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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을 행사하지 않고는 개혁이 불가능한 전제정치에서 폭력 행사는 정당하다. 그런데 그 목적은 오직 폭력을 쓰지 않고도 개혁을 할 수 있는 민주정치를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 민주 헌법과 민주주의적 방법을 파괴하려는 안팎의 공격에 대항하는 폭력 행사 역시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시민의 저항권을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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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국현대사 1959-2020 - 개정증보판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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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대부분 천수를 누린 다음 자연사의 축복을 받았다. 정부·국회·권력기관은 물론이요, 경제·문화계에도 당사자가 권력을 쥔 경우는 이제 거의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민족사적 정통성을 결여한 채 출발한 이유와 과정을 엄정하게 평가하고 철학적으로 소화하는 과제는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다.

1993년 4월 『친일문학론』으로 지식인사회의 일제 잔재를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2009년 11월 『친일인명사전』 발간 계획을 세웠던 임종국 선생 빈소에서 설립 발의를 한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파 후손들의 명예훼손소송과 발행금지가처분소송을 이겨냈다.

민족문제연구소, 『금단의 역사를 쓰다, 18년간의 대장정』, 2009. 이 자료집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과 함께 『친일인명사전』 편찬 발간에 힘을 보탠 민족문제연구소 회원과 국민모금 참가자 명단이 실려 있다. 당시 국회도서관 관계자는 이 자료집을 대출받은 국회의원의 보좌진에게 외부에 유출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국회를 비롯한 권력기관에 그 후손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국가정통성의 두 번째 요소는 ‘경제적 효율성’이다.

국가정통성의 세 번째 요소는 ‘민주적 정당성’이다.

3·15선거는 단순한 부정선거가 아니라 완전한 조작선거였다.

내무부 공무원과 경찰관이 지나치게 열심히 일을 한 나머지 이기붕의 득표율이 100%에 육박했고 득표수가 유권자 수보다 많은 선거구가 속출했다. 그러자 내무부장관 최인규가 긴급지시를 내려 이기붕의 득표율을 79%로 ‘조정’했다.

"국가 자립경제 재건에 총력을 기울여 기아선상에 방황하는 민생고를 해결함으로써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4항), 혁명의 과업을 이루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본연의 임무에 복귀한다(6항)." ‘민생고 해결’ 공약은 박정희 소장의 진심이었겠지만 ‘병영복귀’는 거짓말이었다.

혁명과 쿠데타를 구분하는 기준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쿠데타는 민중의 동의와 지지와 참여가 없이 폭력으로 국가질서를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행위를 가리키며 군대를 동원해 그런 일을 하면 군사쿠데타라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민족중흥을 이룩한 위대한 지도자’ 또는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인권을 유린한 독재자’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박정희 대통령은 폭력으로 권력을 탈취했지만 폭력만으로 통치하지는 않았다. 자발적으로 추종하거나 진심으로 지지한 국민도 많았다. 박정희 정부는 18년의 집권 기간에 농업 중심의 전통사회를 중화학공업을 보유한 산업사회로 바꿨다. 고속도로와 항만, 비행장을 비롯한 사회간접시설을 건설하고 민둥산을 푸른 산으로 가꿨으며 전국에 상하수도와 전기를 보급하고 기생충과 전염병을 퇴치했다. 나는 이런 것이 ‘커다란 선’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크게 성공한 독재자였다.

여가가 없는 시민에게 자유와 민주주의는 아무 의미가 없다. 90% 사람들은 항상 일만 하고 여가가 없는 반면 10% 사람들은 늘 놀면서 전혀 또는 거의 일하지 않는다면 자유란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다. 마그나카르타, 권리장전, 미국 헌법, 자유와 평등이라는 프랑스의 모토는 한갓 종잇조각에 불과한 것이다.
— G. 버나드 쇼, 『쇼에게 세상을 묻다』

우리는 각자 나름의 철학과 인생관을 지니고 산다. 똑같은 경험을 해도 철학이 다르면 해석이 달라지며, 경험까지 다르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독재적인 방식으로 산업화를 이뤘다는 사실을 저마다 다르게 해석하고 평가한다.

국립 서울대를 의미하는 ‘ㄱㅅㄷ’을 두고 기하학적으로 결합해 만든 교문을 우리는 ‘공산당’ 또는 ‘계집·술·담배’의 약자라며 낄낄대곤 했다.

