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제 씨는 선한 의도가 있어야만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역설을 온몸으로 보여줬다. 경선탈락-탈당-신당창당-독자출마로 이어진 그의 반칙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것 덕분에 진보 정권 10년을 경험할 수 있었기에 나는 텔레비전 뉴스 화면에서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감사의 마음을 되새기곤 했다.

표현의 자유는 정부가, 또는 압도적 다수의 국민이 옳다고 생각하는 견해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대다수 국민이 터무니없다고 판단하는 견해까지도 제한 없이 표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비록 진리가 아니라 할지라도 그 견해를 표현하는 행위가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는다면 제약하지 말아야 한다.

2004년 봄의 탄핵규탄 촛불집회는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우리 현대사에서 시민이 현직 대통령을 지키려고 연속·동시다발·전국적 집회시위를 벌인 일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탄핵규탄 촛불집회의 투쟁대상은 야당이었다.

인간이 불완전한 상태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이 존재하는 것이유익하듯이, 삶의 실험도 다양하게 이뤄질 필요가 있다. 다른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각자의 개성을 다양하게 꽃피울수 있어야 한다. 각자의 고유한 개성이 아니라 전통이나 관습에따라 행동하게 되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가운데 하나이자 개인과 사회발전의 불가결한 요소인 개별성을잃게 된다.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가족계획과 기생충박멸

우리 세대는 난민촌과 병영을 체험했다. 선명하게 남아 있는 기억을 몇 가지만 되살려본다. 학교에 채변 샘플을 제출하고 회충약을 한 움큼 받아먹었다. 〈새마을 노래〉를 들으면서 새벽에 거리청소를 했다.

1961년 "알맞게 낳아서 훌륭하게 키우자"로 시작한 가족계획 구호는 1963년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와 1971년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를 거쳐 1980년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까지 갈수록 강력해졌다.

2012년 질병관리본부가 실시한 ‘제8차 전국민장내기생충감염실태조사’에서 나온 감염률은 2.6%였고 2020년 제9차 조사 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게 나올 것이다.

한국기생충박멸협회도 대한가족계획협회와 마찬가지로 ‘자기 성공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전국 13개 시도에 지방조직을 만들고 청사도 갖췄는데, 정작 기생충을 박멸하고 나자 업무가 사라진 것이다.

개발제한구역 지정 자체는 공익을 위해 재산권 행사를 제한한 것이어서 위헌이 아니지만 재산권 행사를 통해 수익을 얻을 기회를 박탈당한 토지소유자에게 아무런 보상을 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고 하면서 국회가 보상 관련 입법을 할 때까지 새로 개발제한구역을 지정하지 못하게 한 정도였다.

산림녹화사업과 그린벨트 제도는 산업화와 환경보호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보여준다. 산업화는 불가피하게 생태계와 환경을 파괴한다. 하지만 산업화로 얻은 경제적 자원과 능력을 잘 활용하면 훼손된 환경을 어느 정도는 복원하고 보호할 수 있다. 그린벨트는 수도권과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울산, 창원 권역에 남아 있으며 대부분 사유지인 임야와 논밭이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사명을 띠고 태어난 사람 역시 없다. 그래서 그 헌장은 1993년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지워졌고 정부의 공식 행사에서도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국기에 대한 맹세’는 민주화시대에도 살아남았다. 충남교육청 공무원이 1968년에 처음 만든 맹세문은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의 통일과 번영을 위하여 정의와 진실로서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였는데 문교부가 문구를 살짝 바꿔 전국 학교에 하달했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병영의 기본은 점호와 피아(彼我) 구분이다. 그래서 정부는 온 국민이 주민등록증을 만들게 했다.

주민등록증의 핵심은 주민등록번호와 지문 그리고 사진이다. 최초의 주민등록제도는 1942년 조선총독부가 도입했다. 일본 호적법에 바탕을 둔 「조선기류령」을 제정해 징용과 징병 등 식민지 수탈을 수월하게 했다.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제정한 「주민등록법」의 목적도 일제의 기류령과 비슷했다. 현행 주민등록증과 주민등록번호가 생긴 것은 1968년 가을이다.

