

 

은교와 먼저 알게 된 서지우는 그녀를 이적요의 집 청소도우미로 소개한다.

영악스러우며 젊음의 무기를 적절히 사용할 줄 알았던 은교는 곧 두 세대에 걸친 남자로부터

사랑을 받게된다.

마치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때론 하나도 빠짐없이 다 안다는 듯 두 남자 사이의 감정선을

넘나들었다.

너무나 존경하고 덕망 있는 시인 이적요를 요상한 계집과 욕망으로부터 분리시켜야겠다는

생각으로 서지우는 그들을 떼어놓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그가 노력하면 할수록 이적요는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고

체제를 전복하려는 불온한 테러리스트로 여겼다.

 

이적요는 우연한 기회에 서지우에게 자신이 쓴 소설 ‘함정’을 내어주게 되고

서지우는 문학상을 타게 된다.

부와 명예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서지우는 그 함정의 우쭐함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문단의 냉대와 집요한 출판사의 부추김에 그는 다시 스승의 원고에 손을 대 단편 소설 세 편을

빼낸다.

이미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던 이적요와 서지우.

이적요는 질투심과 열등감에 사로잡힌 서지우가 자신의 작품을 마음대로 훼손하고,

자신이 가진 젊음에의 욕망을 능멸하며

나의 처녀, 은교마저 농락하는 서지우를 보고 ‘집행’하기로 결심한다.

그의 죄는 생로병사라는 자연법을 부정하고 모욕했으며. 늙었다는 이유로 스승의 자존을 능멸하고 타인의 작품과 영혼을 훔치고 고친 중죄였다.

사형, 땅땅땅!

 

은교는 젊음이 쏘아대는 ‘빛’, 이적요는 늙은 ‘그림자’였다.

그의 생일날, 그는 처녀의 향기에 둘러싸인 은교를 그는 가만히 껴안는다.

그러나, 세상은 욕망이 금기된 그의 육체를 감시하고 있다.

은교의 몸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길로 가고 싶었지만

그는 은교의 이마 위에 입맞춤을 하고 방에서 내보낸다.

그렇게 곱게 지켜낸 은교를 서지우는 이층 서재에서....

서재에 사다리를 놓고 이를 숨어보는 늙은 사슴의 눈에는 빗물이 자꾸 들어갔다.

 

서지우는 죽음 앞에서만큼은 멍청하지 않았다.

이적요의 ‘당나귀’를 빌리러 주차장으로 내려갈 때 스승이 보냈던 우주적인 눈빛을 간파하고

정비소에 들른다.

이적요가 사고가 나도록 핸들을 조작했다는 사실을 알고 내내 눈물을 흘리며 차를 몰고

도로로 다시 나갔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넘어온 트럭에 체념하듯 받혀 죽게 된다.

서지우가 죽자 소주로 끼니를 연명하던 이적요는 지병인 당뇨병과 그에 따른 합병증으로

급격하게 늙어갔다.

더구나 간에서 발견된 암세포는 이미 육체를 해체시키고 있었다.

언젠가 티베트에 갔을 때, 성산 카일라스에 은거했던 밀라레파의 이야기를 듣고

귀국하자 마자 팠던 굴로 들어가 은교로부터 받았던 토끼인형을 안고 죽음을 맞이한다.

일년 후,

은교는 변호사로부터 건네받은 이적요의 노트를 다 읽은 후 노트를 불태운다.

 

  

 

 

 

 

 

은교라는 제목은 ‘은밀한 교제’ ,더 나아가서는 ‘은밀한 성교’까지 추론하게 했었다.

본문에서 언급되던 원조교제를 약간 비틀어 놓은 이름이 아니었을까도 싶었는데

송혜교의 혜교가 지혜로워 보이는 이름이듯이 어설픈 한자의 습득은 얼마나 선입견을

갖게하던지.

 

자기를 괴롭혀서 시를 짓는 것보다

나는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싶다. -A. 앙드레

 

젊은 날 은교를 만났다면 이적요는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았을 것이라 했다.

왜?

은교에게 그저 편지를 쓰면 되었으므로.

한 번도 사랑을 해보지 못한 이의 이 애틋한 가정법에 최상급의 동정이 생겨난다.

그의 노트를 다 읽은 은교가 울며 외친다.

“할아부지가 나를 이렇게 원하는 줄 몰랐어요. 이까짓 게 뭐라구요.”

 

 

나는 이적요가 은교에게 매료되었던 것이 은교가 가진 관능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관능은 그것을 도구화하고 이용할 줄 아는 나이에 더 어울리는 법.

17세 소녀가 가진 것은 관능이 아니라

학습한 이성으로 누르고 구겨넣었어야할 감정들을 두서없이 꺼내고 흐트려놓아도

죄가 되지 않는, 자유로우면서도 보호받는 영혼의 버릇없음이 아니었을까싶다.

민주화운동으로 10년동안 옥살이를 하고 자신을 속이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었던 그가

자신의 세대가 제공한 희생의 토대위에서 도발하는 젊음을 동경했던 건 아닌가한다.

 

이적요는 자신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판타지를 맛보았다.

그가 그토록 욕망했던 시간을 거슬러 가볼 수 있었다.

호텔 캘리포니아, 그 곳에서

그는 강물위를 흐르며 젊어지는 자신, 늙은 은교, 다시 젊어지는 은교를 마음껏 만진다.

만약 천재지변이라는 것이 지진이나 화산폭발이 아닌 시간의 방향을 되돌리는 것이라면

어떠할까.

우리가 여태껏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고통과 쾌락의 탄생을 목격하게 되지 않을까.

노년에는 고요함만이 어울리는 것은 아니겠지만

노년의 품위가 욕망보다 값져 보이는 것은 나 또한 편견을 갖고 있다는 뜻인가 보다.

 

저자가 청년작가로 불리기를 원하는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어찌됐건 그것은 젊음에 베이스캠프를 치고 젊음이라는 고지를 수시로 넘나들고자하는

욕망 때문 아닌가.

오욕칠정을 드러내는 것이 진정한 웰빙의 길이라고 그가 말했다는데

그래, 그는 예술가이므로 봐주자.

인간이 만들어놓은 규범은 욕망의 다른 이름이라고 치자.

창작과 예술의 아궁이라고 치자.

그러나 며칠 전 예능프로에서처럼 작가를 데려다놓고 '내 마음 속 은교'라는 이미지를

농담처럼 끌어쓰는 것은 섣부르지 않았나 생각된다.

부디 이 소설을 덮으며 바라게 되는 것은 다른 은교들이 양산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

 

마지막으로, 나는 자신의 추악한 내면을 폭로하고 우상화를 거부한 이적요의 고백이

자신의 시를 계승시키고 완성시켰다고 본다.

대학생이 된 은교가 변호사에게 자신의 근황을 조용히 이야기하지 않는가.

“저 요즘 시 쓰고 있어요.”

시가 세상을 구하지는 못하지만 상처받은 젊음 하나는 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시가 사랑이라는 피로 유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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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6-29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멋진 서평 잘 읽고 갑니다 ^_______^

ksvioletta 2012-10-26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찾아주시고 읽어주시고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해요. ^^
좋은 가을 맞이하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