경제발전의 핵심 과제는 이륙이다. 이륙에 성공하면 그다음부터는 수월하다. 문제는 이륙이 쉽지 않다는 데 있다.

로스토는 경제를 움직이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은 인간의 보편적 욕망이라고 봤다. 피부색이나 기후의 차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냉전시대 체제경쟁에서 승리하려면 군사력뿐만 아니라 경제력과 경제이론에서도 이겨야 한다고 믿었던 그는 경제성장의 패턴에 관한 이론으로 마르크스를 이기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의 책 『경제성장의 단계』에 『공산당선언(The Communist Manifesto)』을 패러디한 부제 ‘비공산당선언’을 붙였다.

20세기 후반 지구촌에는 마르크스의 길을 따라가 이륙에 성공한 경우도 있었다. 소련은 그 길을 선택했고 체코, 헝가리, 폴란드, 동독 등은 강요당했다. 그런데 그 나라들은 결국 만성적 경제난과 체제붕괴의 위기를 견디지 못해 시장경제로 선회했다. 베트남과 중국은 선제적으로 노선을 변경해 일정한 성공을 거뒀다. 가던 길을 끝까지 간 쿠바와 북한은 이륙하지 못했다.

로스토의 길을 따른 신생국가도 모두 성공하지는 못했다. 칠레의 피노체트와 필리핀의 마르코스는 자본주의적 개발독재를 선택했지만 실패했다.

나는 인간 박정희가 아무 ‘주의자’도 아니었다고 본다. 민족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반공주의, 군국주의, 자유주의 그 어떤 이념도 그를 온전하게 사로잡지 못했다. 생애 전체를 볼 때 그가 일관성 있게 추구한 것은 권력 하나뿐이었다.

레닌은 공산주의자들이 혐오해 마지않던 사적(私的) 소유를 일부 허용한 가운데 국가전략 산업을 정부가 계획하고 조직하고 통제하는 절충형의 신경제계획(NEP)을 실시했다.

그 시대 한국의 경제체제는 영국·프랑스·미국 등 자본주의 선진국과 제국주의 일본, 히틀러의 독일, 스탈린의 소련 경제시스템을 절충한 혼합경제체제였다.

지금 중국의 경제체제가 그때 한국과 비슷하다. 경제개혁을 추진한 중국공산당의 관료들이 괜히 박정희체제를 연구한 게 아니었다. 그들은 ‘성공한 개발독재’의 성공 요인을 탐구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어느 것 하나도 하늘에서 거저 떨어지지 않았다. 오늘의 청년들은 그 모두를 원래부터 있던 것으로 여길지 몰라도, 나는 꿈을 꾸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

이념적 편견에 사로잡혀 국가의 책임을 내팽개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저지른 여러 잘못 중 가장 어리석은 것이었다.

자본의 원시적 축적 과정이 대한민국에서 특별히 비인간적이고 잔혹했다고 할 수는 없다. 마르크스의 말마따나, 어느 곳에서나 자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며 태어났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자본의 원시적 축적’ 또는 ‘이륙을 위한 선행조건 충족’을 위한 것이었다.

"내가 전쟁을 일으키자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 일본은 국가의 운명을 걸고 전쟁을 일으켰는데도 국민은 기꺼이 따라줬다. 태평양전쟁 때 패전해서 국민에게 막중한 피해를 주긴 했지만. 이 정도의 사업에 협조를 안 해줘서야 되나."

IMF 경제위기는 국가주도형 경제개발계획 시대의 종결을 앞당겼다.

경제성장은 국가의 부(富)가 늘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의 부는 무엇인가? 국민이 해마다 생산하고 소비하는 재화와 서비스의 양이다. 이것을 측정하기 위해 국민총생산(GNP), 국내총생산(GDP), 국민총소득(GNI) 같은 지표를 쓴다. 국민총생산은 한 해 동안 국민이 생산한 부가가치 총량을 집계한 것이다.