2006년 개교 60주년을 맞은 서울대가 해방 이후 60년 동안 판매가 금지됐던 책 가운데 역사적 의미가 있는 스무 권을 발표한 적이 있다. 『전환시대의 논리』(리영희), 『신동엽전집』(신동엽), 『순이삼촌』(현기영), 『타는 목마름으로』(김지하), 『문제는 리얼리즘이다』(게오르그 루카치), 『빨치산의 딸』(정지아), 『사회주의 인간론』(에리히 프롬), 『무림파천황』(박영창),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황석영), 『한국전쟁의 기원』(브루스 커밍스), 『해방 전후사의 인식』(송건호 외) 등이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광주민중항쟁 참가자들이 쓴 항쟁기록을 소설가 황석영이 손질해서 출판한 책이다. 1980년대 중반 ‘넘어넘어’라는 약칭으로 회자됐던, 광주민중항쟁의 진실을 널리 알린 최초의 공개 출판물이었다. 금서가 된 바람에 더 유명해진 무협소설 『무림파천황』이 불온서적 지목된 이유는 좀 우습다. 정파(正派)와 사파(邪派)의 대결을 변증법으로 설명한 딱 한 쪽 때문이었다. 그때 공안당국자들은 변증법과 마르크스주의를 같은 것으로 취급했다.

2008년 드러난 국방부의 장병 금서목록에서 보듯 개별 국가기관의 목록은 살아 있었다. 23권의 국방부 금서목록에는 『지상에 숟가락 하나』(현기영), 『북한의 우리식 문화』(주강현), 『통일, 우리 민족의 마지막 블루오션』(전상봉),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노암 촘스키), 『미군 범죄와 한미 SOFA』(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소금꽃 나무』(김진숙), 『나쁜 사마리아인들』(장하준), 『김남주 평전』(강대석), 『대한민국史』(한홍구), 『세계화의 덫』(하랄드 슈만 외), 『삼성왕국의 게릴라들』(프레시안) 등이 들어 있었다. 목록이 공개되자 시민은 그 책들을 베스트셀러로 만들어 줌으로써 국가의 사상통제에 반격을 가했다.

1966년 〈뜨거운 안녕〉을 타이틀곡으로 한 쟈니 리의 앨범은 35만 장을 판매하는 대성공을 거뒀는데 여기에 들어 있던 김문응 작사, 길옥윤 작곡의 〈내일은 해가 뜬다〉도 걸려들었다.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 때도 올 테지"라는 가사가 권력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탓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나쁜 때란 말이냐!" 이 노래는 대학가 운동가요집에 〈사노라면〉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탓에 오랫동안 작곡자 미상의 구전가요로 알려졌다. 1983년에는 한일관계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개그맨 정광태의 〈독도는 우리땅〉을 일시 방송 금지했다.

1993년 가수 정태춘 씨가 의미 있는 싸움을 시작했다.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를 받지 않고 음반을 제작·발표함으로써 문화관광부가 자신을 고발하게 만든 다음 사전심의를 강제한 「음반 및 비디오물에 대한 법률」에 관한 위헌심판을 제청한 것이다.

여기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그 싸움을 키웠다. 4집 앨범 ‘컴백홈’ 수록곡 〈시대유감〉에 대해 공윤이 수정을 지시하자 가사 전체를 삭제하고 연주곡만 수록하는 방식으로 검열에 대항했고 서태지의 팬들은 격렬하게 공윤을 비난했다.

결국 공윤은 1996년 6월 사전심의제를 폐지했고 넉 달 후 헌법재판소는 사전심의제도가 표현의 자유를 규정한 헌법 제21조 위반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대중예술인들이 끈질긴 싸움을 벌여 일제강점기 이래 1990년대까지 존속해온 사전검열제도를 폐지한 것이다.

권력자는 역사에 자신의 인격을 각인한다. 한국현대사에 가장 뚜렷한 각인을 남긴 지도자는 박정희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러나 때로는 아무 지위도 권력도 없는 사람이 역사에 자신의 인격을 각인하기도 한다. ‘영원한 청년 노동자’ 또는 ‘노동열사’ 전태일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 스님도 권력자는 아니었지만 비슷한 경우다.

빨갱이라는 욕설에도 주눅 들지 않고 소신을 관철했던 정치인 이인제는 멋있었다. 고용보험을 만든 것 하나만으로도 그의 정치인생은 의미가 충분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페미니즘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나는 미국 문화비평가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 1961~ )의 생각을 받아들인다. 페미니즘은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존엄한 인간이라는 사상’이다.• 누구도 내놓고 부정하지 못할 만큼 당연해 보이는 이 사상이 ‘혁명성’을 띤 것은 현실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에 대한 지식은 어떤 유형의 정부가 성공할 가능성이높으며 또한 어떤 유형의 정부가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가에대해서도 실마리를 제공한다. 사실 성공적인 정부의 세 가지주요 적은 이데올로기, 도덕성, 공포다. 이데올로기에 의존하는정부는 실패하기 쉬운데, 이데올로기는 역사를 올바르게이해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는 경험을받아들이는 데 필수적인 개방성을 낳지 않고 오히려 폐쇄적인사고 체계를 낳는다.
-- 버넌 보그다너, 『역사, 시민이 묻고 역사가가 답하고 저널리스트가논하다』

"북한의 침략과 도발을 물리치려면 대한민국 내부에 ‘이념적 배신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 배신자는 북한보다 더 위험한 ‘내부의 적’이다. 철저히 색출해 처단해야 한다." 정부는 오랜 세월 그렇게 주장했고, 많은 시민이 그것을 의심해서는 안 될 신조로 받아들였다.

배신자를 가리키는 말은 시대에 따라 바뀌었다. 처음에는 ‘공산당’, ‘빨갱이’, ‘간첩’이었다가 ‘좌경(左傾)’, ‘친북(親北)’, ‘용공(容共)’을 거쳐 ‘종북(從北)’으로 이어졌다.

정부와 공안기관은 민족의 화해와 공존을 추구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을 ‘공산당’, ‘빨갱이’, ‘좌경’, ‘용공’, ‘친북’, ‘종북’이라고 모함했고 시민들은 침묵하거나 동조하는 시늉을 했다. 그것을 꼭 믿어서가 아니라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지키고 싶어서.

국가정보원은 모기를 향해 대포를 쏘았다. 모기를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움츠리게 하려고 쏘았고 그 목적을 이뤘다. 그 사건은 국정원의 불법 대선개입과 박근혜 후보 선거대책본부 고위관계자들의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유출, 각종 대선공약 파기와 청와대의 불통논란, 인사파행 등 당시 정부여당에 불리하게 작용하던 모든 정치 이슈를 집어삼켰다.

초등학생 때부터 ‘간첩 식별법’을 배웠다. 새벽에 구겨진 양복을 입고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 오랫동안 연락이 없다가 갑자기 찾아온 친척, 심야에 북한 방송을 듣는 사람, 직업이 없는데도 고급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신고해야 한다고 배웠다.

제일 널리 퍼진 반공표어는 "때려잡자 김일성 무찌르자 공산당"이었지만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표어는 "옆집에 오신 손님 간첩인지 다시 보자"였다. 평범한 시민이 이웃을 간첩으로 의심하도록 권하는 세상을 산 것이다.

학생들의 반공궐기대회 강제동원은 사라졌지만 반공포스터 그리기는 요즘도 여전한 모양이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대상을 받았다는 반공포스터에 깜찍한 문구가 들어 있었다. "포스터 그리기 지겹다 통일해라."