국민총생산을 늘리는 방법은 네 가지가 있다. 첫째, 더 많은 노동력의 투입. 그렇게 하려면 인구가 늘어야 하며, 인구가 늘지 않는다면 고용률을 높여야 한다. 둘째, 더 많은 자본의 투입. 그러려면 투자를 해야 한다. 투자는 생산한 것 가운데 일부를 소비하지 않고 자본을 형성하는 데 쓰는 행위를 말한다. 투자율이 높으면 성장률이 높아질 가능성이 커진다. 셋째, 생산기술의 향상. 기술수준이 높으면 같은 양의 노동력과 자본으로 더 많이 생산할 수 있다. 넷째,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 합리적 규칙이 있고 자본가와 노동자, 정부와 기업, 공급자와 수요자 그리고 시민 각자가 모두 그 규칙을 지키면서 남들 역시 그렇게 할 것이라고 믿는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회에 비해 더 많은 부를 생산할 수 있다.

광산노동자와 간호사는 급여 일부를 가족에게 송금해 외화 획득에 큰 도움을 줬다. 이때 한국 정부가 그들의 급여를 담보로 상업차관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아무 근거가 없다.• 독일의 법률은 근로계약에 따라 독일 기업이 한국인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급료를 담보로 잡고 정부차관을 제공하는 행위를 허용하지 않는다.

종로 10곳을 비롯해 서울에만 14곳, 부산에 7곳, 경주에 4곳, 제주도에 2곳의 관광요정이 있었다. 가장 규모가 컸던 서울 삼청각과 대원각에는 ‘관광기생’ 수가 800명이나 됐다. 여행사와 관광요정, 호텔이 삼각동맹을 맺은 이 국제적 성매매사업은 1973년 한 해에만 2억 달러의 관광수입을 안겼다.

미국 대사관도 모르게 영국에서 신권을 인쇄해 들여온 그는 1962년 6월 9일 밤 10시,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화폐개혁을 선포했다. 화폐 단위를 10 대 1 비율로 ‘환’에서 ‘원’으로 바꾼 이 작전의 목적은 음성자금을 끌어내 투자재원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화폐개혁 실패는 국내 자본으로 산업화를 추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져 민족자본으로 국가기간산업을 건설하고 수입대체산업과 수출산업을 세우는 전략은 설득력을 잃었다.

"기업의 탈세와 불법은 불합리한 제도 때문이며 기업인을 처벌하면 경제가 위축되어 경제가 침체한다"라는 이병철 회장의 견해는 대통령과 판검사, 언론이 모두 추종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어 지금도 여전히 만만치 않은 위력을 발휘한다.

당시 나는 독일 유학 중이었는데,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온 친구가 내게 물었다. "아니, 그 돈을 왜 한국 금융기관에 뒀대? 스위스 은행도 있는데. 너네 독재자들은 좀 특이하다."

고전적 자유주의가 풍미했던 19세기 중반, 리스트는 자신이 독일인이기 때문에 자유무역론을 거부한다고 말했다. 산업기반이 약한 독일이 자유무역을 하면 경제적으로 영국의 패권 아래 편입되어 별 볼일 없는 산업을 가진 2등 국가가 될 것이라 전망하면서, 높은 무역장벽을 치고 자국의 산업을 육성해 충분한 경쟁력을 확보한 후에 국내시장을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률적으로 재벌은 ‘동일인이 사업내용을 사실상 지배하는 대규모 기업집단’이다. 2020년 5월 현재 64개가 지정되어 있는 ‘대규모 기업집단’ 가운데 삼성은 59개 계열사 자산총액 425조 원으로 54개 계열사 자산총액 235조 원인 현대자동차를 멀찌감치 따돌린 압도적 1등이었다.

최근 몇 해 삼성그룹은 현대자동차·SK·LG·롯데·포스코·한화 등 10위 이내의 나머지 민간 재벌그룹을 다 합친 것만큼의 당기순이익을 올렸다.

IMF 경제위기의 원인은 기체결함과 조종미숙이었다. 김영삼 정부는 국내 금융거래와 민간기업의 자본수입 규제를 완화하면 한국은행의 통화관리 능력이 크게 위축된다는 것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

정부가 IMF의 긴축재정 요구에 굴복해 사회간접자본을 해외투기자본에 개방하자 엉터리 교통량 예측을 토대로 높은 수익률을 보장한 민자(民資) 고속도로는 손쉬운 사냥감이 됐다.

비슷한 시기에 외환위기에 빠졌던 말레이시아의 경우 마하티르 총리가 우리 정부와 달리 IMF 자금지원을 거부하고 외환시장과 금융시장에 강력하게 개입해 문제를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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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간 큰 정치·사회적 사건을 여럿 겪어서인지, 나는 우리 현대사를 예전과 조금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됐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신종 바이러스의 대유행을 겪으면서 나뿐 아니라 한국인이면 누구나 한국사회를 ‘재발견’했다고 생각한다.