다음은 대법원이 재심 무죄를 확정한 사건들이다. 재심이 진행 중인 사건이 많아서 얼마나 더 무죄판결이 나올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조작간첩 재심 무죄’를 키워드로 인터넷 포털 뉴스를 검색해보자. 모두가 간첩죄를 적용한 사건은 아니지만 정보기관과 검찰과 법원이 북한의 사주를 받았거나 북한과 연계됐거나 북한을 이롭게 하려는 목적으로 활동했다는 혐의를 씌워 수사하고 기소하고 유죄판결을 했다는 사실만큼은 예외가 없다.
평화통일론을 주장했다가 사형당한 정치인 조봉암(1959), 박정희 정부가 북한 앞잡이로 몰아 사형한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1961),• 간첩죄로 기소한 1차 인혁당 사건(1964), 작곡가 윤이상과 화가 이응노 등 유럽 지식인들을 엮어 넣은 동백림 사건(동베를린 사건, 1967), 이중간첩 이수근(1967), 납북어부 간첩 서창덕(1967), 조총련 간첩 김복재(1970), 납북어부 간첩 박춘환(1971), 유럽 거점 간첩단 사건 관련 조사를 받던 중 중앙정보부에서 사망한 최종길 교수(1973), 이철 등 민청학련 사건(1974), 손두익·전국술 등 울릉도 간첩단(1974), 김우종 교수 등 문인 간첩단(1974), 김우철 등 형제 간첩단(1975), 납북어부 간첩 정규용(1976), 김정사 등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1977), 석달윤·김정인 등 진도 간첩단(1980), 신귀영·신춘석 등 가족 간첩단(1980), 한국전력 검침원 간첩 김기삼(1980), 재일교포 간첩 이종수(1982), 나진·나수연 남매 간첩단(1981), 재일교포 간첩 이헌치(1981), 조총련 간첩 최양준(1982), 미법도 섬마을 간첩단(1982), 일본 취업 노동자 간첩 차풍길(1982), 납북어부 간첩 이상철·김춘삼·윤질규(1983), 조총련 간첩 조봉수(1984), 이준호·배병희 모자 간첩단(1985), 제주도 간첩 강희철(1986), 조총련 간첩 김양기(1986) 사건이 대법원의 재심 무죄판결을 받았다.

나의 한국현대사 1959-2020 | 유시민

경제논리로 설명하자면 이렇게 된다. 간첩 ‘수요’는 여전한데 ‘공급’이 줄었다. 간첩을 더 보내달라고 북한에 요청할 수는 없으니 공급부족 현상을 해소하려면 간첩을 직접 ‘생산’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낸 것이 바로 ‘한국산(made in Korea) 간첩’ 또는 ‘DIY(Do It Yourself) 간첩’이었다.

간첩 생산비를 적게 들이려면 가공이 수월한 ‘원자재’를 찾아야 한다. 그래서 조총련 인사들과 안면이 있는 재일동포 유학생, 귀환 어부, 외딴 섬마을의 어민, 동유럽 사회주의국가를 오간 경력이 있는 유럽 교민과 유학생, 반정부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불온서적’을 읽은 국내 지식인들을 잡아다 간첩으로 만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가들은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였다. 스스로 목숨을 버림으로써 대의를 알리고 대중의 관심과 각성을 일으키려 했다.

‘연속·동시다발·전국적 도시봉기’는 다양한 ‘현행법 위반 행위’를 수반한다. 도로점거·투석·화염병 투척·야간시위 등 시위대가 하는 모든 행동이 실정법과 충돌한다.

그러나 다수 국민이 헌법을 지키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정당하고 불가피한 수단으로 받아들일 경우 그 모두는 주권자가 저항권을 행사한 정당행위가 된다. 한국의 민주화는 이런 방식으로 이뤄졌다.

우리의 민주화운동은 세 단계를 거쳤다. 5·16에서 10월 유신까지는 ‘맹아기’였다. 4·19는 곧바로 5·16이라는 북풍한설(北風寒雪)을 만났지만 죽지 않고 생명력을 키웠다. 10월 유신부터 6월 민주항쟁까지 유신체제 9년과 제5공화국 7년은 ‘성장기’였고 그 한가운데 광주민중항쟁이 있었다.

헌법을 무시하고 법률을 위반한 대통령을 탄핵하고 질서정연하게 새 대통령을 뽑았다. 우리의 민주화 역사는 자유에 대한 욕망과 꿈, 정의를 향한 열정과 헌신, 존엄을 지키기 위한 분투와 희생으로 엮은 여정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길을 다 걷지 않았고 민주주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박정희의 참모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서울대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다니다 육군사관학교로 진학해 군인이 됐던 예비역 준장 김종필이었다.

그는 5·16 직후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첫 부장을 지냈고 1963년에는 공화당 당의장이 됐으며 2004년까지 아홉 번이나 국회의원을 했다. 부정축재자로 몰려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던 전두환 정부 시기를 제외하고, 박정희 정부에서 김대중 정부까지 무려 40여 년 동안 정권의 ‘2인자’였다.

술도 잘하고 골프도 잘 치며 책도 많이 읽었던 김종필은 우리 정치사의 흥미로운 인물 가운데 하나다. 대선이 끝난 직후였던 1963년 11월 초, 그는 고려대에서 강연을 한 데 이어 서울대 문리대에 가서 학생들과 토론했다.

반정부 학생 대표들과 공개토론을 한 것을 보면 김종필은 군사쿠데타의 주역이자 대통령의 오른팔이었지만 낭만적 정치인이기도 했다.

서울지검 이용훈 부장검사와 김병리, 장원찬 등 수사검사들이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다며 기소장 서명을 거부하기도 했던 소위 ‘1차 인민혁명당 사건’은 법원이 도예종 씨를 비롯한 일부 피고인에게 반공법 위반 혐의로 유죄선고를 내렸지만 북한과 연계됐다는 증거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350여 명이 내란죄와 소요죄로 구속당하는 시련을 겪으면서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벌였던 당시의 청년들에게는 ‘6·3세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 투쟁을 주도했거나 나중 정계·학계·언론계에서 명성을 얻은 인물로는 김중태, 손학규, 이재오, 김덕룡, 현승일, 이명박, 정대철, 이부영, 서청원, 박관용, 하순봉, 김경재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 중 상당수는 투쟁의 대상이었던 정치세력에 합류했고 그때 20대 청년으로서 거리시위에 참여했던 세대는 고령 유권자가 되어 보수정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사랑도 움직이는데, 정치적 신념이라고 그렇지 않겠는가. 그러나 6·3사태가 4·19를 계승한 것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시기에 박정희 대통령은 병영국가 북한에 맞서기 위해 대한민국 역시 ‘병영국가’로 개조하기로 결심한 듯하다. 병영의 기본은 인원 점검이다. 정부는 국민 전체를 조직적으로 통제하려고 주민등록제도를 도입했고 향토예비군을 창설해 군복무를 마친 남자 250만 명을 정기적으로 병영에 소환했으며 대학입시에 반공도덕 과목을 신설했다. 초중고등학교 학생과 교사에게 반공교육을 실시했으며 전국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군사교육을 받도록 했다.

김종태, 이문규 등은 사형당했고 육군사관학교 교관이던 신영복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후 20년을 복역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과 ‘어깨동무체’ 서예글씨로 널리 알려졌던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바로 그 사람이다.

1970년대 초 민주화운동의 ‘톱스타’는 단연 시인 김지하였다. 정부는 재벌·국회의원·고급공무원·장성·장차관을 도적으로 묘사한 담시(譚詩) 「오적(五賊)」을 발표한 그를 구속했다.

유신헌법 초안을 작성한 사람은 중앙정보부와 청와대 파견 근무를 했던 김기춘 검사로 알려졌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992년 대통령선거 때 그는 공무원과 공공기관장들을 모아놓고 화끈한 지역감정 조장 발언을 한 ‘초원복집 사건’•을 일으켰다.

다시 20여 년이 지난 2013년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되어 국정운영을 전횡함으로써 ‘기춘 대원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랬던 그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구속 기소됐고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진보 성향의 문화예술인과 단체에 대한 정부의 재정지원을 막았다는 등의 ‘사소한 범죄 혐의’로 유죄선고를 받았으니, 웃지 못할 역사의 희극이 아닐 수 없다.

내 기억에 최후까지 남은 기업광고는 안국약품의 감기약 ‘투수코친’이었다. "동아일보 만세, 투수코친도 만세!"라고 쓴 독자 광고가 아직도 기억에 선연하다.

이재문 씨는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했고 신향식 씨는 사형당했으며 다른 관련자들은 최장 10년 징역을 살았는데, 북한과 연계됐을 가능성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민주화투쟁 조직인 줄 알고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후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이 사건으로 시인 김남주가 구속됐고, 무역회사 주재원으로 프랑스에 있던 홍세화 씨는 망명허가를 받아 ‘파리의 택시운전사’가 됐다.

부산과 마산 시민이 며칠 동안 궐기했던 이 일을 ‘부마항쟁’이라고 한다. 부마항쟁은 국지적 도시봉기여서 독재정권을 타도하는 정치혁명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집권세력에 큰 충격을 줬고, 유신체제는 내분으로 무너졌다.