첫째, 지난 6년 동안 일어난 중요한 사건에 대한 서술을 추가하고 인구·국민소득·소득분배 등 사회변화를 보여주는 시계열 데이터를 업데이트했다.

둘째, 한국사회에 대한 시민의 인식과 태도가 6년 전과 비교했을 때 변화했다는 사실을 반영하되 책이 지나치게 두꺼워지지 않도록 정보를 압축하고 문장을 전체적으로 손보았다.

셋째, ‘조금 달라진 시선’으로 에필로그를 다시 썼다.

나는 우리 현대사에서 희망의 단서를 찾고 싶었다. 현실이 암담할 때 역사 말고 어디에서 그런 것을 찾겠는가.

2020년의 현실은 우리 자신과 역사에 대한 믿음과 자부심을 품고 희망적인 미래를 기대해도 좋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안다. 역사는 그런 시간을 길게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역사는 또한 환희와 낙관이 넘쳐나는 시대가 비극과 몰락의 시간을 예비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런 두려움을 안고 격려를 받으며 나는 오늘의 역사를 산다. 그 과정에서 모인 생각과 감정을 나누며 독자들께 말하고 싶다. ‘역사는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2021년 1월
자유인의 서재에서
유시민

나의 한국현대사 1959-2020 | 유시민

모든 역사는 ‘주관적 기록’이다. 역사는 과거를 ‘실제 그러했던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방송뉴스와 신문보도가 현재를 ‘실제 그러한 그대로’ 전해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역사학자 서중석을 석좌교수로 초빙하기로 했던 연세대는 그가 백낙준 초대총장의 친일행적을 비판한 적이 있다고 해서 취소했다. 이런 위험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의 지명을 받아 국회 인사청문회에 나온 공직 후보자들은 5·16을 쿠데타로 보느냐는 질문에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흐름 속에 있는 것은 사건만이 아니다. 역사가 자신도 그 속에 있다. 어떤 역사책을 집어들 때, 책 표지에 있는 저자의 이름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출간 일자나 집필 일자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 것이 때로 훨씬 많은 것을 누설한다.
— 에드워드 H. 카, 『역사란 무엇인가』

"대구·경북의 프티부르주아 출신 지식 엘리트로서 젊은 나이에 공직을 맡고 이름을 알렸다가 문필업으로 돌아온 자유주의자." 나는 나를 그렇게 본다.

민주주의 선거제도는 훌륭한 사람의 당선을 보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악한 인물이 권력을 쥐어도 악을 마음대로 행할 수 없게 한다는 강점 덕분에 문명의 대세가 됐다.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며,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 "존재하는 것을 개념에 따라 파악하는 것이 철학의 과제다. 존재하는 것은 곧 이성이기 때문이다."•• 철학자 헤겔의 난해한 이 견해를 통속적으로 해석하면 이렇게 된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며, 그 이유를 말이 되게 설명하는 것이 지식인의 임무다.’

거듭 말하지만, 역사는 주관적인 기록이다. 누가 쓴 어떤 역사도 과거를 "원래 그러했던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현재’는 가상의 개념일 뿐이다. 현재의 모든 사실은 즉각 과거로 들어간다.

"원래 그러했던 그대로(wie es eigentlich gewesen war)"라는 말은 근대 서구 역사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독일 역사학자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의 것이다. 랑케는 1824년에 출간한 『라틴 및 게르만 제 민족의 역사 1494~1514』의 서문에 "과거를 판단하거나 윤택한 미래를 위해 교훈을 제공해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과거를 원래 그러했던 그대로 보여주려고 한다"라고 썼다.

그때와 달리 고교 졸업생의 70%가 대학에 가는 지금은 대학졸업장이 괜찮은 일자리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우리 역사에서 모든 청년에게 ‘제대로 된 일자리(decent job)’가 주어진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때 대한민국은 거대한 ‘난민촌’이었다.

극단적 관념론 철학인 주체사상을 국가이념으로 내세우고 생물학적 유전자를 따라 권력을 대물림하는 나라가 사회주의를 표방한다는 사실을 마르크스가 안다면 무덤에서 크게 화낼 것이다.

국부(國父)를 자처한 무능하고 이기적인 독재자가 통치하는 동안 국민의 삶은 불안하고 비참했다.