김재규 부장의 군법회의 진술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사태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했으니까 총살됐지 내가 발포 명령을 하는데 누가 날 총살하겠느냐."

차지철 경호실장은 맞장구쳤다.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이나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에서 200만 명 희생시키는 것쯤이야 뭐가 문제겠습니까."

김재규는 ‘각하’와 ‘자유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5·16이 정당하다면 10·26도 정당하다고 주장했던 그는 1980년 5월 24일 교수대에 올랐다.

인류 역사는 반란·봉기·내전·혁명·전쟁의 연속이었다. 사태의 원인과 계기, 전개과정과 결과는 모두 달랐지만 한 가지는 같았다. 사건의 한가운데에 있던 사람들을 덮친 게 혼돈이었다는 것이다. 무리지어 힘으로 부딪치는 격동의 순간에 사람들은 저마다의 동기와 지향에 따라 제각기 활동한다.

그런데 광주 시민은 부산·마산 시민보다 더 절박했고 더 용감했다. 공수부대는 시내 곳곳에서 대검을 장착한 소총과 ‘충정봉(忠情棒)’이라는 박달나무 몽둥이로 마구잡이 폭력을 휘둘렀다.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하자 시위는 더 격렬해졌고 계엄사는 더 많은 병력을 보냈다.

광주민중항쟁은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가능성과 당시 민주화운동의 한계를 보여줬다. 전제정치를 타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연속·동시다발·전국적 도시봉기라는 것 그리고 아직 대한민국 국민은 그 과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신군부가 광주에서 무자비한 살상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지역 시민이 계엄군의 폭력에 굴복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이들은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1987년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활동가들은 1980년 광주의 아픔을 되새기며 어느 지역도 고립되지 않도록 투쟁계획을 꼼꼼하게 점검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1년 1월 하순 김대중 씨의 형량을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하고 계엄령을 해제했다. 미국 행정부와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기 위한 ‘사대주의적 유화책’이었다.

우리에게 전두환은 절대악(絶對惡)의 화신이었다. 광주학살과 난폭한 인권탄압을 겪은 만큼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절대악의 화신에게 영혼의 상처를 입은 청년지식인들은 세상과 자신을 구할 이념을 찾아 나섰다.

그가 투박한 부산 사투리로 "햅상은 갤랠됐다"고 선언하는 장면이 내가 본 정치인 김영삼의 여러 모습 중 단연 최고였다.

전두환 정부는 야권의 분열을 일으키면 선거를 통해서 재집권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6·29선언을 했으며 실제로 성공했다. 그러나 그들이 12·12군사반란과 광주학살 그리고 천문학적 부정부패를 저지른 죄를 벗은 건 결코 아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러시아와 중국처럼 땅이 넓고 인구가 많아서 영향력이 큰 나라를 제외하면, 21세기 지구촌의 주역은 모두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는 부국(富國)들이다.

2016년 엠브레인의 조사에서 응답자들은 한국에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은 이유로 ‘삶의 여유가 없고 복지제도가 미비하며 경쟁이 너무 치열하다는 점’을 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민주주의 선진국도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중세 유럽에는 엄격한 신분제도가 있었고 교회와 귀족계급이 종교적 도그마와 무자비한 폭력으로 민중을 착취하고 억압했다.

미국에는 19세기 중반까지 노예제도가 있었다. 그들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거저 얻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처절한 폭동, 반란, 혁명과 반혁명을 겪은 끝에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 앞에는 두 갈래 길이 있었다.

하나는 대한민국을 떠나 더 자유롭고 풍요로운 나라로 가서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찾는 것이었고, 많은 사람이 그 길을 갔다. 다른 하나는 대한민국을 그런 나라로 바꾸는 것이었는데 더 많은 사람이 그 길을 선택했고 나도 그 대열에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는 개혁이 불가능한 전제정치에서 폭력행사는 정당하다. 그런데 그 목적은 오직 폭력을 쓰지 않고도개혁을 할 수 있는 민주정치를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 민주헌법과 민주주의적 방법을 파괴하려는 안팎의 공격에 대항하는폭력 행사 역시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시민의 저항권을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I』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