허황하기 짝이 없는 ‘북진통일론’을 비판하고 ‘평화통일론’을 에둘러 주장한 죄로 교수형을 당한 그는 사형집행 임석 검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공산당도 아니고 간첩도 아니오. 그저 이승만과의 선거에 져서 정치적 이유로 죽는 것이오. 나는 이렇게 사라지지만 앞으로 이런 비극은 없어야 할 것이오."

1959년의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걸지 않고는 권력의 불의에 대항하거나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행사할 수 없는 나라였다.

일부 광물자원 이외에는 수출할 것이 아예 없었던 나라가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무역대국으로 올라섰으니 기적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대한민국이 모두에게 살기 좋은 나라는 아니다. 고르게 가난했던 독재국가 대한민국은 풍요롭지만 고르지 않은 민주국가로 변신했다.

20세기의 신생국가 중에 대한민국처럼 제국주의 수탈과 전쟁이 남긴 폐허를 딛고 거대한 현대적 산업과 정치적 민주주의를 세우는 데 성공한 나라는 없다.

나는 한국현대사를 만든 힘이 대중의 욕망(慾望, desire)이었다고 생각한다. 욕망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느낌 때문인지 사람들은 욕구(慾求)라는 말을 선호하지만 어느 것을 쓰든 상관없다.

첫째, ‘생리적 욕망’. 사람은 숨을 쉬고 물을 마시고 밥을 먹고 잠을 자야 한다. 짝을 찾아 성적인 욕망을 채우려 한다.

둘째, ‘안전에 대한 욕망’. 사람은 두려움, 불안, 혼돈을 싫어한다.

셋째, ‘소속감과 사랑에 대한 욕망’. 사람은 고립과 소외를 싫어한다.

넷째, ‘자기 존중의 욕망’. 사람은 남한테 존경받고 자신을 긍정적으로 인식할 때 기쁨과 만족을 얻는다.

다섯째, ‘자아실현의 욕망’. 이것은 본성에 충실하고 잠재성을 실현함으로써 인간성의 정점에 오르려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든 것을 넘어서는 최고의 내면·철학적 욕망이다.

고대 그리스와 중국에서 훌륭한 삶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남긴 사람은 직접 생산활동에 종사하지 않아도 되는 귀족과 지식인이었다.

자연이 진공을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사회는 권력의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는’ 신천지 대한민국의 권력은 냉전시대가 올 것임을 일찌감치 예견한 ‘빈손의 망명객’ 이승만 박사가 차지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처단함으로써 민족사의 정통성을 세우려 했던 국회 반민특위는 친일파의 역습을 받고 해산당했다. 헌법이 현실을 지배하지 못하는 가운데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있어야 할 자리를 독재와 반칙과 부정부패가 점령해버렸다. 대한민국의 첫걸음은 남루했다.

사고하는 역사가는 엄밀하게 말하면 과거의 문제를 풀고 있는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것이다. 그리고 가장 긴급하게 해결을 요하는 문제들 가운데하나는 바로 우리의 역사성에 관한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책임감 있게 행동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의 역사를 회피하지않으면서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분리해야만 하는긴장관계를 견뎌내야만 한다.
- 한스 위르겐 괴르츠, 『역사학이란 무엇인가』

나는 조선과 중국을 오가면서 무장투쟁을 벌였던 김구, 안중근, 이봉창 같은 분들을 숭앙하며 미국 망명객이었던 이승만 박사가 조국 광복에 기여한 바는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한반도 분단의 책임은 북위 38선을 경계로 남북을 분할 점령한 미국과 소련에 있다. 국가주권을 지키지 못했고 제 힘으로 찾아오지도 못했다는 이유로 국토 분단의 책임을 우리 민족에게 묻는 것은 강도 피해자에게 범죄의 책임을 지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열전(熱戰)에서 막 벗어난 지구촌은 이념적 상호비방과 경쟁적 군비확대를 핵심으로 하는 냉전(冷戰)시대에 진입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터지자 국토와 국가의 분단에 이어 민족마저 둘로 갈라졌다.

2013년 6월 국가정보원이 공개한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남쪽이 자주성이 결여되어서" 남북관계가 풀리지 않는다고 거듭 비판하는 대목이 있다. ‘자주’ 이념이 지금까지도 북한의 마지막 자존심으로 남아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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